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25 11:08
存齋先生行錄
선생의 諱는 伯珪요 字는 子華며 號는 存齋 또는 桂巷이다. 魏氏 本貫은 長興이니 始祖의 諱는 鏡이요 新羅에서 벼슬하니 官은 大阿飡이며 懷州君에 封해지니 懷州는 곧 長興의 옛이름이다. 中世에 諱 繼廷은 高麗朝에 太保文下侍中으로 諡號는 忠烈이며 睿宗廟에 配享되니 그로 因하여 代代로 官祿을 받는 집안이 되어서 十數世에 걸쳐 平章과 侍中이 있었다. 閤門判事 諱 种에 이르러서 李太祖가 革命(湯武革命應乎天而順乎人) 한때를 堂하여 侍中 金宗衍 등과 더불어 本朝(高麗)를 위하여 謀事를 하다가 發覺되어 棍杖刑을 받고 귀양을 가니 벼슬길이 끊어져 버렸다. 그리고 數世 뒤에야 비로소 科擧에 應하여 벼슬을 하였으나 별로 번성하지 못하고 무릇 八世이하로 文科 蔭仕 武科에 처음으로 벼슬한 사람과 進士에 合格한 사람이 겨우 三十餘人이었다. 高祖 諱 廷烈은 縣監이요 曾祖는 諱 東寔이며 祖父는 諱 世寶요 號는 三足堂이니 詩 筆 畵 세가지가 뛰어나서 世上을 울렸으나 不幸하게도 早世하였다. 父親의 諱는 文德이니 進士요 文章과 德行으로써 당시에 이름을 떨쳤고 號는 詠而齋 또 號는 春谷이며 母親은 宜人 平海吳氏니 嘉義大夫인 信男의 玄孫이니 信男은 丙子胡亂 때에 눈내리는 함정속에서 殊勳을 세운 事跡이 모두 山西翁 亂錄에 記錄되어 있으며 祖의 諱는 桂英이요 父親의 諱는 日三이며 夫人은 淑德懿範이 天性으로 醇厚하게 갖추어졌고 于歸함에 집안이 富裕해졌으며 先生이 임신되었을 때에 胎敎를 극히 嚴肅하고 愼重하게 하였다. 英祖丁未 一七二七年 五月十五日에 長興南쪽 桂春洞 집에서 태어났다. 분만한 날 밤 父親의 꿈에 白龍이 뜰아래 우물가운데로 내려온것을 보고 처음 이름과 字를 모두 龍이나 虬자를 너서 命名하였다. 先生이 出生時부터 體相이 峻秀하고 儼然하며 알고 깨달음이 沈敏하며 德性이 渾厚하였다. 四歲가 되었을때 어린 아우가 툇마루 난간을 타고 내려가다가 발이 땅에 닿지않아 오르지도 내리지도 못하게 되었는데 힘으로는 도저히 救할길이 없게 되자 先生은 즉시 집뭇을 끌기와서 사다리를 놔 주었다. 하루는 어느 손님이 와서 옛날 學者는 終日토록 꿇고 앉아 있었다는 말을 들려주자 그때가 마침 여름날이라 바지 저고리를 전부 벗고 곧바로 벌고벗은 몸으로 端正하게 꿇고 앉기를 익혀 드디어 습관이 되었으며 어느날 집종이 땔감나무를 도적질 한것을 보고 어른들이 보실까 두려워서 급히 달려가 中門을 닫아 가려주었으며 또 이웃사람이 소(牛)를 가운데 행랑간에다가 매어 두었는데 작은댁 祖父님 春潭公이 밤에 그곳을 지나다 소가 가슴을 대질러서 몹시 아프셨는데 즉시 春潭公에게 告하기를 약물치료나 잘하시고 소가 대질렀단 말씀을 하지 마세요. 저 사람은 가난해서 외양간이 없어 우리집 빈간을 빌린것 뿐이니 만약에 이말은 들은다면 얼마나 무료하겠어요 하였다. 四.五歲 때로 부터 무릇 지방에 埋鬼(농악)나 배우들의 잡된 희극이나 잔치하는데 妓生들의 風樂같은 것은 눈으로만 지나칠뿐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다. 어느날 이웃사람이 한집에 살면서 싸우고 울부짖는 것을 보고 혼자 탄식하면서 不善한 자는 사람이 아니고 不孝한 자는 사람의 子息이 아니다(不善非人不孝非人子)라고 아홉글자를 종이에 써서 차고 다녔으며 또 팔위에다 썼다. 조그마한 紙帖을 만들어 孔 顔 曾 孟 五字를 列書하여 글을 읽을 때마다 冊 오른편에 펴놓고 家語에서 孔子像을 본떠서 벽에다 붙여놓고 항상 절을 하며 그 아래에 꿇고 앉아 글을 읽는데 때로 시원한 바람이 불었으며 勝戰했다는 事實을 듣고 木牌 두개를 만들어서 하나는 關王이라 쓰고 하나는 國安이라 써서 家廟의 東편 담에다 감추어 놓고 수시로 조용히 祈禱하니 이는 그 仁術이 德性에 根源함을 이루웠기 때문이다. 