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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는 문화의 보고(寶庫)라 불리는 마을이다. 선사시대부터 중심적인 주거지가 형성되어 오랜 역사를 지닌 곳으로 마을 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380여기의 지석묘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방촌마을의 장흥위씨는 안항(顔巷) 위덕후(1556~ 1612)가 1576년경 인근 당동에서 분가하면서 입촌한 후 현재까지 대표적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오고 있다. 특히 선대에서는 천관산(天冠山)과 장천재(長川齋)에서 강학(講學)하면서 호연기(浩然之氣)를 키워왔다. 곳곳에는 선조들의 유택(幽宅)이 위치하고 있어 장흥위문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因緣)이 있다. 고려조 장흥부와 회주목의 230년간 치소 터, 회주고성과 상잠산성 터, 국가지정 존재고택, 오헌고택, 신와고택 등 3곳, 전라남도 지정 판서공파종택, 죽헌고택, 근암고택 등 3곳 총 6곳의 고택이 보존되고 있다. 또한 국가지정 석장승, 전라남도 지정 지석묘군, 삼괴정 내 느티나무 보호수, 400여년 존속되고 있는 대동계(大洞契), 300여년 존속되고 있는 무기계(無忮契), 정월 대보름 별신제 및 매귀(埋鬼), 천관산 산신제 등 각종 문화재와 전통문화가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2005년 방촌유물전시관이 개관되어 선대 교지(敎旨), 문집(文集) 등 각종 유물 1,048점을 소장 전시하고 있는 등 방촌문화마을만의 큰 자랑이다. 이러한 소중한 전통문화는 1994년 정부의 전통문화마을로 지정되었다. 혈연으로 뭉쳐 살아가는 마을 현장 구석구석을 소개하고자 한다.

 

 

 

1.형국(形局)

천관산(天冠山 723m) 동쪽 산자락 사방오리쯤 되는 옴팍지, 빗돌과 기와집이 여느 동네보다 많이 눈에 띄는 곳, 440년 前부터 씨내림 하여 생긴 장흥위씨 대표적 집성촌, 竹川(고읍천)따라 뱃길 열려 외항 선창(죽교리 남창)을 둔 옛 장흥의 중심 텃골, 여기가 바로 방촌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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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산(背山) 천관산은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호남정맥의 남쪽 끝 봉우리이다. 제암산(807m)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줄기는 억불산(518m)과 부용산(609m)을 거쳐 양암봉(469m)으로 내려 깊은재(深峙)를 건너 그 이름 따라 천관(天冠)이란 용머리를 내밀고 남해바다를 지키고 있다. 봉우리는 사방에서 보아도 우뚝 솟아 있고 최고봉에 봉화대가 설치돼 있어 연대봉(烟臺峰)이라 한다. 이 최고봉에서 동남쪽으로 치달리다 계양봉(325m)에서 복호(伏虎)를 만들고, 앞 다리 부분에 해당하는 줄기는 서북쪽으로 뻗어 급함을 멈추고 호동(壺洞 쇵골) 뒷등(嶝) 허리인 망치봉(83m)에 이른다. 동쪽으로 이어진 야트막한 줄기를 따라 오면 장흥대로(23번 국도) 고갯길인 마상등(馬上嶝)재를 건너 상잠산성토의 능선인 찻등으로 내리면서 내동(內洞), 계춘동(桂春洞), 새터 마을을 좌청룡(左靑龍)이 감싸고 있다. 다시 연대봉에서 갈라서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줄기는 성조골을 만들고 탑동(塔洞), 호산(虎山 범산), 산저(山底)를 감싸 안은 우백호(右白虎)이다. 여러 갈래로 뻗어 내린 줄기 사이에는 계곡을 만들어 영은동천(靈隱洞天) 내 큰골에서 흐른 물은 호동과 탑동 마을 앞 자락을 적셔 주고 호산(범산) 마을 뒤로 흐르는 성조골 계곡 물은 다미들을 일구게 한다. 좌청룡 줄기의 여러 계곡에서 흐르는 물은 수등들을 적셔 사람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수등들 남쪽으로 낮은 야산(野山)은 남쪽의 허전함을 덜어주는 남산(南山)이다. 이 산이 득량만(得糧灣) 남해바다에서 불어오는 태풍이나 마파람을 막아 주는 수구(水口)목을 형성하고 있다. 이곳에 청금(聽禽) 위정훈(魏廷勳 1578~1662) 선생의 얼이 서려 있는 장춘대(長春臺)가 있었음은 청금유고(聽禽遺稿)에 전한다. 방촌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과 바다, 들의 북쪽 竹川(고읍천) 하구는 원래 바다이고 남쪽 복와등(伏蛙嶝) 밑이 바다여서 방촌마을은 "배가 바다를 향해 출선하는 형국으로, 풍수설에서 행주형국(行舟形局)"이라 하는데 선수(船首 뱃머리)는 보밭등(寶田嶝) 지역이고, 선미(船尾 배꼬리)지역은 사장등(嶝) 지역이며, 가운데 돛은 등밭(嶝田)이 해당된다. 이러한 지세(地勢)는 사람과 재화(財貨)가 풍성히 모이기 때문에 크게 번창한다는 속설이 있다. 조선후기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地)"에 평양(平壤)의 지리는 행주형국이기 때문에 우물을 파지 않는다고 했다. 이곳도 예전에는 유물을 파지 않고 내동 옥샘, 신기 신와고택 앞, 호산 길가, 탑동 위성천 집앞, 호동 천관산 주차장 위쪽 신대장 등 이곳에만 물이 있어 마을 사람 모두가 사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풍수설이 퇴색했는지 근래 가가호호(家家戶戶)와 필지별로 관정(管井)을 파서 우물이나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평양(平壤), 청주(淸州), 공주(公州) 등이 행주 행국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형국(形局)도 분지(옴팍지)형으로 아늑함과 함께 중앙에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다. 또한 근거리에 득량만 바다가 위치하여 지난날 농한기 때 김 생산은 생활에 기반이 되었다.

 

 2.상잠산성(觴岑山城)과 회주고성(懷州古城)

 1)상잠산성(觴岑山城)

 방촌마을 내동과 계춘동의 뒷산은 상잠산(158m)이다. 이 산의 정상부분에 남북으로 긴 장방형(長方形)의 산성(山城)이 있다. 현재 성벽은 거의 허물어져 있으나 성(城)의 북쪽에 출입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곳에 잘 다듬어진 큰 돌이 남아있다. 군데군데 흙과 돌을 적적하게 섞어서 쌓은 흔적이 있다. 성(城)의 둘레는 약 500m이고 성의 폭은 1~3m이며 높이는 2m 내외이다. 성을 쌓았던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747년에 간행한 장흥읍지(丁卯誌)에 의하면 상잠산이 장흥의 주산(主山)이었고 고장흥성(古長興城)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고려 말까지 활용됨을 뒷받침하고 있다. 정상 칼바위 아래 잔뫼(觴山)는 지형이 평평하여 군사를 조련하는 훈련장이며 마상훈련(馬上訓練)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 벅수골(진서대장군)~상잠산 하골지역 능선으로 죽교리 학교마을과 경계되고, 정상 칼바위 능선을 경계로 하여 내동 뒤쪽은 지정리 지북마을, 계춘동 뒤쪽은 송촌리 송현마을과 구분 경계되고 있다.

 2)회주고성(懷州古城)

 이 성(城)은 상잠산성과 방촌리를 에워싸고 있는 석성(石城)이다. 원래의 성은 천관산에서 남(南)으로 수동저수지까지 북(北)으로는 죽교리와 동(東)으로는 지정리 지북마을 까지 이어져 상잠산성과 연결된 것으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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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산자락 계양봉(325m) 능선에서 시작하여 호동(壺洞)마을 뒤의 망치봉(83m)을 거쳐 망치등(望峙嶝)과 벅수골로 이어져 상잠산성까지 약 2km에 걸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가장 양호하게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2m 내외이고, 폭은 4m 정도이다.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석장승이 있는 곳이 회주고성의 북쪽 성문(城門)터로, 남쪽 성문(城門)초소는 삼산마을 초입 고개 도득막등(嶝)에 위치함이 전해진다. 또한 망치등(嶝)에서는 남해와 득량만 일대가 한눈에 들어와 초소형태의 돌담이 많이 남아 있다. 성(城)의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265년(원종 6) 장흥부(長興府)에서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되었을 당시를 전후하여 쌓은 것으로 추정한 현재 회주고성 밖에 위치한 천관산1592898512384.jpg

  <회주고성 표석>

장천재 입구 주차장~ 옥당저수지~ 망치등 성터 밖~진서대장군 석장승 밖은 행정상 번지는 관산읍 방촌리가 아닌 관산읍 옥당리에 해당된다. 이어진 상잠산의 성터를 기준하여 밖으로는 관산읍 죽교리 산 번지에 해당되면서 경계가 된다. 벅수골 주변을 북문동(北門洞)으로, 상잠산 자락 한쪽에는 당대 군부대가 진(陳)을 쳐 머무름을 알 수 있는 "둔군동(屯軍洞)" 지명이 현재까지 각각 불리고 있다. 상잠산성과, 회주고성은 서쪽 천관산~북쪽 벅수골~동쪽 상잠산~남쪽 삼산 도득막등(嶝)으로 이어져 회주목(懷州牧) 치소를 둘러싸 방어하는 중요한 산성 기능을 한 것으로 사료된다. 요즘은 산림이 우거져 방촌마을에서 조망되지 않으나 지난날에는 산에서 나무를 채취해서 땔감으로 사용하여 산성을 어렵푸시 볼 수 있었다. 지난 유년시절 여름철에 소 풀 먹이러 다녔던 망치등(공동묘지), 상잠산의 둔군동, 하골재(방촌마을과 지북마을 간을 왕래했던 산길의 정상 일대) 주변에서 회주고성과 상잠산성 터에 일렬의 담 형태로 축성된 성터와 무너진 산성 돌 사이에서 깨어진 도자기, 옹기 등을 많이 보았다. 지금은 잡목이 우거져 두 곳의 산성 터에 접근이 어렵고 마을에서도 조망되지 않는다.

