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집에 나타난 실학적 묘지문화에 대한 고찰
-3대 극폐, 5대 방책을 중심으로-
碧泉 위윤기(35世, 청장년회 총무)
1. 들어가는 말
국역 존재집 제19권 294~297쪽 묘지(冢地)편을 정독하면 조선 후기 묘지문화의 심각성을 금방 느낄 수 있다. 존재 公은 사람이 살아가는 문화 중에서 묘지 때문에 천륜과 인륜을 어기고 삼강오륜을 저버리기까지 타락했다고 꼬집는다. 오죽 했으면 그 폐단이 삼극(三極)에 치달았다고 한탄하셨을까! 당시 묘지문화의 폐단과 개혁성이 돋보이는 실학적 견해를 살펴보자.
2, 3극으로 치달은 묘지문화의 폐단
극(極)이란 사전적 의미로 ‘어떤 정도가 더할 수 없을 만큼 막다른 지경’이다. 조선후기 분묘를 둘러싸고 갈 데까지 간 사태를 3극(三極)의 폐단으로 표현하셨다. 존재公께서 언급한 3대 극폐는 풍수설, 산송, 투장을 일컫는다.
1) 국법조차 무기력하게 만든 풍수설
풍수설(風水說)이란 인간의 길흉화복은 땅의 형태와 방향에서 결정된다는 환경이론으로 다신 사상을 빌려와 산을 신(神)과 용(龍)으로 믿어 산에서 내려오는 기(氣)의 흐름을 연구해 좋은 터를 알아내고자 하는 사상이다. 신라 말 승려 도선에 의해 중국에서 도입되어 고려건국과 그 맥을 같이 하여 발전해 왔다. 특히 조선 초 한양 도읍지 선택과 후기에 이르러선 소위 명당으로 불리는 좋은 터와 조상숭배 사상이 결합하여 사대부가는 물론이요, 일반 백성에게까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도교 사상인 풍수설과 유교 사상의 조상숭배 사상의 결합은 마치 종교와 같은 강한 흡인력을 지녔다.
한 가지 실제 예를 들어 보면 윤선도의 증손인 조선 시대 화가 윤두서(尹斗緖)의 분묘는 강진에 처음 조성되었다가 가평, 김포, 파주, 강진, 해남, 영암, 해남 등 일곱 번 이장(移葬)되었다. 바로 묘가 좋지 않다는 지관(地官)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좋은 터에 선조를 매장해야 후손이 복을 받는다는 기복신앙은 조상의 분묘에 대해 병적인 집착으로 나타났다. 풍수설은 ‘조상숭배+풍수 사상+매장풍습=묘지문화’가 정착되도록 중간 매개체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풍수설의 만연으로 조선 초 경국대전이 정한 보수법(步數法)은 점점 수세에 몰리게 되고 숙종 2년에 이르러 풍수설에 근거한 용호법(龍虎法)으로 바뀌게 된다. 즉 풍수설이 국법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2) 산송(묫자리 소송), 극한 묘지쟁탈과 금단의 종착지
‘묘지의 쟁탈과 금단(禁斷)이 이처럼 그치지 않는다면’하고 존재 公께서는 한탄하셨다. 당시 분묘로 인해 묘지 쟁탈전이 자주 발생했다. 소위 명문가의 명당으로 소문난 터에서는 더욱 기성을 부렸다. 유력가문에서 초상이 나면 이름난 지관을 동원 좋은 묫자리를 구하려고 노력했고 명당을 찾게 되면 이장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이장이 완료되면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지 못하게 심지어 산지기를 배치하여 출입을 막는 금단(禁斷)과 여러 관계를 이용해 자리를 빼앗으려는 묘지 쟁탈전이 극에 달했다. 소송이 발생하면 고을의 수령은 현장답사=>산도 작성=>주맥의 흐름 파악=>분묘 위치와 거리산출=>판결이라는 절차로 진행했다. 그러나 불복하고 상급심을 요구하거나 차일피일 판결의 시행을 미루는 등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일화로 청송심씨와 파평윤씨 두 가문에서 발생한 윤관장군 분묘분쟁의 역사는 수백 년간 이어진 길고 지루한 산송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러한 조선 시대 묘지와 관련된 소송을 산송(山訟)이라 부른다. 즉, 산의 사용을 막으려는 방어자인 금장자와 묘를 조성하려는 공격자인 투장자의 극한 충돌로 상해나 폭행, 살해가 발생하는 등 극단적이었다. 