어느날 그림자라 房 아랫목 壁위에 아롱거리니 마치 거울을 달아 놓은 現狀과 같았다. 어른이 그 그림자를 가르치면서 저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봐도 여러 아이들은 모두 모르는데 先生은 네살난 아이로 가장 끝자리에 앉아있다가 문득 방석을 가지고 軒堂을 지나서 뜰 가운데 오목한 곳이 물이 고여있는 곳을 가려서 그 빛을 없애고 아무말없이 자리로 돌아왔다. 그때에 비가 잠깐 개이고 소 발자국에 고인 물이 햇빛에 反射되어 건너편 壁에 비쳤기 때문이다. 그밖에 局度와 器才와 識見이 가는 곳마다 다른 사람보다 월등한 것은 다 말할 수 없다. 그러나 天性이 더욱 沈凝하고 渾默하여 小兒의 機智가 있어 영리한 태도는 없었으며 그 文藝의 뛰어나고 빼어남은 겨우 돌이 지났음에도 말을 理解하고 가르쳐준 것은 다 기억하여 세살도 못되어서 六甲이나 千字文 諺文 九九法 掌訣選擇(손가락을 꼽작해서 吉凶을 選擇하는 法)하는 것같은 類는 能熟하게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마음속으로 理解함이 입으로 외우는 것보다 나으니 그것은 그 만들어내는 理致를 뚤어지게 알기 때문이다. 다섯살 때에 小詩 秋齋獨宿韻(가을날 서재에서 홀로 자면서 지은 韻)을 보고 말하기를 이 詩는 마땅히 그 글귀를 고쳐야 한다 하며
「 산달이 촛불과 같이 밝은데 창안에 사람이 홀로 자고 있네. 밤중에 새가 둥지에서 놀래니 서리찬 바람이 때로 대나무를 움직이네(山月皎如燭牕間人獨宿夜半鳥驚捿霜風時動竹)이 고쳐 쓴것이 좋겠다 」라고 하였다. 여섯살때에 小學을 읽고 이로부터 옛글 보기를 좋아하는 고집스러운 버릇이 되고 文理가 막히는 데가 없었으며 더욱이 周易總目 보기를 좋아하여 先後天說과 掛의 變易하는 妙理에 통했었다. 일곱살 때에 별을 보고 읊은 詩에 말하되
「 각자 이름과 자리가 定해졌는데 須女星 기운은 形容없이 걸렸네. 三光(日月星晨)의 하나에 참여되어 能히 밤빛으로 하여금 밝게 하누나 」各定名與位 須氣掛無形 參爲三光一 能使夜色明) 또 등불을 읊으기를 「 물건에 비치면 아무런 속임도 없으니 속 마음이 본래 스스로 밝도다. 홀로 房가운데 낮(晝)을 만들었으나 창밖에도 三更이 지났구려」(照物無欺暗 丹心本自明 獨作房中晝 窓外三更)라 하였고 天冠山에서 놀면서 지은 시는「天冠寺를 출발하여 空中에 사다리를 놓고 봄 하늘에 오른다. 엎드려 人間의 世上을 보니 먼지와 티끌이 三萬리로구나 」發跡天冠寺 梯空上春昊 俯視人間世 塵埃三萬里)라 하였다. 아홉살 때에 座右銘을 지으니 「옛날의 仁은 愛이더니 지금의 仁은 巧言令色(말을 괴이하게 하고 얼굴 빛을 좋게 꾸미는 것)이요 옛날의 義는 宜라 했는데 지금의 義는 고집이라 하며 옛날의 禮는 敬이라 하더니 지금의 禮는 飾僞요 옛날의 知는 참으로 안다는 知인데 지금의 知는 詐譎이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남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기 스스로를 돌아 보고 남의 말을 들은 것보다 차라리 자기의 말을 새겨보라 하였다. 열살 때에는 깨닫고 解理함이 融通하고 暢達하며 識見이 해박하고 活性化되어 모든 것이 다 내게 갖추어졌음을 깊이 알고 한가지 재주로만 이름을 이룰려고 하지않고 무릇 天文地理와 卜筮 律曆 醫學 相法 道學 佛道 兵書等 여러 書籍을 두루 보지 않아도 原理를 가닥잡아서 推理하면 自然 口訣이 되고 심지어 工匠人의 모든 技藝와 技衡(天體를 觀測한 機械) 수레, 가마같은 種類도 모두 손수 만들며 눈으로 훤히 보는 것같이 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참 선비의 急務가 아닌 것인 줄 알고 專念하지 아니하였다. 