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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 선생의 교육을 통한 향촌개선 연구

   (2019 존재기념의 날 학술발표문)

       -원산 위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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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平生의 교육자
존재 선생의 평생 직업을 무엇으로 볼 수 있는가. 18세기 조선시대의 국가산업은 물론 농업이다. 여기다 농촌에 거주했으니 두 말할 필요 없이 농업이다. 그러나 선생의 직업을 농업이라고 볼 수도 없다. 왜냐면 중농정도의 농가는 모두 머슴에 의해 농사를 지었기에 감농자로서의 농업인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30평생 과장을 출입하느라 감농자의 역할도 충실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주업을 농업으로 단순화하기도 곤란한 점이 있다.
선생의 직업을 굳이 특정하자면 교육자라고 볼 수 있다. 즉, 계당학숙, 귤우헌 양정숙, 사강회, 다산정사 등으로 전 생애를 관통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직업은 감농가와 함께 교육자임이 분명하다. 22세 때인 1748년(戊申), 29세 때인 1755년(乙亥)에 귤우헌(橘友軒)에서 양정숙(養正塾)을 운영했다. 다만 사실상 서당운영의 시초는 17세 때인 1743년(癸亥)부터로 볼 수 있다. 서당을 열지 않았지만 이미 인근에서 많은 학생들이 찾아와 가르쳤기 때문이다.
서당이자 향촌발전을 위한 사강회(社講會)는 독특한 향약이자 교육이다. 1765년(乙酉) 39세에 소과(小科)를 합격한 후 진사의 신분으로서 시작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는 주경야독의 형태가 아닌 농사현장에서 쉬는 틈을 이용한 교육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특정지역의 미풍양속을 순화하기 위한 변형된 향약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강회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교육이다. 그것도 거의가 일가의 후손을 대상으로 삼았기에 유별나다.
당시 방촌은 그만한 충분한 여건이 갖추어져있었다. 16세기 초 관산과 연을 맺은 오덕(五德)의 후손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가장 큰 관심사는 자식들에 대한 교육이었다. 이곳은 국토의 끝자락에 위치한 벽항이지만 다른 촌락과는 달랐다. 그 원인은 고려 때 정안현(定安縣)의 치소가 1379년까지 방촌에 있었다. 특히 공예태후가 당동(堂洞)에서 태어났다는 흔치않은 역사도 있다. 읍민들의 의식과 왕비의 태생지 등의 이유들이 작용하는 정서로 볼 수 있다.
우선 당시 수학적령기에 해당된 26세를 보자. 판사파는 정망(廷望)계가 원주(愿周), 정첨(廷瞻)계 사혁(師赫) 등 5형제다. 청계파는 상복(相復)등 무려 16형제, 판서파는 백파계가 백침(伯琛) 등 29형제, 계파가 사극(師克) 등 25형제, 안항파는 존재의 동생인 백호(伯昊)․백신(伯紳)․백순(伯純)․백헌(伯獻) 등 안항공 후손만 20여명이나 됐다. 28세까지 더하면 그 수가 200여명을 넘을 정도로 불었던 것이다. 이는 교육적령자가 그만큼 많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의 공교육기관은 읍에 있는 향교가 있을 뿐이다. 관산에서 당일 읍내의 향교로 등하교하기는 불가능하다. 다음으로 사립하교격인 서원도 없다. 관산은 서당이 유일한 수학기관이다. 그는 이미 문중의 부노들의 권유를 받고 2세들을 위해 계당과 귤우헌 학숙을 운영한 바 있다. 마지막에 시도한 사강회는 스스로 착안해서 독경병진의 새로운 교육시스템을 적용한 방식이다. 이는 그가 실현해보려는 이상향을 구현하고자하는 의지의 한 단면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은 선생의 대표적 직업이 무엇인지에는 좀 막연하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은 유학자라 한다. 15년간 덕산유학과 30년 동안 서울을 오가며 부거(赴擧)했으니 맞는 말이다. 또 실학자 정도로 알거나 <농가구장>과 연시조와 가사 등 작품의 저자 또는 실학자 등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주장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평생을 관통한 직업은 아니다. 그래서 평생의 직업이 교육자였다는 사실을 보다 명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교육기관 운영일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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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천재에 書堂 개설
1748년(戊辰) 그해 겨울 장천재를 서재로 삼아 독서했다. 부노(父老)들로부터 독서도 하면서 일가친척의 자제들을 지도해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연보에는 1748년 22세부터 '장천서당'이 개설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선생의 강학활동은 사실상 17세부터 시작됐다고 짐작할 수 있다. 자진해서 찾아오는 피교육생을 외면하기는 어려워 가르쳐주기도 하고 그들과 함께 토론했기 때문이다.
그런 추정이 가능한 구체적인 증거는 '계당학규'이다. 만일 22세에 운영했다면 병계 문하로 들어간 1751년(辛未)과는 불과 3년 미만이다. 물론 한 달간 서당을 운영한다고 해도 학규는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고작 3년 정도를 운영하려면서 '학규'까지 내 걸었다는 것은 수긍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따라서 존재의 '장천서당'은 17세 때인 1743년부터 사실상 운영됐다고 미루어 볼 수 있다.

(1) 계당학규 17조
존재는 장천재에 서당을 열면서 율곡의 은병정사(隱屛精舍) 학규 21조를 인용해서 계당학규 17조를 걸었다. 그는 조선의 선비 가운데 율곡을 가장 존경스런 사표로 여겼기에 학규도 거의 그대로 따랐다.

①하나, 붕우들끼리 서로 화목하고, 공경하며 실수를 바로잡고 선(善)을 권하는데 힘쓸 것이며, 믿은 구석이 있다고 해서 서로 교만하지 말고, 자신이 옳다는 생각으로 서로 헐뜯지 말아야 한다.

