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장흥위씨(長興魏氏) (중)마을 공동체
대문회 기본틀 소문회 결성 門中통한 촌락운영
18세기 전란의 여파가 어느 정도 가라앉고 장흥위씨(長興魏氏)들의 사회적 지위가 안정되면서 방촌 마을도 위씨들을 중심으로 재편되게 된다.
전란후 향촌 재정비기를 맞아 마을민 전체가 생활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시기였고, 이 과정에서 위씨들이 동족적인 기반을 강화하면서 서서히 주도권을 장악해 나가게 된 것이다.
장흥위씨들이 방촌 마을로 옮겨와 살게된 직후 마을민들의 친목 도모를 위해 춘추로 경치 좋은 곳을 찾아 놀던 모임인 ‘청금옹전화약(廳禽翁煎花約)’에는 당시 명안(名案)과 함께 1734∼1774년까지의 명단이 전해진다.
조선사회 전형적 마을 조직
‘청금옹전화약’에 따르면 설립 당시에는 위씨들의 참여가 부분적이었지만 1734년에 나타나는 약원수는 모두 14∼34명까지 증가하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반면 타성들은 그나마 나타나지 않게 된다.
이같은 사실로 미뤄 볼 때 방촌 마을은 이 시기부터 서서히 위씨들의 동족마을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뒤이어 1766년, 1774년의 약원에는 ‘다산학동(茶山學童)’이라 명명되는 타성씨들 김(金)·범(范)·조(趙)·서(徐)씨의 자제 3∼4명만 참여하는 상황으로 변하는 등 방촌 이거 초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엿보인다.
방촌 마을 위씨들의 문중활동은 위씨들이 마을에 정착한 이후 3∼4대가 지나면서 활발하게 진행된다.
방촌위문의 문회 조직은 위덕후(魏德厚: 1556∼1606)를 종조로 하는 소위 안항파종회(顔巷派宗會)로서 그 모체를 삼고, 그의 세 아들인 정훈(廷勳)·정렬(廷烈)·정명(廷鳴)의 계통을 잇는 3개의 작은 문회가 병존하는 형태다.
즉 안항공 덕후의 장자 정훈계는 청금공파(廳禽公派)로, 차자인 정렬계는 웅천공파(熊川公派) 또는 현감공파(縣監公派)로, 정명계는 방계공파(磻溪公派)로 각각 독자적인 소문회를 운영하면서 방촌계파의 큰 문회 조직인 안항공파문회에 참여했던 것이다.
안항공 덕후의 소종회인 ‘계춘동종계’의 경우 1757년 안항공이 남긴 유훈을 의방지교(義方之敎)로 받아들이고 그의 직계 후손들의 결속을 위해 안항공의 4세손인 문덕(文德: 1704∼1768)이 조직했다.
이처럼 장흥위문의 문중조직은 대문회를 기본틀로 구축하고 여기에 작은 소문회 조직들이 결성돼 문중을 통한 촌락 운영질서가 마련됐는데 이는 조선사회의 전형적인 동족마을 조직을 대표하는 것으로 주목받아 왔다.
특히 위문덕-위백규 부자의 경우 방촌 마을의 문중조직이 활발하게 운영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존재 위백규(存齋 魏伯珪: 1727∼98)는 문중 조직이나 마을 조직에도 관심이 많아 직접 ‘사약(社約)’ ‘무기계(契)’ ‘관산기로회(冠山耆老會)’ 등을 조직하기도 했으며, 대부분의 방촌위씨 문회 조직들이 그의 부친인 위문덕과 그의 시대에 완비됐다.
위백규 부자가 문중활동으로 가장 먼저 디딤돌을 만든 것은 1746년 작성된 ‘화수종친규(花樹宗親規)’ 였다.
이는 단순히 종친들끼리 한자리에서 모임을 가진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후 장흥위문의 문중활동에 있어 분명한 획을 긋는 시기로 평가된다.