더욱이 禮說과 周易을 즐겨보고 朱子 以下로 부터 東方諸賢의 禮說 및 朱易總目 啓蒙等 같은 類를 항상 따라서 專工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根源을 찾는 기쁨이 있고 中庸圖를 그려서 安宅으로 집을 만들어 高明(日月)을 이고 博厚(大地)를 밟으며 周圍로는 담장을 두르고 草木, 禽獸, 夷狄, 等은 다 담장안에 陳列하며 앞에는 謹德으로써 入德門을 지었다. 이해에 王荊公이 孟嘗君을 論하는 글 뒤에 쓰기를 宋神宗이 王荊公에게 政權을 委任할 때 一士를 얻어 自身을 도와 堯舜君民이 되게 하였으니 齊王과 같은지라 王荊公이 果然 어떠하였는가. 福建子(연인을 놀리는 말인데 여기서는 呂惠卿을 指目함)도 또한 鷄狗의 愛主하는 誠意가 있었는가. 荊公을 僧侶의 初祖達馬다. 이 鷄狗出門에 士不至者라 할 것이다. 진실로 그 말은 거짓으로 辯明한 것이라 하였고 또 李氏陰報說 뒤에 쓰기를 張杜가 後孫이 있었다는 것은 이치가 變함이니 그 刑罰을 쓸때에 비록 혹 元來 惡한 者가 있다 할지라도 亦是 만에 하나일 것인데 실로 天下사람이 다 같이 원망한 바이니 能히 張杜를 除去한 사람이 있다면 바야흐로 가히 그 閭門을 높고 커다랗게 할 것이니 어찌 張杜란 者가 惡한 사람을 除去했다고 하여 善報를 받아 먹을 수 있겠는가. 李氏의 말이 심히 鄙陋(비루)하다 하였고 또 柳氏가 海賈를 招請한 글에 쓰기를 二王의 門은 세상의 바다다. 그 崩濤逆浪(붕도역랑)이 弱水와 暘谷 뿐만이 아닌데 子厚는 險하고 기울어진 배와 아첨하며 웃는 돛대로써 거의 二十년 동안을 出沒하면서 돌아올줄 모르고 結局 자기가 도적이 되었으니 海賈를 봄이 어떠하였으리오. 일를 지었을때 어찌 그가 뉘우쳤으리랴 라고 하였다. 十一歲때 조그마한 粉版을 만들어 차고 다니며 거기다가 어느날 무슨 말은 失言하고 어느날 무슨일을 잘못했다고 쓰며 各各 그 밑에다가 註를 쓰기를 昏迷했다 妄動했다 輕率했다라 하고 항상 스스로 말이 많은 것을 경계하며 多言 두 글字를 써서 四方 마루 房 담장 행廊 울타리 변소 等 여러 곳에 써부쳤는데 그 自治에 독실함이 實로 옛 사람의 風度가 있었다. 十七세에 冠禮를 올리고 이미 巨儒 의 指稱이 있어 製作한 글이 뭇사람들의 입에 膾炙(오르 내림)되여 長川精舍에서 글을 읽고 있는데 遠近 사람들이 모여들어 從遊하며 討論하는데 學規는 栗谷先生의 隱屛規를 그대로 따랐으며 뜻은 伊尹의 뜻을 따르고 學問은 顔淵의 學問을 배운다는 한 글귀를 항상 자리 오른편에 써 부치고 이로 부터 마을에서 酒會가 있을때마다 이를 대략 모방하여 鄕飮禮를 實行하고 社中에 規約으로 삼으니 온 마을이 醇化하여 지금까지 美風良俗이 되었다. 여러번 鄕中에 推薦이 되었는데 맨먼저 獻莊에 이르되 재주가 높고 行實이 아름다우며 학문이 깊어서 啓蒙한다 하였다. 二十五세에 屛溪尹先生에게 禮物로 拜謁하고 이로부터 往來하면서 무릇 經과 禮를 問答하고 理氣를 論辨할때면 師門에서 얻기 어려운 선비로 깊이 있게 여러번 獎勵를 하고 同門에서 識見이 豊富하니 다 畏友로 認定하였다. 그때에 先生은 年少하면서도 醇粹한 資質과 經濟的인 재주로써 自己몸을 다스리는데는 聖人보다 한 等級이 내려가면 헛 세상 사는 것이라 하고 뜻을 세워 인군과 백성을 堯舜과 같이 만들것을 本分으로 삼으며 珠玉이 바다에 감춰지고 칼이 가난한 집안에 묻혀있는 恨을 禁치 못하였다. 