 

 

 

 

 

3.대동계(大同契)

마을의 대동계(大同契)와 관련된 자료는 1803년(癸亥) 위도제(魏道悌)가 쓴 「방촌동약서문」이 있다. 자료에 의하면 "1608년(戊申) 어간(語幹)에 회진만호 김차옥이 동계를 창립하였으나 오래되지 않아 파해졌다. 그 후 1630년(庚午) 어간에 김공이 이를 개탄하고 다시 소동계를 만들었으나 이 역시 오래되지 않아 유명무실해졌고 그 후 김차옥은 이미 죽은지라 任, 白, 朴공 등이 주측이 되어 다시 계안(契案)이 성립되었다." 고 적고 있어 임진왜란이 지난 뒤 마을이 안정되자 대동계와 소동계가 도강 김공(김차옥)을 주축으로 설립되었다가 유명무실해지자 약원(弱員)이었던 任, 白, 朴氏 등과 여기에 魏氏들이 참여하여 방촌동계가 조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동계의 조직은 청금(聽禽) 위정훈(1578~1662) 선생이 주도하였다. 「聽禽翁煎花約」 에 의하면 봄과 가을에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친목을 도모하면서 협력과 결속을 꾀하였다고 한다. 방촌마을 대동계는 공동체 모임으로 주민 친목도모, 단합,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1547534335841.jpg정월 대보름날 별신제(別神祭), 천관산 산신제(山神祭), 기우제(祈雨祭), 복달임, 매귀(埋鬼) 보존 등 마을의 대소사를 처리해오면서 400여년을 지탱해왔다. 보유 재원(財源)은 관산읍 지정리에 위치한 논 5두락과 현금 30,000,000원이다. 또한 방촌마을 내에는 내동 동계, 계춘동 동계, 새터 동계, 산저 동계, 탑동 동계 등 소단위 5개의 동계가 150~200년 전에 자연마을로 조직되어 대동계를 뒷받침 하면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 방촌마을 이규(里規) ●

우리 방촌(傍村)은 회주(懷州)의 고을 터로 敬老孝親과 美風良俗의 風土와 정서가 전래된 문화마을이요, 문화체육부에서 지정된 특수전통문화 마을로써 祖上代代로 계승(繼承)된 고매(高邁)한 유지(遺志)을 이어받아 子孫萬代에 물려주고자 義務感과 責任感을 느끼면서 이민 일동은 다음 항목과 같이 이규(里規)를 제정하여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를 엄수하여 타의 모범이 되도록 날인(捺印) 서약(誓約)한다.

 

​• 이민은 어른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환란(患亂)에 상호 협조한다.

• 이민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불륜(不倫)을 범하지 않는다.

• 이민은 안녕질서를 위하여 환경과 정서를 저해할 수 있는 시설(施設)을 할 수 없다.

• 우리의 생활터전을 보존하기 위하여 里의 행정구역내에 이민 가족 이외의 분묘(墳墓)를 조성할 수 없다. 여기 이민이라 함은 5년 이상 거주자를 말한다. 단 이민의 가족이라도 향사에 등한한 者는 이민의 중의(衆議)에 따라 제외할 수 있다.

• 이민의 중의로 결정된 사항은 자기의사에 反한다고 하여 임의로 방언(放言) 또는 순응(順應)치 않고 위배자(違背者)가 生할 시는 이민의 중의(衆議)에 따라 措處한다.

 

本 이규는 12월 22일부터 시행한다.

​서기 1997년 12월 21일獄쎻뫗�욜븰�됱뱽.JPG

방촌마을은 등밭, 동산밑, 윗골, 내동, 계춘동, 새터, 산저 응달, 산저 양달, 호산, 탑동, 호동, 번덕지 등 12개 뜸으로 구성된다. 110호 주민들이 거주하면서 440여년 마을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중 내동 동계, 계춘동 동계, 새터 동계, 산저 동계, 탑동 동계는 소단위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2000년 以前까지는 사람이 집에서 임종(臨終)하면 매장(埋葬)하는 풍습에 따라 주민간 상부상조와 공동체 조직 동계(洞契)를 중심으로 장례(葬禮)를 치러 "상포계(喪布契)" 성격이 짙었다. 이러한 동계는 거주민들의 고령화와 젊은 청·장년층 부재 등 농촌 생활문화의 변화에 따라 임종(臨終)시 화장(火葬)과 장례식장(葬禮式場) 이용으로 전통적 풍습은 쇠락(衰落)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의 전통문화 마을에 대한 자긍심으로 존속 의지가 강해 상부상조(相扶相助) 근본 미덕(美德)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현재 방촌마을 대동계 산하에는 리장(반장), 무기계, 매귀계, 어촌계, 부녀회, 개발위원회, 새마을지도자회, 민속마을추진위원회, 유물전시관관리위원회 등 각각의 단체가 마을 일을 담당하고 있다.

 1)별신제(別神祭)

마을의 정월 대보름날 행해지고 있는 별신제(別神祭)는 언제부터 행해졌다는 문헌의 기록은 없으나 400여년 전 대동계(大同契)가 조직된 시기부터 행해졌다고 전한다. 행사의 큰 의와 뜻은 마을의 안녕(安寧)과 주민들의 단합(團合)을 기원하는 전통풍속행사이다. 별신제는 여타 마을의 동제(洞祭), 당제(堂祭) 등과 토속적 의미는 비슷하나 유교적 제사인 삼헌(三獻) 제관 중심으로 행하여 절차에서는 다른 마을과 구별되며 행사에 매귀가 동참한다. 방촌마을에서는 농악이라고 하지 않고 액운(厄運)을 땅에 묻는다 하여 "매귀(埋鬼)" 라고 하며 독특한 리듬이 전해지고 있는 등 전통적 가치가 있어 앞으로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IMG_20180302_094059.jpg매년 대동계 주관으로 먼저 정월(正月) 초삼일(初三日)에 별신제 제관을 망정하여 마을회관 앞에 게시 공고 한다. 대보름날 생기복덕일(生氣福德日)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주요 제관으로 망정(望定)하는데 제관은 초헌관(初獻官),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 집례(執禮), 축관(祝官), 집사(執事) 2명 등 7명으로 구성된다. 또 다른 일은 마을 입구 벅수골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석장승과 여자 석장승 가슴에 창호지로 꼰 금()줄을 쳐서 마을에 액운을 차단함과 중요행사인 별신제를 알린다. 마을 회관에서는 손 재능이 좋으신 어르신들이 모여 보름 까지 매귀에 사용할 영기(令旗), 사령기(司令旗), 덕석기, 대포수(大砲手), 조리중, 꽹가리, , 장구, 북 등의 매귀 악기를 정비 한다. 특히 새롭게 고깔을 만드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보름 하루 전인 14일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별신제 제사에 쓰이는 홀기(笏記)를 점검하고 축문(祝文)을 쓰며 허수아비를 볏짚으로 만들어 한지에 붓으로 인형(人形)을 그려 얼굴에 덮는 식으로 만든다. 또한 제물을 담는 망태도 함께 만들어 오후에는 회관 앞마당에 허수아비와 생 시누대나무를 세워 금()줄을 친 사각 제단(祭壇)을 만들어 놓는다. 부녀회는 제사에서 사용될 제물을 준비한다. 요즘도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을 보면 정성과 액운을 쫒기 위함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제찬(祭餐)으로는 조기, 병어, 장대(양태), 전어 등 생선, 꼬막, 돼지머리와 편육, 토란, 숙주, 고사리, 도라지 등의 나물과 두부탕, 매생이탕이 곁들어진다. ()은 시루에 흰 백설기를 하는데 층 사이로 한지(韓紙)를

깔아 층을 구분하여 직접 쪄서 준비한다. 오후에는 마을 회관 앞마당에 허수아비와 생 시누대나무를 세워 금(禁)줄을 친 사각 제단(祭壇)을 만들어 놓는다. 지난날에는 마을 중앙에 위치한 등밭마을 앞 논에 제단을 만들어 제사 장소로 사용했으나, 1999년 지금의 마을회관을 한옥(韓屋)으로 새롭게 건축한 후 2000년부터 마을회관 앞마당에 제단을 만들어 별신제를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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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대동계 매귀 보존회원들은 회관으로 나와 각자가 다루는 악기의 의상을 갖추고 상쇠 진행에 따라 회관 앞 광장에서 보름날 행사가 진행됨을 알린다. IMG_20180302_102411.jpg

이후 마을 입구 마장등(馬場嶝) 진서대장군 석장승과 여자 석장승에게 제사를 드려 한해 마을의 무사안녕을 기원한다. 이어서 마을 위치 뜸 순에 따라 주민들의 집에 들러 문굿, 마당굿, 샘굿, 성주굿, 장독굿, 조왕굿(정재굿 부엌) 등을 한다이중에 조왕굿(정재굿) 과정을 기술해보면 그 댁의  굿을 시작하면서 상쇠가 '주인주인  열어 지신밟기  줌세~, 하고 집안 내로 들어와 마당 한두 바퀴 돌고 샘에서 샘굿을 하고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댁의 액땜을 한다상쇠 '매귀여매귀패 어이~~, 상쇠 '금년  댁은 운수대통 만사형통 하고~, 매귀패 그러재~~, 상쇠 '농사도 대풍년 이루고~, 매귀패 러재~~, 상쇠 '천년만년 대대손손 이어주고~, 매귀패 그러재~~, 상쇠 '()과 복()은 쳐 들이고 잡귀(雜鬼) 잡신(雜神)은 쳐내자~, 온갖 잡귀 (雜鬼) 쳐내자~~, 군것 잡것 쳐내자.~~~하고 신나게 한판 놀고 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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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지신 밞기는 지난날에는 이틀에 걸쳐 행해졌으나, 시대변화에 따른 간소화와 이농현상, 고령화에 따른 주민 감소로 집주인의 청()에 의해 행해지고 있다. 점심때를 맞춰 매귀패는 회관으로 들어와 식사 후 오후 2시경 회관 앞 광장에서 매귀패들의 한판 놀이 후 별신제 제사를 모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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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는 집례의 유교식 진행 절차에 따라 초헌례, 공축, 아헌례, 종헌례로 진행된다. 음복례를 마친 후 허수아비 망태에 제물을 넉넉히 담아 횃불을 들고 산저마을 앞 허수아비골로 향하여 허수아비를 소나무 밑 개천에 놓아두고 주잔을 드린 다음 안녕을 구하고 돌아온다. ()을 버리면 별신제 제사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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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촌마을의 별신제와 매귀는 대동계(大同契)의 주관과 마을주민들의 보존 의지가 강하여 존속 유지되고 있다. 특히 매귀는 장흥군을 대표하여 전남민속예술축제에 1994~1995, 2012~2019년 간 총 10회 출전해오면서 2018년 진도군 개최 대회에서 우수상과 2019년 영광군 개최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여러 번 입상(入賞)하여 보존대책 마련이 절실하다.

