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

사이트검색

문헌/학술자료

⑥ 강규(講規)


323232111.jpg



1월과 8월을 제외하고 매월 1일과 보름에 강회를 연다. 아침 식사를 하고 강회에 나아가 절하고 앉기부터 모두 의식에 맞게 한다. 30세 이하는 각기 정해진 책을 가지고 평상시의 의식대로 나아가 강(講) 즉 외운다. 동자들은 《소학》《격몽요결》을 강하고, 그다음에 세계를 외운다. 8세 이하는 각기 정해진 책을 강하고, 그다음에는 육갑(六甲)을 외운다. 강을 마치면 강원 모두가 《가례》와 《상례비요》의 의심나거나 모르는 곳을 질문한다.
마치고 나면 술을 한 잔 올린다. 술은 세 잔까지 마심을 허락한다. 끝났다고 아뢰면 30세 이하가 일어나 두 번 절하는데, 부약장 이상은 앉아서 소리 내어 인상에 응해주고, 부악장 이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두 번 답배한다. 동자들은 의식에 맞게 절을 드린다. 이날은 좌중에 연로(煙爐)를 놓지 않는다. 계원이 아닌 자는 서로 절하지 않고 자리를 정하여 앉을 때에도 따로 앉아서 이미 정해진 자리를 어지럽히지 않는다.
강안(講案)에 각각 통부(通否) 여부 및 책명을 기재하고 그 아래에 스스로 권점하는데, 만약 규약을 어길 경우에는 자수하여 검은색으로 권점하게 한다. 6월 보름 및 12월에 그 권점을 상고하여 검은색의 권점이 3개 이상인 사람은 벌을 주되 하벌(下罰)을 적용한다. 강규에 따르면 1년 중 8월을 제외하고 11개월 동안 매월 1일과 15일마다 아침 식사를 마치면서 강회를 열었던 것이다. 농사꾼들로서는 부담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⑦ 농규(農規)
나이의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밭을 갈 힘이 있는 자는 스스로 밭을 갈고, 감당할 수 없는 자도 동복(僮僕)을 신칙(申飭)하여 거름을 주고 북을 돋는 일을 도와준다. 여름에는 매번 아침을 먹고 나서 각자 도롱이에 삿갓, 호미와 낫, 그리고 읽어야 할 책과 붓통을 갖추어 일직(日直)의 밭에 모인다. 사시(巳時 오전 9-11시)가 되면 밭 갈기를 중지하고 시원한 나무 아래서 휴식을 취하는데, 어떤 이는 책을 읽고, 어떤 이는 글씨 연습을 하며 어떤 이는 신발을 짜되, 게으르게 낮잠을 자서는 안 된다.
미시(未時, 오후 1-3시)가 되면 다시 밭을 갈러 일하는 현장으로 간다. 비가 오는 날에는 강당(講堂)에 모인다. 매번 겨울이 되면 돛 자리 짜는 일을 겸한다. 자제 가운데 과거 공부에 전념하는 경우에는 그 조례에 해당하지 않고, 농사지으면서 과거 공부를 겸하고자 하는 경우에도 허락해 준다. 치산(治産)을 잘하여 성과가 있는 경우에는 사약에서 상을 주고, 일을 게을리 할 경우에는 검은색으로 권점하는 것과 같은 벌을 준다.

2. 강회와 문학적 성과
존재 선생의 문학을 보석으로 평가한다. 41세(1767 丁亥) 사강회를 운영하면서 문학적 자질을 크게 발휘한다. 김석회 교수의 설명을 통해 그의 문학적 성과를 살펴보자.
"이 무렵 「죄맥(罪麥)」을 시발점으로 한 궁경독서기(躬耕讀書期)의 작품세계가 우주적 종말을 감지케 할 정도로 어두운 전망으로 기우는 경향과 달리 영농(營農) 친화(親和)와 함께 좀 더 밝게 생동하는 분위기를 드러내는 작품들이 있다. 연시조 「농가구장(農歌九章)」이 가장 전형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생활태도의 변화를 진단한 것이다. 덕산수학기(25-41)는 가난과 내키지 않은 과거시험으로 고통스런 시기였다. 그러나 강회는 늦게나마 생원시에 합격한 이후 스스로 선택한 '이상향'의 비전이었다. 그래서 궁경독서기(41-54)초기에는 덕산수학기의 우울에서 벗어나 자신의 탁월한 문학적 능력을 한껏 발산했던 것이다. 그 중심에 죄맥, 맥대, 청맥행, 농가구장, 연년행, 권학가, 자회가 등으로 이어지는 주옥같은 작품들이 산출된 것으로 보인다.
「사강회문서첩」의 경우는 매 수(首) 끝에 표제가 있는데, 각각 조출(朝出)・적전(適田)・운초(耘草)・오게(午憩)・점심(點心)・석귀(夕歸)・초추(初秋)・상신(嘗新)・음사(飮社)등으로서 각 장의 내용들을 포괄할만한 제목들인 것이다. 제목이 표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제1수 朝出에서 제6수 夕歸까지는 농번기의 하루 일과를 읊은 것이다. 후속하는 3수 初秋・상신(嘗新)・飮社는 곡식이 익어가는 초가을에서 추수가 끝난 후의 늦가을까지의 절서감(節序感)을 읊고 있다.
제목을 통해서도 드러나는 바와 같이 이 작품은 농번기(農繁期)의 하루 일과를 농경 현장(現場)의 체험적 실감에 입각(立脚)하여 읊고 있으며, 가을의 절서감을 땀 흘려 수고한 농부의 심정과 감각을 가지고 그리고 있다. 이는 아무리 농촌에 산다 하더라도 감농(監農)하는 자의 위치에서는 농사꾼의 체험적 실감은 나오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들 작품은 화자가 직접 일을 하면서 느끼는 바를 읊은 것이다. 오게(午憩)와 초추(初秋)를 음미해 보기로 하자.