이미 尹屛溪先生을 拜謁하면서 더욱 道를 듣고 敦篤하게 믿는 效驗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 酬唱한 詩什과 往復한 書札에 間間히 애달프게 사람을 感動시키는 면이 많아서 이제 한 冊字를 만들었으며 그 先師를 追慕하는 祭文에 옛날 韓愈氏 는 말하기를 顔子는 聖人을 얻어서 依持할 바가 있어 걱정하지 않고 즐거이 함이 마땅하더니 이제 伯珪는 依持할곳을 읺었으니 아! 슬프도다 하였는데 이 글이 當時의 誄文으로는 최고가 되었다 한다. 그 靈莚을 떠나면서 지은 詩에 이르기를 「 슬프다 길게 휘파람 불며 玉溪를 나오니 北風이 불어오는 空山에 눈비 내리네. 이제 또한 거랭이(荷蕢) 맨 사람 적으니 마음이야 있고 없고 아는 것이 두렵지 않네 」(帳然長肅出玉溪 北風空山雨雪時 如今亦少荷蕢者 有心無心不怕知) 이글은 대개 晦庵이 홀로 瑤琴을 안고 玉溪를 지나가는 韻으로 尤庵 遂庵 屛溪가 서로 傳하면서 次韻한 것이니 이제 가히 先生의 秋月寒水를 보는 느낌이다. 이미 靈筵을 하직하고 돌아와서 곧바로 손수 帖子 하나를 만들어서 屛溪先生의 前後事 書札을 배접하고 제일 첫장에 先生님의 家宅과 田庄을 模寫해서 항상 책상위에 모셔놓고 스스로 그 追慕의 뜻을 부쳤다. 孝道와 友愛가 篤實함은 天性을 타고 났음이니 어머님이 살아계실때 부터 終身토록 한번도 疾病으로 걱정을 끼치지 아니하였으며 젊어서부터 本性을 다하고 實踐을 다하여 自己 몸을 이루고 物件을 이룬 然後에야 바야흐로 人子가 된다는 뜻으로 主本을 삼으며 항상 스스로 그 不足함을 恨嘆하고 오직 三樂中에 하나라도 있는 것을 多幸으로 여기였다. 해마다 四季節이면 五兄弟 家族 五十餘人이 中堂에 모여서 父母膝下에 內外別로 나누어 年齒대로 序立하여 서로가 獻壽하는데 旅酬(여러사람이 모여서 차례대로 술잔을 서로 권하는 禮)의 禮와 같이 하고 婢僕(女婢男僕)을 뜰가운데 세워놓고 심부름한 賤한 사람에게도 미치게 하며 誡辭(訓戒의 말)를 풀어서 읽게 하기를 柳仲塗가 朔望에 訓戒하듯 하여 父母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四弟에게 한번도 성낸 빛을 보이지 않았다. 집에 있으면 喜悅이 있는 것 같아 잠깐이라도 집을 떠날수 없었으며 그 나머지를 옮겨 宗族間에 和睦하고 後學들을 敎訓하고 이웃끼리 團合할것을 切實하게 任務로 삼으며 가난해서 일만하고 배울 겨를이 없는 사람을 哀惜하게 생각하고 하루 두시면 들가운데서 모아 쉴수 있는 講會所를 設置하여 그곳에서 때로는 몸소 호미로 김도 매고 勞苦를 위로하기도 하며 쉬는 틈을 타서 才能에 따라서 小學 通鑑 史略을 날마다 講讀하고 그 以上은 혹 韻을 옲으기도 하며 簡牘(편지)쓰기를 익혀서 無識을 免하게 하고 겨울이면 鄕約과 講論을 法대로 하며 隱然히 三代의 政治로써 한 社에서 試驗을 해서 實效를 거두었다. 그러나 모두가 至誠으로 實踐하고 躬行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感化되고 사람의 머리속에 깊이 들어가는 效果를 거두었다. 辛丑 一九八一年에 母親喪을 當하니 享年 八十歲요 甲辰 一九八四年에 父親喪을 當하니 享年 八十一歲였다. 居喪과 葬祭를 다 哀敬의 禮를 極盡히 하고 마음에 不足함이 없게 하였다. 辛丑年 이후로는 四方 한치정도의 비단주머니를 만들어 出産吐의 탯줄을 담아서 옷깃에 차고 잠시도 몸에서 떠나지 않게 하니 대개 父母가 길러주신 恩惠를 혹시라도 생존시 보다 더 게을러질까 두려워서 잠깐 사이라도 잊지않고 終身토록 思慕하고저 한것이다. 禮記를 읽는 여가에 思成錄 두篇을 지었는데 대개 兩親의 마음과 貌形과 性格과 行實을 글로 써서 模寫하되 오직 중요한 것만 따서 百世에 思慕하는 뜻을 보이고 子孫들이 善行하는 遺訓이 되도록 祈願한것인데 이런일은 비록 적은 일이지만 가히 至誠을 볼수 있다. 