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밀시新密市 노성老城 서가西街 위씨사당魏氏祠堂 탐방기
(大魏 太시조 필만(畢萬)공)
魏氏先祖魏畢萬漢玉雕像頗偉岸
위씨 선조 위필만 한옥상 조상은 웅장하였다.
我們在拍攝姓氏祠堂的過程中,所見到祭祀先祖的內容,都是安放在家祠最醒目位置的牌匾。
우리는 성씨 사당의 촬영 과정 중에 있는데 제사하는 선조의 내용은 모두 사당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위치에 명판이 놓여 있었다.
祭祀的匾額供奉于大殿的最醒目處,讓每一位前來拜祭先祖的後裔,在最近的距離之內接受先祖的遺風。
그 명판은 사당의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여있어서, 모든 선조의 후손들이 경배하기 위해서 그리고 선조의 유풍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접하기 위해서 온다.
但是,在新密市老城的西街村魏氏祠堂內,卻是另外的一種風格,供奉在大殿的正中央位置的並不是魏氏祖先的牌位,而是得姓始祖魏畢萬的漢白玉雕像。
그러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신밀시 서가에 있는 사당은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사당의 중심 위치에 조상의 위패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득성시조 위필만의 한백옥(하얀 대리석) 조상이 있다.
魏畢萬,原為畢姓,是畢公高的裔孫,是魏姓的始祖,仕晉為將。
위필만은 본래 필성畢姓으로 필공고畢公高의 후손으로 위성魏姓의 시조로 진나라晉에 임하여 장수가 되었다.
晉獻公十六年(公元前 661 年),獻公建立二軍,自將上軍,命太子申生將下軍,趙夙禦戌,萬為車右,伐霍(今山西霍縣西南),狄(今山西河津東南)、魏(今山西芮縣東北),大獲全勝,班師回朝論功行賞時,鑒于畢萬建功顯赫,獻公不僅把畢萬封為魏大夫,世為晉卿,還把魏國所轄三地封給畢萬。
진헌공晉獻公 16년 (기원전 661년), 헌공은 2군을 창설하고 스스로 상군上軍을 이끌고, 태자 신생申生에게 하군下軍을, 조숙趙夙은 좌익을, 필만은 우익을 맡게 하여 곽霍(지금의 산서성 곽현霍縣 서남), 적狄(지금의 서하진西河津 동남), 위魏(지금의 산서성 예성현芮縣 동북)를 정벌하였는데, 크게 승리하여 조정으로 회군하여 논공행상할 때에 필만이 세운 혁혁한 공로에 비추어 헌공은 위나라 대부大夫로 봉하고 세칭 진경晉卿이 되었고, 위나라가 관할하는 3곳을 필만에게 주었다.
于是畢萬遂以國為姓,改為魏畢萬,從此,後世子孫便以 魏為 姓。
그래서 필만은 나라 이름을 성姓으로 하여 위필만으로 고치고 이 때 부터 후세 자손들도 위魏를 성으로 하였다.
而後魏氏日隆,成為晉國“六卿”之一 , 當時,晉國的神算子卜偃就預言:“畢萬的後代一定會昌盛。萬,是滿數;魏,是大名(古時魏寫作“巍”,高大的意思);以這裏作為始封地,上天已經啟示預兆了。天子主天下,稱兆民;諸侯主一國,稱萬民。現在把這個叫“魏”的地方封他,他名字裏又有“萬”這個滿數,所以一定會得到民眾的。”神算子卜偃的預言得到證實,以後的魏畢萬的子孫,以魏為姓,有了重大的發展。
이후 위씨는 나날이 융성하여 진나라晉國의 육경六卿 중 일인이 되었으며 당시 진국의 신산자神算子 복언卜偃이 예언하여 필만의 후대는 반드시 크게 융성할 것이다. 만萬은 가득찬 수이고 위魏는 큼은 말하는 것이다.(옛날에는 魏는 “巍”라고 썼는데 높고 크다는 뜻이다) ;
훈공으로 봉지에서 시작하였으니 하늘은 이미 징조를 보이셨다. 천자는 천하를 주장하니 조민兆民이라 말하고, 제후는 한 나라를 주장하니 만민萬民이라 부른다. 지금 위라는 지방의 봉지는 그의 이름에 또 “萬”이라는 가득 찬 수가 있으니 반드시 만백성을 얻을 것이다. 신산자 복언의 예언은 마침내 실증되어서 이후 위필만의 자손은 魏로 성을 삼고 중대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魏氏宗親的負責人魏留成來到打開了祠堂的大門。
위씨 종친회 관계자 위유성魏留成씨가 나와서 사당의 대문을 열어주었다.
我們走進匾額為“魏氏家寢”的祠堂,大殿上方的“十思堂”引起造訪人莫大興趣。
우리는 “위씨가침魏氏家寢”라는 편액이 있는 사당으로 가서 사당의 윗부분의 “십사당十思堂”이 방문한 사람들에게 큰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這是此處魏氏家族的堂號,它告誡魏氏後裔遇事要多動腦筋。
이것은 이곳 위씨가족의 당호堂號이며 위씨 후예에게 경계하여 일러 일을 만났을 때 많이 심사숙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從字裏行間可以看出魏氏先祖對後代的要求嚴格。
행간의 뜻은 위씨 선조가 후대에 대하여 엄격함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졌다.
魏留成打開了魏氏宗祠的大殿的門鎖。
위유성魏留成씨는 위씨종사魏氏宗祠의 대전大殿의 고리를 열었다.
一張紅布籠罩著大殿正方的一座物體。
한 장의 붉은 천이 대전방의 큰 물체 위에 걸려 있었다.
毫無疑問,這應該是魏氏先祖的塑像。
틀림없이 이것은 위씨선조의 조상이었다.