ᄯᆞᆷ은 든ᄂᆞᆫ대로 듯고 볏슨 ᄶᅬᆯ대로 ᄶᅬᆫ다
淸風의 옷길 열고 긴 파람 를리 불 제
어ᄃᆡ셔 길 가ᄂᆞᆫ 손님 아ᄂᆞᆫᄃᆞ시 머무ᄂᆞᆫ고
면화ᄂᆞᆫ 세 ᄃᆞ래 네 ᄃᆞ래요 일은 벼ᄂᆞᆫ ᄑᆡᄂᆞᆫ 모개 곱ᄂᆞᆫ 모개
五六月 어제런ᄃᆞᆺ 七月이 ᄇᆞᄅᆞᆷ이다
아마도 하ᄂᆞ님 너ᄒᆡ삼길 제 날 위ᄒᆞ여 삼기샷다
이 작품은 농업노동의 현장을 실감나게 노래하고 있다. 땀에 절고 볕에 그을리는 농부의 삶을 현장 사실 그대로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작품을 조직하고 있는 언어의 자질도 농경적 삶의 현장적 실감에 어울리는 일상의 평이한 구어(口語)들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내용의 측면에서나 언어 조직의 측면에서 종래의 시조(時調)들과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달라 과연 이것이 사대부(士大夫)의 손으로 지어지고 그들의 입으로 읊어졌을 것인지 자못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존재 선생의 「농가구장」 중의 제4수 오게(午憩)로서 사대부 시조의 하나임이 틀림없다. 이것은 사대부 시조가 위백규에 이르러 현격한 변모양상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농가구장」의 특질을 문학사적인 맥락 속에서 해석해 내고자 한 처음 시도는 조동일의 「한국문학통사」인데, 그는 “위백규의 「농가구장」이야말로 사대부 전원시조(田園時調)의 결정적 면모를 마련한 작품”이라고 평가하면서 이런 변모는 “민요시조화”에 의해 가능해진 것으로 분석했다.
사대부 시조의 본령은 상자연적(賞自然的) 구도지락(求道之樂)을 읊은 이른바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성리학적 이념을 사회개혁의 기치로 내걸고 왕조를 개창하고 이후 지배계층으로 군림하고 있던 사대부계층이다. 이들은 사회경제적으로는 대부분 향촌의 중소지주층으로서 향리에 기반을 뒀다. 이들은 출사와 은거를 반복하며 살았는데 출사해서는 향리의 강호산천과 족당을 그리워했고, 은거해서는 정치현실과 세도(世道)의 문제를 염려하면서 自修하는 길을 걸었다.
강호가도의 세계는 주로 은거자수기(隱居自修期)의 삶과 관련된 것으로서 구도자수(求道自修)의 길에 반려가 된 강호산천을 성리학의 관념으로 채색(彩色) 미화(美化)하여 즐기고자 한 세계였다. 「농가구장」의 경우는 이러한 강호가도적 삶의 전형적인 양식(樣式)인 연시조(聯詩調)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이 작품이 강호가도의 타성(惰性) 위에서 지어진 것이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연시조의 어떠한 유형(有形)에도 포섭(包攝)될 수 없는 내용상의 이질성(異質性)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농가구장」은 강호가도의 특질로부터 본질적으로 멀어진 세계임도 또한 분명해 보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형식과 내용 사이의 괴리현상(乖離現象)에 대해서는 임주탁(任周卓・공군사관학교 교관)이 그의 석사논문(서울대)과 그 후속(박사)연구를 통하여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그 문학사적인 의미를 해명코자 시도한 바 있거니와, 「농가구장」의 이러한 양면성은 조선 후기 문학사의 이해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관건(關鍵)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농가구장」은 각수의 표제대로 “아침에 집을 나서서, 김매고, 점심 때 잠깐 쉬며 즐기다, 점심을 먹고, 저녁에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읊고 있다. 여름 대낮의 들녘 풍경을, 초추(初秋)는 가을로 옮아가는 7월의 절서감을 탁월하게 묘파하고 있다. 힘이 드는 노동이지만 오게(午憩)엔 위로와 희망이 있고, 유정(有情)함이 있다. 그리고 初秋에는 땅의 풍요로움과 철의 유신(有信)함과 하느님께 대한 감사가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9수의 내용이 이와 유사하다. 「고한(苦旱)」이나 「연년행」, 관물설(觀物說) 등의 어두운 세계에 닫힌 전망(前望)과 판이하다.
이 작품의 태생에 관한 정보는 「社講會文書帖」 속에 들어 있다. 이것은 1767년(41세)부터 1778년(52세) 사이에 이루어진 작은 문서들 22개의 집성(集成)인데, 사강회의 구성 및 운영과 변모의 추이 등을 담고 있다. 「農歌九章」 13번째 문서인 「農規」 다음 14번째로 실려 있다. 「농규」는 영농과 관련한 사강회 규약이다. 주로 방촌 위씨들인 사강회 회원들의 처지와 형편을 따라 독(讀)과 경(耕)을 어느 정도 병행시킬 것인가를 결정하고 그것을 준수토록 하는 권고안이자 상벌규칙이다. 「농가구장」은 이러한 「농규」를 보완하는 성격을 지닌 노래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문서첩의 성격은 한마디로 향약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향약을 생활공동체라 할 수 있는 동족 부락에 정착시키기 위하여 각종 규약들을 문중의 당면과제와 생활현실에 맞도록 조정하면서, 구체적인 지침들을 새로 첨가시킨 형태라 할 수 있다. 향약은 대개 군현을 ‘一鄕’으로 하여 시행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이나 군도 면도 아닌 자연부락에 해당하는 ‘방촌’의 문중단위에서 향약의 유제(遺制)를 시행코자 한 것은 선생의 독특한 개인사에 기인(起因)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존재가 사강회를 추진한 배경에는 개인적 좌절을 극복하고, 지식인으로서 성리학 질서를 뿌리내리게 해서 향촌을 교화하기 위한 시도였을 것이다. 태어나서부터 신동이나 천재로 불릴 만큼 주변의 기대와 촉망을 받았던 당사자였다. 사람들은 그가 과거에 쉽게 급제해서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가 39세 때인 1765년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복시에는 번번이 실패했다. 부모와 가족들의 희생, 그리고 뭇사람들의 선망을 한 몸으로 감당하기엔 너무도 초라했을 것이다.
사강회는 행정구역단위로 하지 않고 위씨 ‘마을’을 대상으로 향약과 독서 모임을 접목시키고자 했다. 논밭에서 파종하고 김을 매거나 땔나무를 하면서 틈틈이 공부하는 사강은 노동현장에서는 매우 생경스러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14세에서 43세에 이르는 주민 20여 명이 참여했다. 1767년(丁亥)의 강계좌목은 노응탁(魯應鐸) 1인을 제외하고는 17인 모두가 위씨 종친들이고 1774년(甲寅)에는 김화조(金華祖)와 이달운(李達運) 등 2명이 첨록(添錄)되어 있으나 이들도 인척관계이다.
사강회운동의 시발점인 1767년의 「강계좌목」에 있는 구성원들은 伯暉(43), 伯珪(41), 伯琛(36), 伯昊(34), 伯紳(32), 伯益(31), 魯天鐸(31), 伯純(31), 伯綠(30), 伯勛(30), 伯燦(30), 道紳(28), 伯毅(28), 伯賢(26), 伯協(25), 伯林(25), 道立(20), 伯仁(17), 道欽(14) 등이다. 이 문서첩의 제17번째 문서인 후서(後序)에 “奉而六代之親 無慮半百 團居一閭 敍昭穆 守萬祧”라고 밝힌 바처럼 구성원이 안항공의 5대, 6대 후손들로 이루어진 10촌 이내의 친족들이다. 모임의 핵심은 20대 후반 30대이다.


1) 가사(歌辭)작품
김석회교수는 강회 출범 이후 첫 번째 작품을 '죄맥'연작으로 본다. 아마도 보리 연작이 산출된 배경에는 강회 출범 시기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사실 강회는 선생이 40세 때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활동할 때가 1767년 보리수확기와 맞물려 비롯된 결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가사는 '권학가'가 최초의 작품일 수 있겠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강회의 당위성과 취지문 같은 의미의 뜻을 담았기 때문이다.

(1) 권학가(勸學歌)

(2) 자회가
자회가(自悔歌)는 강회기간에 산출된 작품이 아니다. 자회가는 61세 때인 1787년(丁未)의 작품이다.