그러나 平生에 몸에다 「 孝 」一字를 더하여 크게 두려워 하였으니 그 마음으로써 德을 삼되 舜임금에게 一分도 못미쳐서 子로서 不足할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을 읽고 著述을 할때 나를 위한 工夫와 理致를 推究하는 것으로 根本을 삼고 科擧 工夫는 餘暇 일로 생각하며 더우기 時體에 浮薄한 文詞는 싫어하여 일찌기 得失에 개의치 아니하였다. 大小 鄕試에 十餘차례나 合格을 하고 策으로 壯元을 한것이 네번이나 되고 三十九歲에 비로소 進士가 되었지만 時格으로서 요행으로 된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文章이 가깝게는 보통 花草와 작은 冊과 隻句로 부터 簡牘 序 記와 金石文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 道德性命의 正直性에 根本이 된것이라 가히 天地에 質定하고 造化에 參與가 되어서 百世에 聖人을 기다림이니 어찌 자질구레한 作者들이 章句사이에다 造作한것과 같으랴. 또한 그 늘을 만들때에 처음에 생각을 해가지고 한것이 아니라 입으로 불러쓰면 본래 부터 能熟하게 외우는것 같다. 그러나 읽어보면 百千의 日月과 萬億의 星辰이 텅빈 넓은 들판을 손으로 휘졌고 물이 흐르며 경하여 비 바람이 내리치면서 뇌성벽력이 잠깐동안 퉁탕거리며 번쩍번쩍한 사이라도 星數나 時刻이 毫釐도 오차가 없으니 대개 文의 聖者다. 그러므로 先生이 항상 말하기를 내가 이미 世上에 쓰지 못한다고 하나 이와 같이 내가 千年뒤에 살게 된것은 오직 내 글이 있기 때문이니 만약에 金櫃와 玉盒에다 封緘해서 太山의 바위 굴속에 감춰놓고 뒤에 淸漢(푸른 하늘 은하수)과 昆灰(昆明池에서 나온 재)와 魯壁(孔子의 古宅) 에서 나온것과 같이 된다면 이것이 내 所願이다 라고 하였다. 多幸히도 하느님이 斯文을 버리지 않고 이제 쌓아 가지고 玉階 金門의 위로 돌아가서 바로 酉陽山의 玉과 같이 감췄으니 先生에게는 또 무슨 有感이 있으리요. 甲寅年 겨울에 徐公 榮輔가 御使로서 湖南에 와서 先生의 文行과 實績을 探知하고 돌아가서 朝廷에 아뢰니 나라에서 처음에 副司勇을 除授하고 두번차에 繕工奉事를 除授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職業에 나아가지 아니하니 이에 王이 즉시 때마쳐서 起送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道伯을 추궁하고 邑의 守令을 論罪하므로 先生은 不得已 丙辰年 三月에 入闕하여 王을 뵈오니 文稿 若干卷과 前날에 著述한 萬言疏를 閱覽하고 크게 稱讚하며 玉果縣監으로 特除하여 驛馬를 주어서 赴任시켰다. (때에 先生이 老病으로 힘쓰기가 어려움에 還鄕할 것을 애걸하였으나 王이 말하되 願에 의하여 還鄕한다면 가고 오면서 보고 들은 바가 무엇인가 하면서 銓曹에 命하여 守令으로 除授하라함에 銓曹가 처음에는 機張縣으로 하려 하므로 왕이 말하기를 늙은 사람이 어떻게 먼곳으로 가겠느냐고 하여 다시 泰仁으로 하려 하므로 거기도 조금 멀다하고 玉果縣監으로 特拜하여 驛馬를 주고 빨리 赴任하라 하므로 先生이 不得已 赴任하였다). 이때에 先生은 연세가 이미 七旬이라 임직할때는 이미 神氣가 쇠약해진 後요, 해임할때는 또 낭설이 그치지 않을 때를 當하였으니 어찌 애석하다 않으리요? 그러나 政事를 한지 五百餘日동안에 花粟紙를 革罷하고 官用朔紙를 半으로 絶減하여 僧侶의 弊端을 들어주며 朔望魚(초하루 보름에 바치는 고기)와 日次魚(날마다 바치는 고기)의 바침을 除去하여 漁村의 곤혹을 解消시키고 軍丁을 넉넉하게 하여 六月달이면 生銀魚 진상으로 오랫동안 痼弊가 되었던 것을 代金으로 納付하여 편안케하고 鐵匠과 鍮工과 錫冶와 木手가 恒時 官에 가서 머물러 살았던것을 없애며 금三품과 徭役(울력) 五分의 四를 덜고 人吏 各廳 契房의 革罷라든지 四色錢 八百의 蕩減은 軍丁을 넉넉히 하여 私慾을 채우지 못하게 한것이다. 