물론 이때 만들어진 ‘사약(社約)’은 일종의 문중 규약으로 1760∼1770년에 이르는 기간에 수정과 보완을 거쳐 완비되며, 가전되던 가훈과 유계를 통해 강조되던 ‘농상에 힘쓰고 형제간에 화목하라’는 내용이 골격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사약(社約) 가운데 특별히 주목되는 점은 농사일에 종사하는 자와 과거 응시자를 철저하게 구분, 각기 재질에 따라 인재를 양성하고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벽촌인 방촌의 위씨들이 경제적으로 자생하는 한편 사족가문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자구적인 방안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장흥위씨들은 또 사약과 함께 보완적인 조직으로 위씨들간의 화목이 최대의 목표인 ‘무기계’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 조직은 명칭 그대로 ‘시기심을 없애고 화목하자’는 목적으로 빈부격차를 탈피한 상부상조의 전형적인 일반 계 조직으로 1790년 설립(계장 위도순)돼 현재까지도 운영되고 있다.
또 문중조직의 방계(傍系) 조직으로 강학과 교화를 위한 ‘강계(講契)’ ‘강회(講會)’ ‘양사계(養士契)’ 등을 운영, 흥학(興學)에도 주력했다.
방촌의 장흥위씨 동족마을은 임란기를 지난 17세기 초에 혈연적 기반을 마련했지만 실질적인 면에서 동족적인 배경을 확립시킨 것은 18세기 초엽과 중엽에 이르러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위씨들의 동족적 기반이 강해지면서 방촌의 마을조직들도 위성일색(魏姓一色)의 구성원을 갖는 조직으로 변모했고, 마을 조직들은 장흥위씨들의 문회조직과 병렬 또는 중첩적으로 얽혀서 조직되게 된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마을민들은 3중 4중의 조직에 참여하게 됐고, 그만큼 동족적·지연적 유대는 강화되게 된다.
이같은 상황에서 문회(門會)의 권위는 증대 될 수 밖에 없었고, 이것이 동족마을로서 성향을 결정짓게 하고 유력 성씨로서의 지위를 구축하는 토대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방촌마을 전체의 조직체로 1768년 재조직된 ‘방촌 상하계’는 ‘동계’의 계통을 잇고 있으며, 계원은 마을내 거주하는 사람으로 한정했다.
특히 ‘비록 원래는 계원이었다 하더라도 다른 마을로 이사하면 즉시 제명한다’라는 약조와 내용은 방촌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크게는 상호 부조적인 체계와 작게는 물건 구입에 따른 비용과 관리에 이르는 것까지 포함되는 것이었다.
4개 구역별 노동조직 형성
이후 1803년 마을민 167명으로 창설된 ‘방촌동약’의 경우 설립 당시 위씨가 116명으로 70% 가량을 차지했으며, 김씨 24명, 이씨 12명, 정씨 11명, 영씨와 노씨가 각각 2명씩이었던 것으로 미뤄볼 때 이 시기에는 위씨들의 동족적인 기반이 확고하게 마련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방촌마을의 조직은 그 운영이 대체로 양반계층에 의해 주도 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방촌에는 마을민 전체의 동약조직의 하부단위로 순수한 생산계층인 농민들의 노동조직이자 생활 공동체였던 소동계(흔히 소동꾼 또는 두레)도 조직돼 있었다.
이 소동계는 ‘방촌동약’ 서문(1803년, 魏道悌 書)에 ‘1630년 무렵에 김차옥(金次玉)이 이를 개탄해 다시 소동계(小童契)를 만들었다’라는 것처럼 300여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조직이다.
소동계는 이후 일시 중단되기도 했으나 그 전통을 이어 오늘날까지 그 명맥이 전해진다.
마을민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소동계의 운영 모습을 정리해 본다면 방촌마을의 소동계는 4개의 구역(뜸)으로 공동체가 형성된다. ‘내동’ ‘신기·계춘동’ ‘산저·범산’ ‘탑골·생골’ 등이 그것이다.
이같은 조직체제 하에서 장흥위씨 문중은 향촌내의 이주 성씨로서 기존 세력들에게 협력 체계를 유지하다 점차 방촌의 유력 성씨로 성장하면서 향촌내 제반사는 물론 방촌 마을을 장흥위씨 동족마을로 변형시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