(3) 연시조
이미 일부를 다룬 연시조 '농가구장'을 비롯한 '죄맥(罪麥)' 등 보리연작과 '연년행(年年行)'연작은 강회기간에 산출된 작품이다. 따라서 만일 강회를 하지 않았다면 이 같은 작품이 나왔을까. 이들 작품들도 중복을 피하기 위해 본서 Ⅳ장 「한시와 문학」편에서 함께 다룬다.

3. 서당과 社講會의 차이
장천재와 양정숙은 정주(定住) 공간이라면 사강회는 교실 없는 서당 겸 마을단위의 향약인 것이다. 농규에서 구성원들은 스스로 농사일에 나서도록 규정하고 있다. 여름에는 아침에 각자 도롱이와 삿갓, 호미와 낫, 읽어야 할 책과 붓통을 갖추어 일직(日直)의 밭에 모인다. 사시(巳時)에는 일을 중지하고 그늘 아래서 휴식을 취하면서 책을 읽거나 글씨 연습을 하며, 신발을 짜되 낮잠은 자서는 안 된다. 미시(未時)에 다시 일을 한다. 비가 오는 날에는 강당에 모인다. 겨울에는 돗자리 짜는 일을 겸했다.
강규에 따르면 정월과 8월을 제외하고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강회를 연다. 30세 이하는 정해진 책과 의식대로 강한다. 동자는 <소학> 및 <격몽요결>을 강하고 세계(世系)를 외운다. 8세 이하는 배운 책을 강하고 육갑을 외운다. 이를 마치면 <가례>와 <상례비요>의 의심나거나 모르는 곳을 질문한다. 이런 절차를 마치면 술을 세잔까지 마시는 의식을 거친다. 강안(講案)의 통부(通否)여부 및 책명을 기록, 그 아래 스스로 권점(圈點)한다. 규약을 위반하면 6월과 12월에 3먹 이상이면 하벌(下罰)을 받는다.
사강회는 독경병진의 서당이자 향약이었다. 출범 당시는 "족형 백휘(伯暉․1725-1798), 족제 백침(伯琛), 백훈(伯勛․1732-1797) 등 열 몇 명의 사람과 함께 규약도 없이 공동으로 농사짓고 서례(書禮)를 강학했다." 또한 선생은 "이들과 함께 강회의 규약을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선생은 1766년(丙戌 英祖42) 늦여름에 사강회를 시작했다”을 자찬한 간암공(艮庵公) 행장에서 밝히고 있다. 연보에서 "41세(1767년 丁亥) 봄부터 「사강회」를 시작했다."는 기록과는 약간의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더구나 선생은 "늦은 더위를 무릅쓰고 처사군(간암공)이 종가의 대청에서 강회를 열게 하고, 옆에 앉아 그 광경을 보며 '아직 죽지 않고 이 광경을 볼 수 있어 다행이다'"라고 적었다. 특히 강회를 지켜보면서 흐뭇해했다고 전했는데 처사군은 그해 12월 19일에 타계했다. 전후사정으로 보아는 1755년에 개설한 귤우헌의 가숙과 1766년에 출범한 사강회는 11년의 시차가 있다. 결국 간암공 행장에서 언급한 사강회 출범은 처사군이 "귤우헌의 대청에서 서당을 개설하도록 권유한 1755년으로 추정"된다.
또 사강회는 구성원들에게 여름에 비가 올 때는 강당으로 모이게 했다. 겨울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그 '강당'은 어디를 말하는가. 연보에는 41세 때인 1767년(丁亥)에 「다산초당」을 세웠다고 했다. 그로부터 18년 후인 1785년(乙巳)에 초당을 중수해 「다산정사(茶山精舍)」라 했다. 선생은 45세인 1769년(己丑)부터 초당에서 △향음주례 △3․6․9․12월 등 사계절마다 치르는 가중사시회를 이곳에서 열었다. 그러니 농규에서 말하는 강당은 귤우헌이 아니라 다산초당을 지칭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의문은 해산한 시점이다. 선생은 사강회 서(序)에서 (중략) "강회를 시작한지 3년이 되자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중략) "세상 사람들이 낯설게 보며 또한 눈과 해의 이상한 조짐도 없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중간에 그만두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는 사강회의 효과를 기대할 정도로 결과가 나오는데 주변 사람들이 곱지 않게 여겨 중단했음을 밝힌다. 그 기간은 약 3년 정도라고 한다. 대충 그 기간을 추산해 보면 1766년 늦여름부터 1769년 또는 1770년 사이로 매우 짧은 기간이다.
물론 사강회를 마땅찮게 여긴 주인공들도 대부분 동족들이다. 그들의 논리는 "농사일하기도 바쁜데 일하는 현장에까지 「지필묵」을 지고 다니면서 공부를 해야 하느냐"라는 것이다. 인생에서 앎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먹고 살기 위해 농사를 지은 것이 우선"이란 얘기이다. 비웃은 무리 중에는 강회에 몸담고 있는 구성원도 합세하기도 했다. 중심멤버인 종형 백휘의 「가농부」와 성구(聖球)의 月課詩「次族兄韻」과 양학연의「和題社中約講會軸韻」종제인 사락헌(四樂軒)의 「사약발(社約跋)」을 보자.

1) 가농부(假農夫)(伯暉)
非求顯世讀詩書 세상 현달을 위하여 시서를 읽은 것은 아니요
豈爲豊家自把鋤 어찌 집을 넉넉하게 하려고 스스로 호미를 잡겠는가
但使心頭無雜念 다만 심두에 잡된 사념을 없애고자 함이니
兩忘身世似湖魚 신과 세를 다 잊음이 못의 고기와 같도다

2) 사약발(社約跋)(伯琛)
『오호라! 세도(世道)의 어지로움이 오래도다. 자고로 몇몇 성현들이 구하고자 해도 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주례(周禮)가 망한지 3천년 뒤에 난 자는 어떻겠는가. 그러나 실로 망연무식(茫然無識)한 자가 아닌 다음에야 누가 한밤중에 크게 탄식하며 고인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근고에 향약(鄕約)이 설치된 바라. 그러나 항산(恒産)이 없는 항심(恒心)을 지닌다는 것은 보통사람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바다. 업농(業農)하지 않고는 항산을 할 수 없고, 독서하지 않고는 항심을 지닐 수가 없는데, 이 둘을 함께하기는 더욱 어렵다. 족형 자화(子華)씨는 이 둘을 극진히 하고자 하나 어찌 우활(迂闊)하다 하지 않으랴. 또한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더불어 마을 사람들의 습속을 모두 친히 돌아보고자 하니 실로 오활하도다. 그러나 이미 창수(倡首)하는 자가 있거니 내 어찌 '저는 어떤 사람이라 하겠는가'그 말을 적어두고 동약자(同約者)와 더불어 힘써나가기로 한다.』