조상의 분묘와 관련된 문제라 심각성이 도를 넘었다. 산송이 조선 후기 들어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게 된 배경에는 조선 초 경국대전에서 정한 분묘의 영역은 숙종 때에 이르러 보수규정을 넘어 청룡과 백호까지 확장되었다. 분묘에 대한 권리를 보장한 용호수호(龍虎守護)를 법으로 정해 분묘에 대한 권리구역이 이전보다 더욱 확대되고 분묘 소유자는 실제보다 더 넓게 분묘의 소유권이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분묘 인근 산의 상당 부분을 독점하여 타인의 출입을 막아 배타적인 권리를 주장하는 등 좁은 국토 내에서 집약적으로 살아가는 터전에서 여러 폐단을 낳았다.
이와 더불어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유교의 장례문화 정착과 성씨별 문중결속은 묘지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결국 분묘가 서로 인접하거나 다른 가문과의 이해관계가 얽힌 분묘를 사이에 두고 극단적으로 충돌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3) 투장, 산의 사유화를 위한 극한 집착
분묘가 차지하는 산의 규모 확대와 다른 사람의 분묘조성을 막는 금단으로 타인의 분묘 내에 불법적으로 투장하는 일이 많게 되었다. 사대부가에서는 산송과 같은 소송이 많았지만 이에 비해 일반 백성들은 산이 없거나 풍수사상을 기준으로 해 좋은 자리나 타인의 묘지에 몰래 묘지를 만들었다. 이를 투장(偸葬)이라 하는데 타인이 발견하지 못하게 평평하게 만든 평장(平葬), 힘을 이용한 늑장(勒葬), 유장(誘葬), 암장(暗葬)이나 밀장(密葬)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금단과 투장은 풍수설과 교묘히 작용하여 서로 충돌하는 양상은 개인을 넘어 가문과 가문 간의 대결로 걷잡을 수가 없이 팽팽한 대립이 이어졌다. 오늘날 분묘기지권과 소유권의 충돌도 바로 여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조선후기 소송의 절반 이상이 바로 산송이었다.
본래 조선 시대 때 산(山)은 사유재산이 아닌 공지(公地)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들어 묘지조성, 즉 점유를 통해 국가재산을 사유재산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불법화가 일반화되어 심지어 상속, 매매, 증여가 이루어지기까지 했다. 이 모두가 분묘를 이용하여 사유지라 주장하는 악의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소위 법이란 선의와 악의로 구별되는데 고의적이거나 반복성을 띠면 악의로 판별된다. 이것으로 판단한다면 분묘를 이용한 산의 사유화는 악의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당시 소위 명문 사대부 가문에서조차 앞장서서 산의 사유화란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새로운 법을 만드는 극한 혼란의 단계에 접은 든 것이었다.
3. 묘지문화에 나타난 존재 公의 실학사상
존재 公은 극에 이른 삼대 폐단을 개혁하려고 실학자적 입장에서 풍수설의 허구성, 토지의 집약적 사용, 법의 즉시성과 실효성 제고, 사대부의 자각, 매장문화의 퇴보라는 다섯 가지 의견을 제시했다. 조선 후기 때 제시한 방책은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 평가해보면 역시 존재 公의 천재성이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1) 환경개선론에 입각한 풍수설의 허구성
존재 公께서는 ‘어리석은 지관(地官)의 해로운 풍수설에 미혹’이라고 풍수 사상을 작심하고 공격했다. 존재 公은 풍수설을 한마디로 어리석고, 해로우며 지위고하를 막론 모든 사람을 미혹시키는 이단 풍조로 몰아세웠다. 사대부는 문론 일반백성까지 동조하는 유행병처럼, 광풍처럼 사회를 지배했다.