②하나, 덕이 높고 나이가 많은 사람을 추대하여 당장(堂長)으로 삼고, 또 학문이 뛰어난 한 사람을 추대하여 장의(掌議)로 삼아 모든 일을 여쭈어 처리한다.

③하나, 매일 오경(五更)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침구를 정리하고 방과 당을 청소하며, 모두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정돈하고 글을 읽는다.

④하나, 언어는 반드시 신중하게 하며 문자, 예법, 의리 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

⑤하나 궤안(机案), 서책, 붓과 벼루 등 문구는 모두 제자리에 정돈해 두어 혹시라도 뒤섞여 어지러워지지 않도록 한다.

⑥하나, 아침부터 저물녁까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혹 독서하고 혹 학업을 청하며 더 가르쳐주기를 청하여 학문의 일이 아닌 것이 없도록 한다.

⑦하나, 어른은 매일 한 가지의 책을 범위를 정하여 읽고, 오시(午時)에는, <가례(家禮)>를 강론하고, <상례비고(喪禮備考)>, <의례문해(疑禮問解)> 및 여러 선현의 예설(禮說)과 저녁 이후에는 <염낙풍아(廉洛風雅)>를 읊으며 외운다.

⑧하나, 동자(童子)는 매일 한 가지 책을 범위를 정하여 읽고, 오후에는 <소학(小學)>을 윤강(輪講)하며, 저녁에는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외운다.

⑨하나, 평소에 반드시 의관을 바르게 하고,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앉기를 마치 웃어른을 대하듯이 하며, 평상복을 입고 스스로 편하다고 여겨 외람되게 기대거나 드러눕지 않아야 한다.

⑩하나, 학당에 있을 때나 개울을 건너거나 언덕을 오를 때 모두 차례대로 하고, 또 사물을 완상하거나 이치를 궁리할 때에 서로 다투어 토론하거나 잡담을 하지 말아야 한다.

⑪하나, 항상 안 좋은 옷과 음식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마을 가져야 한다.

⑫하나,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단점을 말하지 말고, 남이 선행을 했을 때에 혹 시기하지 말고, 서로 장려하는데 힘써야 한다. 조정의 득실과 관장(官長)의 현부에 대해 말하지 말아야 한다.

⑬하나, 의롭지 않은 방법으로 나아가 취하기를 바랄 수 없으니, 항상
그 의(義)를 바르게 하되 그 이익을 도모하지 않으며, 그 도를 밝히되 그 공(功)을 따지지 않는다. 는 말로써 바로집고 경계해야 한다.

⑭하나, 오늘날 과거문장 또한 선비의 일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으레 모두를 방탕하고 안일하게 장난삼아 희롱하면서 과거 문장을 익힌다. 그러나 글은 글을 짓는 핵심 방법이나 과거 문제의 지름길 또한 방심하는 자들이 능히 살펴 도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재(長川齋)에서는 이러한 습속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

⑮하나, 이곳에 거처하는 동자에게는 어른을 공경하고 가르침을 자상하게 하며, 한결같이 <소학>과 <曲禮>로 가르침을 삼게 해야 한다. 임의로 출입하면서 칼이나 낫을 함부로 사용하거나 먹으로 창문이나 벽을 더럽히지 않아야 한다. 옷차림을 바르게 하여 어른을 모시고 강론을 듣게 하며, 위험한 계곡과 바위에는 가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나 너무 심하게 구속해서 주눅이 드는 마음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된다.

⑯하나, 집에 돌아갈 때는 재중에서 익힌 내용을 잊지 말고, 모든 일에 한결같이 그 마땅함을 따라야 한다.

⑰하나, 이 학규를 멸시하여 따르려고 하지 않는 자는 이 재에서 살면서 이미 정해진 학규를 어지럽히지 말아야 한다.

(2) 은병정사 학규
은병정사(隱屛精舍)는 황해도 해주(海州) 석담(石潭)에 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선생이 43세 때 이곳에 은거하며, 주자(朱子)를 추모하며 후진을 양성하기 위하여 세운 서당이다.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 가운데 <대은병大隱屛)>의 제목에 따라 붙인 이름이다. 학칙(學則)은 자치적으로 정사를 운영하게 규정하고 있다.

①재(齋)에 들어오는 규칙은 사족과 서류(庶類)를 막론하고 학문에 뜻이 있는 사람은 모두 재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되, 먼저 들어온 사람들의 의논이 “들어와도 된다”고 한 뒤에라야 허락한다. 전일에 패악(悖惡)했던 사람이 들어오기를 원한다면 그로 하여금 먼저 스스로 개과(改過)하고 조심하게 한 다음, 그 행동하는 것을 자세히 보아서 그 행위가 개선되었음을 확실히 안 뒤에야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며, 만일 평소에 내력을 모르는 자가 들어오기를 원하면 그로 하여금 우선 가까운 마을(혹은 양정재(養正齋))이나 산사에 왕래하면서 배우고 묻게 한 다음, 그 지취(志趣)와 조행(操行)을 보아서 취할 만함을 안 뒤에야 들어오기를 허락한다.
재 안에서 나이가 많고 지식이 있는 이를 추대하여 당장(堂長)으로 삼고, 또 같은 또래 중 학식이 우수한 한 사람을 추대하여 장의(掌議)로 삼으며, 또 두 사람을 가려 유사(有司)로 삼고, 또 차례로 두 사람을 가려 직월(直月)로 삼는다. 당장과 장의와 유사는 연고가 없으면 갈지 말고 직월은 다달이 서로 교체한다. 재 안의 의논은 장의가 주도하여 당장에게 물어 본 뒤에 정한다(당장이 연고가 있어서 다른 곳에 있을 때는 모임 중에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섭행(攝行). 재 안의 물건 출납과 재직(齋直)이. 사환과 집기의 유무에 관한 일은 유사가 주관하고 모든 물건은 장부에 기재하여 교체할 때는 새로 맡는 이에게 장부를 넘겨주고, 무릇 사제와 벗들의 강론한 말은 모두 직월이 기록하여 뒤에 참고할 자료로 삼는다.