4. 수신처방(去病書)(1789년 己酉)
"나는 8, 9세 때부터 경서는 사람다움을 만드는 신방(神方 妙方)이라는 점을 알았다. 그래서 요어(要語)를 초록(抄錄)하여 좌우에 놓아두거나 차고 다녔으며, 담장, 벽, 문에 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20세 이후 의지가 나뉘고 게을러졌으며, 30세 이후에는 세상에 희망이 끊어져 나도 모르게 내 자신을 버렸다. 40세 이후에는 더욱 비분한 감정이 복받치고 방탕하여 드디어 평생을 그르치게 되었다. 지금 63세(1789년 己酉)에 처지가 곤궁해지고 나서야 근본으로 돌이켜 회상해보니 떨리고 슬퍼서 한 밤중에도 회한(悔恨)의 눈물을 쏟아낸다. "
<국역 존재집 5권 125쪽>

제사(題辭)
거병(去病)은 어려서 병이 많아 내가 ‘거병’이라고 이경(李檠)의 자(字)를 붙였으니, 병을 제거하고자 한 의도였는데, 정말로 병이 없어져 건강해졌다. 지금 나이가 15세이니, 앞으로 거인으로 성장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옛날에 이름을 통해 그 사람을 축원한 일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그렇지만 거병이 제거해야 할 병은 단지 의방(醫方)에서 열거한 404가지 종류일 뿐이다. 옛날부터 성현은 이러한 병은 병으로 여기지 않았고, 마음의 병을 큰 병으로 여겨 힘써 제거했다.
경전에는 열두 성인의 가르침과 염(濂)ㆍ락(洛)ㆍ관(關)ㆍ민(閩)의 군자의 글은 심병을 제거하는 방도이다. 대개 풍담(風痰)ㆍ냉습(冷濕)ㆍ옹양(癰瘍)ㆍ비륭(痺癃)은 혈육의 몸을 병들게 할 뿐, 내가 사람답게 되는 것은 본디 그대로 있다. 마음에 병이 들면 하늘에서 받은 성명이 이미 끊어져 혈육의 몸이 비록 살찌고 건강하게 편안히 생활하더라도 살아 있다고 말하기에 부족하다. 병이 심한 경우에는 군자라도 그 썩은 냄새를 차마 맡을 수 없으니, 어찌 병이 위중하다고 말할 뿐이겠는가. 아, 공자․맹자․정자․주자는 마음의 병을 고치는 신의(神醫)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진맥에 따라 병증(病症)에 이름을 붙이고 약을 조제해주고 있다. 신묘한 조제와 비결들이 글에 있으니, 세상 누구나 읽고 외우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이를 가져다가 시험해서 자신의 큰 병을 치료하는 자가 드무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무릇 인정이란 크게 서로 다르지 않으니, 하우(下愚)나 지극히 비속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누가 스스로 병든 사람이 되기를 좋게 여기겠는가.
단지 의학서를 잘 읽지 못했기 때문에 무슨 일이 빌미가 되는지, 무슨 빌미로 병증이 되는지를 모른다. 이미 병을 살피지 못하기 때문에 조제할 약을 살피지 못한다. 무슨 처방이 보(補)가 되는지, 무슨 처방이 사(瀉)가 되는지, 어떻게 해야 하제(下劑)가 되는지, 어떻게 해야 한제(汗劑)가 되는지, 어떻게 해야 진심(鎭心)하고 익지(益志)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첨정(添精)하고 전수(塡髓)할 수 있는지 모른다. 비록 자신의 병을 돌이켜 찾아내 약을 쓰고자 한들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오로지 습속에 익숙해져 10세 이전부터 마음의 병이 고질병이 되어 자랄수록 더욱 사나워지니, 경전을 읽을 적에 단지 문구를 따고 모으는 정도로만 구하고 의취(義趣)를 연구하지 않아 심신과 글은 두 가지 사물이 되어 서로 상관이 없게 되고 만다. 병은 날로 심해 가는데 약은 날로 어두워져 결국에는 명리에 취해 살고, 부귀를 꿈꾸다가 죽는 지경에 이르니, 심지어 남의 치질을 빨고 핥아 주며 아첨하는 데서 극도에 이르게 한다. 이를 큰 병이라고 하는 말이 어찌 빈말이겠는가. 지금 거병은 이미 혈육(血肉)인 몸의 병을 제거했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드디어 마음의 큰 병을 제거하기를 기대하여 성현의 가르침과 요결을 뽑아 증세에 맞게 수십 조목을 조제하여 거병을 위해 개인 처방문(處方文)을 지어준 것이다. 이름 거병을 축원하는 뜻이 원대하니, 어찌 어린 시절만을 위한 것이겠는가. 불자가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부처나 보살이 아니지만, 설법은 부처나 보살의 묘전(妙詮)이다. 내가 부처나 보살이 아니라고 업신여기면, 이는 한밤중에 거리에서 악인이 촛불을 들고 가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 그 불빛을 취하지 않는 것이니, 어찌 구덩이 속으로 떨어짐을 모면할 수 있겠는가.” 거병도 당연히 그 불빛만을 취하라. 이 불빛은 태양의 정기이고 수황이 만든 불씨이니, 이 불빛을 잡고 앞서 가는 사람이 존재옹이라고 해서 혐의(嫌疑)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선생은 63세 때 큰누나의 손자 이경(李檠)을 사랑했다. 그래서 손자와 후학들이 마음의 병을 알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16개에 이르는 병을 치유하는 36가지 처방전인 《거병서(去病書) 제사(題辭)》를 썼다. 이 글은 선생의 교육을 철학을 담고 있는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앓고 있는 이 병의 실체를 파악하고, 선생께서 그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어떤 처방을 하셨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부끄러움을 모르는 병
맹자가 말하기를 “남과 같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어느 것이 남과 같은 것이 있겠는가.” 했다.〔孟子曰 不恥不若人 何若人有〕

(1) 모두 똑같은 사람인데도 더러는 시골 사람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남과 같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2) 맹자가 말하기를 “지금 무명지(無名指)가 굽혀져 펴지지 않으면 싫어하면서도 마음이 남들과 같지 않으면 싫어할 줄 모르니, 이를 유(類)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孟子曰 無名之指屈而不伸則惡之 心不若人則不知惡 此謂不知類也〕- 오(惡)는 치(恥)와 같은 의미이다.

3) 대체로 사람들은 의복․음식․음주․여색․노름․씨름․해학․사기․속임수․경쟁․청탁이 남과 같지 않으면 몹시 싫어하여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해 온 힘을 다해 본떠 배우려고 한다. 그러나 부모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우애, 덕의(德義)와 지식(知識), 국량(局量)과 재능(才能)이 남과 같지 않을 경우에는 싫어할 줄 모른다. 남이 혹 이를 말해 주면 스스로 “나의 본성과 기질이 본래 이러하니 배운다고 어찌 되겠는가.”라고 핑계를 댄다. 스스로 소인․잡인․망인(妄人)․우인(愚人)․흉인이 되기를 달갑게 여기고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이것이《맹자》의 이른 바 ‘유(類)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위의 내용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병이다. 사람이 금수와 다른 점은 염치가 있기 때문이다. 오상(五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덕을 닦고 오륜의 가르침을 차례대로 행하는 것은 모두 부끄러움을 모면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끄러움을 첫머리로 삼았다.


