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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조 행장 확인 주요 내용 

장흥위문의 역사는 신라시대 638년 선덕여왕(7) 때 시조공()의 동래(東來)로 시작된 후 298년간 세계가 실전되었다. 고려초 시중(侍中)을 지낸 창주(菖珠)를 중시조 일세(一世)로 승계하고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1,381년 간의 역사와 종원수는 3만여명에 이르고 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5세 충렬공(繼廷), 26세 존재공(伯珪등 많은 인물을 배출해 문세(門勢)를 형성해오고 있다. 이러한 선조들의 흔적은 고려사, 승정원일기 등 국가 사료(史料)에서 확인된다. 현재 20대 국회의원에 34세 성곤(聖坤) 종친이 당선되어 왕성한 의정활동은 장흥위문의 큰 자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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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위문의 역사기록물이라 할 수 있는 대동보(大同譜)는 장흥과 관북(함흥)을 중심으로 편찬해왔다. 장흥에서는 1759년 기묘초보(3)를 시작으로 1842년 임인보(6), 1883년 계미보(9), 1916년 병진보 (14), 1957년 정유보(3), 1972년 임자보(6)를 편찬하였다. 관북(함흥)에서는 1767년 정해보를 시작으로 1824년 갑신보, 1875년 을해보, 1915년 을묘보, 1940년 경진보, 1981년 신유보를 편찬하였다.(1689년 기사보는 미간생) 이후 1999년 남북합보인 7차 기묘보를 장흥에서 편찬하였다. 편찬시 관직에 출사한 선조들의 행장을 기록한 면주, 지장록 등 일부 선대 기록은 고려사, 승정원일기, 교지 등 역사기록과 일부 차이점이 확인되고 있다.

특히 2010년 5월~2012년 12월 간 도문회(都門會) 보의론연구위원회에서는 시조공의 동래 시기는 신라 선덕여왕(7년) 638년(戊戌) 선덕여왕이 도예지사를 당나라 태종에게 請함에 8학사를 파견하였다. 관직은 아찬(阿湌)으로 고려 충선왕 때 회주군(懷州君)에 추봉되었다. 638년부터 936년에 이르기까지 298년간 세계가 실전되었다. 중시조공은 고려 초인으로 시중(侍中)을 지냈다. 세계(世系)사항은 수보(修譜)를 유보하고 6세 소(紹), 7세 문개(文凱), 8세 극겸(克謙), 9세 경효(景孝), 10세 온(溫)의 족보 원문을 유지키로 하였다. 도문회(都門會)는 이러한 중요 사항을 연구결과를 토대로 운영위원회와 2012년 5월 6일 오현대제(五顯大祭)를 마치고 총회를 거쳐 12월 4일 시조공 사적비 개비(改碑)하고 사업을 완료하였다.

개비 문안(文案) , 5세 충렬공(繼廷)에 대해 고려 文宗 登科하여 네 임금을 섬겼다고 했다. 이는 기묘초보부터 文宗 登科하여 歷四事朝하다로 기록한 면주와 같은 해석이다. 네 임금을 섬겼다는 기존 사적비 내용을 그대로 유지하고 개수(改竪)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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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충렬공은 文宗 때 登科하여 順宗·宣宗·獻宗·肅宗·睿宗 등 여섯 임금 때 관직에 몸담아 섬겼음이 명백한 역사 사실이다. 고려 왕 계보에서도 11대 문종, 12대 순종, 13대 선종, 14대 헌종, 15대 숙종, 16대 예종으로 기록하고 있다. 12대 순종은 문종의 장자로 1083년 재위 3개월 만에 타계한다. 14대 헌종은 1094~1095년 재위하고 왕위를 숙부(숙종)에게 물려준다. 순종과 헌종의 재위 기간이 짧다는 사유로 역사사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충렬공에 대한 시조공 사적비 내용은 타당하지 않는다고 사료된다.  의 태생은 1038, 졸년이 1107년 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려시대 문과 급제 자료에 의하면 급제 시기는 알 수 없다. 부(父) 4세 기로(耆老), 조(祖) 3세 원보(原補), 증조(曾祖) 2세 달(澾), 형(兄)은 계령(繼令)으로 대동보 기록과 동일하다. 처부(妻父) 즉 장인은 황주량(黃周亮, 황주人 ~ ?)으로 기록되었다. 황주량은 1004년(甲辰 목종 7) 문과에 장원급제 하여 한림원과 사관의 요직을 거쳐 세차례 지공거(知貢擧)를 맡았다. 수태보겸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등 중요 관직을 역임하고 거란과의 전쟁 후 태조부터 목종까지 「고려 7대실록36권을 편찬하였다. 타계하자 정종(靖宗)묘정에 배향되고 시호는 경문(景文)이다. 이러한 근거로 충렬공의 配는 황주황씨(黃氏)로 고증된다.