在攝影鏡頭的拍攝之下,魏氏宗親緩緩地拉開紅色的布幔,一座漢白玉的雕像進入眾人的眼簾。
카메라의 조리개 렌즈를 조절하고 있을 때 위씨종친은 천천히 붉은 천을 잡아당기자 한백옥의 조상이 사람들의 눈으로 들어왔다.
這座漢白玉的雕像,足有五米高,佔據大殿的重要的位置。
이 한백옥 좌상은 족히 5미터 높이는 되어 보였고, 대전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魏留成告訴我們這是他們的得姓始祖魏畢萬的雕像。
위유성씨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그들의 득성시조 위필만의 조상이다 라고 말했다.
我們到場人也感受到魏氏得姓始祖的威嚴和莊重。
우리들은 함께한 사람들이 위씨 득성시조의 위엄과 장엄함을 느꼈다.
漢白玉的魏畢萬塑像。
한백옥의 위필만 조상.
春秋時代的服飾,冠帶亦是那個時代的風採。
춘추시대의 복식, 관대 역시 그 시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魏畢萬先祖手持笏版,端坐大殿之內,沉穩剛毅的神態,晉國卿大夫的風范,仍舊停留在魏畢萬的面部。
위필만선조의 손에는 홀판笏版을 쥐고 있고, 대전의 안쪽에 단정히 앉아 있었고, 조용하면서 강직한 기상이 진국晉國 경대부卿大夫의 풍모가 여전히 위필만의 얼굴에 남아 있었다.
歷史倣佛定格。
역사가 멈춘 것처럼 보였다.
讓我們這些後代之人,也感悟到魏畢萬叱吒風雲,金馬鐵戈的拼搏場景。
우리와 또한 후대사람에게 위필만의 위세당당함과 금마철과金馬鐵戈가 싸우는 장면을 인식하게 할 것이다.
正是魏畢萬的睿智,魏畢萬的勇猛,才成就了晉國的強大。
바로 위필만의 지혜, 위필만의 용맹, 진국晉國의 강대함을 이룩함이다.
而魏畢萬本人也被晉獻公封為上卿, 將魏封給畢萬做了採邑,繼而魏的姓氏自此以後産生並且不斷壯大。
위필만 본인은 진헌공晉獻公이 봉하여서 상경上卿이 됨으로써 장차 위나라 봉지는 필만의 채읍이 되었고, 위씨 성씨들이 이를 계승하여 이 때부터 이후의 생산 또한 부단히 장대해졌다.
使魏氏的人口,在當今的社會有了很大的發展,全球達到六百多萬,名次排列第 40 位
위씨 인구는 지금에 이르러 대단히 발전하여 전세계적으로 6백만에 이러렀고 40위 순위에에 배열되었다.
我們瀏覽著大殿墻壁上用瓷磚燒制的魏氏起源,魏氏的發展等內容。
우리들은 대전의 담벽 위에 구운 자기타일로 만든 위씨기원, 위씨의 발전 등이 내용을 훑어보았다.
密縣的這支魏氏後裔,其一世祖乃為魏大,字乾元,號大公。
밀현密縣의 이 지손의 위씨후예들의 일세조는 위대魏大로 하며, 자는 건원乾元, 호는 대공大公이다.
洪武年間從山西晉陽府播遷河南,始遷鄭州莆田馬家渡,再遷中牟謝家莊,後擇密邑旸山,卜居西瓦店。
홍무洪武 연간에 산서山西 진양부晉陽府에서 하남河南으로 남천하여 처음으로 정주鄭州 포전莆田 마가도馬家渡에 옮겨와 다시 중모中牟(현) 사가장謝家莊으로 이주하여, 후에 밀읍密邑 양산旸山, 서쪽 와점瓦店에 살 곳을 정하였다.
到如今,新密的魏氏在當地已經成為一個名門望族,成了一個有影響力的氏族。
지금까지, 신밀 위씨는 지역의 명문이며 영향력있는 씨족이 되었다.
魏畢萬的漢白玉雕像,是魏氏後裔崇敬先祖,拜祭祖先的最好的證明。
위필만의 한백옥 조상은 위씨 후예가 선조를 우러러 존경하고 조상을 숭상하는 가장 좋은 증거이다.
他們把得姓始祖的形象雕塑成漢白玉像,就是為了讓自己的始祖形象永久地保存在天地之間,就是為了讓這裏的魏氏子孫世世代代敬仰先祖的遺容。
그들은 득성시조의 형상 조상의 이미지를 한백옥상에 조각하여 그들의 조상의 이미지를 지구상에 영원히 보존하고, 자손 그리고 세세대대 선조의 전하여지는 모습을 존경을 하게 하기 위함이다.
為了不忘祖先,為了虔敬拜祭,他們不惜花費重金去打造先祖的形象。
선조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독실한 존경을 표하기 위하여, 그들은 조상의 이미지를 조성하기 위해 많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魏氏兒女的這份孝敬之心,讓其他姓氏的宗親也為之動容。
위씨 후손들의 이러한 효경지심은 여타 성씨의 종친들의 마음도 움직이게 했다.
2014 年 11 月 26 日 採訪 November 26, 2014 interview
본 탐방기는 인터넷 웹서핑 중 발견하여 올렸습니다.
아마 중국사람 어느 단체의 탐방기를 어느 분이 국역한 듯 합니다.
순수한 탐방기이기에 뿌리공부에 도움이 되는 내용인 것 같아 올립니다.
대종회에서는 이곳을 답사하고자 두차례에 걸쳐 중국위씨 뿌리를 찾아 이곳 신밀시에 단체 여행을 하였으나 태시조 한백조 조각상은 여행 불허지역이라는 이유로 답사를 못했던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