매귀계 역사와 계보 ◆

①1800년대 등 이전의 방촌마을 매귀계 역사는 문헌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당대 양반과 상민 등 봉건적 신분제도가 있어 별신제에서 매귀는 무당(당골, 풍물패) 등 특정 신분의 사람이 참여한 것으로 사료된다.(필자 註) 1900년대 들어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중요한 역사는 생존 어른신들의 생생한 증언과 현존하는 마을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정월 보름 때 별신제를 모시면서 매귀와 함께 했음이 축문을 통해 알 수 있다. 내용 중에는 "불용무격(不用巫覡), 거기존고(去旗存鼓)" "무당을 쓰지 않고, 기는 버리며 북은 둔다."

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별신제 제사 때 무당(천민)에게 매귀(풍물)을 맡기지 않고, 일반(양반)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시대 문화가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축문은 선대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던 것을 1930년경 오헌(梧軒) 위계룡(1870~1948) 선생이 일부 정정·보완하여 오늘날까지 사용해오고 있다. 이러함은 이전부터 별신제는 매귀와 함께 해왔음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매귀에서 중심이 되는 상쇠는 관산읍 죽교리에 위치한 죽천사(竹川祠)에서 관리인으로 기거하였던 한문용(1895년생 추정)은 꽹과리 재능이 매우 뛰어나 장흥군 내에서 알려진 인물이었다. 방촌마을 위계섭(1918~1960, 제4대 관산면장)과 당동마을 백남인(1918~?) 두 사람은 한문용에게 재능을 배웠다. 이를 통해 위계섭은 방촌마을에 매귀을 지도, 전수하였다. 백남인은 1950년 6.25사변 후 장평면 우산리로 이사하여 농악을 지도하고 1980년대까지 우산리 농악을 이끌어 왔으며, 매귀계 초청과 매제(위신량)가 거주하고 있어 별신제에 자주 참여하였다.

방촌마을은 1960년 중반에는 180여 가구, 주민의 수는 1,100여명이 되어 이정을 책임지는 이장 아래에 행정 서기 1명을 둔 큰 마을이었다. 당시에는 매귀도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있었으며, 상쇠 위계섭에게 지도 받았던 사람들로는 동쪽에 아들 위연량(1940~1988, 동산밑), 위대환(1934~2016, 내동), 임창모(1934년생, 동산밑)가 있다. 서쪽에는 위영환(1916~1950, 탑동), 위계형(1922~2014, 탑동), 위은환(1924~1981, 호동), 위재열(1933~2011, 탑동)이 있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1960~1970년대 매귀는 재능 전수를 통해 발전을 거듭하면서 보름날 가가호호(家家戶戶)의 지신밟기는 동·서쪽으로 나뉘어 실시하고 등밭마을 논에서 모시는 별신제 제사에는 합동으로 참여했었다. 이때 매귀패가 논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서로 먼저 영기(令旗)를 들어오려고 경쟁하기도 했었다.

 

 
이후 1976년(이장 위연량) 동쪽과 서쪽의 매귀는 합하여 매귀계(埋鬼契)를 조직하여 보름날 별신제와 2일간 지신밟기, 음 2월 1일 하드랫날 행사를 주관하였다. 이를 통해 단합하면서 매귀 재능 전수와 보존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90년(이장 위노환) 이농현상에서 따른 고령화로 매귀계를 대동계 산하로 개편하고 보름날 별신제를 대동계에서 주관하여 모시게 되어 지금에 이른다. 매귀계의 책임을 맡았던 계장(契長)은 주로 상쇠를 담당한 사람들로 위은환, 위연량, 위재열, 위대환, 위노환(1944~2020, 호동), 위헌량(1949년생, 범산), 장구 위수환(1944년생, 호동)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보유하고 있던 재원은 1999년 마을회관 건립에 헌성하였다.

 

②매귀는 영기(令旗), 사령기(司令旗), 덕석기와 꽹과리, 징, 장구, 북, 대포수, 조리중, 양반, 나팔 등으로 구성되며, 각자의 재능의 따라 의상이 구별된다. 별신제 행사시 매귀패로 활동해온 주요 악기 계보 인명을 기술한다.

▲꽹과리 상쇠(부쇠·종쇠) : 위계섭, 위영환, 위계형, 위은환, 위재열, 위대환, 위연량, 임창모, 위종환(1935년생, 산저), 위노환, 위헌량, 위공환(1947년생, 계춘동), 이성격(1956년생, 탑동), 위백(1965년생, 산저)

▲징 : 위동량(1918~1988, 내동), 위성량(1931~2015, 범산), 위종환(1932~2003, 등밭), 위수환(1934년생, 산저), 위길환(1953년생, 범산), 위봉현(1959년생, 탑동)

▲장구 : 위사량(1924~1988, 호동), 위종량(1928~2000, 내동), 위염량(1938~2003, 산저), 위수환(1944년생, 호동), 위성종(1945년생, 시흥시 거주), 위숙환(1951년생, 서울시 은평구 거주)

▲북 : 위계동(1911~1975, 탑동), 위복량(1915~1989, 새터), 위신량(1920~1985, 동산밑), 위욱량(1921~1994, 내동), 위득환(1923~1990, 탑동), 위정환(1924년생, 동산밑), 백형수(1941년생, 새터), 위성계(1949년생, 탑동), 위여량(1954년생, 산저)

 

▲대포수 : 위권량(1936~1997, 산저), 위성염(1973년생, 산저)
▲조리중 : 정일남(1915년생 추정~?, 송현마을), 위상량(1917~1975, 탑동), 위장환(1920~1984, 내동), 위팔만(1933년생, 호동 번덕지), 위성선(1951~2002, 내동), 위흥환(1945년생, 등밭), 위점환(1950년생, 계춘동)
▲양반 : 위재현(1954년생, 계춘동)
▲나팔 : 위명환(1925~1982, 탑동)
▲영기 : 위외환(1940~1995, 산저), 위계환(1942~2019, 계춘동), 위두량(1947년생, 산저), 위성신(1955년생, 탑동)
▲홀기(笏記) 점검 및 축문(祝文) 작성 : 위욱량(1921~1994, 내동), 위용철(1922~2008, 계춘동) 위성환(1929년생, 내동), 위봉환(1930~2002, 새터), 위성량(1931~2015, 범산), 위진환(1937년생, 등밭), 위인환(1946년생, 새터)
▲허수아비 만들기 : 위문환(1917~?, 호산), 위팔만(1933년생, 호동 번덕지), 백형수(1941년생, 새터)
▲고깔모자 만들기 : 위명환(1925~1982, 탑동), 문복현(1929~2000, 새터), 위재열(1933~2011, 탑동) 등이다. 매귀에서는 여러 부자(父子)가 같은 악기를 다루면서 재능이 뛰어나 부전자전(父傳子傳)으로 이어졌음이 확인된다. 이밖에 이농과 고령화에 따른 청장년층 부재로 매귀 계원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자연 감소되어 2000년경부터 일부의 부녀자도 참여하는 등 급격히 변화되어 가는 농경문화를 볼 수 있다. 아울러 현재 매귀계를 이끌고 있는 위헌량(상쇠), 위수환(장구) 등의 체계적인 재능 전수(傳授)는 필수 과제이다.

2)무기계(無忮契)

 안항(顔巷) 위덕후(1556~1612)1576년경 방촌에 이주하면서 처음으로 방촌에 입향(入鄕)하여, 이미 살고 있던 任氏, 朴氏, 白氏, 金氏 등과 어울려 살다가 위씨의 세력이 넓혀면서 위씨 집성촌을 이루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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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계는 1791(정조 15) 방촌의 위씨 친족 30여 명이 원취당(願醉堂) 위도순(1739~1796) 선생을 중심으로 종친간의 화목을 목적으로 를 결성하자 존재(存齋) 위백규(1727~1798) 선생은 시기하지 말고, 서로 화목 하라는 뜻으로 무기계(無忮契)”라 명명하고 의미를 부여했다.존재 선생은 무기계 서문에서 시기(猜忮)’의 자학적(字學的)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자는 ’ 변에 ‘청(靑)’자를 붙였으니 개의 마음이고, ‘기()’ 자는 ’ 변에 (支)’ 자를 붙였으니 남과 함께 하지 않는 갈라진 마음이라는 것이다. 정리해 보면 시기(猜忮)는 온갖 의 근원이고 온갖 의 원수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선생이 우려하는 점은 계()에 재산(財産)이 있는데 재산이란 다툼의 창고라고 여겼다. 즉 재산으로 인해 알력이 생겨 형제간에 원수가 되고, 부자간에도 용서하지 않은데 촌수가 먼 일가 친족의 경우는 말할 나위 없다는 것이다. 이는 ()’자 즉 남을 해치는 마음은 싸움을 일으키는 곳이다. 잘못되면 도리어 위씨문중의 쇠망을 재촉한다고 걱정하면서 무기계라 칭하였다.

