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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임씨(長興任氏) 성지(聖地) 정안사(定安祠) / 栢江 위성록

1.장흥임씨의 연역(沿革)
南道의 靈山인 장흥 천관산 아래 자리 잡은 당동 마을은 장흥임씨의 시조인 태자태부(太子太傅) 임호(任顥)가 1040년(庚辰) 송나라의 정세가 혼란하여 난을 피해 고려에 들어와 개척한 터이자 발상지이다.

정안사 전경(하늘).jpg

종사(宗史) 1000년 중, 300여년동안 세거하면서 영화를 누린 요람지였다. 고려사에 시조 임호의 아들인 정경공 임의(任懿)가 고려 문종조에 문과급제 후 출사하여 예종조까지 6朝에 걸쳐 봉직하면서 문하시랑동중서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平章事)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까지 역임함으로써 임씨의 고려 왕조에 기반을 닦았다. 그 후 문숙공 임원숙(任元淑), 문충공 임원후(任元厚), 문헌공 임원준(任元濬) 등 아들 3명을 비롯하여 평장사(平章事) 8명을 배출했고, 시호(諡號) 받은이가 7명에 이르면서 잠영갑족(簪纓甲族)으로 등장하였다. 특히 정경공의 손녀이며 문충공의 딸 공예태후가 제 17대 인종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어 의종, 명종, 신종 3왕의 어머니가 되면서 왕비 임씨의 탄향(誕鄕)이라 하여 당시 영암군 속현 정안현(定安縣)에서 장흥(長興)으로 사명(賜名)하고 부(府)로 승격 개칭되었다. 이런 바탕에서 장흥임씨는 고려시대 문과 급제자 12명을 배출하였다.

고려 제26대 충선왕은 1308년(戊申) 즉위하면서 왕실과 혼인 할 수 있는 제상지종(帝相之宗)15 가문의 성씨를 발표하였다. 이 성씨 중에는 "長興任氏"가 세 번째로 포함되어 있어 고려 귀족가문으로 자리를 더욱 굳히게 되었다. 또한 고려 중엽 최씨 무인집정 때에도 가문은 위축됨 없이 크게 성장하였다. 고려말 권문세가의 실정(失政)에 따른 약화와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 세력의 역성혁명으로 집권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 王氏를 포함한 고려 귀족 가문을 탄압함에 따라 300여년 세거지 장흥 당동을 버리고 인근 보성, 해남과 충남 아산 등으로 흩어져 거주하여 가문(家門)이 약화되고 침체기를 겪었다. 이러한 연유로 전주李氏와의 통혼(通婚)을 금(禁)하였다.

임씨의 혼(魂)이 서려있는 당동 마을을 중심으로 장천동, 아지(娥池), 궁터, 청화루 등의 유적에 얽힌 설화 등이 전승되어 종사(宗史)의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300여년 누렸던 세거지를 두고 거소가 사방으로 흩어져 왕비(王妃)골 당동 마을에 한 가구도 거주하지 않는 안타까운 현실 속에 600여년 동안 옛터의 회복만을 숙원하는 회한(悔恨)의 문헌은 조선 1747년(丁卯 영조23) 간행된 정묘 장흥읍지(丁卯 長興邑誌)와 국담유고(菊潭遺稿)에 남아 있다. 국담(菊潭) 임희중(任希重)이 쓴 임씨도(任氏島)와 석가(石舸)에 대한 詩와 당동 마을의 아지(娥池), 장천동(長川洞)에 관련 詩가 있다. 이는 1040년 시조 임호가 송나라에서 배를 이용해 고려로 들어 올 때 임씨도로 상륙함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임씨도는 지금의 회진면 대리이다. 천관산 뒤  두개의 섬(관산읍 우산도, 도리도) 등 주변 경관을 詩로 남겼다. 또한 당동 마을의 아지(娥池)관련 詩에는 공예태후의 왕비 책봉에 대해, 장천동(長川洞) 관련 詩에는 선대의 유택(幽宅)이 곳곳에 많이 있는데 거주하는 후손이 없음을 탄식하는 詩가 두 문헌(文獻)으로 남겨 傳해지고 있을 뿐이다.

장흥임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8명, 무과 16명, 생원시 7명, 진사시 15명 등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예조판서 임서종(任瑞宗), 대사헌 임헌(任獻), 전라도관찰사 임종선(任從善)이 출사하였다. 이후 200여년 관직 진출이 미미하다가 임진왜란 때 호성공신 임발영(任發英),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임희진(任希璡), 전라좌의병장 임계영(任啓英)이 국난에 참여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 후에는 과거급제를 통해 다수가 관직에 출사하였다.

장흥임씨 대동보는 1830년(庚寅) 경인초보(庚寅初譜)를 편찬한 후, 2차 1892년 임진보(壬辰譜), 3차 1924년 갑자보(甲子譜), 4차 1956년 병신보(丙申譜), 5차 1979년 기미보(己未譜), 6차 2005년 을유보(乙酉譜)를 각각 편찬하였다.

1977년(丁巳) 장흥군 용산면 어산리 봉황재 뒤에 설단(設壇)하고 시조 임호(任顥)는 원조(遠祖)라고 배향하지 않았다. 정경공 임의(任懿), 문숙공 임원숙(任元淑), 문충공 임원후(任元厚), 문헌공 임원준(任元濬) 4位를 제향 봉행하였다. 1968년(戊申) 고려대학교 이난영 교수의 「한국 금석문 추보」와 1978년(戊午) 고려대학교 박용운 교수의 「고려시대 한국사 논총」에서 정안(장흥)임씨, 철원최씨, 공암허씨 가문(家門)을 분석한 논문 발표를 하면서 개성시 팔덕산에서 발견된 정경공 임의(任懿) 묘지명(墓誌銘)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사실과 내용 중, 부(父) 임호(任顥)의 실존(實存)이 확인되었다. 1979년(己未) 장흥임씨 대종회가 발족되면서 이러한 근거로 기미 대동보(己未 大同譜) 편찬시 경인초보부터 임호(任顥)를 원조(遠祖)로, 1세조를 정경공 임의(任懿)로 기록 했던 것을 시조를 임호(任顥)로, 2세조를 정경공 임의(任懿)로 바로 잡았다.