풍수설에서 꺼리는 압맥과 결인이 관련된 압장을 옹호하고 청룡과 백호 묘혈 아래에 분묘를 조성하되 1, 2품은 내청룡 내백호까지 점진적으로 그 영역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압장(壓葬)은 분묘의 위치 때문에 풍수론 자가 가장 꺼리는 장례법이다. 기존 분묘의 윗부분에 새로운 묘지가 조성되는 것으로 네 개의 산 중 후면에 위치한 주산(主山)에서 내려오는 기(氣)의 흐름을 막아 나쁜 형태의 매장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존재 公은 풍수설에서 말하는 흉지를 묘지로 조성해도 아무런 해가 없다고 주장하여 묘지의 풍수적 기본원리를 비판하고 있다. 오히려 압장한 선조의 후손이 재상에 이르는 등 압장에 대한 존재 公의 선호도는 매우 높다.
일정 공간 내에서 다수의 묘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압장을 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고민이기도 하다. 주산의 정상을 기준으로 하여 중간에 어떠한 묘지가 있으면 기를 막는다는 당시 풍수설을 정면 반박하여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광범위한 분묘영역을 최소화해 분쟁을 없애자는 의도였다. 이것은 숙종이 정한 용호법을 비판하고 경국대전의 보수법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원시유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묘지의 참뜻을 재정립하기 위해 유교 경전을 근거로 개혁적 견해로 보인다.
또한 존재 公께서는 묘지를 설치조성풍수설의 안쪽의 백호나 청룡 주변의 자연을 살려 훼손하지 말고 단지 봉분인 묘혈, 극히 일부분만의 자연을 훼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리(天理)를 들어 자연보호에 앞장 선 존재 公의 뜻이 오늘날에도 신선해 보인다. 오늘날의 자연보호운동이다.
풍수 사상에 대한 존재 公의 인식은 어떻든 현실을 지배하는 풍수설과 내세관을 무시하는 태도는 원시유교를 숭상한 실학자였기 때문이다. 분묘에 예속을 강요하는 풍수설을 어리석고, 해로우며 미혹의 사상으로 멸시했다. 자연에 순응하되 숙명적이지 말고 이로 인해 극에 이른 폐해가 있다면 이것은 과감하게 척결하고 자연을 슬기롭게 이용하자는 견해이기도 하다. 환경론의 입장에서 인간이 환경을 지배하느냐? 지배당하느냐? 두 관점으로 본다면 전자의 부류에 속한다. 즉, 존재 公은 환경개선론자요, 탈(脫)환경론자인 셈이다.
2) 유교 경전에 나타난 ‘가족 공동 묘’ 조성으로 토지의 집약적 사용을 장려
존재 公의 묘지문화에 나타난 두 번째 실학적 개혁 사상은 가족묘, 즉 공동묘의 장려이다. 단순한 가족묘의 개념을 넘어서 종중 묘과 문중 묘의 개념으로 확대된다. 작게는 4~5대 150년, 크게는 8~9대 270년에 이르는 거대한 가족묘를 활성화하고 터가 모자랄 경우에 한 해 예외적으로 다른 묘 터를 찾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여러 사람을 한 묘역에 묻었음을 알 수 있다. 한 묘역에 남은 터가 없게 된 뒤에야 다시 다른 묘역을 차지한다면, 장사 지낼 땅이 절로 넉넉해져서 다투어 송사하는 일이 점점 그칠 것이다.'라고 했다. 묘지의 분산(分散)을 막고 오로지 집약된 토지사용만이 3극의 피해를 막는 방책으로 제시했다.