당시 조직원은 道純, 道立, 道及, 守粱, 道運, 道佺, 道洽, 道峻, 道澗, 道玉, 道任, 道億, 道英, 道集, 道昕, 道約, 榮一, 道經, 道晃, 榮國, 榮夏, 道根, 道璘, 道晟, 道輯, 道珏, 道秀, 道植, 道勳, 廉宗揵으로 그 장자(長子)가 승계하여 왔는데, 현재는 추입 한 계원들이 있어 40여 명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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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무기계는 옛 어른들이 활동했던 것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여름에는 중복(中伏) 날 자복(煮伏)을 통해 계원들의 화목을 도모하고, 4월 둘째 주 토요일 밤 11(子時)에는 천관산 아래 계양산에 설치된 제단에서 대동계에서 준비한 제물을 설찬(設饌)하고 제관들과 계원들이 참석하여 산신제를 모셔 한해 마을의 평온을 기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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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부터 일요일 행사를 "방촌의 날"로 제정하여 서울, 광주 등에서 거주하는 출향인들이 참석하고 마을 내 90세 이상 어르신들을 회관으로 초청하여 위안행사를 열어 경노사상을 고취하면서 주민 화합과 마을 번영의 잔치한마당 행사를 갖고 있다. 무기계의 재원은 논3두락과 일정액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

 

천관산 산신제 축문(天冠山 山神祭 祝文)

天冠山之神 嵩高維嶽 鎭此海陬 中州淑氣 于焉蓄止 嗙礴扶輿 發爲靈奇 巖峰崷崒 泉脉淨活 郊原溢澤 豊稔稼穡 崖谷氣厚 草樹茂茁 元元民生 依仰生息 英乂駿發 文武並顯 惟我有臨 靈異昭闡 白氣敲景 仙樂殷響 衆譽所萃 造化攸佑 凡丘剩陵 順迪惟命 風雨霜露 莫之興孽 肆惟一坊 各自精白 不戒胥孚 共迓靈休 掃玆壇墠 伏惟明神 降鑒微誠 俾我生靈 克生克養 奠我牲幣 恭脩蠲潔 敢陣心膂 胚息三元 上鳴民國 下敦民風 氓謳于農 士慶尙賓 截此名區 反朴還淳 菀惟靈譽 實歸于神 神人胥依 於千萬年 薦此吉蠲 歲以爲常 于是于止 我歆我聽 謹以 明水淸酌 恭伸奠獻 尙 饗

<천관산 산신제 축문 번역문>

천관산의 은 높고 높이 솟은 큰 뫼로 남해 바다의 섬들을 진압(鎭壓)하고, 중주의 맑은 기운 듬뿍 담아 모아 이 땅에 가득하니 신령스럽고 기이한 것이 피어나도다. 암봉(巖峰)이 뾰족뾰족 높이 솟음에 샘물은 맑고 활기차며 들판엔 물이 넘치고 심어 거둔 곡식은 넉넉하다. 계곡 기운 두터우니 草木이 무성하고 밑바탕 백성들은 우러러 낳고 자람에 의지하고, 영웅과 재주꾼 자주 일고 文武官이 함께 나타나게 하소서. 한갖 우리는 지켜보겠사오니 신령(神靈)스럽고 기이함이 밝게 들춰나고 좋은 기운 빛나게 두들기니 신선 음악 은은히 퍼지고, 뭇 칭찬 모여 조화롭게 도우며 크고 작은 펑퍼짐한 언덕에 시키신 대로 에 따르겠나이다. 풍우상로(風雨霜露) 흥얼거림을 막고 오직 한결같은 이 땅에 각자 스스로 정백하게 하며 경계치 말고 서로 믿고 다함께 신령님 쉴 곳 맞아 이에 단선을 청소하고, ()과 폐를 올려 조심스레 닦고 깨끗하게 하여 감히 온갖 정성 바치오니, 엎드려 바라오건데 명신께서는 降臨하시어 작은 정성 살피시고 우리들을 도와 영험(靈驗)을 일으키시면 생을 다하여 힘껏 받들겠나이다. 낳고 자란 삼원에 위로는 백성의 나라를 울리고, 아래로는 풍속(民風)을 돈독(敦篤)히 해서 백성들은 농가(農歌)를 부르고, 선비들은 손님 받드는데 정성을 다 한다면 분명히 이름난 마을에 질박하고 순박함이 반복 순환해서 좋은 칭찬 완유하여 진실로 모든 공이 신께로 돌아 갈 겁니다. 신과 사람이 서로 의지해서 천년만년토록 이 같이 길하고 깨끗함을 올려 해마다 계속하겠사오니, 신께서는 우리와 같이 좋은 음식 먹고 우리와 같이 좋은 음악 들읍시다. 삼가 맑은 물과 깨끗한 잔 조심스럽게 올리오니 흠향하시옵소서. 

 

 

 

4.내동 동계(內洞 洞契) 

행정상 방촌리 1반에는 등밭(嶝田), 객사골, 근래 개발로 입촌한 벅수골 지역(천관식당, 천관모텔 등), 동산밑터, 윗골 지역이 해당된다. 방촌리 2반은 내동 지역이다. 총 40호이나, 일부 고령 거주민이 집을 비우고 병원 또는 도시 자녀의 집에서 거주하는 사례가 있어 실제 30호가 거주한다. 지금의 천관식당과 천관모텔이 위치한 지역을 벅수골이라고 한다. 이곳부터 행정상 번지가 방촌리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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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회주목 때 치소 동헌의 북문동(北門洞)과 둔군동(屯軍洞)이란 지명이 지금도 전해져 불리고 있다. 석장승 진서대장군은 2013년 6월 17일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275호로 지정되었다. 벅수골에서 나지막한 고개 길을 넘으면 우측, 관산읍 장흥대로 1645에 방촌유물전시관이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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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방촌마을 내 후손 자택에서 소장해온 교지, 유고문집 등 선조 유물의 도난과 자연적 훼손 방지, 체계적 홍보 등 문화 관광사업 목적으로 정부의 4,300,000,000원 지원금을 들여 2005년 9월 6일 개관하였다. 현재 1,048점의 선대 유물이 소장 전시되어 있다. 유물전시관 전면에는 호조판서공 위덕화(1551~1598)의 신도비가 위치한다.판서공 신도비.jpg

公은 1585년(선조 18년)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의주(義州)로 피난 중인 선조(宣祖)를 호위하고, 혁혁한 전공을 세워 군자감정 겸 언양현감, 훈련원정에 제수되었다. 1605년 호성·선무공신에 훈록되고 아들 병조참판 위정철의 정사·진무공훈, 후금 회답사 사행 등을 감안하여 1631년 8월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도로 건너편에는 전라남도 지정 기념물 제134호 방촌리 지석묘군이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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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90여기의 지석묘를 포함하여 방촌마을 내에는 380여기가 산재한다. 지석묘가 집단적으로 분포함은 청동기시대에 이 지역이 중요한 지배층의 생활터전 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국도 23호선(장흥대로) 현 방촌리 사거리 주변 일대를 "객사골" 이라고 한다. 이는 고려 회주목(장흥부) 때 객사동(客舍洞)이 위치해 유래된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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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는 장흥위씨 세장비와 장흥향교의 천장(薦狀)을 받아 세운20200627_193037.jpg

위신식(1862~1890)의 配 효열부 여산송씨 행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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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계일(1880~1908)의 配 효열부 선산김씨의 비가 위치한다.

 