또한 7세 원개공(1226~1293), 문개공(1228~?), 신개공(1230~?) 3형제는 장원과 급제를 하였다고 한다. 첫째 원개공은 1242년 17세 때 진사시 1위로 입격하였다. 그 후 1244년 19세 때,  둘째 문개공은 이듬해인 1245년 18세 때, 형제가 년년히 과거시험에서 장원 급제하고, 셋째 신개공은 후에 급제하였다고 시조공 사적비, 면주, 요람 등에서 후손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 과거시험 기록인 문과 급제자 자료와 1999년 편찬한 기묘대동보 지장록의 32세 만암공(光肇) 보의설에 의하면 첫째 원개공은 1244년(甲辰) 19세 때 장원급제 하고, 둘째 문개공은 1245년 18세 때가 아닌 1260년(庚申) 33세 때 장원급제가 확인된다. 셋째 신개공의 급제에 대한 기록은 확인 할 수 없다. 그밖에 문과 급제자로 위제만(魏齊萬, ~ ?)이 1051년(辛卯 문종 5) 과거시험에서 6위로 급제함이 확인된다. 진사시에는 위대여(魏大輿, ~ ?)가 1212년(壬申 강종 1) 진사시 1위로 입격하였다. 위제만 선조는 學士로 기록했으며, 두분의 선조는 방계손으로 추정된다.

대동보에는 고려 때 선조 12人에 대해 인명과 관직만 부록에 기록되어 있다. 기묘대동보 1권 상계에 고려 때 선조 12에 대해 인명과 관직만 부록에 기록되어 있다. 부록 내용에는 "12(위제만, 위소, 위순, 위문경, 위문개, 위덕유, 위종, 위숭, 위강, 위통원, 위돈겸, 위공취)은 회주군(懷州君)의 후예로 고려시대에 현달하여 사적과 행장이 모두 史記에 실려있으나 世系의 차례가 舊譜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하였다이는 세계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중 위소(魏紹), 위순(魏珣), 위문경(魏文卿), 위문개(魏文愷)는 직계손에 해당되고 위순은 위원개(元凱), 위문경은 문개(文凱)로 개명(改名)하였으며 위문개(魏文愷)는 문개(文凱)와 동일인 이다. 위제만, 위덕유, 위종, 위숭, 위강, 위통원, 위돈겸, 위공취 8분은 방계손(傍系孫)으로 추정되며, 이는 중시조공(菖珠) 이하 15세 통선랑공(悳龍) 간 방계손에 대한 기록이 미미하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그 이외의 선조에 대한 급제와 입격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고려말 1361년(辛丑 공민왕 11), 홍건적의 침입으로 수도 개경(開京)이 함락되어 다수의 중요 사료(史料)가 소실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사료된다. 이 같은 사유로 고려 역사 보완과 정리를 위해 조선 개국 후 1449년 고려사와 1453년 고려사절요를 편찬했다. 2007년 9월 문중에서는 도문회를 중심으로 장흥문화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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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의하여 장흥읍 읍성로 장흥경찰서에서 장흥향교 방향으로 가는 남문고개 도로변에 「壯元峯由來碑」를 문화원에서 세웠다. 현세 사람들에게는 삼형제의 뛰어남을 알리고 후손들에게는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대종회(大宗會)에서 추진하는 매년 하계수련회에서 필수 답사 장소이다. 이러한 유래비가 역사 사실과 차이점이 있다. 후손들은 기록에서 반드시 사전 역사 고증과 확인을 거쳐 사실의 역사를 반영하고 오기에 대해서는 정정해야 한다. 이는 장흥위문의 위상과 자존심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보의론연구위원회에서는 선대 역사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 및 토론문화를 이끌어 내면서 세계(世系)사항은 족보 원안을 유지키로 하였으나, 종원들간 이견차로 에너지를 소모하는 등 문중화합이라는 과제를 남겼다. 족보 원안(原案) 중, 5세 繼廷(1038~1107), 6세 紹, 7세 文凱(1228~ ?) 조손(祖孫) 간의 연령 190년 차이는 성립이 불가하다고 사료되며, 역사 학계에서도 이를 지적하고 있다. 연구안(硏究案)은 5세 계정(繼廷), 6세 통원(通元), 7세 돈겸(敦謙), 8세 대여(大輿), 9세 소(紹), 10세 문개(文凱)로 하였다. 당대의 문과 급제자, 진사시 입격자는 평균 20대 초반 연령이다. 이를 가정하고 8세 대여(大輿)의 생년이 근거되는 1212년 진사시 자료를 기준하여 증조(曾祖)가 되는 5세 충렬공(繼廷)과 생년을 비교하면 150년 안팎 가량 차이가 생겨 이 또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사료된다. 다만, 8세 대여(大輿), 9세 소(紹), 10세 문개(文凱) 간은 40년 가량 차이가 생겨 타당하다고 사료된다.