2) 부끄러움을 제거하는 약
맹자가 말하기를 “부끄러움이 없음을 부끄러워한다면 치욕스러운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孟子曰 無恥之恥 無恥矣〕

사람들을 위협하여 겁탈하고 좀도둑질하거나, 남녀가 문란하거나, 재물과 이익에 탐욕을 부리거나, 언어가 추악하거나, 음식에 탐욕을 부리거나, 어깨를 웅크리고 아첨하며 웃거나, 비굴하게 등창이나 치질을 빨고 핥으며 아첨하는 것은 모두 부끄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스스로 후회하고 깨달아 부끄러움이 없음을 깊이 부끄러워한다면, 비로소 유(類)를 알 수 있고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게 되어 드디어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니, 마음과 뜻에 하자가 없고, 굽어보고 우러러보아도 부끄러움이 없으며, 의리를 행해도 흠이 없고, 소문을 들어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이 경지에 이르게 되면 해진 솜옷을 입더라도 부끄러움이 없고 가난한 골목에서 자주 끼니를 걸러도 안빈낙도하고 호연지기가 천지 사이에 꽉 차게 되니, 이것이 부끄러움을 아는 지극한 공효이다.

위의 내용은 부끄러움을 제거하는 약이다. 《맹자》에 “만일 이를 부끄러워한다면 인(仁)을 행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으니, 이 말은 약을 복용하는 방도인 것이다.

3) 오만(傲慢)으로 인한 병
(1) 《서경》에 “단주(丹朱)는 어리석고 다툰다.〔書曰 丹朱嚚訟〕”라고 했다.

마음이 화순(和順)하고 안정되지 못한 자는 말을 해서 사람을 어긋나게 하지 않거나 사물을 손상시키지 않으면 불쾌하게 여기고, 일을 해서 사물과 어긋나지 않거나 남과 다투지 않으면 즐거워하지 않는다. 이는 살모사가 가을철에 한창 독이 올라 사람을 물지 않으면, 필시 생기(生氣) 있는 초목이라도 물어 그 독기를 쏟아낸 뒤에야 겨울잠을 자는 것과 같다. - 반드시 생물(生物)을 무는 이유는 시기심이 독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

(2) 《서경》에 “곤(鯀)은 명령을 거역하며 족류(族類)를 패망시켰다.〔書曰 鯀方命圮族〕”라고 했다.

마음에 오만함이 있기 때문에 윗사람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스스로 현명하고 지혜롭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벗들과 괴리감이 생긴다.

(3) 《서경》에 “삼묘(三苗)는 남을 업신여기고 스스로 어진 체한다.〔書曰 三苗侮慢自賢〕”라고 했다.

마음에 경계하고 공손한 뜻이 없는 자는 하늘의 명과 성인의 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사를 능멸하고 만물(萬物)을 업신여기며, 내가 이미 성스럽고 지혜롭다고 스스로 잘난 체하고, 그 누구보다 자신이 낫다고 자부한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들이 그를 배반하고 친한 이들이 떠나가 나라를 망치고 자신을 망치더라도 깨닫지 못한다. 삼묘는 한족(漢族)의 통치에 자주 반란을 일으킨 묘족과 하남, 하북지역의 이민족을 가리킨다.

(4) 《서경》에 “유호씨(有扈氏)는 오행(五行)을 업신여기며 삼정(三正)을 태만히 하여 버렸다.〔書曰 有扈氏 威侮五行 怠棄三正〕”라고 했다.

유호씨는 오만방자하고 패역을 저지르는 자다. 후계(后啓)가 그 죄를 하나씩 열거하면서 하늘과 사람에게 동시에 죄를 저질러 모든 정사와 온갖 일이 하나라도 어지럽혀지지 않은 것이 없음을 밝히고자 했다. 그 때문에 반드시 오행과 삼정(三正)을 칭했다. 오행을 업신여기고 삼정을 저버리면 하늘과 사람의 이치가 모두 상실되는데, 단지 심성(心性)이 간특하여 매사에 이치를 어기기 때문이다.

(5) 《서경》에 “하나라 걸(桀)은 덕을 없애고 위엄을 부렸다.〔書曰 夏桀滅德作威〕”라고 했다.

마음이 너그럽고 화평하지 않으면서 남의 위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힘써 위엄을 부리고 학대하여 그 마음을 푸니, 이른바 강퍅하고 난폭한 자이다.

(6) 《서경》에 “상나라 주(紂)는 거칠고 태만하여 공경하지 않았다.〔書曰 商紂荒怠不敬〕”라고 했다.

태만은 온갖 악(惡)의 근원이고, 공경은 온갖 선의 으뜸이다. 거칠고 태만하여 공경하지 않으면 필부(匹夫)조차도 제 한 몸을 보전할 수 없다. 하물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겠는가.

(7) 《시경》에 “여왕(厲王)은 강포하여 원망이 많고 중국(中國)에서 사나움을 부렸다.〔詩曰 厲王 強禦多懟 炰烋于中國〕”라고 했다.

강포함은 마음에 너그러운 인(仁)이 없고, 사나움을 부림은 기운이 거침을 숭상하는 것이다. 강포는 행사(行事)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고, 사나움을 부리는 것은 기상(氣象)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니, 전적으로 흉악한 사람의 습관이다.

위의 내용은 오만의 병이다. 오만은 사람의 흉한 덕이다. 만(慢)은 마음에 보존되어 있는 것이고, 오(傲)는 일에 드러난 것이다. 오는 성(性)에서 이루어지고, 만은 정(情)에서 드러난다. 오만이 극도에 이르면 반드시 난폭하게 일을 처리하다가 스스로 잘난 척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로지 제 마음대로 행동한다. 자신의 경우에는 제 몸을 망치고, 집에서는 집안을 망치고, 나라에서는 나라를 망쳐 만에 하나라도 모면할 수 없다. 단주(丹朱) 이하 흉악한 일곱 사람의 오만한 덕을 합하여 살펴보면 마치 부절처럼 합치되니, 아, 두려워할 만하다. <傲慢 性情>