 ●등밭(嶝田)은 지금의 내동마을의 일부이나 내동 앞쪽으로 나지막한 줄기가 사장등(嶝)에서부터 남쪽으로 뱀처럼 길게 뻗어 있다. 수등들을 앞에 두고 건너편 남쪽 복와등(伏蛙嶝)과 대치하고 있는 형국(形局)이다. 여기에는 복와가 성(盛)하면 등전이 쇠(衰)하고, 등전이 성(盛)하면 복와가 쇠(衰)한다는 말이 傳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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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자락에 마을회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1800년 중반에 형성된 마을로 추정된다. 방촌마을은 배가 바다로 진출하는 행주형국(行舟形局)으로 등밭은 한가운데 돛에 해당되는 위치이다. 최초의 방촌리 마을 회관(會館)은 일제강점기 때 건축했던 기와지붕 목조 건물로 현재의 등밭 위축환님의 집 앞 논(과거 별신제 제단 장소)에 위치하였으며, 마을 주민은 1,000명이상 되어 1967년까지 이장 아래 서기 1명을 두고 행정을 처리하였다고 한다. 그 후 1968년 새마을운동 일환으로 농업진흥청에서 지원하여 건축했던 정미소가 화재로 전소된 장소에 시멘트 기와 지붕의 목조건물을 신축하여 1980년까지 사용해오다가 철거하였다. 1981년 2층의 벽돌 건물로 신축하여 1998년까지 사용해오다가 철거하였다. 마을 회관은 1992년 3월 24일 실시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관산읍 지역 제7투표소로 지정되어 방촌리, 송현마을, 평촌마을, 대평마을 주민들의 참정권을 행사한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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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장흥군 지원 및 주민 부담으로 기와지붕의 목조건물인 현재의 마을회관을 신축하였다. 내부 공간은 주민들이 운집할 수 있는 강당과 회주(남자) 경로당, 주방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최초 방촌마을 회관 때부터 통신 수단으로 사용했던 종(鐘)이 현재 마을회관에 보관되어 있다. 지난날에는 회관 옆 한쪽에 정미소(방앗간), 구판장, 이발소가 있었다. 정미소(精米所)는 1969년 위곤량(1936~1997)이 신축하여 운영하다가 1976년 화재로 전소되어 1978년 객사(客舍)골 밭에 신축하여 운영하였다. 1983~1989년 위주환(1949년생)의 운영을 거쳐 1990년부터 현재까지 김용칠(1957년생)이 운영하고 있다. 구판장(購販場)은 1962년 마을에 정미소 건축에 맞춰 들어섰다. 최초의 운영인은 탑동 거주 위계진(1907~1980, 위상배 조부)이었다. 이후에는 계춘동 거주 춘사(春史) 위용철(1922~2010)의 운영을 거쳐 호동 거주 광암(廣庵) 위사량(1924~1988)이 1973~1978년간 운영하였다. 1979~1981년간을 범산 거주 위예량(1946년생)이 운영하였고, 1982~1994년간은 동산밑에 거주했던 위연량(1940~1988)이 운영하였으며, 1995~2005년간 호동에서 거주했던 최종석(1936년생, 처 위야순)이 운영하였다. 이발소(理髮所)도 구판장과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열어 영업을 하였다. 최초 운영자는 알 수 없다. 두 번째 운영인은 새터 거주 문복현(1929~2000)이었다. 이후 운영인은 양두승(1949년생, 탑동 위숭량 처남, 현 관산읍내 광명이발관)이다. 마지막 운영인은 이성신(1952년생, 호동 위노환 매제)으로 1986년에 폐업하고 광주광역시 서석초등학교로 옮겨 구내 이발관을 운영하였다. 구판장과 이발소는 거주민들의 이농과 고령화에 따른 자연 감소 등 당시 농촌현실이 반영되어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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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산밑 뒤쪽에 상잠산과 사장등 밑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1750년경 현재 위정환님의 거주 터에 입촌하면서 마을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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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골은 안항(顔巷) 위덕후(魏德厚 1556~1615)가 당동마을에서 분가하면서 방촌 마을에 입촌 (위삼량님이 거주 했던 곳)한 후 마을이 번성하였다. 당대에는 윗골과 내동(안골)의 지명(地名)이 분리되지 않았다. 1800년에 접어들면서 현재의 위성국님의 집터를 중심으로 조성 되었다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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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동(內洞)은 상잠산(觴岑山) 서쪽 기슭 해발 40m 산을 등지고 천관산을 마주보고 있는 마을이다. 관산읍 방촌길 69-1에 위치한 판서공파종택(위성렬 소유)은 고려시대 1149년(의종 3)부터 1379년(우왕 6)까지 230년간 장흥부(長興府)와 회주목(懷州牧)의 치소인 동헌 터가 있었던 자리이다. 왜구의 침입으로 피난차 도읍을 나주 철야현(봉황)으로 옮겨간 후 고읍(古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인근에는 청금고택(현 근암고택, 위성환 소유) 등이 있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이곳 안촌(顔村, 현 내동)으로부터 방촌에 거주하는 장흥위씨의 씨족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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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서공파 종택은 위덕화, 위정철, 위동전으로 이어진 3대 무반가이다. 종택은 판서공의 配 정부인 죽산안씨(1560~1625)에 의해서 올려 지었는데, 속설에 의하면 대대로 남편 그리는 한(恨)을 풀고자함 이었다고 한다. 당시 죽산안씨와 장자 정철(廷喆 1583~1657)의 配이자 며느님 정부인 창령조씨, 차자 정혁(廷赫 1589~1627)에 의해 건축되었다고 전한다. 장자 정철(廷喆)은 경상도 곤양군수(지금의 경남 사천시 곤양면) 재임(1622년 1월~1623년 6월) 때이라 "두 분의 과부 할머님이 집을 지었다"고 전한다. 이는 판서공은 1598년에 별세하였고, 장자 정철(廷喆)은 제72대 곤양군수에 재임 중이라 일부 와전(訛傳)된 속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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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서공파 종택 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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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회주목 옥(獄)샘> 

또다른 종택 건축의 중요한 근거는 1945년(乙酉) 죽암(竹庵) 위계문(1865~1951)이 기존 집을 철거 할 때 상량문(上樑文)에 "天啓 三年(1623)"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때 판서공파 종택은 아래로 내려 신축하였다. 뒤에 기존 집터 흔적과 철륭단지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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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양왕환일기>

특히 병조참판 위정철은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여 영흥대도호부사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지내 교지 28매, 유서 3매 등 다수의 유품이 현존한다. 특히 1631년 3월 19일~4월 30일간 심양 회답사를 사행하면서 당대 후금(後金)과 조선(朝鮮)간의 조공(朝貢) 등 외교 현안 임무를 완수하면서 장계 형식의 〃瀋陽往還日記〃를 남겼다. 이를 통해 1627년 정묘호란 後~1636년 병조호란 前간 동북아 정세(政勢)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史料)로 역사적 가치를 평가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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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조판서 추증 3칸 사당>

사당은 위덕화가 1631년 8월 호조판서에 추증(追贈)된 후 건축되었다. 상량문, 구전 등을 근거하면 위정철이 제76대 가리포(완도)첨사 재임(1633년 2월~1635년 9월) 때인 1633년 사당을 건립하여 4차 중수를 거친 목조 건물이다. 손자 위동전(1649~1713)은 1676년 무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 거제현령, 상원군수, 진도군수, 남해현령, 용양위 부호군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특히 경상도 남해현령 재임(1710년 4월 28~1713년 1월 17일) 때 다수의 인명을 구하고 선정을 베풀어 절충장군(折衝將軍 정3품 상)으로 승계됨이 교지를 통해 확인된다. 판서공파 종택은 2002년 11월 27일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38호로 지정되었다. 제5대 송원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위성동(1943년생)이 이곳 태생이다.

 

관산읍 방촌길 65-6에 위치한 근암고택(勤庵古宅)은 1649년(己丑) 청금(聽禽) 위정훈(1578~1662) 선생이 현재의 터에 집을 내려 지었다. 집을 지으면서 호산마을 앞 남산에 있었던 마을 화수정이라 할 수 있는 장춘대(長春臺)를 중수하면서 일부의 자재를 옮겨지었다고 전한다. 청금 위정훈 선생은 어려서 중부(仲父) 성균생원 청계(聽溪) 위덕의(1540~1613)로부터 학문을 수학하였다. 1612년(壬子) 성균진사에 입격하고 장흥 서원의 효시인 예양서원(汭陽書院) 창건을 주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 때 의병·의곡을 모아 국난에 참전한 功으로 1659년 노년에 의금부도사로 제수되었다. 이 고택은 후손의 보수를 거쳐 전해 내려와 1910년경 9대손 근암(勤庵) 위계상(1879~1948)이 거주하면서 보수한 목조 건물이다. 현재 마을 내 고택 안채 건물 중에 가장 오래된 가치가 인정되어 아호를 따라 근암고택(勤庵古宅)이라 명명하고 2010년 8월 27일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46호로 지정되었다. 청금고택은 1649년(己丑) 기와를 올려 집을 신축하였다. 이를 뒤받침 하는 근거 자료는 2011년 지붕 기와를 교체하면서 "順治 己丑" 이란 글자가 기록된 망와(望瓦 지붕위 마루 끝에 세우는 우뚝한 암막새)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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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암고택 안채>

이는 병조참판 위정철이 1644년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한 후 종형(從兄) 성균진사 위정훈, 웅천현감 위정렬과 함께 당대 국풍(國風)으로 불리던 이의신(李懿信)을 대동하여 천관산에 올라 지금의 근암고택과 계춘동 존재고택 자리를 잡았다고 전해 내려오는 구전을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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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당대 정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망와는 방촌유물전시관에 소장하고 있다. 현재의 근암고택 옆 위성빈 가옥 터의 옛 지명은 "반계(磻溪)"라고 한다. 이는 청금 위정훈 선생의 동생 반계 위정명(1589~1640) 선생이 옆에 터를 잡아 분가하여 3형제의 정착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26세(伯,師,相), 27세(道,守) 때 번손되어 근거리로 분가 과정을 거쳐 계춘동, 새터, 호산, 산저, 탑동, 호동, 등밭 등의 성촌으로 방촌 영역(領域)이 넓혀졌다. 전반적으로 내동의 주거지 형성과 발전은 상잠산(觴岑山)의 지세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고, 이로 인해서 좌향(坐向) 역시 일부 남향(南向)을 제외하고 모두 천관산을 마주보는 서향(西向)으로 자리하고 있다. 마을 안길도 촌락 형성대로 주거지 아래쪽에 형성되어 있고 가옥들은 안길 바깥쪽과 짧은 샛길을 두고 그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안항 위덕후의 입촌 당시는 안촌(顔村)이나 안항(顔巷)이라 이름 하였던 마을이 내동(內洞)으로 불리어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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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동과 계춘동 마을 뒤에 펼쳐져 있는 상잠산에 늦은 허리 안개(저녁놀)가 둘러싸여 있는 아름다움을 "상잠만하(觴岑晩霞)"라고 하며 방촌8경 중, 제3경에 해당된다. 내동 동계는 "內洞 洞契案" 문서를 보관 관리하고 있다. 지난날 임종(臨終)시 매장(埋葬)이 성행하였을 때에는 유사(有事) 2인이 2년간 일을 맡아 관리하였다. 당시 집에서 장례를 치르면서 사용했던 놋그릇, 차일 등 물품 일체를 보관 관리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화장(火葬)과 장례식장 이용에 따라 간소화 되면서 유사 1인이 2년간 일을 맡아 보고 있다. 현 보유 재원은 현금 30,000,000원이다.