14세 합문판사공(种)은 고려말 시중 김종연 등과 고려 회복을 모의 하다가 누설되어 곤장백대를 맞고 멀리 유배(被杖百遠流)되었다.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 후 망복(罔僕)해오다가 태종 이방원의 강권(强勸)에 의해 1405년(乙酉) 판내섬시사(判內贍寺事), 1408년(戊子) 판례빈시사(判禮賓寺事), 경상도경차관(慶尙道敬差官), 별시위패두(別侍衛牌頭) 등 정3품 上 관직에 봉직(奉職)한 새로운 행장이 2005년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에서 발견되어 시조공 사적비를 개비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반영하였다. 차후 모든 기록물에서는 이를 반영하고 계속된 역사기록 수집이 필요하다.

 

조선초기에 대한 선대 여러 기록에서는 합문판사공의 영향으로 이후 선조들은 관직에 출사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15세~20세간 선조 중에는 1392년(壬申) 조선이 개국하면서 개국원종공신 위인주(魏仁柱)와 호종공신 낭장 위천주(魏天柱)가 공신에 훈록되었다. 1469년(己丑) 함흥분경(咸興分京)에 있는 석차를 적은 목록에 사정(司正) 위흥민(魏興敏)이 있다. 이러함은 32세 만암공(光肇)의 보의설에 근거하나, 대동보에는 인명 기록이 없어 누락된 것으로 추정된다. 1400년대 중·후반에 접어들면서 장흥에서는 17세 한성참군공(宗復), 18세 승문원 습독공(由亨), 19세 양산군수공(元忠)·元信, 20세 仁傑·億武·법성만호공(億章)와 관북에서는 18세 頓, 19세 碩貞·병조참의공(世忠)·중랑장공(信忠), 20세 선략장군공(克明) 등 일부 선조가 관직에 출사한 내용이 면주에 기록되어 있다. 이중 15~16세 2代에서는 합문판사공의 영향으로 출사를 포기하고 터전을 관아(官衙)가 있었던 장원봉(壯元峯) 아래에서 평화(平化)로 옮겼다. 이후 문세(門勢)가 미약하여 출사자가 적었다고 추정된다. 이를 근거로 하면 조선초기부터 임진왜란 前까지 200여 년 동안 출사자가 없었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사료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 되지 않고 관련 교지 등 근거 자료가 없어 조명에 한계점이 있다.
 