4) 오만을 치유하는 약
(1) 《서경》에 “제요(帝堯)는 진실로 공손하고 능히 겸양한다.〔書曰 帝堯允恭克讓〕”라고 했다.
진실로 공손함〔允恭〕은 목소리나 웃는 모습 따위의 공손이 아니다. 능히 겸양함〔克讓〕은 남을 의식해 애써 겸양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과 사람이 하나의 이치이고, 너와 내가 근원이 같으니, 초목이나 금수조차도 소홀히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더구나 사람에 있어서이겠는가. 사람을 소홀히 대할 수 없으니, 사람과 관계되는 모든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성인이 어찌 진실로 공손하지 않았겠는가. 사람을 대할 적에 성실하게 하고, 일을 집행할 적에 공경하고, 모든 사물을 이루어 줌이 모두 공(恭)이다. 천하의 사물은 내가 소유하지 않으면 당연히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천하의 일은 내가 처리하지 않으면 당연히 다른 사람이 처리하니, 어찌 사사로이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 지위를 말하면 천자(天子)이니 천하의 천자를 내가 어찌 관여할 수 있겠는가. 부유함으로 말하면 만승(萬乘)이니 천하의 만승을 내가 어찌 관여할 수 있겠는가. 내가 관여하지 않으면 무아(無我)인 것이다. 공자는 “천하를 소유했으나 관여하지 않았다.〔有天下不與〕”라고 말했고, 정자(程子)는 “뜬구름이 태허를 지나가네.〔浮雲過太虛〕”라고 했다. 본래 무아이니, 어찌 또다시 겸양할 일이 있겠는가. 성인은 본래 겸양할 일이 없는 분이다. 그러나 겸양할 일이 없다고 하면 안 되기 때문에 ‘극(克)’ 자를 썼다. 능히〔克〕하면 겸양을 통달할 것이니, 성인의 마음은 모두 이와 같다.
도량이 천지와 같아 가득 차지 않기 때문에 교만함이 없다. 교화가 천지와 같아 무위(無爲)하기 때문에 나태함이 없다. 덕(德)이 귀신과 같아 망녕됨이 없기 때문에 오만함이 없다. 지혜가 만물을 두루 파악해도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성인인 체하지 않는다. 만물을 곡진히 이루어 빠뜨리지 않기 때문에 경외하는 마음을 보존한다. 현인은 성인을 본받기를 바란다는 것 또한 배움이 이와 같을 뿐이다.

(2) 《서경》에 “제순(帝舜)은 온화하고 공손하고 성실하고 독실하였다.〔書曰 帝舜溫恭允塞〕”라고 했다.

(3) 《서경》에 “대우(大禹)는 자만하고 큰 체하지 않았다.〔書曰 大禹不自滿假〕”라고 했다.

(4) 《서경》에 “성탕(成湯)은 힘써 그 덕을 공경했다.〔書曰 成湯懋敬厥德〕”라고 했다.

(5) 《서경》에 “문왕(文王)은 아름답게 부드럽고 아름답게 공손했다.〔書曰 文王徽柔懿恭〕”라고 했다.

(6) 《시경》에 “무왕(武王)은 마음에 두 가지가 없으셨다.〔詩曰 武王無貳爾心〕”라고 했다. - 가까운 신하라고 해서 함부로 대하지 않고 멀리 있는 신하라고 해서 잊지 않았다.〔不泄邇 不忘遠〕 -

(7) 《논어》에 “공자는 온화하고 어질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겸양했다.〔論語曰 夫子溫良恭儉讓〕”라고 했다.

성인보다 성대한 사람이 없으니, 그 덕을 찬미하는 사람들은 필시 평범하지 않은 말을 했을 것이지만, 일곱 성인에 대한 찬사는 이 정도에 불과하다. 큰 요지는 경외(敬畏)일 뿐이니, 사람에게 보존된 것 가운데 이보다 위대한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마음에 보존된 것이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아 밖으로 드러난 행위가 자연히 절도에 맞은 연후에야 여기에 참여하여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자사(子思)가 도(道)를 전수한 《중용》을 기록할 적에 특별히 ‘중화(中和)’ 두 글자를 말했으니, 어찌 이유가 없었겠는가. 배우는 사람들이 여기에 힘을 쏟아 경지에 이르면 성인이 되고, 경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현인이 되며, 진실로 뜻만 있다면 또한 성인의 문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고 배우다가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는 모르는 것과 똑같다. 그러나 다행히 사람이 되어 성인의 도(道)가 있음을 알고, 성인이 사는 길머리에 서서 성인의 문과 담장을 바라보니, 그 기쁨과 감격이 어찌 그 끝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용감히 앞으로 나아가 그 수준에 올라 성인을 직접 뵐 수 없다면 이 슬픈 마음이 어찌 또 그 끝이 있겠는가. 아,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과연 나 때문인가, 다른 사람 때문인가, 아니면 하늘 때문인가.

위의 내용은 오만함을 제거하는 약이다. 일곱 흉인(凶人)의 덕이 이미 저와 같고 일곱 성인의 덕이 또 이와 같으니, 글을 읽는 자가 만일 잘 살피고 깊이 연구한다면 어찌 시원하게 깨달아 힘쓰는 구석이 있지 않겠는가.

5) 허물을 반성하지 않는 병
(1) 《서경》에 “허물을 부끄러워하여 잘못을 저지르지 마소서.〔書曰 無恥過作非〕”라고 했다.
무심히 한 실수와 모르고 한 잘못을 이른바 ‘허물〔過〕’이라고 한다. 마음만 쓰면 반드시 실수하지 않고, 앎이 있으면 반드시 잘못되지 않으니, 내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허물을 깨닫자마자 자복하면서 이는 내가 저지른 허물이라고 말하고, 자복하자마자 고치면서 다시는 감히 허물을 짓지 않겠다고 하면, 내게는 마음의 병이 되지 않고 다른 사람 역시 이를 꾸짖지 않을 것이니, 어찌 쾌활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어리석은 사람의 경우에는 도리어 제 허물을 인정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이어서 끝까지 우기기를 “이 일이 어찌 잘못된 일이겠는가. 이는 진실로 당연하다. 내가 어찌 생각 없이 했겠는가. 나는 충분히 잘 생각하고 이 일을 했다. 내가 어찌 무지하게 이 일을 했겠는가. 내가 사리를 잘 따져 보고 했다.”라고 한다. 처음에는 그가 실로 허물과 관련이 없었지만, 이런 말을 하는 지금은 그의 진짜 잘못이 된다. 그는 마음의 병이 드디어 깊어지고, 사람들 역시 그를 버릴 것이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2) 공자가 “허물이 있어도 고치지 않는 것을 바로 허물이라고 했다.”라고 했다.〔子曰 過而不改 是爲過矣〕

왕안석(王安石)이 물고기 먹이를 먹었던 일은 애초에는 무심한 허물이었다. 한두 알을 먹었을 때 곧 깨달았어야 했는데 계속 먹어 끝까지 허물을 저질렀으니, 이 일을 아는 사람은 모두 의심했다. 이것이 바로 허물이 된다. 결국에는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치고 충량(忠良)한 사람들을 죽이고 송나라를 멸망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허물이 되는 데 그쳤을 뿐이겠는가. 지금까지도 그는 소인의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비웃음을 당한다. 물고기 먹이를 한두 알 먹었을 때에 허물을 자복한 경우와 득실을 비교해 보면 과연 어떠한가.
근세에 나름대로 몸가짐을 조심하던 어떤 한 선비가 하루는 크게 술에 취해 집에 돌아갈 길을 헤매다가 창가(娼家)에서 유숙했다. 다음 날 친구들이 이상하게 여겨 묻자 그 선비는 취해 헤매던 사실을 숨기려고 이어 표명하기를 “내가 평소 이 여인을 마음에 두고 엿보았는데, 지금 축첩하려고 하네. 첩 한 명 정도야 선비에게 늘상 있는 일이 아닌가.”라고 했다. 협객질하던 기생 서방이 이 말을 듣고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거의 죽을 지경까지 그 선비를 구타했다. 사람들이 모두 그 앞서의 잘못을 비웃을 줄을 알면서도 스스로 이를 가지고 다른 허물을 반증하지 못했으니, 애석하도다.