그밖에 東園머리에 있는 妓生과 奴婢들과 市井의 租稅등 자질구레한 것을 除弊한것은 모두가 다 私慾을 버리고 公益을 위함이요 自身은 곤궁하고 民間은 살찌우게 한것이다. 그리고 將校의 鍊武와 兵器의 修繕과 官廳의 修理와 鄕約의 設行과 勸學의 規約과 糶糴法 따위는 다 깨끗이 잘되었고 또 衙供은 官廚의 하나인데 가난한 선비의 子弟가 집에 往來할때 감히 말을 타고 다니지 못하게 한 것등은 아무리 옛날 淸白吏라 할지라도 이보다는 더하지 못했을 것이다. 但, 도움도 求하지 않고 名譽도 求하지 아니하니 미움도 받게되고 汗陋하다 하여 꺼려하고 꾸짖는 소리가 일어나니 심사 評價에서 下之下가 될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王으로 부터 道臣을 叱責하여 말하되 魏伯珪가 치적평가에서 最下位에 있는 것을 보니 마땅히 襃賞을 해야지 貶을 함은 不當하니 이것이 부드러운 땅에다 揷木하는 理致가 아닌가 하고 드디어 道臣을 추궁하여 下로 평가된 것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連해서 二階級을 올려서 掌苑別提로 부터 慶基殿令에 任命하고 여러번 재촉해서 赴任하라 하니 이것이 栗谷詩에 이른바 四方에 먹구름이 컴컴한데 中天에는 해가 分明하다(四野陰雲昏似墨 中天惟有日分明)는 말과 같다. 그러나 이때에 先生은 이미 나아갈 생각이 없어서 健康이 좋지 않다는 연유로 취임을 하지않고 家居한지 一年半만에 正祖戊午 一七九八年 一月 二十五日에 正寢에서 終하니 享年이 七十二歲였다. 아! 슬프다. 先生은 어러서 부터 마음을 세우되 至親은 한 몸이요 同姓은 一室이요 한 나라는 한 집이라고 하였다. 일찌기 한 聯句를 읊으기를 經綸과 器局은 비록 呂尙이 아니지만 堯舜의 抱負는 어찌 伊尹만 못하랴. 어두운데서도 마음은 속이지 아니하니 하늘에도 가히 質正할만하고 學問은 전적으로 옛것을 배우니 나는 疑心이 없다(經綸器局雖非呂 堯舜襟期豈讓伊 暗不欺心天可質 學全師古我無疑)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도 可히 그 뜻을 볼 수 있다. 겨우 弱冠에 바로 經濟에 뜻이 있어서 全國의 山川脉絡과 郡邑境界와 物産과 土質의 肥沃하고 瘠薄한것과 行政의 찰되고 못된 것과 不正腐敗된 行政의 痼疾과 民生의 利害와 三洋의 津泊 遠近과 小路길이 平坦하고 險難한것과 風勢가 順하고 거슬린 것을 모두 널리 硏究하고 잠잠하게 講究하여 政絃新譜 三十二條를 編成하여 各各 그 弊端을 말하고 따라서 弊端을 救濟하는 方法을 記述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大略의 방법으로 하여금 一目瞭然하게 만들어서 손바닥을 보는듯 훤하였다. 才操가 한가지에만 국한하지 않고 여러가지를 두루 通하여 드디어 性癖이 되어서 天下에는 못할일이 없고 알지못할 理致가 없었다. 무릇 天下 古今의 書籍에 실린 陰陽理氣를 鬼神같이 能通한것과 人事의 情態가 잘 다스려지고 混亂이 어떻게 해서 區分된다는 것과 나는 새며 달리는 짐승이며 動植物들이 어떻게 해서 無窮토록 化生하는가 하는것을 모두 다 窮理를 해서 充分하게 알아 다른날에 쓰여지기를 기다렸는데 중년 이후로 세상이 마음에 맞지않고 나라가 才操와 맞지않아서 自量컨데 한량없는 寶藏과 滿腹한 珠玉이 장차 窮山僻海와 한모퉁이서 草木같이 시들어짐을 免치 못할것이니 自然히 밤중에 金과 銀의 氣가 紙墨사이에 빛그림자로 發作됨을 禁치못할 것이니 寰瀛誌 原圖書 原事物 原風水와 觀物說 格物說과 首尾吟 四書箚義 然語等 諸篇 千餘萬言이 즉 이것이다. 