조선중기 역사격변기 임진왜란에서는 21세 괴봉공(大用)·청양현감공(天佑)·청계공(德毅)·공조참의공(德元)·호조판서공(德和)·충청수군절도사공(大器)·광양현감공(大澤), 22세 장기현감공(舜廷), 24세 호조정랑공(公達)·훈련부정공(公濬), 25세 의주부윤공(漢良) 등 여러 선조가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워 호성·선무 공신에 훈록되었다. 정묘호란·병자호란에서는 22세 청금공(廷勳)·웅천현감공(廷烈)·병조참판공(廷喆)·반계공(廷鳴), 23세 문화현령공(山寶)등이 역사의 현장에서 功을 세워 문중을 빛냈다. 특히 병조참판공(廷喆)은 심양 회답사 사행으로 후금(後金)과의 조공(租貢) 등 외교마찰을 수습하고 「심양왕환일기」를 남겼다.

 

​조선후기에서는 26세 존재공(伯珪)은 1796년(丙辰) 정조대왕에게 「만언봉사」를 올려 옥과현감에 제수되고 실학사상의 저서 「정현신보」 등 90여권을 남겼다. 관북 태생 선조들은 함경도 함흥 지역을 중심으로 다수가 생원·진사시를 거쳐 문·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출사하였다. 1758년(戊寅) 영조대왕의 명을 받아 「북도능전지」를 저술한 31세 호조참의공(昌祖) 등 훌륭한 선조 다수를 배출하여 장흥위문의 위상을 높였다. 남북분단으로 인해 교지, 문집, 간행 책자 등 흔적과 행장을 확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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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6.25 전쟁 때 함흥 출신 종인들이 월남하면서 가지고온 1915년 을묘보(乙卯譜)는 학계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존재공이 쓴 충의록은 합문판사공(种) 등 49人이다. 이중에는 사월 태생 21세 덕원부사공(重俊), 24세 호조정랑공(公達)·훈련부정공(公濬), 26세 사진공(士進) 등 4人과 관북(함흥) 태생 23세 추파만호공(國弼), 24세 참봉공(澂), 25세 의주부윤공(漢良), 26세 길주훈도공(大業), 32세 만암공(光肇)등 5人이 포함되어 있다. 존재공과 비교 하면 대수가 아래인 28세 도승지공(定相) 등 여러 선조가 반영되지 않았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선조들이 관직에 출사하였으나, 선대에서는 이에 대한 체계적 기록이 없다. 함경도 함흥은 지리적으로 장흥과는 원거리에 위치하여 왕래가 쉽지 않은 여건과 1950년 6.25 전쟁으로 인한 민족의 분단이 있었다. 이러한 바탕에서 장흥위문 자료를 본향(장흥)에서 정리 간행하다보니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였다고 추정된다.

 

최근 선조 행장 확인은 필자가 평소 의문을 갖고 시작하게 된 곡성현감공(21세 大成) 등 조선시대 38人 선조이다. 외관직을 중심으로 화순 능주 1人, 장흥 17人, 관북 20人 선조들에 대해 1)장흥 방촌 판서공파, 행원 괴봉공파 종택에서 소장하고 있었던 교지와 국가 사료인 국조방목·사마방목·승정원일기·조선왕조실록 등 2)선조들의 관직 역임지 현 28곳 시·군·구(문화원·향교·향토사학자)에서 향토지로 간행한 자료 3)1999년 기묘보 면주와 지장록, 요람 등의 후손 기록 등을 통해 선조들의 행장을 비교 확인하였다. 특히 곡성현감공에 대한 대동보 면주, 충의록, 요람 등의 기존 기록에서 公은 1637년(丁丑)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간 동궁(소현세자)을 호성하고 돌아와 고향과 가까운 곡성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한지 얼마 않되어 병환으로 타계함을 기록하고 있다. 公의 자(子) 후징(後徵)의 1585년 식년 진사시 입격 자료인 사마방목 기록에서 후징의 생년이 계축(癸丑 1553년), 父는 前 곡성현감 大成으로 기록하고 있다. 곡성군청의 선생안 자료에 의하면 제 38대 곡성현감으로 재임기간은 1565년 1월~7월간이다. 이러한 근거로 하면 公의 생년은 대략 1525~1530년 정도로 추정되며, 100년 이상 차이가 있어 청나라 심양 호성에 의문이 따른다?. 사마방목에서 자(子) 후징의 생년 등 자료와 곡성군청 선생안 자료를 대동보 면주, 충의록, 요람 등의 기록과 비교하면 큰 차이점이 확인되었다.

