문헌공 병계(屛溪) 윤봉구(1683~1767) 선생과 존재(存齋) 위백규(1727~1798) 선생 간의 사제(師弟)의 연(緣)은 간암처사 위세옥(魏世鈺 1689~1766) 선생의 주선으로 1751년 병계 선생 69세, 존재 선생 25세 때 맺어졌다. 처사 선생은 상원군수공 위동전(魏東峑 1649~1713)과 숙부인 금성羅氏의 자로 아버지께서 보공장군행용양위우부장(保功將軍行龍驤衛右部將),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등 관직에 몸담고 있어 한양 남산 아래 주자동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고관대작의 자제들과 벗이 되어 함께 학문을 수학하였다. 이들 중에는 훗날 공조판서 문정공(文正公) 이 재(李 縡 1680~1746), 공조판서 문헌공(文獻公) 윤봉구(尹鳳九), 우의정 문헌공(文憲公) 민응수(閔應洙 1684~1750), 좌참찬 문원공(文元公) 민우수(閔遇洙 1694~1756), 호조참의 직암(直菴) 신 경(申 暻 1696~?) 등은 고위 관직에 오른 대표적 인물이며, 민응수와 민우수는 재종(再從 6촌)간 이다. 또한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4촌 오빠는 우의정 등을 지낸 문효공 민진장(1649~1700), 오빠는 우참찬 등을 지낸 충문공 민진후(1659~1720)와 좌의정 등을 지낸 문충공 민진원(1664~1736)이다. 민진후의 아들은 민우수이다. 이들 3분 종형제를 상원군수공 위동전이 모두 수행하였다. 1809년 상원군수공의 묘표(墓表)를 민진장의 증손으로 병조참판을 지낸 민창혁(~?)이 근찬(謹撰)하고 현손 삼회당 위도임(1765~1838)이 근수(謹竪)하였다. 1938년 상원군수공의 조(祖) 호조판서공 위덕화(1551~1598)의 신도비(神道碑)를 민진원의 8대손으로 이조참판을 지낸 민병승(1866~1946)이 근서(謹書)하고 10대 종손 죽암 위계문(1865~1951) 선생이 근수하였다. 이는 두 집안 간 우애의 情은 250여년 후까지 계속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간암처사 선생은 부친이 타계한 후 1721년 33세 때 한양생활을 청산하고 선친의 고향이자 두 형님이 살고 있는 관산읍 방촌리로 귀향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한양과 방촌을 오가면서 관직에 몸담고 있는 지기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다. 처사 선생과 존재 선생은 10촌 종손(從孫)간으로 처사 선생은 63세 때 집안 내 총명하고 영특한 존재 선생을 예산 덕산에서 거주하고 있는 지기 병계 선생에게 보내 문하에서 학문을 수학케 주선하였다. 훗날 병계선생은 존재선생의 실학적 학문과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선생은 위문 선조이신 청계(聽溪) 위덕의(1540~1612) 선생, 호조판서공 위덕화(1551~1598), 청금(聽禽) 위정훈(1578~1662) 선생, 병조참판공 위정철(1583~1657) 등 4분의 묘갈명(墓碣銘)을 찬(撰)하였다. 직암(直菴) 신 경(申 暻) 선생과는 매제(妹弟)간이며, 직암은 1759년 장흥위씨 기묘초보의 서문(序文)을 썼다. 병계 선생의 학문은 존재 선생과 장흥위문에 큰 영향을 끼쳐 현세까지 전해지고 있어 선생에 대한 고찰(考察)의 시간을 갖고자 한다.
1.문헌공 병계(屛溪) 윤봉구(26세 1683~1767)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서응(瑞膺), 호는 병계(屛溪), 구암(久菴), 시호는 문헌(文獻)
이다.
부는 사재감 첨정 윤명운(尹明運), 모는 완산이씨 이다. 조는 가선대부 호조참판 윤비경(尹飛卿)이며, 증조는 진사 윤유건(尹惟健), 고조는 금성군수 윤홍립(尹弘立)이다. 우참찬 윤봉오(尹鳳五)의 형이며, 좌의정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다.