가족장이나 공동 묘의 논증은 강태공, 계자, 선산, 정자의 도판, 호리와 주례의 도랑 순으로 옛 중국의 경전에 근거해 설명하고 있다. 첫째 강태공(姜太公)과 계자(季子)의 일화를 들어 타국이나 고향을 떠나 죽더라도 반드시 가족 공동 묘가 있는 곳에다 장사를 지내는 옛 선현들의 풍습을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목숨이 다하면 선산에 의지하고 싶다. 〔畢命依松秋〕’라는 소원이 있었고, 정자(程子)는 좌우로 무덤을 배치한 도판을 그렸으니 송추(松秋〕는 바로 선대 조상이 묻혀 있는 선산을 의미하며 정자의 도판을 통해 가족 공동 묘의 전통성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호리(蒿里), 주례(周禮)에 “도랑으로 구별한다.”라는 글을 통해 일정 규모의 땅에 여러 사람의 시신을 안장하는 가족묘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 유교의 묘지에 대한 올바른 견해라고 확신했다. 결국 존재 公은 토지의 집약적인 사용을 위해 가족 공동 가 고대 선현들이 주장하고 실천한 역사적으로 증명된 전통적인 묘지조성법이라 여겼다.
3) 국가 묘 관리 정책의 즉시성과 실효성
백성들이 묘지를 조성할 때는 반드시 국가의 관리와 통제를 받아야 했다. 벼슬아치가 죽으면 종3품 관리인 도정(都正)이 묘의 현장을 감독하고 하급관리인 면임(面任)을 상가에 보내어 제반 절차를 시행하도록 했다. 이때 면임은 호적을 정리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백성의 묘 조성은 먼저 면임(面任)에 보고하여 호적대장을 정리하고 그보다 못한 어린이가 죽더라도 반드시 향촌사회의 면과 리를 대표하는 풍헌(風憲)을 보내어 묘지 설치를 감독하고 예하 사람으로 향약조직의 임원인 약정(約正)을 보내서 장례를 진행토록 했다.
투장하는 백성들은 천륜과 인륜을 저버린 것이라고 존재 公은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여 비판하는데 특히 아내 시신을 투장하는 사례를 열거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투장을 발견했을 때는 즉시 이장하고 투장자는 외곽 군대가 소재한 변방으로 평생 유배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다. 존재 公의 투장자에 대한 엄격하고도 빠른 조치요구는 당시 시대 상황이 매우 엄중했음을 바로 보여주는 근거이다.
이에 대해 '풍헌과 약정에게 알려 장부에 모두 기록한다. 그리하여 다투어 소송하는 일이 있을 때, 이를 증빙 자료로 삼아 위반 사항이 있는 면임에게 벌을 준다. 만일 면임의 장부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면 모두 투장(偸葬)으로 논죄하여, 거리가 멀고 가까움을 막론하고 관아에서 날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파서 옮긴다. 만일 부모나 아내를 투장한 자라면 인정과 하늘의 뜻을 모두 잃었으니, 그와 더불어 같은 나라에서 함께 살 수 없으므로, 한결같이 모두 먼 변방의 군대에 넣어 일생을 마치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국가의 실정법과 존재 公의 주장을 비교하면 두 가지의 이견(異見)이 노출된다. 국법은 소송을 통해 투장자를 가려 유배형이 처하지만 존재 公은 관아의 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묘는 무조건 투장으로 보고 소송 없이 즉시 파서 옮기고 평생 유배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소송을 통해 시간이 한없이 길어지는 것을 막고 호적을 통해 발생하는 관리의 부패를 경계한 것이다. 즉, 즉시성과 실효성을 강조했다. 앞의 즉시성은 호적대장만으로 투장자를 색출하여 빠른 법 집행을, 뒤의 실효성은 실질적인 호적관리만이 투장을 막을 수 있는 근거 있는 관리감독이라 주장했다. 이는 국가의 묘지관리 정책의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성에 중점을 두었다고 보인다.