또 經傳을 或은 全篇 或은 全章을 손수 쓰고 가장 十聖人의 神髓가 될만한 것은 淨寫하여 보배로 所藏하고 매양 酒氣가 얼근하고 마음이 불편할때는 朗詠하고 諷誦하며 古琴이라 이름하고 스스로 峨洋曲을 千年뒤에 演奏하니 그 뜻이 또한 슬프도다. 平生에 閒吟筆한 것이 글字 한字라도 文士의 空言이 되고 사람에게 無益한 것이 없었으며 더우기 사람의 숨은 美行을 闡揚하는데 性癖이 있어 무릇 遠近의 고을을 莫論하고 古今의 偉蹟과 美行이 世上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반드시 傳記를 만들어서 永遠히 傳하게 하는데 貴賤의 區分이 없고 太陽의 癖은 더욱 古今에 切實하여 그 讀史箚記와 明史評을 보면 直筆이 서릿발치며 벼락을 내리때려서 간특한 두뇌와 창자를 가진자들로 하여금 붓끝에 분쇄하고 난도질을 하여 宛然히 뜨거운 피가 글가운데서 끓어오르는 것을 볼수 있으니 그 禮設隨錄 한篇 즉 變禮疑文이 옛적에는 없었는데 이제는 남겨두어 後世에 까지 전할것과 俗襲이 잘못된 것을 다 禮의 뜻에 推極하여 義로 일어서서 制裁를 하고 世上에 쓰이게 하니 대저 著論한 것이 다 痛快하고 明暢하여 豪快하게 列擧하여 天地의 精神과 聖賢의 心腑를 寫出한 듯하여 異端을 배척하는데는 그 소굴을 쪼개서 뼈를 볼겨냐듯하고 世道를 論할때는 그 皮膚를 갉아 씻어서 聖代한 制度를 百篇 가운데다 若干 갖추었으니 대개 六, 七歲때에 聖人의 資稟을 배워가지고 五, 六十年동안 經歷을 쌓아서 世故를 두루 겪어서 배부르게 담뿍 쌓인 餘分을 發揮한것이다. 그러나 當日 나라에서 부를때에 王으로 부터 內閣에 命하여 그 文稿를 빠짐없이 종이 조각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가져다가 궤에 넣고 封하여 자물쇠를 채우고 日時를 刻해 밤낮없이 달려와서 드리라 하니 이와 같이 嚴하고 또 急하게 하였으므로 이제 남은것은 단지 이리 저리 흩어져 있는 것을 추후로 주워 모으는 일이 또한 많지않으니 어찌 아니 그 밝고 어두운 것이 때가 있어 天時를 기다리는 것인줄을 알리요. 아! 先生으로 하여금 當世에 뜻을 얻어 그 품은 재주를 쓸수 있게 되었더라면 그야말로 어떠한 事業을 해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萬言疏를 朝廷에 올렸을때에 아래로는 太學濟生과 四學群儒들이 다 혐의를 이끌어 스스로 허물하고 奉身하고 물러나와 三日동안을 食堂을 거두고 課製를 罷하다가 王으로부터 극히 慰勞의 말을 한뒤에야 安定이 되었고 그 후 縣에 있을때에 隣近 고을에 사는 한 선비가 州司를 찾아가서 말하되 魏아무개는 行政을 잘한다고 인군에 까지 다 잘알려져 있는데 어찌하여 그 심사 成績이 下로 되었는가요 하니까 州司가 선반위에 얹어놓은 편지 여러축을 가르키면서 하는말이 이것이 다 魏아무개를 罷免시키라는 서울에서 온 편지인데 내가 어찌 하겠는가 하는 것을 보면 그 上疏글이 여러 사람의 노여움을 범하고 그때 숨겨온 事實을 건드렸던 것을 가히 알수 있다. 이것으로 보면 선생이 어떻게 해서 조정에 설것이며 또 조정에 서지못하게 된것이 先生으로서는 多幸인줄을 어떻게 알리요. 先生의 생김이 머리가 크고 머리위가 편편하며 이마가 눈섭위로 넓고 그 아래 이마는 모가나고 광대뻬는 威儀가 있어 보이고 눈섭이 성글고 얼굴이 峻秀하며 수염이 가늘고 아름다우며 성글 성글하고 얼굴이 검붉으며 살짝 얼금 얼금 하는데 어렸을 때에 상을 잘보는 사람이 울려놓더니 이 아이는 鳳의 눈이고 龍의 소리라 將來 百世의 스승이 될것이다 하였다. 