1714년(숙종 40) 진사시에 입격하여 학문이 뛰어나 천거되었다. 1718년 직산현감, 1721년 문화현령, 1725년 청도군수, 1733년 사헌부지평(持平)·사과(司果) 1734년 장령(掌令)이 되었고, 1735년 부사과(副司果), 1738년 김제군수에 이르렀다. 1740년 부호군(副護軍)이 되었을 때 주자(朱子)를 보은군 춘추사(春秋祠)의 송시열(宋時烈) 영당에 추봉할 것을 주장하다가 삭직되었다. 이어 1742년 사헌부 집의(執義), 군자감정(軍資監正), 1744년 진선(進善), 1754년 서연관(書筵官)을 거쳐, 1756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계, 1759년 찬선(贊善), 1762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계 및 대사헌에 특별히 임명되었으며, 1763년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이어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1766년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계되었다. 한원진(韓元震), 이 간(李 柬), 현상벽(玄尙璧), 채지홍(蔡之洪), 이이근(李頤根), 최징후(崔徵厚), 성만징(成晚徵) 등과 더불어 권상하의 문하에서 수학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서 호락논쟁(湖洛論爭)의 중심인물로 꼽힌다. 호락논의 분파는 이 간과 한원진에게서 심화되어 심성론(心性論)의 한 줄기를 형성한다.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서로 같다는 이 간의 학설은 뒤에 이 재(李 縡)와 박필주(朴弼周)에 이어져 ‘낙론(洛論)’이라 불리고, 인성과 물성은 서로 다르다는 한원진의 주장은 윤봉구 선생과 최징후(崔徵厚)로 연결되어 ‘호론(湖論)’으로 지칭되었다. 선생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간추리면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의 형성 이전에 부여되는 천리(天理)는 동일하나 일단 만물이 형성된 뒤 부여된 이(理), 즉 성(性)은 만물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윤봉구 선생의 생애는 사회적, 현실적 활동보다 심성론을 주로 한 성리학자로서의 입론(立論)에 치중했으며, 저술의 내용도 경전의 강의나 주석 및 성리설이 주를 이룬다. 고령군 노강서원, 제천시 황강연당, 합천군 옥계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는 <병계집(屛溪集)>과 <화양존주록(華陽尊周錄)>이 있다.
2.병계 선생의 선조, 후손 등 가족 관계
파평윤씨의 시조는 고려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윤신달(尹莘達 ~?)이다.
파주시 파평면 눌노리 388-1번지에는 파평윤씨 시조 탄생 설화가 전해지는 성지(聖地) 용연(龍淵)이 위치한다.
중시조는 윤 관(尹 瓘 5세, 1040~1111)으로 고려 문종조 107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어사대부, 이부상서 등 주요 관직을 거쳐 1104년 추밀원사로서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가 되어 여진 정벌을 추진하였다. 문무를 겸비한 명장으로 수태보(守太保), 문하시중(門下侍中), 병부판사(兵部判事), 상주국(上柱國)을 지내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 4-1번지에 위치한다.
파조(派祖)는 윤 곤(尹 坤 15세, ?~1422)으로 1400년(정종2)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간(李芳幹)이 일으킨 난을 평정하고 이방원(李芳遠)이 왕위에 오르는데 협력한 功으로 1401년(태종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책록되고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 파평군(坡平君)에 봉작되었다. 조선 초기 좌군도총제, 평안도관찰사, 이조판서, 우참찬 등을 지내고 시호는 소정(昭靖)이다.
묘소는 파주시 파주읍 연풍리 산 81-1번지에 위치한다.
5대조는 윤인함(尹仁涵 21세, 1531~1597)으로 1552년 진사시에 입격하고 1555년 식년시에서 문과 급제하였다. 이후 홍문관정자, 이조정랑, 풍덕군수, 형조참판 등 내 외직을 두루 지냈다. 1561년 서장관, 1584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임진왜란 때 경주성이 함락되자 의병을 모집하여 왜구에 대항하였고, 1597년 영위사(迎慰使)로 명나라 장수를 평양으로 영접하러 나갔다가 사망하였다. 公의 행장을 우암(尤庵) 송시열이 찬(撰)하였다.
고조(高祖)는 윤홍립(尹弘立 22세, 1563~1612)으로 율곡(栗谷) 이 이(李珥 1536~1584)와 우계(牛溪) 성혼(1535~1598)의 문하생이다. 1606년(선조39)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직장(直長)과 금성군수를 지냈으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과 가까이 지냈다.(묘갈명을 우암 송시열이 찬(撰)하였다.)
증조(曾祖)는 윤유건(尹惟健 23세, ~?)으로 1609년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조(祖)는 윤비경(尹飛卿 24세, 1607~1680)으로 1630년 진사시에 입격하고 1650년 증광시에서 문과급제 하였다. 1660년 사헌부 장령(掌令)과 1667년 우승지를 거쳐 병조참의, 공조참의를 지냈다. 이어서 경주부윤, 회양부사에 제수되었다. 1680년(숙종6) 가선대부로 호조참판에 올라 파원군(坡原君)에 봉군(封君)되었다. 3남을 두었는데 윤명우, 윤명운, 윤명원이다.(우암 송시열 찬(撰), 수암 권상하 서(書) 윤비경 묘갈명에서 발췌)
원래의 묘소는 포천시 신북면 고일리에 위치하였으나, 2006년 파주시 파주읍 연풍리로 이장(移葬)하였다. 그밖의 병계 윤봉구 선생의 선조 묘소 등 흔적은 관향(貫鄕)인 파주시를 비롯하여 포천시, 연천군 일원에서 확인된다.
부(父)는 윤명운(尹明運 25세, 1642~1718)으로 1680년(숙종6년) 특별 추천에 올라1684년(숙종10년) 처음 벼슬길에 나아가 참하관(參下官)으로 있었는데 모두세 번 파직되고 네 번 벼슬을 제수받았으며 봉사(奉事)와 직장(直長)을 지냈다. 이후 1689년(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스승 송시열(宋時烈)을 변호하다가 충청도 해미에 유배되었다. 1694년(숙종20년) 4월 갑술옥사 때 임금은 지난날의 행위를 후회하고는 축출하였던 중전(中殿)을 복위하고, 우암 송시열의 관작을 다시 회복하면서 公을 서용하여 선릉참봉(宣陵參奉)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1699년(숙종25년) 주부(內資寺主簿)로 승진하고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와 신령현감(新寧縣監), 장례원사의(掌隷院司議), 강화경력(江華經歷),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 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 광흥창수(廣興倉守),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 등을 지냈다.