4) 충(忠)과 효(孝)의 충돌 - 자각(自覺)한 사대부의 몫.
掘則不孝 파내면 불효요
不掘則不忠 파내지 않으면 불충이다.
與其掘而忠於國 파내서 나라에 충성하느니
寧不掘而孝於家 차라리 파내지 않아 집안에 효를 행하고
使他日朝家 훗날 조정에서
求忠臣於孝子之門 효자 가문에 충신을 구하게 하라
윗글은 윤영배(尹英培/1787년~?)가 강원도에서 현감으로 재직할 때 묫자리 소송을 담당했는데 이때 소송자였던 민씨가문(閔氏家門)에서 제출한 당시 소지(所志)라 불렸던 오늘날 소장의 일부 내용이다.
이것은 분묘와 관련되는 한 충(忠)과 효(孝)가 충돌하면 나라보다 가문을 우선시하여 국가권력이 무용지물이 되는 명백한 증거다.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대부들이 국가보다 가문을 중시하는 노골화된 세태이다. 이러한 산송의 패자는 유배형에 처하게 되었는데 실제 유배형을 택한 경우가 비일비재했다고 하니 묘지문화의 심각성이 생각보다 대단했다. 삼강오륜의 각각 첫 번째 항목인 임금과 신하 간에는 의리가 있어야 하는데 묘지로 말미암아 깨지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자조이기도 하다. 묘지문제는 유교의 근본정신을 흔들고 파괴하는 괴물로 둔갑했다.
'묘지의 폐단이 가장 커서 인륜과 천륜이 모두 없어지고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이 모두 무너졌으니, 이를 바로잡을 방책은 사대부로서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스스로 깨닫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빈말이나 법의 이치로 바로잡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어찌하겠는가.'라고 존재 公은 한탄하고 있다.
묘지의 글 말미의 나오는 ‘빈말과 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법이란 상반되는 보수법과 용호법을 일컫는데 두 법은 재판정에서 혼용되어 혼란을 자초한 부분이 많았다. 조선 후기 묘지연구학자의 글에 따르면 원고와 피고는 서로 유리하게 두 법을 해석해 이용한 소장이 많이 발견되곤 한다고 한다. 법의 무용론을 넘어 법이 오히려 묘지문화가 극단에 이르도록 부추긴 셈이다. 또한 빈말의 진정한 의미는 법의 판결도 비웃고 왕의 중재도 따르지 않는 당시 세태를 꼬집는 단어이다. 유학자요, 실학자인 존재 公의 안타까운 마음의 표현이다. 묘지에 관한 한 법의 이중적인 잣대나 느슨한 약속(빈말)보다 사대부들의 각성을 촉구해서 이를 바로 잡고자 하는 의지요, 고백이다. 철저한 법도, 어설픈 합의도 결국은 사람에게 달려있고 그중에서도 사대부들의 의식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자기가 속한 가족이나 문중보다 국가라는 큰 틀 안에서 묘지문제를 해결하려는 거시적 방향의 방책이다.
5) 역설적으로 매장의 퇴보와 화장(火葬)의 대중화를 예견
화장(火葬)이란 시신을 태워 뼈를 모아 가루로 만든 다음 봉안당에 안치하거나 물이나 땅에 뿌리고 나무 밑에 묻는 수목장 등 현대식 장례 방법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유교의 영향으로 매장이 대세였으나 21세기 현대에 이르러 좁은 국토 내 매장지의 감소, 유교 관념 약화와 국가의 대대적인 홍보로 1994년 통계로는 화장이 21%였으나 2018년은 90%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수치로만 보자면 마치 화장이 대세였던 불교를 국가의 종교로 삼은 고려 시대로 돌아간 느낌이다.
유학자인 존재 公은 어떻게 화장의 대중화를 예견하셨을까? 이는 역설적으로 '묘지의 쟁탈과 금단(禁斷)이 이처럼 그치지 않는다면, 훗날 죽는 사람은 수장(水葬)하거나 화장(火葬)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을 것이니'라고 했다.
