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장흥위씨(長興魏氏) (상)유래·입향
-500여년 위씨 일문 世居 ‘남도판 민속촌’
위씨일문(魏氏一門)의 가통은 ‘장흥위씨대동보’에 기록된대로 그 시조를 신라 선덕여왕대의 위경(魏鏡)으로 보든, 고려초의 중시조 위창주(魏菖珠)로 잡든간에 불명확하고, ‘문헌비고’에 보이는 수령위씨 시조 위문개(魏文凱) 이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정말 수령위씨도 같은 핏줄입니까,
장흥군 관산읍에서 23번 국도를 따라 대덕읍으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를 지나다 보니 천관산 초입에 있는 방촌마을이 나온다.
지난 93년 문화마을로 지정된 방촌마을은 500여년간 장흥 위씨(長興魏氏)들이 살아온 대표적 동족마을로 남도판 ‘민속촌’이라 불릴 만큼 과거 우리 전통의 모습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여귀정’이란 정자와 정자나무, 다산 정약용보다 25년 앞서 호남 실학의 기틀을 세운 존재 위백규(存齋 魏伯珪: 1727∼98) 선생의 생가, 장천재, 석장승, 24여기의 고인돌 등 선사시대에서 현재까지 유물들이 장구한 역사의 흔적을 드러내 보이며, 이 마을을 찾는 이방인을 다정하게 맞아준다.
모두 120여호인 마을 전체가 한옥으로 돼 있고 골목마다 즐비한 흙돌담이 보기에도 정겹다.
서쪽으로는 이 지역의 명산인 천관산이 자리하고 있고, 천관산의 지맥이 북쪽으로 이어지면서 다시 솟은 나즈막한 상잠산이 마을의 동쪽을 감싸고 있다.
방촌은 현재 주 마을이라 할 수 있는 내동, 계춘, 신기, 호동, 탑동, 호산, 산저 등 7개 마을이 동서의 두 산자락에 면해 집촌 형식으로 형성돼 있고 그 사이에는 ‘수등들’이라고 부르는 넓은 농경지가 조성돼 있다.
풍수적으로는 바다로 출선하는 배의 형상이라고 해서 행주형(行舟形)이라 하는데, 이같은 지세에는 사람과 재화가 풍성히 모이기 때문에 읍기로 하면 크게 번창한다는 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장흥 위씨들의 집성촌인 이 마을에는 200여년동안 지속돼 온 마을 자치 조직과 함께 별신제, 산신제 등 유교 문화의 세시풍속과 민속이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어 전형적인 전통 양반 마을의 풍모를 풍기고 있었다.
장흥 위씨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지난 1600년대 초반으로 내동에 처음 자리를 잡았고 계촌동 신기로 마을이 점점 번성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방촌 마을에는 모두 120여호가 사는데, 이 가운데 인천 이씨(仁川李氏)를 비롯 9개의 성씨가 10호며, 나머지 110호는 장흥위씨로 동족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높은 마을이다.
방촌 마을 회관을 찾아 경로당장인 위성탁(80)씨와 위계환(65) 이장 등 장흥 위씨 촌로들을 만나 마을 유래 등을 들었다.
위씨일문(魏氏一門)의 가통은 ‘장흥위씨대동보’에 기록된대로 그 시조를 신라 선덕여왕대의 위경(魏鏡)으로 보든, 고려초의 중시조 위창주(魏菖珠)로 잡든간에 불명확하고, ‘문헌비고’에 보이는 수령위씨 시조 위문개(魏文凱) 이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특히 조선조에 들어와서 위씨일문의 쇠퇴는 이같은 계보의 혼미를 더욱 가중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즉 고려조에 ‘동방갑을족(東方甲乙族)으로 지칭되던 위씨가문은 조선 건국기에 위충이 김종연의 역모에 가담했다가 진도로 유배된 뒤부터 중앙정계에서 유리 됐으며, 본관지 장흥을 중심으로 토착한 것도 이처럼 중앙 진출이 단절된 이후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문헌비고 ‘성씨고(姓氏考)’에 수령위씨의 시조로 기록된 위문개는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속명 원개: 1226∼1262)의 동생으로 위소(魏紹)의 세아들 가운데 작은 아들이었다. 장남인 충지가 승려인 탓으로 차남인 위문개가 계(系)를 잇게 된 것이다.
이들 형제는 모두 고려 고종대인 1244년과 1245년 문과에 급제했으며, 위씨의 구거지(舊居地)로 불리는 수령현터(현 장흥읍 동동리)에 이들의 일화가 어린 ‘장원봉(壯元峯)’과 ‘거말봉(居末峯)’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미뤄볼 때 13세기를 전후한 시기 위씨들이 장원봉 부근에 모여 살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 지역이 여말선초 왜구의 침입이 종식되고 연해의 군읍이 정비되던 시기에 장흥의 새로운 치소(治所)로 결정(1413년)됨에 위씨들은 위덕룡(魏悳龍: 조선 태조∼태종대)대에 인접한 평화촌(平化村)으로 옮겨 살게 됐다.
이후 위덕룡의 네 아들들이 각기 계파(系派)의 파조(派祖)로 족보에 나타나는 것으로 미뤄 볼 때 그 수 세대 사이에 다시 분산, 이주를 결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문헌비고’ 성씨고에 장흥위씨의 인물로 나타나는 위인걸(魏仁傑)·위천우(魏天佑) 부자는 위덕룡의 장자 위자온(魏自溫)의 4∼5세 손으로 위씨 족보에는 이들을 능주파(綾州派)로 기록하고 있다.
위덕룡의 네아들 가운데 장자인 자온의 계는 능주파로 분파되고, 둘째 아들인 자양(自良)의 계는 장흥 관산파(冠山派) 및 행원파(杏園派), 자공(自恭)은 장흥 사월파(沙月派) 및 함흥파(咸興派) 등으로 각각 나뉘어져 계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자온 형제들의 분파 이후 다시 3∼4세대가 지나면서 장흥위씨들은 또 분산, 이거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방촌으로의 새로운 터잡이가 시작된다.
이들의 입향 시기는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으나, 전후의 사정을 감안할 때 대체로 1500년대 말에서 1600년대 초반에 걸치는 왜란기 및 난후의 재정착 정비기에 방촌에 위씨들의 뿌리가 서서히 마련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