配는 전주이씨, 화순최씨, 완산이씨이며, 전주이씨 사이에서 윤봉휘(尹鳳輝 1665~?)를 두어 벼슬은 직장(直長)이고, 화순최씨 사이에서 윤봉위(尹鳳威)와 윤봉기(尹鳳蘷) 2남을 두었으며, 완산이씨 사에서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윤봉구와 윤봉오(尹鳳五 1688~1769)이고 사위는 신 경(申 暻 1696~?)이다.
형제의 가족 관계는 윤봉휘는 2남으로 윤심해(尹心海)와 윤심호(尹心浩)이다. 윤봉위는 3남을 두었는데 진사 윤심웅(尹心雄)과 윤심준(尹心準)이며, 하나는 어리다. 윤봉기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윤심영(尹心泳)이며 두 딸은 어리다. 윤봉구는 1남을 두었고, 윤봉오는 1남 2녀를 두었으며, 신경은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윤심웅의 2남도 어리다. 윤봉기는 상(喪)을 당하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공이 졸한 뒤 8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다.(수암 권상하 찬(撰) 윤명운 묘갈명에서 발췌, 윤명운 사후 묘갈명을 세웠을 때 기준하여 가족사항을 기록한 것임. )
병계 윤봉구 선생의 배는 밀양박씨, 창령성씨이다. 밀양박씨 사이에서 자 윤심위(尹心緯 1716~?)를 두었는데 伯兄 형조정랑 윤봉휘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윤심위는 1750년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방목 자료에서 본 파평, 거 덕산, 부 윤봉휘의 품계는 통훈대부 관직은 형조정랑, 생부 윤봉구의 품계는 통훈대부 관직은 세자시강원 진선으로 확인된다. 선생은 후사가 없어 족질 윤심약(尹心約)을 양자로 삼았다.
선생의 계열 후손들을 살펴보면 윤봉구 → 1대손 윤심약(1748~1816) → 2대손 윤응후(1776~1839) → 3대손 윤경대(1801~1834), 경조(1812~1890),경유(1827~?) → 4대손 윤헌일(1823~1860), 윤궁일(1829~1888) → 5대손 윤 간(1853~1933) → 6대손 윤철보(1873~?) → 7대손 윤승혁(1895~1954), 윤당혁(1899), 윤동혁(1906~?), 윤충혁(1917~?) → 8대손 윤옥현(~?), 윤태현(1942년생 故), 윤시현(1938년생), 윤발현(1941년생), 윤창현(1944년생), 윤구현(1955년생), 윤명현(1962년생) → 9대손 윤봉한(1965년생), 윤용한(1967년생 미국 거주), 윤성한(1971년생 미국 거주), 마이클(미국 국적), 윤상한(1979년생), 윤지한(1985년생) 이다. 이하의 손은 생략한다.
7대 장손 승혁은 아들 옥현을 두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타계하여 후손은 끊겼다. 次孫 당혁은 자 태현, 三孫 동혁은 딸 2명을 두어 충혁의 삼자 창현을 양자로 들였다. 四孫 충혁은 시현, 달현,구현,명현을 각각 두었다.
8대손 태현은 봉한, 창현은 상한, 시현은 용한·성한, 달현은 마이클(미국 국적), 구현은 지한, 명현은 딸2명을 각각 두었다.
병계 윤봉구 선생의 직계 후손들에 대해서는 1997년에 간행한 파평윤씨 소정공파 파보(派譜)에 수록된 사항을 진보현감공 윤명우의 계열, 8대 방손 윤방현(34세 1945년생, 경기도 파주시 거주)과 소정공파 사무국장 윤여신으로부터 자료를 자문 받아 정리하였다.
※ 파평윤씨는 장흥위씨와 세수(世數)가 비슷하다. 특히 5세 문숙공 윤관은 고려 문종~예종조에서 문무를 겸비한 명장으로 수태보(守太保), 문하시중(門下侍中), 병부판사(兵部判事), 상주국(上柱國) 등을 지냈다. 당대 청백리 재상(宰相) 충렬공 위계정(5세 1038~1107)과 11대 문종, 12대 순종, 13대 선종, 14대 헌종, 15대 숙종, 16대 예종 간의 고려왕조를 모신 큰 인물이다. 위계정, 유인저, 윤 관, 김인존 4분은 사후(死後) 예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조선조에서는 왕비를 4명 배출(폐비윤씨 제외)하여 청주韓氏 5명에 이어 여흥閔氏와 두번째이다. 정승(政丞) 수는 11명이다. 문과급제자는 418명, 무과 86명으로 전주이씨 844명이어 두번째로 많다. 현재 전국 종원수는 100만여명에 이르러 대한민국에서 8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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