 
조선시대에서 문과 급제자는 화순 능주 1人, 장흥 1人, 관북(함흥) 11人 등 13人이다. 무과 급제자는 25人 가량, 생원·진사시 30여명으로 각각 추정된다. 족보 면주기록에 생원·진사시를 거쳐 문·무과 급제로 출사하여 관직 기록은 있으나, 문중 편찬 책자 기록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본향 태생 적양첨절제사공(26세 原徵), 사헌부감찰공(27세 致亮), 단성현감공(31세 啓采) 등 3人과 관북 태생 남학훈도공(31세 榮祖)·고원군수공(弘祖), 32세 자산부사공(光翼)·고령첨절제사공(光軫), 33세 양지현감공(尹喆)·전의현감공(魯喆)·사헌부장령공(文喆)·진보현감공(迪喆)·흡곡현령공(煥喆), 34세 병조정랑공(鍾善)·오위장공(鍾敏)·사헌공(鍾崑)·내금위장공(鍾植)·사헌부지평공(鍾謙), 35세 홍문관수찬공(道源)·사간원정언공(翼源) 등 16人, 총 19人의 관직을 확인하고 관작호(官爵號)를 각각 명명하였다.

 

여러 기초자료 중, 교지는 당시 왕이 내린 인사 발령장으로 연월일까지 알 수 있어 신뢰하는 문건으로 사료된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국조방목·사마방목 내용은 교지와 같이 공신력을 가진 역사기록물이다. 관직 제수 시기는 알 수 있으나, 부임한 후 이임까지 재임기간을 알 수 없다. 선조들이 관직을 역임한 현재의 시·군·구청(문화원,향교,향토사학자)에서 편찬한 향토지 선생안에는 수령(부사·군수·현령·현감 등)의 재임기간, 전·후임자 등을 알 수 있어 교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를 보충 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대동보 면주, 지장록(충의록), 묘갈명, 행장록 등 여러 자료는 석학(碩學) 후손들이 찬(撰)하였다. 당대 시대적 풍토인 가문(家門) 중시와 선조를 높이는 사례가 일부 반영됨이 확인된다. 

대종회에서는 문중의 대표적 책자 「장흥위씨 요람」을 2005년 4월 25일 초판 발행했다. 이어서「보정 장흥위씨 요람」을 2018년 4월 25일 재판 발행하였다. 문중에서 의결한 세계 내용, 종파 명과 각 종파 계열, 선조의 행장, 관작호, 문·무과 급제와 생원·진사시 입격 현황, 사우 연혁, 세거지 자료 등 여러 기록에서 기묘대동보, 현존 교지, 승정원일기, 시·군·구청(문화원)에서 정리 간행한 책자 기록 등과 비교하면 많은 차이가 있음이 확인된다.

 

충청남도(문화관광국) 등 28곳 시·군·구청(문화원,향교,향토사학자 등)관서에 연락하여 선조의 관직 역임 자료를 수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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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에게 우편 송부한 책자>

자료는 문화관광(예술)과, 문화원 업무 담당자로부터 해당 책자 전면 표지와 내용 부분을 사진 촬영하여 메일 또는 핸드폰으로 송부받았다. 일부 연령이 되신 문화원장, 향토사학자들과는 전화 통화하여 간행된 책자에서 내용을 발췌하였다. 4곳의 지자체에서는 관련 책자를 우편으로 송부해주었다. 협조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정리 간행된 자료에서 선조들의 인명과 관직 역임 사실이 확인되면 후손으로써 가슴 벅차고 반가웠다.

시·군·읍지, 향토지, 향교지 등의 공통된 사실은 조선 초기를 포함한 역사 격변기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조선 중기까지 자료가 현존하지 않는 사례가 많았다. 또한 400~6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자연적인 멸실로 행장 확인에 한계점이 있다. 여러 시·군·구청(문화원)에서는 주로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각 지역의 사료(史料)를 정리하여 책자를 간행하다보니 정확한 재임기간(연월일) 등 기록 자료가 드물었다. 