조선 시대는 본래 유교 문화의 확산과 정착으로 사대부부터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 매장풍습이 대세였다. 존재 公의 걱정은 바로 매장의 폐단, 즉 묘지의 확대와 더불어 소위 길지라는 명당이 삼천리 방방곡곡을 모두 선점한다면 어느 시점에는 기존 분묘가 포화상태에 이르러 새로운 매당지가 없어질 미래를 내다본 것이다. 조선 후기처럼 묘지의 세 가지 극폐가 지속한다면 다가올 미래는 화장을 할 수밖에 뾰족한 수가 없다는 예견이다. 이는 불교의 장례형태를 꼬집은 것으로 보이지만 화장이 매장을 압도하는 존재 公 사후 220년이 지난 오늘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하겠다. 역설적이지만 존재 公의 선견지명이 돋보이는 방책이다. 결국 유학자인 존재 公의 입장에서 화장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필요악과 같은 방책이었다.
5. 나가는 말
무덤에 대한 한자를 몇 개를 조사해보니 다양하다.
묘(廟) : 조상이나 여러 훌륭한 성인의 신주·영정 등을 모신 사당.
묘(墓) : 분과 달리 나무를 심지 않고 흙을 쌓지 않은 무덤.
분(墳) : 흙을 쌓아 장식한 무덤.
분묘(墳墓) : 시신을 땅에 묻고 흙을 쌓거나 비석을 세워 표시를 한 곳,
총(塚) : 옛 무덤 중 규모가 크지만,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천마총).
총(冢) : 총(塚)과 동일어.
능(陵) : 임금이나 왕후의 무덤.
원(園) : 왕세자, 왕세자빈, 왕의 부모의 무덤.
분산(墳山) : 묘를 조성한 산.
사산(四山) 주산(主山), 안산(案山), 청용, 백호(뒤, 앞, 좌, 우)
산송(山訟) : 조선 시대 묘지와 관련된 소송
경국대전의 보수규정 : 墳墓定限 禁耕牧(宗親則一品四面各限一百步 二品九十步 三品八十步 四品七十步 五品六十步 六品五十步 文武官則遞減一十步 七品以下及生員․進士․有蔭子弟 同六品
宗親의 경우, 被葬者가 1品일 때에는 묘를 중심으로 사방 100步 안에서 경작과 목축을 금지하였으며 그 이하는 이를 기준으로 품계마다 10보씩 차등을 두어 2품은 90보, 3품은 80보, 4품은 70보, 5품은 60보, 6품은 50보 안에서 경작과 목축을 금하도록 하였다. 문무관의 경우에는 종친의 그것보다 10보씩 감하도록 하였으며 7품 이하와 生員, 進士 및 有蔭子弟는 6품의 그것과 동일하였다.
속대전의 용호규정 : 雖無步數之人墓山內龍虎內養山處則勿許他人入葬自龍虎以外則雖或養山勿許任意廣占
비록 無步數之人이라도 분묘의 龍虎內 養山處에는 타인의 입장을 허용하지 말도록 하되 용호의 바깥은 養山이라고 할지라도 임의로 광점하지 못하도록 한다.
‘살았을 때 누울 자리가 없는 것도 불행하지만 죽어 누울 자리 없는 것 또한 서럽다’고 한 어르신의 말이 기억난다. 위 무덤의 분류만큼이나 우리들의 분묘에 대한 생각도 복잡하고 다양하다. 3극에 이르기까지 분묘 때문에 인륜과 천륜을 어기고 삼강오륜까지 짓밟는 극에 치달아 그냥 빈말이나 이중적인 법 적용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존재 公은 잠잠히 고백한다. 존재 公의 글을 통해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깊은 뜻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다. 어떻든 존재 公의 3극폐에 대한 개혁적이요, 실학적 5대 방책이 오늘도 변함없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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