위의 내용은 허물을 부끄러워하는 병이다. 우 임금과 탕왕은 자신을 탓했기에 나라를 짧은 시간에 흥기시켰다. 사람이 만일 자신을 탓하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흥기시킬 수 있는 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필시 허물을 인정하는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것이니, 단지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정도에 해당할 뿐만이 아니다.

(3) 맹자가 말하기를 “옛날 군자들은 그 허물이 해와 달의 일식ㆍ월식과 같아서 백성들이 다 그것을 보았고, 허물을 고침에 미쳐서는 백성들이 다 우러러보았는데, 지금 군자들은 어찌 다만 그대로 따를 뿐이겠는가. 또 따라서 변명을 하는구나.”라고 했다.〔孟子曰 古之君子 其過也如日月之食 民皆見之 及其更也 民皆仰之 今之君子 豈徒順之 又從而爲之辭〕

사람에게 허물이 있을 경우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보고 있는 줄을 모르고서 반드시 이를 가리고자 하기 때문에 부끄럽게 여겨 꾸민다. 허물을 고치면 다른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는 줄을 모르고서 마음속으로 반성하지 않기 때문에 고치기를 싫어한다. 게다가 변명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면 버려진 사람이 될 뿐이다.

6) 허물을 제거하는 약자로는 사람들이 그에게 허물이 있음을 말해 주면 기뻐했다.〔子路 人告之以有過則喜〕

내 허물을 알게 해서 허물이 없는 데에 이르게 된다면 이보다 더 큰 다행이 없을 것이니 어찌 기뻐하지 않겠는가. 제 허물을 듣고 화를 내는 사람과 비교한다면 어찌 봉황새를 참새에 비교할 정도뿐이겠는가. 정자가 “자로 역시 백세(百世)의 스승이다.”라고 한 것은 진실로 맞는 말이다.

위의 내용은 허물을 제거하는 약이다. 내가 만일 허물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다른 사람들이 허물을 말해 주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말해 주지 않으면, 나 스스로 성인인 양 여긴다. 자신을 성인으로 여기게 되면 끝내 잘못된 사람이 되고 만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허물을 알려준 이후에야 허물을 안다면 어찌 허술한 방식이 아니겠는가.
스스로 수양하는 사람은 밤낮으로 돌이켜 생각하고 경계하고 조심하며, 항상 큰 허물을 저지른 것처럼 여기고 큰 일이 잘못된 것처럼 한 이후에야 다른 사람들 역시 그 사람의 허물을 즐겁게 알려줄 것이다. 만일 터럭 하나만큼이라도 내게는 허물이 없다는 생각이 있으면, 그런 기색이 얼굴에 나타나, 이미 천리 밖에서도 사람을 거부할 것이다.
또한 군자의 허물이란 반드시 의리를 어기고 몸을 손상시키는 큰 잘못이 아니라도 모두 허물로 여긴다. 일언반구(一言半句)의 실수와 한 번 움직이거나 조용한 순간의 어긋남과 막 싹트는 한 가지 생각의 그릇됨이 모두 허물이다.
자로를 오늘날 사람과 비교한다면, 어찌 허물이 있는 사람이 되겠는가. 이웃 나라가 천승(千乘)을 소유한 나라의 맹약을 가볍게 여기고 자로의 한마디 말을 믿었으니, 그의 군자다움을 상상할 수가 있다. 자로의 이른 바 허물이라는 것은 하루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정도 인(仁)에 이르는 즈음에 천리(天理)가 아직 완전하지 않았을 때 털끝만큼 소홀히 하거나 잘못한 것이다. 크게는 걸음걸이ㆍ진퇴ㆍ시선ㆍ응대 사이에 나타나고, 미세하게는 거문고의 소리에서 드러나는 부류이다. 오늘날 사람의 경우에는 만약 이를 허물로 삼아 말해 준다면, 어찌 칼을 어루만지며 서로 적대하지 않겠는가. 자로는 이와 달리 허물에 대해 듣기를 몹시도 좋아했으니, 참으로 호걸스러운 선비였다. 오늘날 그가 우리 같은 사람들을 낮게 본 것이 어찌 아지랑이나 먼지 정도일 뿐이겠는가. 아, 성대하도다.

7) 훈계를 듣기 싫어하는 병
(1) 《시경》 〈억(抑)〉에 “철인들은 좋은 말을 해 주면 덕(德)을 순히 하여 행하거든, 어리석은 사람은 도리어 나더러 거짓말한다고 하니, 사람들이 각기 다른 마음을 갖고 있도다.〔詩抑篇曰 維彼哲人 告之話言 順德之行 其維愚人 覆謂我僭 民各有心〕”라고 했다.

훈계하는 간언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리 민첩한 머리와 재주가 있더라도 단지 어리석은 사람일 뿐이다. 상(商)나라 주(紂)의 지혜는 간언을 막기에 충분했지만, 이를 지혜라고 말해서는 안 되니, 참으로 “하우(下愚)는 변화시킬 수 없다.”라는 것이다. ‘도리어 나더러 거짓말한다고 하니’라는 한 구절은 간언을 거부하는 어리석음을 형용한 것으로, 그 참모습을 잘 표현했다. ‘사람들이 각기 다른 마음이 있도다.’라는 한 구절은 어찌할 수 없다는 뜻을 탄식한 것이다. 말이 비록 절박하지는 않을지라도 그 실상은 금수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2) 또 말하기를 “너를 간곡히 가르치는데, 너는 내 말을 건성으로 듣는구나. 가르쳐 준다고 여기지 않고 도리어 사납게 군다고 하는구나. 설령 지식이 없다고 하나, 또한 이미 늙었도다.〔又曰 誨爾諄諄 聽我藐藐 匪用爲敎 覆用爲虐 借曰未知 亦聿旣耄〕”라고 했다.

잠계(箴戒)를 진언하는 사람이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을까 걱정하여 한 번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두 번, 세 번 간언하면, 어리석은 사람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자신을 싫어한다고 여겨 난폭하게 대하고 분노를 견디지 못한다. 벗의 경우에는 절교하여 원수가 되고, 군신(君臣)의 경우에는 일곱 개의 심장 구멍을 칼로 갈라 볼 것이니, 아, 통탄할 일이다.
‘설령 지식이 없다고 하나(借曰未知)’라는 한 구절은 지극히 어리석은 죄를 극단적으로 말하고자 했지만, 말로 다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도리어 표현을 완곡하게 하였다. 그러나 드러난 표현 이외에도 긴 가락에 통곡보다 심한 슬픈 뜻이 담겨 있다.

위의 내용은 말을 듣기 싫어하는 병이다. 비록 보통 사람 이상의 자질일지라도 혹 감정이 솟구치고 사심이 가릴 때에 한마디 말조차 듣기 싫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끝내 반드시 몸을 망치고 집안을 망치고 나라를 망치고 천하를 망치는 상황을 초래할 것이다. 더구나 일생토록 간언을 거부하는 자이겠는가. 이로써 볼 때, 요순 이하 여러 성인들이 매번 전전긍긍 두려워하고 조심하며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한다고 하신 말씀은 참으로 구차하게 꾸미는 말이 아니다. - 동해가 뽕밭이 되는 일은 혹여 일어날 수도 있으니, 남이 하는 말을 듣기 싫어하고서 망하지 않는 경우는 만에 하나도 없다. ‘오(惡)’는 거성(去聲)이다.