②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스승과 제자가 모두 관복(官服)으로써 (벼슬이 있으면 사모(紗帽), 단령(團領), 품대(品帶)를 갖추고, 유생은 두건(頭巾), 단령(團領), 조대(條帶)이다.) 문묘(文廟)에 나아가 중문을 열고 묘모(廟貌: 사당)를 드러내어 재배 분향(焚香)하고 (스승이 만일 없으면 학재 안에서 연장자가 분향한다.)또 재배한다. (서는 차례는 스승의 앞줄에 서고 제자가 뒷줄에 서되, 서쪽을 상위로 한다.)

③매일 5경(更)에 일어나 침구를 정돈하고 나이 적은 사람은 비를 들고 방안을 쓸며, 재직을 시켜 뜰을 쓸게 한 다음 모두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의관을 바로 잡고 나서 글을 읽는다.

④아침이 되면 모두 평상복 (笠子)에 직령(直領)이나 또는 관건(冠巾)에 직령(直領)같은 따위인데, 다만 짧은 겹것·직령은 안 입는다.)으로써 묘정(廟廷: 문묘의 뜰)에 가서 중문을 열지 않고 재배만 한다. (스승이 만일 재에 있으면 또한 평상복으로 문묘에 배알한다.) 스승이 강당에 있으면 스승 앞에 나아가 배례를 하고, (스승은 일어서지 아니하고 자리에서 구부려 답례만 한다.) 동서로 갈라서서 서로 바라보며 읍례(揖禮)를 한다. (스승이 없으면 문묘에 배례한 뒤 사당 문을 나와 뜰에서 동서로 갈라서서 서로 바라보며 읍을 한다.)

⑤ 무릇 독서를 할 때는 반드시 팔짱을 끼고 단정히 꿇어앉아 전심치지(專心致志)를 하며 의취(義趣)를 궁구하는 데 힘쓰고, 서로 돌아보며 잡담을 하지 말아야 한다.

⑥무릇 책상·책· 붓·벼루 같은 물건은 모두 제 자리에 정돈해 두고 행여나 어지럽게 여기저기 흩어 두지 말아야 한다.

⑦무릇 식사 시에는 어른과 젊은이가 나이 차례로 앉고, 음식을 먹는데는 가려먹지 말며 늘 배부르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⑧무릇 거처(居處)는 반드시 편안한 자리를 어른에게 사양하고 행여나 편안한 곳을 사리지 말며, 열 살 이상의 연장자이면 드나들 적에 연소자가 반드시 일어선다.

⑨무릇 걸음걸이는 반드시 점잖고 안존하게 하고 천천히 어른 뒤에 가서 질서를 지키며 행여나 난보(亂步)로 질서를 흐트리지 말아야 한다.

⑩무릇 언어는 반드시 믿음직스럽고 무게 있게 하고 문자와 예법이 아니면 말하지 말며, 공자가 괴력란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법을 삼고, 범씨(范氏:자는 원장(元長) 호는 익겸(益謙), 송(宋)의 학자)의 칠계(七戒)를 마음에 간직하고 눈여겨본다.

⑪성현의 글이나 성리의 설(設)이 아니면 재 안에서 읽을 수 없으며, (사학(史學)은 읽어도 좋다.) 만약 과거 공부를 하려고 하는 자라면 반드시 다른 곳에 가서 익힌다.

⑫평상시에도 항상 의복과 의관을 정제(정제)하고 팔짱을 끼고 꿇어 앉아 마치 어른을 대하듯이 하고, 편안하다고 속옷 바람으로 있어서는 안 되며 너무 화려하여 사치한 듯한 옷을 입어서도 안 된다.

⑬식후에 혹 냇가에 가서 거닐더라도 또한 사물을 관찰하여 이치를 탐구하고 서로 의리를 강론할 것이다. 장난이나 잡담을 해서는 안 된다.

⑭벗 사이에는 서로 화목하고 공경하기를 힘쓰고, 과실을 서로 바로 잡아주고, 착한 일을 하도록 서로 권하며, 귀함이나 현명함이나, 부유함이나 부형의 권세나 많은 지식을 자부하고서 같은 또래에게 교만을 부려서는 아니 된다. 또 같은 또래들을 기롱하고 능멸하며 서로 희학(戱謔)하여서도 아니 된다.

⑮글씨를 쓸 때는 반드시 또박또박 반듯하게 쓸 것이며 휘갈겨 쓰지 말며 또 벽이나 창문에다 낙서를 해서도 안 된다.

⑯몸가짐은 항상 구용(九容)3)으로써 하고, 한쪽 발로 기우듬히 서거나 기대어 자세를 흩트리거나 킬킬대고 웃거나 말을 함부로 함이 없이, 시종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⑰날이 어두운 뒤에는 등불을 밝혀 글을 읽고 밤이 깊은 뒤에야 잔다.

⑱새벽에 일어나서부터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루 동안에 반드시 하는 일이 있어서 마음을 잠시도 게을리 말아야 한다. 혹 독서하며, 정좌(靜坐)하여 본마음을 간직하며, 의리를 강론하기도 하고, 혹 익힌 바에 대해 질문도 하고, 좀 더 자세히 가르쳐 달라고 여쭙기도 하는 등 학문에 관한 일이 아닌 것이 없으니, 여기에 어긋남이 있으면 곧 배우는 자가 아니다.