몸키가 八尺이고 몸집이 크고 肥大하여 甚히 威儀가 있어 보였으나 사람을 대하면 和氣가 있고 사람과 더불어 말할때에는 각기 그 사람의 마땅한 것을 따라서 격려해주고 실업으로 돌아가게 하며 공장인 技術系統 사람들에게도 亦是 그와같이 하였다. 무릇 居家하면서 처마끝 층계를 오르내릴때면 발을 左右 先後로 드는것이 常度가 있고 終日 앉아 있어도 게으른 氣色이 없고 기대고 비기는 일이 없으니 그 行動이 이와같이 恭敬하는 工夫가 익숙한 것이다. 婦人은 金海金氏 兵曹判書 鶴城君襄武公 完의 五世孫이요 海城君 汝水의 玄孫이요 曾祖는 世樞니 府使요 祖父는 命龍이니 郡守요 父親은 始聲이니 通德郞이다. 二男一女를 두니 男은 道立과 道及인데 道立은 光山金沃의 딸에게 娶妻하니 贈兵曹判書 國鉉의 曾孫이다. 딸은 昌寧曺光根의 妻가 道立이 一男四女를 두니 男은 榮疑요 女는 咸豊李宅圭 錦城羅重賓 咸陽朴賢榮의 妻가 되고 餘他는 아직 어리다. 道及은 昌寧曺命棟의 딸에게 娶妻하여 二男二女를 두니 長男 榮幹은 仁川李宗柏의 딸에게 娶妻하고 딸은 咸陽朴載龜에게 出嫁하니 餘他는 아직 어리다. 아! 先生의 품고 있는 知識을 事業에 써보지 못하였으니 그 말할만한 것은 德行뿐이다. 二十歲 以前은 先生이 수록한 年譜에 依하여 썼고 그 外는 내가 愚昧하여 잘보지 못하고 말로 잘 表現을 못한뿐만 아니라 또 털끝만치라도 과찬을 해서 先生의 平素에 스스로를 속임이 없는 본심을 저버릴까 두렵기에 그 先生의 行蹟 萬分의 一도 形容을 못하였다. 그러나 後에 君子가 깃털 하나를 보고 鳳全體를 상상할수 있게 된다면 이것이 多幸이겠다.
壬戌 一八0二年 正月下旬
家弟 生員 伯純은 謹狀하다.
번호 | 제목 | 조회 수 |
---|---|---|
공지 | 장흥위씨 2600년 그 뿌리를 찾아서(영상) | 1191 |
공지 | 성씨표기 통일화 추진 결과 보고서(2015년 11월 21일 작성) | 976 |
58 | 존재 선생의 교육을 통한 향촌개선 연구 (3-3) | 216 |
57 | 존재 선생의 교육을 통한 향촌개선 연구 (3-2) | 251 |
56 | 존재 선생의 교육을 통한 향촌개선 연구(3-1) / 위정철 | 212 |
55 | 中國 魏氏 遺跡의 巡禮 코스(案) / 圓山 위정철 | 172 |
54 | ◇中國 宗親의 懷州大祭 參禮 / 圓山 위정철 | 118 |
» | 存齋先生行錄 / 書溪公 諱 伯純 1802年 | 159 |
52 | 장흥위씨 성자(姓字)표기 통일화 | 845 |
51 | 장흥동학농민혁명의 인물과 사건, 그리고 장소(3-3) / 溫山 위의환 | 935 |
50 | 장흥동학농민혁명의 인물과 사건, 그리고 장소(3-2) / 溫山 위의환 | 743 |
49 | 장흥동학농민혁명의 인물과 사건, 그리고 장소(3-1) / 溫山 위의환 | 1443 |
48 | 存齋 魏伯珪, 記念館 建立 請願書(6-6) 圓山 위정철 | 392 |
47 | 存齋 魏伯珪, 記念館 建立 請願書(6-5) 圓山 위정철 | 265 |
46 | 存齋 魏伯珪, 記念館 建立 請願書(6-4) 圓山 위정철 | 260 |
45 | 存齋 魏伯珪, 記念館 建立 請願書(6-3) 圓山 위정철 | 301 |
44 | 存齋 魏伯珪, 記念館 建立 請願書(6-2) 圓山 위정철 | 310 |
43 | 存齋 魏伯珪, 記念館 建立 請願書(6-1) 圓山 위정철 | 252 |
42 | 장흥위씨 인구수 -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 1670 |
41 | <판서공 관련> 선조실록 선조 27년. ◆요동 도지휘사사가 왜정에 관하여 보낸 자문 | 390 |
40 | 조선왕조실록 수록된 판서공 (휘 위덕화) 충의관련. | 233 |
39 | 艮庵公 祭文 / 圓山 위정철 | 17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