8) 충고를 받아들이는 약
(1) 《주역》에 “망하지 않을까 망하지 않을까 경계해야 우거진 뽕나무 뿌리에 매어 둔 것처럼 견고하다.〔易曰 其亡其亡 繫于苞桑〕”라고 했다.
천지의 이치는 늘 가득 차 있는 것이 없다. 가득 차자마자 곧바로 이지러진다. 여름해가 길지만, 하지(夏至)는 단 하루뿐이다. 양기(陽氣)가 자라지만, 하지 오시(午時) 4각(刻)일 뿐이다. 겨울밤은 길지만, 동지는 단 하루뿐이다. 음기(陰氣)가 극에 달하지만, 동지 자시(子時) 4각 일 뿐이다. 햇빛은 받아들일 만한 곳은 반드시 모두 비춰 주지만, 정오 초각(初刻)에 동쪽 벼랑이 이미 응달이 된다. 보름달은 지극히 둥글어 모자람이 없지만, 정망(正望 보름달) 1각에 서규(西規 서쪽 동그라미 부분)가 이미 엷어진다.
성인은 이 이치를 살펴 알았기 때문에 요순(堯舜)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긴 점이 있었고, 공자도 오히려 능하지 못하다고 했다. 혹자는 성인의 겸사(謙辭)라고 여기는데 이는 잘못이다. 요순이 만약 스스로 부족하게 여기는 점이 없다고 하고, 공자가 만일 내가 모든 일을 다 잘할 수 있다고 했다면, 이는 하지 오시의 양(陽)과 같아서 눈 깜박할 사이에 이지러졌을 것이니, 어찌 위대한 성인이 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항상 경외하는 마음을 간직하면서 혹시라도 망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조금도 늦출 수 없는 이유이다. 망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은 바로 날로 새로워지는 근본이다. 이 때문에 숨이 끊어지기 전에는 덕업이 날로 진보하고 퇴보함이 없어야 하니, 바로 이른바 죽은 뒤에야 그친다는 것이다.

(2) 대우(大禹)가 순에게 경계하기를 “단주(丹朱)처럼 오만하게 하지 마소서.”라고 했다.〔大禹戒舜曰 無若丹朱傲〕

(3) 고요(臯陶)가 순을 경계하기를 “안일과 욕심으로 나라〔有邦 제후〕를 가르치지 마소서.”라고 했다.〔臯陶戒舜曰 無敎逸欲有邦〕

(4) 소공이 무왕을 경계하기를 “군자를 업신여기면 사람의 마음을 다하게 할 수 없고, 소인을 업신여기면 그 힘을 다하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건을 애완하면 뜻을 잃고 사람을 희롱하면 덕(德)을 잃을 것입니다. 작은 행실을 조심하지 않으면 마침내 큰 덕에 누를 끼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召公戒武王曰 狎侮君子 罔以盡人心 狎侮小人 罔以盡其力 玩物喪志 玩人喪德 不矜細行 終累大德〕

(5) 순 임금은 그 당시 나이가 70세였고, 무왕은 이미 90세였는데, 세 신하가 훈계하는 말이 마치 어린아이에게 귀를 대고 말해 주는 것과 같다. 두 성인이 내가 이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지니고 있었다면 반드시 화를 냈을 것이다. 세 신하가 만일 우리 임금은 필시 이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지니고 있었다면, 또한 일부러 위태로운 표현으로 두려움을 갖도록 지나친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순 임금은 원래부터 내가 단주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없었고, 무왕도 본래 대덕(大德)을 이미 이루었다는 뜻이 없었기 때문에 신하는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깊이 경계했으며, 임금은 진실한 마음으로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였다. 이것이 바로 성인의 덕에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점이다.
지금 사람들 중에 조금이나마 지식이 있는 자라도 관례를 치르고 나면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40세가 되자마자 반드시 “너는 내 백발을 보아라. 부동심(不動心)의 나이에 어찌 다른 사람의 훈계를 받아들이겠는가.”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두 공자가 말한 바처럼 도저히 어찌할 수 없다는 부류에 들어가는 경우이니, 애석하도다.

위의 내용은 듣기 싫어하는 병을 제거하는 약이다. 만일 마음속에 내가 이미 지혜롭고, 내가 이미 성인이라는 생각이 있다면, 훈계하는 좋은 말을 억지로 받아들이더라도 끝내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당 태종 같은 사람도 위징(魏徵)을 죽이고자 했고 십점(十漸)을 능히 고칠 수가 없었다. 반드시 항상 경외하는 마음을 지녀 좋은 말을 듣자마자 마음과 뜻에 허심탄회하게 합치되어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대우(大禹)처럼 절한 이후에야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당 태종이 비록 억지로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걸주(桀紂)보다 훨씬 더 현명했다. 지금 사람들은 당 태종보다 못한 죄인이면서도 모두 자신이 제일 잘났다고 자랑하니,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번호 제목 조회 수
공지 장흥위씨 2600년 그 뿌리를 찾아서(영상) 1191
공지 성씨표기 통일화 추진 결과 보고서(2015년 11월 21일 작성) 976
58 존재 선생의 교육을 통한 향촌개선 연구 (3-3) file 216
» 존재 선생의 교육을 통한 향촌개선 연구 (3-2) file 251
56 존재 선생의 교육을 통한 향촌개선 연구(3-1) / 위정철 file 212
55 中國 魏氏 遺跡의 巡禮 코스(案) / 圓山 위정철 file 172
54 ◇中國 宗親의 懷州大祭 參禮 / 圓山 위정철 file 118
53 存齋先生行錄 / 書溪公 諱 伯純 1802年 159
52 장흥위씨 성자(姓字)표기 통일화 file 845
51 장흥동학농민혁명의 인물과 사건, 그리고 장소(3-3) / 溫山 위의환 935
50 장흥동학농민혁명의 인물과 사건, 그리고 장소(3-2) / 溫山 위의환 743
49 장흥동학농민혁명의 인물과 사건, 그리고 장소(3-1) / 溫山 위의환 1443
48 存齋 魏伯珪, 記念館 建立 請願書(6-6) 圓山 위정철 392
47 存齋 魏伯珪, 記念館 建立 請願書(6-5) 圓山 위정철 265
46 存齋 魏伯珪, 記念館 建立 請願書(6-4) 圓山 위정철 260
45 存齋 魏伯珪, 記念館 建立 請願書(6-3) 圓山 위정철 301
44 存齋 魏伯珪, 記念館 建立 請願書(6-2) 圓山 위정철 310
43 存齋 魏伯珪, 記念館 建立 請願書(6-1) 圓山 위정철 252
42 장흥위씨 인구수 -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file 1670
41 <판서공 관련> 선조실록 선조 27년. ◆요동 도지휘사사가 왜정에 관하여 보낸 자문 390
40 조선왕조실록 수록된 판서공 (휘 위덕화) 충의관련. 233
39 艮庵公 祭文 / 圓山 위정철 176

로그인 정보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