5.계춘동 동계(桂春洞 洞契) 
계춘동은 내동 마을 길과 연결되어 상잠산과 다산등() 연결지맥 아래 약간 깊숙한 곳에 위치한다. 마을의 주거 형성 과정은 1600 중엽 안항(顔巷) 위덕후의 차자이자 통훈대부로 웅천현감을 지낸 위정렬(1580~1656) 분가하여 처음 터를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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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고택>

관산읍 방촌길 91-32에 위치한 존재고택(存齋古宅)은 내동 근암고택과 비슷한 시기(1649년경)에 위정렬이 신축하여 후손에게 전해 내려왔다. 公은 임진왜란 후 1603년 4촌 아우 정철과 함께 고금도에서 실시된 무과에 급제하고 사도진관 녹도수군만호, 웅천현감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웅천현감으로 재임 때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남한산성 전투에 참전하였다. 인조의 항복으로 관직에 뜻을 접고 고향 방촌에서 여생을 보냈다. 존재 위백규(1728~1798) 선생은 公의 4대손 이다. 고택은 안채, 사당, 사랑채, 헛간채, 대문채, 연못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의 안채는 서남향으로 1937년(丁丑) 신축하였다. 안채 뒤쪽 우측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4대 신주를 모신 사당이 위치한다. 사랑채는 영이재 위문덕(1704~1784) 선생과 존재 위백규 선생이 기거하였던 서재로 안채 우측 한쪽에 위치하며, 건물은 1775년(乙未)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헛간채는 안채 좌측에 위치한다. 101세의 고령인 11대 종부(수원백씨)가 안채에서 생활이 어려워 개수하여 기거하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문 앞 우측에는 연못 옥련정이 있다. 연못 앞으로 실개울이 흘러서 집 동쪽을 휘감아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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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 존재 선생이 서재에서 글공부를 하던 , 개구리 울음소리에 지장이 있어 하루 저녁에는 시끄럽다고 부적(符籍) 써서 연못에 넣으니 그때부터 연못에서 개구리 울음 소리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뒤에는 동백나무 숲이 남녘의 정취를 더한다. 선생은 1796(丙辰) 정조대왕에게 만언봉사(萬言封事) 올리고 옥과현감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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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언봉사에 대한 정조대왕 비답>
정현신보(政絃新報), 환영지(寰瀛誌) 실학 저서 90여권을 남겨 오늘날 학문사상 연구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다1984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161호로 지정되었다. 당시 명칭은 '장흥위계환가옥(長興魏桂煥家屋)' 이었으나, 선생의 () 따라 2007 1 29 '장흥 존재고택' 으로 지정 명칭을 변경하였다. 주변 가옥들 중에는 1700 중엽 후반에 위경호님의 터와 위성룡 가옥 터를 중심으로 점차 마을이 형성됨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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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헌고택>

계춘동 마을에는 존재고택과 더불어 죽헌고택이 자리 잡고 있어 마을의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죽헌고택은 관산읍 방촌길 101에 위치한다. 죽헌(竹軒) 위계창(1861~1943)이 살았던 집으로 사랑채, 안채, 사당, 곳간채, 대문채로 이루어져 경관이 뛰어나고 내부 구조가 원래대로 보존되어 1986년 2월7일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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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는 1919년(己未) 위계창이 신축하였다. 5칸 겹집으로 앞면에 차양용 처마를 덧달았으며, 사랑채에서 안채를 볼 수 없게 담장을 쌓아 내·외 생활을 구분하였다. 마루에는 당시 대학자로 한말 의병활동을 펼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 1845~1910)의 기문(記文) 편액과 소파(小波) 송명회(1872~1953)와 설주(雪舟) 송운회(1874~1965) 형제가 쓴 당호(堂號) 편액 등이 걸려 있어 교유의 폭을 엿볼 수 있다. 뜰아래에는 잘 꾸며진 정원과 연못이 있고 천관산이 한 눈에 보여 시음(詩吟)이 절로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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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안채는 1946년(丙戌) 위계창의 아들 위대량(1884~1951)이 6칸으로 신축하였다. 대문에서 안채로 들어오는 공간은 층층의 돌계단으로 조성하여 자연미를 더하고 있다.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이 있고 부엌과 작은방이 있으며, 뒤편에는 적벽돌로 높이 쌓은 굴뚝이 있다. 안채 오른쪽에는 사당이 위치하며 4대 신주(神主)를 모시고 있다. 대문채는 1963년 해체하여 천관사 칠성당(七星堂)에 옮겨지어 현존하지 않는다. 계은(桂隱) 위대량은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으로 1930~1937년 고읍면장 재임 중에 소재지 옥당리 시가지를 개설하고, 송촌리 대평마을 앞 간척사업을 추진하여 300두락의 농토를 조성하였다. 1939년 장흥향교 전교를 지냈고 개인 논 110여 두락을 문중에 희사하는 등 지역과 문중 발전에 공헌하였다.  

 

고택은 죽헌 선생의 증손 위성룡(1938년생)이 소유하고 있다. 그는 1960년대 초 박정희 정부 때 경제기획원 공무원에 몸담아 재직하면서 필리핀 대사관과 미국 대사관 파견, 총무국장, 경제담당 협력관, 아시아개발은행 이사 등 요직을 지냈다. 퇴직 후에는 한국보증보험 초대 사장으로 발탁되었다. 특히 경제기획원 초기 근무시 정부 지원으로 독일 유학을 다녀와 독일어에 능통하였다. 1966~1977년간 경제개발 일환에서 추진한 독일 광부, 간호원 파견과 외화 차관 업무에 깊숙히 관여, 담당하여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아들 위구연(1972년생)은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교 전자공학 석좌 교수이다. 저전력·고성능·인공지능 프로세서 분야의 세계적 석학 중 한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2019년 삼성전자에서는 위구연을 펠로우(Fellow)로 영입하였다. 펠로우(Fellow)란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한 전문가에 부여하는 회사의 연구 분야 최고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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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춘동 마을은 내동 마을과 같이 지형에 따라 일부 남향(南向)이고, 대체적으로 천관산을 마주하는 서향(西向)이다. 계춘동 마을의 동계 조직을 알 수 있는 "계춘동 동계안(桂春洞 洞契案)" 문서가 있다. 계춘동은 "맑은 샘과 골짜기가 아름답고 연못과 정원의 화초가 늘상 피어 있어 마을 사람 위세보(1669~1707) 선생은 詩·書·畵 3절(絶)로 스스로 즐기며 살았다"고 전한다. 또한 계동춘풍(桂洞春風)은 계수나무 골에 부는 봄바람은 항상 훈훈함의 표현을 "계동춘풍(桂洞春風)" 이라고 하며 방촌8경 중, 제2경에 해당된다.

 

마을 뒤 성잠산 자락 송현마을로 가는 길목에는 다산재(茶山齋)가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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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삼족당 위세보 선생이 타계하자 아들인 영이재 위문덕 선생이 시묘살이 하는 곳을 석류헌(錫類軒)이라 하여 묘각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1784년(甲辰) 존재 위백규 선생이 다산재(茶山齋)를 창건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선생의 증손 위경곤(1812~1864)은 다산재를 지금의 자리에 옮겨 신축하였다. 1950년(庚寅) 6대손 위필량(1895~1964)과 산음(山陰) 위근(1883~1971)이 중수하였다. 중수에는 탑동 거주 대목장(大木匠) 염병일(1905~1982)이 참여했다. 이곳은 웅천종중의 묘각으로 활용하면서 한편으로 1970년대 중반까지 다초(茶樵) 위복량(1897~1979) 선생 등이 후손들을 강학한 장소이기도 하다. 2002년(壬午) 관리사의 과실로 재당(齋堂)이 전소된 후 후손들의 헌성 참여와 장흥군청의 재정 지원을 받아 2003년(癸未) 신축하고 경내에 묘정비(廟庭碑)를 근수(謹竪)하였다. 묘각 뒤 우측에는 존재 위백규 선생 등 선조 묘소가 위치한 묘역이 자리잡고 있다. 매년 음 10월 2일 음통덕랑 위동식(1640~1708) 등 이하의 선조 17위의 가을 시제를 모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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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壬寅)년 장흥의 유림들은 존재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서재 위쪽에 단(壇)을 세웠다. 그후 1984(甲子)년에 다산사(茶山祠)를 건립하고 존재 선생을 주벽으로 배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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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서계공 위백순(1737~1815), 죽오공 위도한(1763~1830), 다암공 위영복(1832~1884)을 추배하여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매년 陰 3월 15일 제향한다.

현재 행정상으로는 방촌리 3반으로 경계 범위는 내동 방향에서 첫번째 위점환님 가옥부터 다산재(茶山齋)까지 포함하고 있다. 지난날에는 존재고택을 중심으로 일대를 "우대미" 죽헌고택을 중심으로 한 일대를 "아대미"라고 불렀다. 마을 동계에서는 2000 以前까지 4 신기동계와 공동하여 주민 임종(臨終) 장례(葬禮) 주관하는 부상계(賻喪契) 있었다. 현재 15호가 거주하고 있으며유사 1인이 동계(洞契) 일을 보고 있다. 보유 자산은 현금 40,000,000 이다.
 