⑲이따금 집에 돌아가더라도 절대로 재중에서 하던 습관을 잊지 말고, 어버이를 섬길 때나 사람을 접대할 때나 몸단속을 한 때나, 일을 처리할 때나 본마음을 간직하기에 천리를 따르고 인욕을 제거하기에 힘써야 하며, 행여 학재에 들어와서는 신칙(申飭)하고 재를 나가서는 방탕한다면, 이는 두 마음을 품은 것이니 용납할 수 없다.

⑳직월(直月)은 선악을 기록하는 장부를 맡아 기록하되, 제생(諸生)들이 학재에 있을 적과 집에 있을 적의 한 소행을 자세히 살펴서, 만일 언행이 도리에 맞은 자와 학규(學規)를 위반한 자가 있으면 모두 기록하여 매월 초하루에 사장(師長)에게 올려 (무릇 학규를 위반한 자는 직월이 당장(堂長)과 장의(掌議)에게 알려서 함께 고치도록 꾸짖고 만일 고치지 않으면 곧 스승에게 고하고, 고치면 그 기록을 지워버리고 스승에게 고하지 않는다.) 선한 자는 권장을 하고 악한 자는 벌을 주어 가르치는데, 끝내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학재에서 축출한다.

㉑재생은 비록 모여서 강회(講會)할 때가 아니더라도 매월 모름지기 한 번씩 정사(精舍)에 모여서 (매달 초하루에 반드시 모여야 하고 초하루에 연고가 있으면 늦추되 3·4일이 지나지 아니하여야 하며, 유사는 기일에 앞서 회문(回文)을 내어 두루 알린다.) 의리를 강론하고, 또 직월을 개선한다.

㉒향중(鄕中)에서 배우기를 원하는 자는 모두 양정재(養正齋)에 있게 한다.

2) 귤우헌의 양정숙
두 번째 서당은 29세(1755년 乙亥) 봄으로 일가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사락헌(四樂軒) 백침(伯琛)의 사랑채인 귤우헌(橘友軒)에 개설했다. 이때 서당이름을 병계선생이 써준 현액인 「양정숙(養正塾)」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런데 「가숙학규」는 1754년(甲戌)에 썼으니 이것이 맞다. 학규는 백록동규(白鹿洞規)를 따르고, 훈몽(訓蒙)에 대한 절목은「동자수지(童子須知)」를 따르며, 당장(堂長)과 장의(掌儀)의 세부규칙은 율곡의 「은병정사규(隱屛精舍規)」를 따랐다.

6세의 아동은 교과서에서 범위를 정해 읽게 하되 주로 성정(性情)을 배양하게 했다. 간지학(干支學)은 훈장이 간지, 방위를 가르쳤다. 8세 이상에게는 세계(世系)와 내외 족파(族派)를 훈장이 가르쳤다. 10세 이상은 산수(算數)의 계산법을 가르쳤다. 12세 이상은 상례비용(喪禮備要)를, 15세 이상은 관‧혼‧상‧제 사례(四禮)를 가르쳤다. 16세 이상은 재주와 품성에 따라 제술(製述)과 강학(講學) 또는 치학(治學)을 가르치며, 감당할 수 없으면 농사를 배우게 했다.

소학의 경우는 일종의 필수과목이다. 선생은 모든 학생과 함께 돌아가며 낮에는 강의하고, 풀어서 읽어주어 이해하도록 했다. 이렇게 반년을 실행하자 거의 체제가 잡혀갔다. 연보에는 또 「양정숙」을 세웠는데 "이전에 비해 더욱 상세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귤우헌과 양정숙은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학숙으로 보인다. 또 귤우헌과 양정숙의 서당이 어느 기간 동안 운영됐는지도 불분명하다.

3) 사강회(社講會)
1767년(丁亥)의 강계좌목은 노응탁(魯應鐸)과 1774년(甲寅) 좌목에는 김화조(金華祖)와 이달운(李達運)이 첨록된 것으로 보아 타성씨도 있다. 伯暉(43), 伯珪(41), 伯琛(36), 伯昊(34), 伯紳(32), 伯益(31), 魯天鐸(31), 伯純(31), 伯綠(30), 伯勛(30), 伯燦(30), 道紳(28), 伯毅(28), 伯賢(26), 伯協(25), 伯林(25), 道立(20), 伯仁(17), 道欽(14) 등이 구성원이다. 이 문서첩의 제17번째인 후서(後序)에 「奉而六代之親 無慮半百 團居一閭 敍昭穆 守萬祧」라고 밝힌 바처럼 형제 5인, 아들 1인 등 가족이 중심이다.

관련된 기록은 △서문 △사강회명첩 서문 △사강회강령 △완의(完議) △부조방식(賻助式) △벌주는 방식(付罰式) △사강회 때에 윤독할 <소학>초선(社講輪讀小學抄選) △회규(會規) △강규(講規) △농규(農規) 등을 갖췄다. 완의에서는 사강회의 성격을 계(契)로 규정한다. 조약은 여씨향약을 따른다. △몸가짐을 단정히 하는 칙궁(飭躬) △화목하는 목족(睦族) △어른을 공경하는 경장(敬長)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제가(齊家) △자질을 훈계하는 훈자질(訓子姪) △경조(慶弔) △계규(契規) 등을 실천하게 했다.