1988년(戊辰) 종원들의 시조공 사우(祠宇) 건립 발의(發意)하였다. 1989년(己巳) 사우 건립 장소를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당동 마을에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1990년(庚午) 발상지 성역화사업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회장 임영주 외 16명 위원을 선출하였다. 이후 장흥임씨 내 10 종중, 21 종파,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임택모(任澤模) 등 종원 550명이 헌성에 참여하였다. 사업은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당동마을 입구 민가 2채, 논 등 토지 6,789평의 부지를 매입 마련하고 신실(神室) 정안사(定安祠)를 위시하여 외삼문(紹興門), 소강당(長川堂), 대강당(景慕齋), 내삼문(崇仰門) 등을 갖추고 1998년(戊寅)에 준공되었다. 이때부터 시조 임호(任顥)를 비롯하여 임의(任懿), 임원숙(任元淑), 임원후(任元厚), 임원준(任元濬) 등 3代 5位 위패를 봉안(奉安)하여 매년 4월 넷째 일요일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2015년 기준 전국의 종원수는 37,000여명이며, 현 문재인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고 있는 임종석(任鍾晳)이 임호의 후손이다. 대표적 집성촌은 보성군 조성면 축내리, 해남군 계곡면 당산리, 아산시 영인면 월선리 등이다.

2.정안사(定安祠) 조성 내역(內譯)
정안사 총 면적 : 6,789평 이다.(내부 : 2,381평, 주차장 등 외부 : 4,408평)
장흥임씨 대종회에서는 일금 1,064,000,000원의 헌성금을 조성하였다.(이중 임택모 종원이 500,000,000원 헌성함.)
○ 토지매입 : 298,000,000원       ○ 건물신축 : 225,000,000원
○ 담장공사 : 136,000,000원       ○ 조경공사 : 106,000,000원
○ 바닥 석재공사 : 83,000,000원 ○ 사적비 근수 : 50,000,000원
○ 기타 : 130,000,000원              ○ 역사관은 2013년 330,000,000원으로 건립되었다.
 ※ 장흥임씨 정안사 조성은 정부(지자체)에서 일체의 지원 없이 순수 종원들의 단합된 저력과 헌성으로 마련되었기에 그 숭조돈목(崇祖敦睦) 정신을 높게 평가한다.

3.정안사 내 주요 건물

◇ 신실 정안사(定安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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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임씨의 발상(發祥)은 고려 정안현(定安縣)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이 지역의 제일 토성(土姓)이기도 하였다. 이에 정안(定安)은 영원히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해서 신실의 명칭을 정안사라 명명하였다.

◇ 내삼문 숭앙문(崇仰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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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여 우러러 본다」는 의미이다. 이곳에 들어서는 자손들은 모두 숭앙(崇仰)하는 마음의 자세를 갖고 이 문(門)을 들어서야 하며, 이 문(門)을 들어서면서 선대의 위업(偉業)을 계승 발전하겠다는 마음을 다지기 위하여 숭앙문이라 명명하였다.

◇ 대강당 경모재(景慕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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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러러 사모한다」는 의미이다. 전국에 흩어져 사는 종원들이 매년 이 자리에 모여 경건한 마음으로 선조들을 추모하고 숭조사상(崇祖思想)과 족의돈목(族誼敦睦)을 앙양시키는 장소가 될 것이므로 경모재라 명명하였다.

◇ 소강당 장천당(長川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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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5대 명산의 하나인 천관산 장천동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오는 맑은 물은 당동(堂洞) 마을 앞 개천을 휘감아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흐르고 있어 이곳에 강당을 세워 장천당이라 명명하였다.

◇ 교육장 역사관(歷史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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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의 혼(魂)이 서려 있는 교지(敎旨) 등 주요 유품을 소장 전시하여  2013년 건립하면서 명명하였다.

◇ 외삼문 소흥문(紹興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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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에서 시조 임호(任顥)가 태생하였다. 고려 1040년(정종 6) 현재의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당동 마을에 정착하고 터를 잡았다. 따라서 시조의 고향을 잊지 않고 오래토록 전하기 위해 정안사의 첫 문을 소흥문이라 명명하였다.

◇ 공예태후임씨기전비(恭睿太后任氏紀傳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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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2월 정부에서(문화재청)는 유서 깊은 인종왕비 공예태후 탄향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장흥임씨 발상지인 당동에 비(碑)를 세웠다. 이로써 천년 前 고려 중기 번창했던 장흥임씨의 옛 면모를 재조명하게 된 것이다.

◇ 공예태후 장흥임씨 사적비((恭睿太后長興任氏事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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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혜의 절경을 자랑하는 남도의 영산 천관산 아래 자리 잡은 당동 마을은 고려 17대 인종왕비인 공예태후 장흥임씨의 탄향지이다. 장흥은 백제 때 오차현이었고(중략) 단기 4341(2008)년 4월 27일 태자태부공 26세손  임철흥 謹竪

◇ 장흥임씨발상지사적비(長興任氏發祥地史跡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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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손 송공비(頌功碑) 및 헌성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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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문 입구 안내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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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 : 남전(南田) 위정우, 장흥임씨 제13대 대종회장 청봉(靑峯) 임기호 
씨족문화연구위원 栢江 위성록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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