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위씨 시조(1세조)는 대각간(大角干) 위창주, 중시조 15세조 통선랑 위덕룡입니다.
위경라는 분은 당나라 때 신라의 청에 따라 도예지사로 동래했다는 설과 대광공주의 배신자격으로 동래했다는 두 설이 있었습니다. 현재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다.
위씨들은 위창주의 선조 위경라는 분께서 동래하신 638년부터 실계(失系) 300년을 포함해서 거의 800년에 가깝게 외줄로 이어져 분파가 없었지만 위씨들의 자손은 대(代)만 끊기수도 있으며 다른 중국 위씨의 후손을 이었을 것 아직 정학한 문헌이 없기 때문에 고증하기가 어렵다
신라 진성여왕 때 위홍은 대구 스님과 함께 향가집
《삼대목(三代目)-신라의 시가를 모은 책인데 지금은 없습니다.》을 수집·편찬했습니다.
고려시대 대표적 인물로는 문종 때 문과에 장원, 감찰어사·한림학사에 이른 위문개, 숙종·예종 때의 명신으로 문하시중상주국에 이른 위계정이 있다.
조선시대엔 13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으며, 주요인물로는 위대기, 위백규를 들 수 있습니다. 위대기는 선조 때의 장군으로서 이순신의 부장으로 임진왜란, 정유재란에 공을 세우고 수군 절도사에 올랐으며, 위백규는 정조 때 '머리'를 인정받아 벼슬을 받았지만 사양하고 학자로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위장령, 위천우, 위영조, 위창조, 위흥조 등도 조선시대의 위씨들이죠.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미셸 위(위성미)까지...
1960년 조사에서 인구 14736명으로 258개의 성 중 76위였고, 1985년 조사에서는 인구 24257명으로 274성 중 77위였습니다.
1.위계정(? ~ 1107) - 본관은 장흥,문종때 문과에 급제
1091년 예부시랑으로서 이자의와 함께 송나라에 갔다왔으며 숙종초기에
예부,이부의 상서 등을 지냈습니다 이후 예종이 등극하면서
수태위.문하시중.상주국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여러차레 사임을 청했지만
임금이 이를 불허한 것으로보아 신임이 매우 두터웠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2. 위대기(? ~ ?) - 본관은 장흥, 자는 자용,위계정의 후손,조선중기때의 무신
1592년 조,일전쟁 이른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순신 휘하에서
조전장(助戰將)으로 전공을 세웠으며 이어 병마절도사 황진과 함께
웅치싸움에서 왜군을 섬멸하는 대승을 올립니다
이후 1597년 제2차 조,일전쟁(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고향에서 궐기하여
다시금 전공을 세우게 됩니다 이에 수군절도사에 승진되기도 합니다
전남 남원에 충량비(忠良碑)가 세워졌습니다
3. 위백규(1727 ~ 1798) - 본관은 장흥,자는 자화,호는 존재,진사 '문덕'의 아들,
윤봉구의 문인으로 천문,지리,율력,복서,산수 등에 달통했다고 전해집니다
정조(1776 ~ 1800)때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등용될만큼 학문이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위백규는 곧바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다만 '만언봉사'라는 상소를 올려 여러 정책들을 상주했습니다 사실 이때에 위백규의 나이는 이미 69세의 노령
이었습니다 이 만언봉사의 내용에는 나라의 기강확립과 선비들의 부정부패
척결,사치를 금할것 등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만언봉사 내용을 흡족하게 여긴
정조는 옥과현감 이라는 벼슬을 내려 선정을 베풀것을 명합니다
그리하여 위백규는
나이 70세가 되어서 옥과현감에 부임하여 1년여동안 선정을 베풀었다고 합니다
이후 정조가 여러차레 벼슬을 승급하여 임명하고자 했던 것으로보아
위백규의 학덕(學德)을 미루어 짐작할수 있습니다
한편 위백규의 사상은 상당히 개혁적 이었습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먼저 서당의 훈장을 선거로 뽑을것을 주장했고
신분이 아닌 능력있는 학생을 선발하여 국가에서 교육을 시킬것
향촌의 문화발전과 자체방어를 내세웠는데 위백규가 말하는 향촌자체방어는
오늘날의 국민개병제와 흡사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향촌 자율조세정책을 단행할것을 주창했는데 즉 마을별로 농민자치의
회의체를 만들어 각 호구의 재산정도에 따라 조세 액수를 정하고 군역을
부과할 것을 지적했는데 이는 사실상 오늘날의 지방자치제와 매우 유사하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진보적인 위백규의 개혁사상은 계승되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