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29 20:28
지난날에는 각 종·문중을 포함한 집안에서는 가을 추수를 마치고 가장 큰일이 선조에 대한 묘전 제향이었다. 산업화에 따른 후손들의 도시중심의 거주와 이농에 따른 농촌사회의 고령화 등으로 요즘은 제향을 행하지 않는 사례가 많고, 여러 제향을 1회로 행하는 합제와 산속 묘소까지 이동 불편에 따라 편리한 장소를 택해 제향을 행하는 등 제향문화가 획기적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 이와 같은 제향 문화에서는 선조의 묘소를 알지 못하는 일이 발생되고 후손간 유대가 결여될 수밖에 없다. 이러함은 장흥위문 내에서도 흔히 볼 수 있고 특히 장흥위문 후손 중, 50%이상이 분포하는 관산파 내 오덕, 21세 판사공(德弘 1537~?), 청계공(德毅 1540~1613), 운암공(德寬 1547~1628), 호조판서공(德和 1551~1598), 안항공(德厚 1556~1615) 등 오덕(五德)각 종중에서는 제향시 교류 참여 사례가 드물면서 형제 선조의 묘소를 답사하지 않아 위치를 모르고 있었다. 최근 고향을 찾은 백강(성록)의 제안으로 본향 장천재 제향 前날인 11월21일 오전 근환(판사), 홍환·성태(청계),두환·종삼·성철(운암), 성록(판서), 수환·백(안항) 등 9명의 후손은 부산면 호계리에 위치한 운암공 묘소를 시작하여 관산읍 옥당리 당동 뒤 판사공 묘소, 관산읍 농안리 안항공 묘소, 관산읍 죽교리의 청계공 묘소 등 4곳의 묘소를 답사하였다. 회진면 대리에 위치한 성균진사공(20세 鯤, 1515~1583), 호조판서공(德和)의 묘소는 매년 陰 10월 1일 묘전에서 제향 행사를 가져 후손들에게는 익숙하여 금번 묘소 답사에서는 생략하였다. 답사한 순서대로 선조 묘소 등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운암공(21세 德寬, 1547~1628) 묘소는 장흥군 부산면 호계리 산 226번지 월만마을 뒤 역기등(驛基嶝)에 위치한다. 配 숙부인 영광金氏와 쌍조다.
원래의 묘표(墓表)는 6대손 도안(1760~1815)이 근지(謹識)하였다. 오랜 세월이 흘러 글자의 식별이 어려워 묘표를 묘소 내에 묻고 光復后 癸亥(1983년 10월) 원문대로 12대손 경환(1946년생), 삼환(1950년생)이 근수(謹竪)하고 중환(1929~1998)이 근서(謹書)하였다.
묘소 아래에는 소옹공(22세 廷灝, 1582~1647)과 配 유인 청주金氏의 묘소가 위치한다.(配 순창趙氏는 기동마을 우측 산에 위치함.)
丁丑(1937년) 2월에 족9대손 계룡(1870~1948)이 근찬(謹撰)하다. 도유사 9대손 계붕(1883~1961)이 근수(謹竪)하고, 별유사 계창(이명 계화 1886~1948)이 근서(謹書)하였다.
※ 1999년 편찬한 기묘대동보 지장록 679p "笑翁公 諱 廷灝 墓表" 내용이 있다.
7대손 춘조(1802~1862)가 근지(謹誌)하였음이 확인된다.
묘소 아래에는 체헌공(23세 東晩, 1620~1681)과 配 유인 광산金氏 묘소가 위치한다.
丁丑(1937년) 2월에 족8대손 계룡(1870~1948)이 근술(謹述)하다. 유사 8대손 계붕(1883~ 1961)이 근수(謹竪)하고, 종인(從人) 계창(이명 啓和 1886~1948)이 근서(謹書)하였다.
아래 묘소 우측 한쪽에는 인근에 묘소가 위치한 승사랑공(24세 세경, 1639~1681)과 配 단인(端人) 장흥任氏의 단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 운암공 묘전에서 소옹공, 체헌공, 승사랑공 등 4位 제향을 1993년까지 매년 陰 10월 4일 제향 행사를 봉행하였다. 이후 1994년 부산면 기동마을 입구에 저존각(箸存閣)을 창건하고 운암공(德寬) 이하 선조 234柱, 540位을 봉안하고 매년 4월 첫째 일요일에 합제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묘소가 위치한 호계리 산 226번지, 산 210번지 일대 임야는 94,550평으로 운암종중 소유이다. 주변에는 운암종중 산하 괴헌(23세 東堤, 1623~?)종중의 소유 2정(6,000평 가량)과 매죽당(24세 世霖, 1654~1681)종중의 소유 4정(12,000평 가량) 등 임야 10정 가량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인근에는 운암종중 소유 제위 답(논) 10두락(2,500평)과 산하 괴헌종중 소유 3,000여평이 위치하고 있다.
괴헌재(槐軒齋)는 부산면 호계리 월만마을 뒤 괴헌종중 소유 임야 한쪽, 인근 운암공 묘소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1912년 기동마을 앞 현 경호정(鏡湖亭)이 위치한 장소에 행은공(31세 계훈, 1866~1942)이 경호정 이라고 지은 건물을 1964년 철거하고 그 재료로 옮겨 지은 것이다. 그해 운암종중에서는 부산면 자미마을 뒤 수리봉 병풍바위 아래에 위치한 회은공(32세 원량, 1882~ 1945)의 별장을 매입하여 그 자재로 현 경호정을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운암공은 관산읍 당동 오덕생가에서 태어나 20세 연령 때 영광金氏와 혼인하면서 당동마을에서 방촌으로 가는 길목인 판사터(현 천관산 축구장)로 분가하였음이 傳해진다. 1593년 전란중에 처가 영광김씨 집성촌인 부산면 내안리 인근 기동마을에 입촌하여 400년 넘게 후손이 세거하면서 세계적 골퍼 위성미와 박사 18명이 배출되는 등 성촌하였다.
자문 : 12대손 연당(두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