 

대한민국 성씨 족보는 1423년(癸卯, 세종5) 문화柳氏 영락보(永樂譜)를 시작으로 대부분 조선시대 후기에 편찬되었다. 당대 시대적, 문화적 환경의 바탕에서 기초하고 유교적 전통과 가문(家門) 중시가 지나친 숭조로 이어져 고증 없이 사실이 왜곡된 사례들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왜곡 사실은 인터넷, SNS상에서 쉽게 확인된다. 허구일 뿐이요, 한낱 웃음거리가 되어 조상을 욕되게 할 수 있다. 역사학계에서는 장흥위씨 대종회 홈페지, 후손의 블러그 게재 내용 등을 기초 고증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2017년 10월 30일 안전행정부와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주관하는 국가 DB사업으로 구축되어 있는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에서는 장흥위씨 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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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지 자료 중에 31세 운수공(啓忠 1853~1931, 행원문중 괴봉공파종중)의 홍패(紅牌) 등 교지 4매를 저본(底本)으로 하고 무과 급제자로 한국역대인물정보에 등록한 사례가 있다. 후손들의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끝으로 선조 행장 확인 내용에 대해 이견(異見)과 차이점, 새로운 사실, 정정(訂正)할 부분 등이 있으면 조언(助言) 바란다. 정독(精讀)한 종원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 수령(首領) : 조선시대 도(道)·주(州)·부(府)·군(郡)·현(縣)의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의 총칭이다. 여기에는 관찰사(觀察使 종2품)·부윤(府尹, 종2품)·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정3품)·목사(牧使, 정3품)·도호부사(都護府使, 종3품)·군수(郡守, 종4품)·현령(縣令, 종5품), 현감(縣監, 종6품) 등이다. 그 품계는 종2품에서 종6품까지에 걸쳐 있다. 주·부·군·현의 읍격(邑格)과 수령의 품계는 호구(戶口)·전결(田結)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가 있다. 행정상으로는 모두 관찰사의 관할 밑에 있었다. 부윤 5人, 목사 21人, 대도호부사 5人, 도호부사 76人, 군수 70人, 현령 26人, 현감 133人 등 336人이다. 그 시절 재임한 왕에 따라 약간 따르며 일부 관직에서는 겸직 사례가 있어 실제 약간 적은 인원이 될 수 있다.  군사지역에는 육군의 경우 兵馬節度使(종2품), 兵馬僉節制使(종3품), 兵馬同節制使(종4품), 兵馬節制都尉(종6품) 관직이 있었다. 병마절도사의 경우 관찰사가 겸직하는 사례가 있었다. 독진(獨鎭)의 병마첨절제사는 정3품 上 사람을 제수하였고, 일부 都護府使가 겸직했다. 병마동절제사는 郡守가 병마절제도위는 縣令, 縣監이 겸직했다. 수군에는 三道水軍統制使(종2품), 水軍節度使(정3품), 水軍僉節制使(종3품), 水軍萬戶(종4품) 관직이 있었다.            

                                        <자료수집 참고 문헌>

  

☞ 고려시대 문과 급제자, 진사시 입격자 명단  :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국보 제151호) : 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1,893권 888책으로 간행했다. 필사본·인본, 정족산본, 태백산본 등이 일괄적으로 1973년 12월 31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1997년에는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국보 제303호) : 조선시대에 왕명(王命)의 출납(出納)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매일매일 취급한 문서(文書)와 사건을 기록한 일기로 1999년 4월 9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승정원에서 편찬한 일기로 필사본이며 3,243책이다. 일기의 작성은 승정원의 주서(注書)와 가주서(假注書)의 소임이다. 한 달에 한 권 작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사건이 많을 경우에는 2권 이상으로도 작성하였으며, 반드시 그 다음 달 안으로 완성하여 보존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 국조방목(國朝榜目) : 조선 태조 초기부터 1877년(고종14)까지의 문·무과 급제자를 기록한 책이다.

☞ 사마방목(司馬榜目) : 조선시대 일년동안 실시된 생원시·진사시의 입격자 명부다.    