(1) 사강회서(社講會序)
아, 우리 5대조 안항공(顔巷公)은 후손에게 유계(遺戒) 6개 조항을 남겼는데, 2개 조항이 바로 농상에 힘쓸 것, 형제들과 화목하게 지낼 것이다. 백고조 청금공(聽禽公)은 선조의 뜻을 잘 계승하여 집안의 재산을 합해서 규약과 계획을 대강 만들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숙고조 반계공(磻溪公) 또한 가훈을 계승하여, 낮에는 밭갈고 밤에는 글을 읽을 것,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할 것으로써 후손에게 훈계를 남겼다. 이것이야말로 농사에 힘쓰고 화목을 익히는 일이 우리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가학(家學)임을 안 것이다.

또 우리 집안은 하늘 끝 남쪽의 궁벽(窮僻)한 바닷가 모퉁이에서 살았기에 벼슬이 오랫동안 끊어지고 문호가 한산하여 막막하게 물고기나 개처럼 살고 있으니 진실로 슬퍼하고 애통할 만하다. 그러지만 다행스럽게 6대의 친족들이 무려 50여명이나 한마을에서 단란하게 모여 소목(昭穆)의 차례를 갖추고, 선영을 지키고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서로 지켜주고 봄과 가을이면 즐겁게 노닐었다. 형제는 남이 아니니 어찌 슬픔 중에 즐거울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또 다행스러운 것은 산수의 경치 좋은 곳에 살고 있어서 무릇 봄과 가을의 좋은 시절이면 노소유(老少幼)가 빼어난 경치를 찾아가 표주박 잔을 들고 서로 권하니 어찌 기뻐하고 즐거움으로 앞서 말한 슬픔과 애통함을 곧 잊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청금공은 일찍이 자제 5․6인과 성(姓)은 다르지만 뜻을 같이한 몇 사람, 그리고 양인 집안의 자식 몇 사람과 함께 화전(花煎) 놀이를 약속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즐거울 만한 흥취를 얻는 것이라고 하겠다.

나는 시골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여가(餘暇)가 많아 멀리 유풍(遺風)을 그리워하며 선조들의 뜻을 이어가고자 했다. 그런데 족형 백휘(伯暉, 1725~1768)씨와 족제 일여(一汝) 백침(伯琛, 1732~17790), 여흠(汝欽) 백훈(伯勛, 1738~1815) 등 열 몇 사람이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뜻을 모두 합하여 마침내 공동으로 농사를 짓고 서례(書禮)를 아울러 익히면서 초하루와 보름에 모임을 갖고 퇴계(退溪)와 율곡(栗谷)의 향약 규약을 대략적으로 모방하고 또 약간의 곡식을 모아 이자를 불려, 강회를 할 때 술과 안주의 비용을 삼았다.

강회를 시행한지 3년(1770년)이 되자 거의 효과를 이를 수 있었다. 그런데 회원들이 무더운 날씨에 더위를 먹거나 혹은 도연명(陶淵明)처럼 파리하게 야위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세상 사람들이 강회를 낯설게 보고 또 눈과 해의 이상한 조짐도 없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중간에 그만두게 됐다. (주목된 점은 1767년에 시작한 강회가 3년 만에 성과를 냈다는 점이다. 그러나 회원들이 힘들어 하고 주변에서 낯설게 여겨 축소운영 했음을 확인하고 있다)

하지만 처음에 가졌던 뜻은 그대로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으니, 그 즐거움은 막기 어려웠다. 마침내 매월 한 차례씩 갖던 모임을 간략하게 축소하여 대략 1년에 두 번 갖기로 결정하고 존양(存羊)의 뜻 을 부쳤다. 이에 자신의 몸가짐을 단속하고(飭躬), 친족과 화목하게 지내며(睦族), 어른을 공경하고(敬長),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齊家), 자식을 가르치고(訓子姪) 경조사를 챙기는(慶弔) 등 몇 가지 조항으로 규약을 만들고 이를 강론(講論)하여 가르쳤다.

청금옹(聽禽翁 : 廷勳)의 좋은 모임을 이으니, 비록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던 처음 모임만 같지는 않더라도 이것을 아우르느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소옹(邵雍)이 심의(深衣)를 입지 않았던 은미(隱微)한 뜻을 내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를 뿐이니 어찌하겠는가.

어떤 이가 "어째서 사람들과 함께 술지게미를 먹고 탁주를 마시지 않는가?"라고 말한다면, 나는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나는 본래 홀로 깨어 있는 사람이 아니다. 여러 사람들이 다 취해 있는데 그중에 또 더 많이 취한 사람이 있다면, 이는 어차피 똑같이 취한 것 아니냐며 비웃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취해 있어도 즐겁고, 술이 깨어 있어도 역시 즐겁다"라고 말이다. 이 글로 성우당(醒愚堂)에게 질정(質定)해 본다.

(2) 사강회명첩서(社講名帖序)
아, 우리 인간의 삶이 어찌 이리도 행복하지 않단 말인가. 사람이 처음 날 때부터 만물이 닫힐 때까지 8만6천 400여년의 지나긴 시간이다. 그런데 다행히 세상에 한번 태어나는 기회를 얻었고, 더구나 하늘과 땅 사이에 생명을 품은 만물이 모두 1,800,000가지의 종류로 많다고 한다. 그 많은 종류의 만물 가운데 다행히 가장 영명(靈明)함을 얻어서 사람이 되었으니, 진실로 기뻐할 만하고 즐거워할 만하다.

그러나 오래 사는 사람도 겨우 백년을 사는데, 그 100년 가운데 어린 시절과 늙은 나이, 병든 날을 제외하고 나면 하늘을 이고 땅을 딛고서 제대로 사람 도리를 하고 사는 날이 며칠이나 되겠는가. 설령 예외 없이 금수(禽獸)처럼 살다가 인생이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가고, 한번 죽은 후에는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없으니, 앞서 스스로 다행스럽다고 한 이유가 도리어 두렵고 슬퍼할 만하다는 말이 어찌하여 크지 않겠는가.