6.신기 동계(新基 洞契)

천관산 기슭인 서쪽에서 바라볼 때 동쪽의 마을은 전체적으로 한마을 群으로 보이고 실제 마을구조의 혈관이라 할 수 있는 마을 안길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새터 마을은 내동, 계춘동과 달리 집촌(集村)으로 형성되지 않고 3개群 정도로 흩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방촌 동쪽에 마지막으로 조성된 마을이라 새터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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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1년(辛丑) 상원군수 위동전(1649~1713)의 三子, 간암(艮菴) 위세옥(1689~1766) 선생은 33세 때 한양 생활을 청산하고 부친(父親)의 고향이자 두 형이 살고 있는 방촌에 입촌하였다. 새터마을 남쪽 뜸에서 일정기간 거주하다가 대덕읍 초당으로 옮겼다. 이를 뒷받침 하는 간암정 터는 현재 위관철 가옥 일대로 "가남쟁이"란 지명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훈도공 위방(1532~1593)의 7대손 위도흠(1763~1858)이 선대부터 200여년 동안 거주했던 고흥군 국도(國島 현재 외나라도)생활을 청산하고 1780후반 년에 방촌으로 돌아와 현재의 위인환 거주 터에 정착하였다. 이후 후손들은 주변 지역으로 분가하여 주요 터전이 되었다. 위세량 가옥 터는 장흥위씨가 아닌 타성의 주거지이며, 마을 삼괴정 앞 야산 터안과 송치등(嶝)에는 도강김씨가 거주했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를 뒷받침 하듯 지난날 밭에서 기와장이 일부 발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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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와고택> 

다산재로 가는 길목 좌측, 관산읍 방촌길 111-17에 신와고택(新窩古宅)이 위치한다. 이 고택은 1800년대 중엽 위재경의 6대조부 위영형(1808~1855)이 터를 잡아 조성하였다. 이후 중건한 신와 위준식의 호를 따라 "장흥 신와고택"으로 명명하였다. 서향(西向)으로 건물은 안채, 사당 등 6동이 들어서 있다. 안채는 1950년(庚寅)에 신축하였다. 가옥의 역사와 내력, 반가(班家)로서의 건물구성, 각 건물의 건축내용 등에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2002년 11월 27일 전라남도민속자료 제39호로 지정(장흥 위봉환 가옥)되었다가 2012년 4월 13일 국가민속문화재 제269호로 승격 지정되면서 명칭도 장흥 신와고택으로 변경되었다. 지난날 고택 뒤쪽에는 7~8호가 거주하였다. 이중에는 부산으로 이사하여 갖은 노력으로 흥우산업(株)을 창업한 사업가 우원(友垣) 이득배(인천人 1934~1985)가 태어나 14세까지 살았던 곳이다. 그는 관산지역 후진양성을 위해 장학사업을 펼치고 모교인 관산국민학교 등 지역기관에 앞장서 희사하여 고향 발전에 기여하였다. 또한 재부향우회를 조직하고 3번 향우회장을 맡아 향우들의 단합과 고향사랑을 몸소 앞장서 실천하면서 부산지역 정계, 경제인 등과 친분을 쌓고 교류하여 지역감정 해소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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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앞에는 삼괴정(三槐亭) 이라는 고인돌 20여기 群이 있다. 고려 회주목(懷州牧) 때 명기(名妓) 옥경과 명월이가 느티나무 3그루를 심었다하여 여기정(女妓亭)이라 불렀는데 연재(淵齋) 송병선 선생이 1898년 3월 30일 이곳을 찾아 삼괴정(三槐亭)이라 명명하고 제일 큰 바위에 새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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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속 바위 "三槐亭" 중, 괴(槐)자를 살펴보면 나라 위자(魏)와 같이 뒷부분 귀신 귀(鬼)의 위부분 점을 떼고 하단 부분을 엎어 써 장흥 일원에서 쓰고 있는 위자와 유사한 형태의 글자로 고인돌 바위에 남겨져 있다. 원래에는 느티나무 3그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후에 2그루는 태풍에 쓰러지고 말라 고사한 것으로 傳해 온다. 가지에 잎이 무성하게 피면 풍년이 들고 세력이 약하게 피면 흉년이 든다고 傳한다. 수령(樹齡)은 700년이 넘고 전라남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완도군 금당도가 쉽게 조망되어 선대에서는 수창(酬唱)과 풍류를 즐겨 방촌8경 중, 조그만 돛을 단 조각배가 금당도로 돌아가는 아름다움을 표현한 제8경 "금당귀범(金塘歸帆)"에 해당된다. 근래에는 여름철 휴식이나 회의 장소로 이용되면서 청년들의 힘겨루기에 사용된 "들독" 이 지금도 놓여 있어 농경문화의 흔적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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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마을은 행정상 방촌리 4반에 해당된다. 경계 범위는 서쪽으로는 범산 앞 개천 넘어서 위두량님 거주지부터 해당된다. 동쪽으로는 다산재 길목 동산등(嶝)까지이며, 남쪽은 위관철님 거주 아래 비랫등(嶝)까지 해당된다. 방촌8경 중, 제1경에 해당하는 "동산제월(東山霽月)"은 장천재에서 봤을 때 동산 위로 솟아 오르는 달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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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는 동산제(東山祭)를 주관한 사제계(社祭禊)를 중심으로 운영해왔으며, 신기동계안(新基洞契案)과 사제계 문서가 현존한다. 당시에는 마을에 30호 이상 거주하여 자연스럽게 동계도 활성화 되어 유지해왔다. 2000년 이전에는 계춘동계와 부상계(賻喪契)를 공동으로 운영하여 장례(葬禮)를 주관하였다. 이후 거주민의 고령화로 13호로 줄어들어 2013년 동계를 파(破)해 아쉬움이 남는다. 
 

7.산저 동계(山底 洞契)
산저마을은 천관산 동쪽의 성조골과 대나무골이 멈추는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성조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마을 앞쪽으로 흐르고 개천 위쪽에 마을을 형성하여 남향(南向)하고 있는 곳은 양달 산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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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 건너 대나무골 쪽 자락에 위치한 마을을 응달 안산저라고 한다. 천관산 바로 밑의 마을로 지형이 마치 돼지가 산으로 올라가는 형국(形局)이라고 해서 불린 이름으로 뫼밑등(嶝) 이라고도 불리었다. 최초에는 '뫼산(山)' '돼지저(猪)'를 합하여 산저(山猪)라 표기하였으나, 지금은 산 밑이라는 의미로 산저(山底)로 표기하여 쓰고 있다. 구전(口傳)에는 이씨, 김씨, 배씨 등이 터를 이룬 마을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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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뒷받침 하는 응달 위정희님 가옥 옆 뜰이 "배가들터"란 지명으로 불리고 있다. 산저에는 1860년경 서암(西庵) 위덕기(1835~1905)가 탑동에서 분가하여 현재 위 백님의 집터에 입향하여 마을이 형성되었고, 집안 내 4대 봉사(奉祀) 장소인 사당(祠堂)은 1952년(壬辰)에 신축하여 자리하고 있다. 응달 산저마을 뒤 계곡 지명을 도곡(道谷)이라 한다. 방촌8경 중, 제7경에 해당하는 도곡귀운(道谷歸雲)은 산저마을 뒤 도곡에서 넘어오는 석양녘의 구름은 사뭇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문중서적을 도맡아 번역한 도곡(道谷) 위계방(1929~2014)님이 이곳 산저 태생이다.   
    
방촌마을 회관에서 앞 국도를 이용 남쪽으로 300여미터 가다보면 산 아래 우측에 호산(범산)마을이 위치한다. 천관산 성조골 아래 구릉성 야산 비탈면에 조성된 마을로, 전체적인 마을 형상(形像)이 호랑이 같이 생겼다고 하여 "虎山"이라 하였다. 위백환님이 거주했던 집 아래 도로가에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과 위길환님 집터 아래 우물 등 2곳이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이 2곳의 우물이 호랑이의 "눈(目)"이고, 가운데에 위치한 위헌량님 거주 집터는 "입(口)"에 해당된다고 傳한다. 호산 마을은 존재선생의 차자(次子) 양천(陽川) 위도급(1754~1821)이 1770 중반년에 계춘동에서 분가하여 현재의 위도환님의 가옥 터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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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안길은 전면의 큰 도로에서 급한 경사를 계단으로 처리하였으나, 북쪽에서 옆으로 비스듬하게 설치하여 편리성을 도모하였다. 분가과정에서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영역이 자연스럽게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난날 다산재(茶山齋)와 평촌 유천재(柳川齋)에서 한학을 강학(講學)하였던 다초(茶樵) 위복량(1897~1975) 선생의 생가와 경향신문사 사장을 역임한 고영재(1948~, 관산 용전 거주)님이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까지 생활한 외가(外家) 위현량님 집에는 거주인이 없어 빈집으로 남아 적막감과 서글픈 마음이 앞선다.
    
범산마을 앞 개천에 흐르는 물은 천관산 자락 계양봉 아래에서 발원하여 계양재(桂陽齋) 옆 방촌저수지에 담수(湛水)된 다음 탑동 마을을 거쳐 흘러 내려온다. 산저마을 가운데 개천에 흐르는 물은 천관산 자락 성조골 성동폭포(聖洞瀑布)에서 발원하여 양달 산저 앞을 거쳐 흘러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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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골에 비가 내리게 되면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의 길이는 20m 정도에 이르고, 겨울철에는 폭포수가 얼어 있어 얼음골이라 부른다. 이곳은 방촌8경 중, 제6경의 성동폭포(聖洞瀑布)라고 한다. 이 두 물줄기는 산저 "허제비골" 앞 계천에서 합류(合流)하여 평촌마을 유천재(柳川齋) 앞과 대평마을 들판을 거쳐 득량만(得糧漫) 바다로 유입(流入)된다. 현재 산저와 범산은 행정상 방촌리 5반에 해당된다. 거주민은 21호이다. 2000년 이전에는 부상계(賻喪契)를 공동으로 운영하여 장례(葬禮)를 주관하였다. 동계와 관련된 "山底洞契案" 문서를 현재까지 보존 사용하고 있다. 다만 장례(葬禮)시 사용했었던 물품 일체를 1990년경에 도난 피해를 당하였다. 보유 자산은 논 4두락과 현금 8,000,000원 이다.
 

8.탑동 동계(塔洞 洞契)
탑동(塔洞)마을은 천관산 동쪽자락 아래 평탄한 지형에 입지(入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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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대로변 마을 입구 동산 아래에 위병량(1879~1900)의 配 효열부 인천이씨의 행적비가 위치한다.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으로 사정고탑(射亭古塔)이라고 한다. 1992년 탑()을 도난 당해 기단(基壇)만 남아 있던 것을 2008년 주민들은 탑을 복원하여 탑동(塔洞)의 면모를 찾았다.