※행장 확인 선조
21세 덕원부사공(重俊)·곡성현감공(大成)·청양현감공(天佑)·호조판서공(德和) ·충청수군절도사공(大器)·광양현감공(大澤), 25세 의주부윤공(漢良), 22세 웅천현감공(廷烈)·병조참판공(廷喆), 23세 문화현령공(山寶)·남포현감공(廷寶)·상원군수공(東峑), 24세 삼수군수공(天會)·해남현감공(天相), 25세 보성군수공(赫萬), 26세 적양첨사공(原徵)·존재공(伯珪), 27세 사헌부감찰공(致亮), 28세 도승지공(定相), 31세 남학훈도공(榮祖)·호조참의공(昌祖)·고원군수공(弘祖), 32세 자산부사공(光翼)·만암공(光肇)·고령첨절제사공(光軫), 33세 양지현감공(尹喆)·전의현감공(魯喆)·사헌부장령공(文喆)·진보현감공(迪喆)·흡곡현령공(煥喆), 34세 병조정랑공(鍾善)·오위장공(鍾敏)·사헌공(鍾崑)·내금위장공(鍾植)·사헌부지평공(鍾謙), 35세 홍문관수찬공(道源)·사간원정언공(翼源), 31세 단성현감공(啓采) 등 38人 선조이다.

※선조 행장 확인시 자문기관 등
곡성군청, 청양군청(문화원), 울주문화원·울산임란숭모회, 해남군청, 충남도청, 보령시청, 완도문화원, 광양시청, 창원시 진해구청(문화원), 함평군청(문화원), 사천시청(문화원)·곤양향교, 거제시청(문화원), 진도문화원, 남해군청, 무안군청(문화원), 보성문화원, 제주특별자치도청, 서귀포시청(문화원), 창원시 마산합포구청(문화원), 순천시청, 서천군청(문화원), 연천군청, 안성시청, 용인시청(문화원), 세종특별자치시청, 청송군청, 산청군청(문화원·단성향교) 등 28개 지역 관서 및  일부 문화원, 향교, 지역 향토사학자 등이다.        

 

 

                                   씨족문화연구위원 34세 성록 삼가 쓰다

 

 

 

 

 

 

 

 

 

 

 

 

 

 

 

 

 

 

 

 

 

 

번호 제목 조회 수
공지 성씨순위 및 장흥위씨 지역별 분포 내역 [1] 1677
공지 회주사 사호 개칭 경위 [1] 467
129 고려시대 문과 급제 등 중요 고증 자료 / 栢江 위성록 file 329
128 존재집에 나타난 청소년 교양필수 과목에 대한 고찰 322
127 존재집에 나타난 실학적 묘지문화에 대한 고찰 406
126 위백규(魏伯珪) 만언봉사(萬言封事)에 정조대왕(正祖大王) 비답(批答) / 栢江 위성록 file 417
125 장흥 방촌마을 장흥위씨 숨겨진 이야기 / 栢江 위성록 file 1695
124 방촌마을 무기계(無忮契) / 栢江 위성록 file 301
123 장흥위씨 족보 새로운 사실 발견 / 栢江 위성록 file 627
» ◎ 선조 행장 확인 주요 내용 ◎ / 栢江 위성록 [1] file 436
121 38.내금위장공(34세 鍾植, 1821~ ?) / 栢江 위성록 116
120 37.단성현감공(31세 啓采, 1849~1892) / 栢江 위성록 148
119 36.사간원정언공(35세 翼源, 1848~1894) / 栢江 위성록 file 94
118 35.홍문관수찬공(35세 道源, 1838~1886) / 栢江 위성록 file 197
117 34.사헌부지평공(34세 鍾謙, 1854~ ?) / 栢江 위성록 file 146
116 33.사헌공(34세 鍾崑, 1796~1868) / 栢江 위성록 119
115 32.오위장공(34세 鍾敏, 1791~1861) / 栢江 위성록 111
114 31.병조정랑공(34세 鍾善, 1789~1862) / 栢江 위성록 file 129
113 30.흡곡현령공(33세 煥喆, 1772~1836) / 栢江 위성록 96
112 29.진보현감공(33세 迪喆, 1766~1838) / 栢江 위성록 file 103
111 28.사헌부장령공(33세 文喆, 1766~ ?) / 栢江 위성록 file 103
110 27.전의현감공(33세 魯喆, 1764~1832) / 栢江 위성록 file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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