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30 23:55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당동길 36-1 송곡(松谷) 위경량 가옥은 당동마을 깊숙한 안쪽에 위치한다.
●장흥임씨 사부자 평장사 출생지
문하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정경공 임의(任懿), 중서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문숙공 임원숙(任元淑), 문하시중 문충공 임원후(任元厚), 중서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문헌공 임원준(任元濬)의 출생지이다.
●고려 인종왕비 공예태후 임씨 탄생지
공예태후 임씨(1109~1183)는 고려 17대 인종왕비로 문충공 임원후(任元厚)의 따님이요, 정경공 임의(任懿)의 손녀로 이곳에서 탄생하였다. 1126년(인종4년)에 왕비로 책봉 된 후 18대 의종, 19대 명종, 20대 신종 3왕의 어머니이다. 당시 장흥은 정안현으로 영암군에 소속되었는데 인종 때에 공예태후의 탄향이라 하여 장흥으로 사명(賜名)하고 부(府)로 승격시켰다. 지금의 장흥군은 공예태후에 연유한 것이다.
●임란공신 위씨 오덕(五德) 출생지
성균관 진사 위곤(魏鯤)의 오자(五子) 판사공 위덕홍(魏德弘) 군자정, 청계공 위덕의(魏德毅) 병조참의 죽천사 배향, 운암공 위덕관(魏德寬) 부호군, 호조판서공 위덕화(魏德和) 죽천사 배향, 안항공 위덕후(魏德厚) 제용감판관 등 오덕(五德)의 출생지이자 장흥위씨 관산파의 성지(聖地)가 된다.
●독립지사 덕암(德菴) 위석규(魏錫奎) 출생지
선생은 1883년 이곳에서 출생한 후 1906년 을사늑약으로 국외로 망명하여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3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87년 건국훈장애족장(제1668호)을 서훈하였고, 장흥군 주간으로 천관산 장천동 입구에 의열비를 세웠다.
●성균관 고문 의재(毅齋) 위석한(魏錫漢) 출생지
선생은 성균관 고문, 유도회 총본부 고문을 역임하여 유도진흥에 공헌하였고 오덕생가 터 회복과 청계공 위덕의를 광주 황산사(黃山祠)에 존재 위백규 선생을 곡성군 영귀사(詠歸祠)에 배향케 하는 등 숭조돈목(崇祖敦睦)에 기여했다.
이 터의 최초 주인은 고려 때 장흥임씨의 시조 임호(任顥)이다. 1040년경 이곳에 터를 잡아 임씨들의 발상지이며, 17대 인종왕비인 공예태후의 탄향지다. 정확한 연혁(沿革)은 알 수 없으나 장흥임씨들은 고려가 폐망하기 前인 1300중반 년까지 300여년 정도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집터의 두번째 주인은 탐진최씨로 1300중반 년부터 조선초 1500년까지 150여년 거주하였다.
세번째 주인은 장흥위씨다. 1500년경 최수동(崔壽東)의 사위인 강릉참봉 위진현(1483~1564)이 정착한 후 아들 당곡 진사 위곤(1515~1582)이 이곳에서 아들 덕홍(德弘), 덕의(德毅), 덕관(德寬), 덕화(德和), 덕후(德厚) 등 5형제를 낳아 가문(家門)이 중흥(中興)하였다. 그 후 청계 위덕의의 아들 국천(菊泉) 위정헌(1570~1643)이 1630여년까지 거주하다가 이후 거소를 인근 옥산으로 옮겼다. 장흥위씨는 이곳에서 130여년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네번째 주인은 1630~1790년까지 어느 성씨가 거주하였는지 알 수 없다. 160여년 가량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섯번째 주인은 장흥위씨다. 관암(冠菴) 위상정(1732~1799)의 차자(次子) 위도방(1773~1831)이 1790년 안팎에 거주하여 후손들이 1916년까지 120여년 동안 거주하다가 성산리 선자동으로 잠시 거소를 옮겼다.
여섯번째 주인은 수원백씨가 1916~1950년간 34년 거주했다.
일곱번째 주인은 장흥위씨다. 관산읍 성산리 선자동에서 20여년을 거주하던 의재(毅齋) 위석한(1900~1982)은 광복 후 1946년 현 당동마을 효자송 주변 새터로 이사와 거주하면서 지난 유년시절에 거주했었던 오덕 생가를 매입할 기회를 보다가 1950년경 백우인의 딸 백몽임으로부터 매입하였다. 현재 의재 선생의 후손들이 소유하고 있다.
추원각(追遠閣)은 제례문화 변화에 맞춰 2013(癸巳)년에 덕운(위황량), 송곡(위경량)등 후손의 주도로 건립하였다. 매년 4월 둘째 주 토요일에 주벽 초헌 위윤조(1841~ 1916) 등 49位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하고 제향한다.
2016년 새봄 덕운(德雲) 위황량은 출입 대문에 앙지문(仰址門 우러러보는 터)이라 써 현판을 걸었다.
집 앞 개천 바위에 호곡(壺谷) 위일환(1910~1977)은 唐谷進士魏公遺庄이라 새겨 남겼다.
장흥임씨 대종회에서는 오덕(五德) 생가를 수회 자신들에게 되팔라고 하였다. 그러나 의재 선생 후손들은 천신만고 끝에 되찾은 집을 다시 팔수는 없었다. 임씨들은 시조 임호가 터를 잡아 살았고 공예태후가 태어났던 집을 되찾지 못해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당동마을 입구의 부지를 매입해 1998년 정안사(定安祠)를 창건하였다. 만일 자신들의 선대 터를 찾았으면 당연히 그 자리에 사우(祠宇)를 지었을 것이다. 이곳은 장흥임씨, 장흥위씨의 선대 얼이 전해 내려 오고 있다. 후손 모두가 우러러보는 유서 깊은 터가 자명하다.^^ 栢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