방촌8경 중, 제5경 탑동효종(塔洞曉鐘)은 천관산 주변에는 89개 암자가 있었는데, 이중 탑동에 있던 암자의 새벽 풍경소리가 듣기 좋음을 표현한 것이다. 마을 전면에는 넒은 "사정이 들판"이 형성되고 건너편 등전, 내동, 계춘동, 신기 등 동쪽마을이 보인다. 장흥위씨의 최초 입향은 존재선생의 둘째 동생 동산(東山) 위백신(1736~ ?)이 1760년경 계춘동에서 분가하여 현재의 위성계님 가옥 자리에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옥은 口傳에 의하면 입향 당시에 지어진 집이라고 傳해진다. 안채는 근래 들어 크게 보수하여 옛 모습이 많이 사라졌다. 보수 前의 옛집은 방의 문턱이 상당히 높았다고 하는데 이는 호랑이가 무서워 방어 수단으로 집의 구조를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한다. 필자는 지난 시절 고향 방촌에서 〃에라 호랭이나 물어가라, 지랭이 호랭이는 뭐한지 모르건 네...〃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지랭이는 탑동 뒤 천관산 자락 계양봉 아래 골짜기 일대를 부르는 지명이다. 마을은 장흥위씨가 입향하기 前부터 타성들에 의해 성촌(成村)되었던 마을이다. 원래 계양봉 밑 계양동에 있었으나 호랑이가 무서워 지금의 마을 자리로 내려 옮겨왔다고 傳한다. 옛날에 실제로 마을까지 호랑이 출몰(出沒)이 있었는지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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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 중에는 장흥위씨 외에 파주염씨, 인천이씨가 있다. 염씨는 1780년경에 염종건(廉宗揵)이 보성군 문덕에서 안항공 5대종손 위백원(1709~1793)에게 시집온 고모할머님을 뒤따라 입촌한 후 7대손까지 200여년 거주하였다. 이중에 5대손 염병일(1905~ ?)은 당대 대목수로 널리 알려져 다산재(茶山齋) 중수에 참여했다. 이씨는 현재 이안주님이 거주하고 있다. 1880년경 증조부 때 용산면 접정에서 처가인 방촌에 입촌하였다고 한다. 마을 안길은 호동에서부터 내려온 작은 길이 마을 안쪽으로 연결되고 이 길은 호산(범산)으로 연결되어 있다. 마을 뒤에는 계양봉에서 흘러 내려온 물을 담수(湛水)한 방촌저수지가 있다. 1961년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축조하였다. 적은 규모로 토사가 쌓여 있고 유입된 수량(水兩)도 적어 재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되었다.

마을 뒤 계양산 자락에는 계양재(桂陽齋)가 위치한다.

계양재.jpg

이곳은 반계 위정명(22세 1589~1640)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1978년(戊午) 안항공파 반계종중에서 건립하였다. 매년 4월 첫째 일요일 반계선생 이하 후손 35位의 제향을 봉행한다.

 

방촌리 309-1번지 탑동마을 앞 들판 가운데 양사정(楊社亭)이 위치한다.양사정 전경 1.jpg

이 정자는 2010년(戊子) 장흥군청(군수 이명흠)의 마을 정자 짓기 추진 사업 지원금 25,000,000원과 탑동 동계금 35,000,000원 등 일금 60,000,000원 예산으로 그해 6월 23일 준공하였다. 사정이 들판에 위치하여 시원한 남풍이 불어와 마을의 주요 회의, 삼복더위 때 복달임 모임 장소로 활용 등 6월~9월간 여름철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호동마을.jpg

호동(壺洞 쇵골)마을은 천관산 계양봉(325m) 지맥(地脈)이 북동쪽으로 이어지면서 나지막한 야산 망치봉(83m) 아래에 위치한 남향(南向) 마을로, 풍수설에 의하면 개가 새끼를 품고 있는 형국(形局)이라한다. 위쪽 천관산 자락 계양 마을이 동네를 감싸 안고 있고 좁은 목에서 점점 앞들 쪽으로 넓어져 술병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번덕지.jpg
또한 위팔만님 거주 가옥부터 천관산 입구 주차장 앞까지 넓은 공간 뜸 지명을 〃번덕지〃라고 한다. 마을은 2곳의 뜸으로 형성되어 있다. 입향은 원취당(願醉堂) 위도순(1748~1816)선생이다. 1770년경에 현재 위성탁님 거주 오헌고택(梧軒古宅)에 터를 잡아 이후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본다. 오헌고택은 오헌(梧軒) 위계룡(1870~1948) 선생에 의해 완성되었다. 1918년(戊午)에 안채와 사당이 축조되었고, 사랑채는 1923년(癸亥)에 지어졌다.  

오헌고택.jpg

<오헌고택>

문간채, 연못 등 8개 건물로 구성되어 있고, 축조 당시 공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다양한 민속생활사 관련 자료를 소장하고 있어 지역문화와 향촌 생활사 등의 연구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특히 12代가 연속해서 문집(文集)을 남긴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前 조흥은행장 위성복님이 이곳 태생이다. 옆집 위수환 가옥은 존재선생의 셋째 동생 서계(書溪) 위백순(1737~1815) 선생의 三子 위도업(1772~ ?)이 1800년경에 터를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4대 봉사(奉祀)의 장소인 사당(祠堂)은 1849년(己酉) 윤 4월 6일 상량 신축하였다.

천관산 자락 장천동(長川洞) 계곡 입구 뇌문탄(雷聞灘) 앞 물줄기를 놓고 1940년경, 방촌마을 오헌(梧軒) 위계룡 선생과 당동마을 백수인 선생 등이 중심 되어 재판(裁判) 소송을 하였다. 이 재판을 거쳐 방촌마을이 승소(勝訴)한 후 한쪽에 수로(水路)를 설치하여 물길을 방촌마을 쪽으로 흐르게 하였다.
뇌문탄.jpg

이 물줄기는 천관산길 한쪽 수로를 통과하여 호동(반덕지) 앞을 거쳐 방촌 사정이 들판을 적셔주고 호산 앞으로 흐른다. 마을길은 천관산 입구 주차장 앞에서 시작한 길은 마을안쪽으로 통하여 있고, 좌측 길은 방촌마을 앞 국도와 우측 길은 탑동과 연결되어 있다. 방촌8경 중, 제4경에 해당된 호동초적(壺洞樵笛)은 장천동, 호동 일대에서 나무를 해오며 부르는 초동들의 아름다운 피리소리를 표현한 것이다. 방촌에서는 피리를 흔히 "촐래"라고 하는데 두개의 피리를 한입으로 부는 쌍촐래 소리는 더한층 아름답다.
    

탑동과 호동마을은 행정상으로 방촌리 6반에 해당되며, 현재 21호가 거주한다. 탑동의 경계는 좌측 안쪽 위봉현님의 가옥을, 우측은 위주량님의 가옥이 경계가 된다. 호동의 좌측 경계는 계양재, 위쪽은 천관산 주차장 입구 회주고성 터 줄기, 우측은 안쇵골 초입 지왓등(嶝)이 각각 해당된다. 지난날 부상계(賻喪契)를 운영하여 장례(葬禮)를 주관하였다. 동계와 관련된 "塔洞洞契案" 문서와 장례시 사용했던 상여틀 등 물품일체를 현재까지 보존하고 있다. 보유 자산은 논 18두락과 현금 20,000,000원 이다.^^

 

9.현대 인물 및 과제

위계본(장흥군 유도회장), 위덕량(장흥향교 전교), 위계섭(관산면장), 위욱량(장흥향교 전교), 위용철(1999년 기묘보 편찬 도유사), 위민환(전남일보 주필), 위승환(관산면장), 위성탁(초등학교장), 위황량(장흥향교 전교), 위성렬(유물전시관건립추진위원장), 위규량(초등학교장), 위임환(육군 중령), 위성용(경제기획원 경제협력관, 아시아개발은행 이사), 위각환(의학박사 병원장), 위성백(육군 대령, 에스원사장), 위기량(중등학교장), 위맹량(시인), 위성복(조흥은행장), 위풍환(의학박사 병원장), 위두환(양천구의회 재선의원), 위백량(법학박사 일본 오사카대학교 교수), 위동환(국립현충원장 이사관), 위용환(화가, 신한은행 지점장), 위성동(송원대학교 총장), 위지환(우신기계 대표이사), 위추량(물리학박사 미국 뉴욕주립대 교수), 위공환(농촌지도자 중앙회이사), 위성철(공군 중령, 항공사 기장), 위성(문화관광해설사), 위영희(광주시청 서기관), 위성천(장흥축협조합장), 위내환(초등학교장), 위홍환(문학박사 중등학교장), 위성문(국민은행 지점장), 위경애(서예가), 위행복(문학박사 한양대 교수), 위황(국민은행 지점장), 위근량(그린내장건설 대표), 위평량(중앙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 위승철(경기도의회 의원), 위성근(신한은행 지점장), 위구복(의학박사 병원장), 위상배(경영관광학박사 서정대 교수), 위형운(양천구의회 의장), 위평환(삼성전자 상무), 위승훈(회계사), 위대훈(변호사), 임병록(법원 서기관), 위성웅(화가, 동국대 강사), 위구연(전자공학박사 미국 하버드대학교 석좌 교수, 삼성전자 Fellow), 위재천(KBS 아나운서), 위수영(서경대학교 피부미용학박사, 위뷰티 대표), 위정희(송파여성문화회관 관장) 등이다.

방촌마을 주민들은 전통문화에 대한 존속 의지가 강하여 맥(脈)은 이어져 오고 있다. 산업화에 따른 이농(離農)현상, 고령(高齡)화, 문화 환경변화 등으로 존속에 어려움이 현실화 되어 가고 있어 걱정이 앞선다. 퇴직자 등 출향인들의 적극적 귀향이 간절하다. 장흥군 내 마을 단위로는 흔치 않게 존속되고 있는 매귀의 보존 및 문화재 지정과 관리에 따른 건물 신축 등에서 주민의 재산권 행사 제한에 대하여 전라남도(장흥군)의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사료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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