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백규 만언봉사(萬言封事)에 대한 정조대왕의 비답(批答)
1.원소장처 :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존재고택(8대 종손 위재현)
2.현소장처 : 방촌유물전시관
3.내용 : 만언봉사 비답
위백규(魏伯珪, 1727~1798) : 자(字) 자화(子華), 호(號) 존재(存齋)‧계항(桂巷)이다. 영이재 위문덕(魏文德) 선생과 평해吳氏 사이에서 五子중, 장자(長子)로 태어났다. 1751년부터 병계 윤봉구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천문(天文)· 지리·율력(律曆)·복서(卜筮)·산수 등에 통달하고 특히 역(易)에 정통하였다. 정조(正祖)때 公이 68세 되던 해 호남 위유사(慰諭使)로 내려온 서영보(徐榮輔, 달성人, 1759~1816)의 천거로 사용(司勇)에 제수된 후 선공감부봉사(繕工監副奉事)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명(命)이 거듭되어 입궐하여 정조대왕에게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리고 옥과현감(玉果縣監)에 제수되어 1796년 3월~1797년 윤 6월간 1년4개월 재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 후 장원서별제(掌苑署別堤)와 경기전령(慶基殿令) 등에 임명되었으나, 노병(老病)으로 취임하지 못하고 72세로 종(終)하였다. 학통은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 권상하(權尙夏), 윤봉구(尹鳳九), 위백규(魏伯珪), 홍직필(洪直弼)로 이어지는 노론계이나, 향촌생활을 통하여 형성된 강한 현실 비판 의식이 저술에 나타나고 있어 학문적 성격은 경세적 실학의 색채가 짙은 호남의 대표적 실학자이다. 정현신보(政絃新報) 등 9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위백규(魏伯珪) 만언봉사(萬言封事)에 ①비답(批答)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살펴보니 이미 原稿에 考徵한데로 다 갖추어져 그 存한바를 얻었다. 또 對面을 내리어 그 포부를 두드렸다. 들으니 十年동안 硏究하여 만언봉사를 만들었다. 참으로 또한 ②大農에 命하여 紙筆을 支給케 하였노라. 이제 그 文章을 보니 진실로 풍부하고 넉넉하다. 初章의 뜻을 세워 학문을 밝힌다는 아룀은 내가 가상히 여기노라. 내 뜻이 세워지지 않았으므로 백성의 뜻이 능히 한결같이 아니하고 올바른 학문이 밝혀지지 아니한지라 그러므로 邪學이 능히 없어지지 아니하니 내가 反省할 곳이 아닌데가 없으니 마땅히 깊이 體念하리라. 그 二章 보필(輔弼)할 자를 가리되 어진 이를 登用하라는 아룀을 내가 가상하게 여기노라. 사람이 임금을 섬김은 大臣의 責任이다. 가리고 띠처럼 얽힌 것을 발라내고 뽑아 버리듯 林泉에 숨어 있는 어진이가 없어야 한다는 것은 나 혼자 생각할 때 오늘의 朝廷大臣들에게 희망이 있다. 三章과 四章과 六章은 말마다 ③개절(剴切))하여 시폐(時弊)에 절실히 맞으며 ④사유(四維)의 펴지 못함도 近日과 같은 때가 없었고 ⑤국강(國綱)의 不振도 오직 지금일 것이다. ⑥조경(躁競)이 심하여 선비가 날마다 빨리 달려가고 사치가 너무 심하면 ⑦탐풍(貪風)이 날로 성하여 옛날의 떳떳한 法을 회복할 수가 없으니 政治를 비보(裨補)하고 法律을 비호(庇護)함이 손가락을 구부려도 다 헤아릴 수 없어 매양 밤중이면 생각하고 탑(榻)을 돌며 잠을 못자니 스스로 初志를 돌아보건데 얼굴이 붉어짐을 깨닫지 못하였다. 너는 먼 시골 왕래도 드문 곳에서 능히 이같이 理論을 다하니 들음을 구한 것은 利益됨을 求하는 것이다. 삼년동안에 方伯節度使 首領들의 천인(薦人)과 科擧文體가 法則과 같지 아니하면 그 榜目을 삭제하는 일을 朝廷大臣에게 자세하게 復命케 하여 실효성이 있는 말을 계도하게 하였다. 네 나이 七十歲로 부름을 받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단지 환향(還鄕)하기를 허락해 주기 願하니 그 이른바 가고 오면서 듣고 보는바가 무엇이며 천천히 기다려 벼슬을 하라고 한다면 ⑧풍로(馮老)의 부장 벼슬을 끝으로 숨어버린 것 보다 심하므로 一邑의 원으로 任命할 것이니 축적(蓄積)된 經綸을 施行하도록 하라.
①비답(批答) : 왕이 대신의 상주문에 의견을 써서 회답한 것임.
②대농(大農) : 관부의 명칭으로 장관을 말함. 당대 호조판서로 지금의 재무장관을 말함.
③개절(剴切) : 아주 알맞고 적절함.
④사유(四維) : 나라를 유지함에 필요한 네가지 수칙 즉 예의염치(禮義廉恥)
⑤국강(國綱) : 나라의 기강
⑥조경(躁競) : 마음이 거칠어 양보를 하지 않음.
⑦탐풍(貪風) : 욕심을 내는 풍속
⑧풍로(馮老) : 이름은 풍당(馮唐)으로 한나라 안능人, 관(官)은 文帝 때 중랑서장 이었는데 武帝 때 賢良에 천거되었으나 나이가 九十歲로 벼슬하지 못하고 그 아들에게 낭(郎)을 임명(任命)함.
●만언봉사(萬言封事)
「만언봉사」는 1796년(정조 20) 존재 위백규 선생이 정조대왕에게 올린 것으로, 입성지명성학(立聖志明聖學)·간보필거현능(簡輔弼擧賢能)·여염치진기강(勵廉恥振紀綱)·정사습억분경(正士習抑奔競)·율탐장금사치(律貪贓禁奢侈)·유구장혁폐정(由舊章革弊政) 등 6개 항목으로 나누어 논하였다. 성학(聖學)을 밝힘으로써 사도(邪道)를 물리치는 것을 근본 사상으로 하여 폐정을 광정(匡正)하고 정치 제도를 개선하자는 것으로, 저자의 경세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자료이다.「대황사간봉사(代黃司諫封事)」는 학교·문체(文體)· 용인(用人)·군현·노비·무선(武選)· 관직 등의 폐단을 들어 시정을 확립할 것을 주장한 내용의 상소문(上疏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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