상고 시대의 성현들이 이를 걱정하여 가르침의 조목을 세우고 윤리강상을 일러 주어 사람으로 하여금, 헛된 삶을 모면할 수 있도록 했으니 이는 불행 중 다행이다. 그런데 시대가 내려오면서 풍속이 무너지고 풍교(風敎)가 쇠퇴하고 엷어져서, 이익만을 추구하고 의리를 멸시하며 악(惡)을 따르고 본성을 가로 막아서 사람이 마침내 금수가 되어 버렸으니, 이것이 또한 다행 중 불행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궁벽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하늘이 부여한 본성(本性)을 전부 상실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인생이 크게 두려워할 만하다는 점을 알기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규약(規約)을 맺고,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따르며 서로 타이르고 경계하여 거의 인도(人道)에 가깝게 된다면, 또 어찌 불행 중에 다행스런 경우가 아닐 수 있겠는가. 이것이 우리가 사강회(社講會)의 규약을 만든 까닭인 것이다.

그 훈계하는 말은 주공과 공자가 남긴 뜻이고, 그 조례는 회암(悔庵), 퇴계(退溪), 율곡(栗谷)이 일찍이 절도에 맞게 정해 놓은 것이다. 만일 우리들이 힘써서 서로 닦고 오래 지속하여 성취가 있으면, 상등은 성인의 경지에 미칠 수 있고, 중등은 넉넉하게 현인이 될 수 있으며, 하등은 기뻐할 만한 사람이 됨을 잊지 않을 것이다. 누가 금지한다고 하지 않으며, 무슨 해가 된다고 힘쓰지 않겠는가.

그러나 혹은 어리석어 기뻐할 만한 사람이 되는데 어둡고 사나워서 기뻐할 만한 사람이 됨을 잊어버려, 감히 처음의 규약을 깨뜨리고 스스로 그 삶을 포기하여 개나 돼지 또는 효경(梟獍)이 되는 지경으로 돌아간다면, 마침내 크게 불행한 경우가 되고 말 것이니, 또다시 어찌하겠는가. 또 부귀와 빈천은 명(命)이 하늘에 달린 일이라 사람이 미리 알 수 없다. 만약 가난하고 천한데 또 나쁜 사람이 된다면, 그 불행이 이미 심하지 않은가. 기꺼이 나쁜 사람이 되면서 구차하게 부귀를 얻었더라도, 이런 자가 어찌 내가 말하는 사람이겠는가.

옛사람의 말에 "장차 선한 일을 할 적에는 부모에게 아름다운 명예를 드릴 수 있음을 생각하여 반드시 결행하라"라고 했다. 만일 우리들 각자가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을 생각하면서 한마음으로 깨우치려고 노력한다면, 이미 그 부모에게 아름다운 명예를 주고 또 이를 세워 모범을 드러내 자손들의 법이 되게 할 것이다. 어려서 이를 듣고 자라서 실천하여, 그 사람됨이 대대로 이어져 우리들로 하여금 사람의 아비가 되고 금수의 아비가 되지 않도록 한다면, 또한 어찌 다행스러움이 원대하지 않겠는가. 우리들이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3) 사약강령(社約綱領)
△五倫 :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六行 : 孝, 友 ,睦, 婣, 任, 恤
△六德 : 知, 仁, 聖, 義, 忠, 和
△六禮 : 禮, 樂, 射, 御, 書, 數

(4) 완의(完議)
이 계(契)는 사약강회(社約講會)로 말미암아 만들었으니, 계의 조약은 한결같이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따르고 영원토록 바꾸지 말아야 한다.

하나, 칙궁(飭躬, 몸가짐을 단정히 함)
남과 사이에 어긋난 말이나 패악스런 말을 하지 말고, 남의 결점을 들추지 말며, 헐뜯는 말로 음해하지 말고, 길거리에서 크게 소리 지르지 말라. 술을 마실 때 술주정하지 말고, 밖에 나가서는 두건을 벗지 말며, 웃옷은 띠를 풀지 말고, 기생과 풍악을 탐닉하지 말며, 장기와 바둑, 노름을 하지 말고, 관리를 공경히 대하며, 세금과 요역에 성실하게 응하라.

하나, 목족(睦族, 동족 간에 화목함)
동성(同姓) 친족은 하루라도 어른이면 모두 공경히 섬기고 감히 도리에 어긋날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촌수가 아저씨뻘이면 나이가 자신보다 어리더라도 자(字)를 벌러서는 안 된다.

하나, 경장(敬長, 어른을 공경함)
향당(鄕黨)의 연장자는 모두 공경히 섬기고, 10년 이상 연장자는 벗할 수 없으며, 20년 연장인 경우는 평소에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된다.

하나, 제가(齊家, 집안을 가지런히 함)
평소에 욕하거나 때리지 말고, 정처(正妻) 및 적첩(嫡妾)이 뒤바뀌지 않도록 하며, 형제간에 싸우지 말라. 남녀의 분별을 엄하게 하고, 과부의 집은 비록 가까운 친척이라도 늘상 왕래하지는 않아야 한다.

하나, 훈자질(訓子姪, 자질을 훈육함)
자질이 7, 8세가 되면 모두 학교에 들어가고, 밭을 갈고 땔나무하고, 신발 짜는 일을 배워야 한다. 만약에 재예(才藝)가 출중한 자라면 학업에 전념하도록 하고, 뒤처지는 자라면 오로지 농사에 전념하도록 한다. 그러나 모두 성명을 쓰고, 세계(世系) 정도는 알도록 해야 하며, 상놈 집에 가서 놀고 자게 해서는 안 된다.

하나, 경조(慶弔, 경축하고, 조문함)
초상과 장례를 치르거나 소상과 대상을 지낼 때는 모두 밤을 새우는데, 모든 일을 주관하여 담당하고 두루 주선해 준다. 초상 및 장례 때에 모두 부조를 해야 하고, 사위와 며느리를 맞아들일 때에도 모두 부조를 해야 한다. 큰 경사에는 별도의 부조를 한다. 같은 사약의 구성원이라면 동성 집안과 이성 집안을 따지지 말아야 한다. 상례와 장례를 치를 때에는 고기를 먹을 수 없으며, 술과 떡을 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다. 이를 어긴 자에게는 벌을 준다.

하나, 계규(契規, 계의 규약)
계원 사이에 소소한 다툼이 있을 경우에는 공론(公論)으로 처리하고 화해하여 다툼이 그치도록 힘써서 말썽이 생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계원 중에 만약 사리에 맞지 않게 탈퇴를 원하는 자가 있다면 다만 원조(元租) 5말(斗)을 지급한다. 공론으로 벌을 주는데 거부하고 받지 않을 경우에는 1년치를 덜어낸다.
봄, 가을 강회 때에 아무 이유 없이 참석하지 않는 자는 벌을 준다. 참석하지 못할 사유가 있는 자는 단자(單子)를 올리고 계원이 모두 알고 있는 사유라면 이 조례에 해당되지 않는다.

① 부조하는 방식(賻助式 )
△사위를 맞아들이는 경우와 며느리를 맞아들이는 경우 : 각각 쌀로 한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경우 : 사내종이나 계집종을 빌려준다.
△초상의 경우 : 죽이나 짚단, 장작을 부조한다.
△장사 지내는 경우 : 사내종을 빌려주거나 쌀을 부조한다.
△큰 경사가 있는 경우 : 수연(壽宴)이나 과거급제는 모두 별도로 부조한다.

② 벌을 주는 방식(付罰式)
△상벌(제가 이상을 범한 경우) : 6개월
△중벌(경조 이상을 범한 경우) : 4개월
△하벌(계규 중 여러 규정을 범한 경우) : 2개월
벌을 풀어 줄 때, 하벌의 경우는 술 1통과 안주 한 쟁반이고, 중벌의 경우에는 여기에 안주 한 쟁반을 추가한다.

③ 社會輪讀小學抄選
아래 아홉 장(章)을 사강회 때마다 규약을 읽은 후에 해석하면서 읽는다.
△증자가 '친척이 기뻐하지 않거든'에 대하여 말한 장(명윤 通論 제105장)
△유변(柳玼)이 자제들을 경계한 장(가언(嘉言) 광입교(廣立敎) 제9장)
△소강절(邵康節)이 자제들을 경계한 장(광입교 제11장)
△절효(節孝)가 배우는 자에게 훈계한 장(광입교 제12장)
△고령(古靈)이 백성들을 가르친 장(광입교 제14장)
△안씨가훈(顔氏家訓)의 인민이 있는 뒤에로 시작하는 장(廣明倫 제47장)
△유중도(柳仲途)가 치가(治家)에 대해 말한 장(광명륜 제48장)
△횡거(橫渠) 장재(張載)가 오늘날의 붕우에 대해 말한 장(광명륜 제52장)
△주인궤(朱仁軌)가 자제들을 훈계한 장(광경신(廣敬身) 제59장)

④ 퇴계향약(退溪鄕約) : 11월 강신회(講信會) 때에 전문을 해석하며 금지해야 할 조항을 크게 읽는다. 퇴계의 예안(禮安)향약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옛날 향대부의 직분은 덕행과 도예(道藝)로써 인도하고 따르지 않으면 형벌로 꾸짖어 살폈다. 선비된 자들은 반드시 집안에서 수양하여 고을에서 뛰어난 뒤에야 나라에 나아갈 수 있었다. 왜 이처럼 하였던가? 효제충신은 사람이 따라야 할 큰 근본이며 집안과 고을은 이를 실천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효제충신의 도가 막히어 행해지지 않으면 예의를 버리고 염치가 없어짐이 날로 심해지며 마침내 오랑캐와 짐승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는 실로 국가의 큰 근심이니 그 것을 살펴 바로잡는 책임은 유향소에 있게 되는 것이다. 전에 숭정대부를 지낸 지사 농암선생(이현보)이 이를 걱정하여 약조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했다. 이제부터 우리고을의 선비들이 성명(性命)의 이치를 근본으로 하고 국가의 법을 준수하며 집에서, 고을에서 각기 질서를 바로잡으면 이는 나라에 좋은 선비가 될 것이요 서로 출세하든지 궁하게 살든지 의지가 될 것이다. 약조를 만들어 서로 권할 필요도 없으며 벌을 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진실로 이를 알지 못하고 의(義)를 범하며 예의를 해침으로써 고을의 풍속을 무너뜨리는 자는 바로 하늘의 폐민(弊民)이니 벌을 주지 않으려 해도 어떻게 안줄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오늘날 부득이하게 향약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다.』
가정(嘉靖) 병진년(1556년)』
(퇴계선생문집 권42 서 향입약조서)

부모 말을 잘 듣지 않는 자
형제간에 서로 다투는 자,
집안의 도덕을 무너뜨리고 어지럽히는 자
사건이 관청의 일에 저촉되고 향풍에 관계되는 자
망령되게 위세를 부려 관을 소란하게 하며 사사로움을 꾀하는 자
향장(鄕長)을 능욕하는 자
수절하는 청상과부를 유혹, 협박하여 간음하는 자,
이상은 극벌(極罰) 상중하에 처한다.

친척 간에 화목하지 않는자
본처를 소박하는 자
이웃과 화목하지 않는 자
친구 간에 때리고 욕하는 자
염치없이 사풍(士風)을 무너뜨리는 자
강함을 믿고 아래 사람을 괴롭히고 재물을 빼앗으며 싸움을 거는 자
무뢰배들로 무리를 지어 못된 짓을 일삼는 자
공사(公私)로 모여 관의 일에 시비 거는 자
거짓말을 지어내어 남을 모함하는 자
어려움을 보고 힘이 있으면서도 도와주지 않는 자
관의 일을 맡아 공무를 빙자하여 폐단을 만드는 자
혼인, 상례, 제례에 이유 없이 때를 지나치는 자
집강을 무시하고 향령(鄕令)에 따르지 않는 자
향론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원망하는 자
집강으로서 자기마음대로 향(향안, 향회 등)에 끌어드리는 자
전직관리 송별잔치에 이유 없이 참가하지 않는 자
이상은 중벌(中罰) 상중하에 처한다.

공회에 늦게 참석하는 자
아무데나 앉아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
좌중에서 떠들며 다투는 자
자리를 비워두고 물러나 제볼 일을 보는 자
까닭 없이 먼저 일어나 나가는 자
이상은 하벌 상중하에 처한다.

원악향리(元惡鄕吏:나쁜 일을 꾸미는 향리)
아전으로서 민간에 폐단을 만드는 자
공물을 방납(使濯徵價物)하는 자
서민으로 사족을 능멸하는 자

⑤ 회규(會規)
이날 강원(講員)들은 일찍 식사를 하고 각자 강(講)해야 할 책자를 가지고 강당에 모여 뜰아래에 차례대로 선다. 약장(約長), 강장(講長), 부약장(副約長)이 먼저 자리에 나아가면 강원이 차례로 들어가 동서로 나누어선다. 강장 이하는 모두 일어나서 서로를 향하여 두 번 절한다. 모두 앉고 나면 부형을 모신 자들이 그 자리에서 두 번 절한다. 이들이 모두 앉고 나면 동자(童子)들이 남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서서 두 손을 모으는데, 얼마 있다가 앉으라고 명한다.

사정(司正)의 자리는 술상이 있는 북쪽에서 동쪽을 향하는 자리에 별도로 마련한다. 사정이 소리 높여 사약(社約)을 일고, 그다음 《소학》 <장초(章抄)>를 읽고, 다음에 부벌식을 읽는다. 그다음에 강원들의 책명을 점검하여 강장에 고하고 그 책자를 술상 남쪽에 있는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그다음에 강안(講案)을 가져다 통부(通否)를 하여, 통(通)을 맞은 자는 붉은색으로 권점(圈點)하고, 통을 맞지 못한 자는 검은색으로 권점한다. 다 마치고 나면 헌주(獻酒)를 청한다.

사여(社旅) 2인은 술상이 있는 곳의 동쪽에 나아가 술잔을 씻어 술을 따라 사정에게 건네준다. 사정이 술잔을 받아서 자리 앞에 두고 절하면 약장 이하가 모두 답배(答拜)한다. 사정이 술잔을 가져다 모두 마시고 나서 절하면 약장 이하가 또 답배한다. 사정이 스스로 술잔을 씻어 술을 따르면 사여가 받아서 약장에게 올린다. 약장이 술잔을 받아서 자리 앞에 두고 절하면 사정이 답배한다. 약장이 술잔을 가져다 모두 마시고 나서 절하면 사정이 또 답배한다.

사여 2인이 또 술잔을 씻어 술을 따라 동서로 나누어 올린다. 받아 마시는 자는 모두 앉아서 읍하고 사정은 의식에 맞게 답례로 읍한다. 부형을 모신 자는 모두 읍하지 않고 절한다. 동자 가운데 작헌례(酌獻禮)를 맡을만한 자에게 술을 올리게 하는데, 술잔을 받든 자가 수석을 차지한 자에게 술잔을 올리면, 수석을 차지한 자가 받아서 자리에 꿇고 절한다. 그러면 의식에 맞게 답배한다.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관례에 따라 절한다. 그다음 의식에 맞게 읍하고 마신다.

일헌(一獻)이 끝나면 사여 가운데 나이 어린 한 명이 술잔을 씻고 술을 따라 나이 많은 사람에게 올리고 절하면 답배한다. 각자 서로 의식에 맞게 술을 따르는 것이 끝나면 사여가 술잔을 씻어 술을 따르고 강장이 받아서 사정에게 준다. 사정이 절하면 강장이 의식에 맞게 답례한다. 끝나면 사려가 앞에서처럼 나누어 올리되 모두 절하거나 읍하지 않는다. 단 술잔은 삼합배(三合盃)를 사용한다. 안주는 술 한 잔에 한 젓가락을 넘지 않고 세 가지 맛을 넘지 않는다.

술 일헌이 끝나면 공인(工人)이 음악을 연주한다. 동자에게 명하여 차례대로 의식에 맞게 춤을 추도록 하는데 위로 약장까지 이른다. 한 짝이 춤을 출 때마다 음악은 삼성(三成) 에서 그친다. 어지럽게 춤을 추어서는 안 되고 기악(妓樂)을 써서도 안 된다. 오후 5시에서 7시까지의 사이인 유시(酉時)에 자리를 마칠 것을 고하면 악장 이하가 서로를 향하여 처음 의식처럼 두 번 절한다. 이날 밤에는 머물러 계속해서 노래하고 춤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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