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조 행장 확인 주요 내용 ◎
장흥위문의 역사는 신라시대 638년 선덕여왕(7년) 때 시조공(鏡)의 동래(東來)로 시작된 후 298년간 세계가 실전되었다. 고려초 시중(侍中)을 지낸 창주(菖珠)를 중시조 일세(一世)로 승계하고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1,381년 간의 역사와 종원수는 3만여명에 이르고 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5세 충렬공(繼廷), 26세 존재공(伯珪)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해 문세(門勢)를 형성해오고 있다. 이러한 선조들의 흔적은 고려사, 승정원일기 등 국가 사료(史料)에서 확인된다. 현재 20대 국회의원에 34세 성곤(聖坤) 종친이 당선되어 왕성한 의정활동은 장흥위문의 큰 자랑이다.
장흥위문의 역사기록물이라 할 수 있는 대동보(大同譜)는 장흥과 관북(함흥)을 중심으로 편찬해왔다. 장흥에서는 1759년 기묘초보(전3권)를 시작으로 1842년 임인보(전6권), 1883년 계미보(전9권), 1916년 병진보 (전14권), 1957년 정유보(전3권), 1972년 임자보(전6권)를 편찬하였다. 관북(함흥)에서는 1767년 정해보를 시작으로 1824년 갑신보, 1875년 을해보, 1915년 을묘보, 1940년 경진보, 1981년 신유보를 편찬하였다.(1689년 기사보는 미간생) 이후 1999년 남북합보인 7차 기묘보를 장흥에서 편찬하였다. 편찬시 관직에 출사한 선조들의 행장을 기록한 면주, 지장록 등 일부 선대 기록은 고려사, 승정원일기, 교지 등 역사기록과 일부 차이점이 확인되고 있다.
특히 2010년 5월~2012년 12월 간 도문회(都門會) 보의론연구위원회에서는 시조공의 동래 시기는 신라 선덕여왕(7년) 638년(戊戌) 선덕여왕이 도예지사를 당나라 태종에게 請함에 8학사를 파견하였다. 관직은 아찬(阿湌)으로 고려 충선왕 때 회주군(懷州君)에 추봉되었다. 638년부터 936년에 이르기까지 298년간 세계가 실전되었다. 중시조공은 고려 초인으로 시중(侍中)을 지냈다. 세계(世系)사항은 수보(修譜)를 유보하고 6세 소(紹), 7세 문개(文凱), 8세 극겸(克謙), 9세 경효(景孝), 10세 온(溫)의 족보 원문을 유지키로 하였다. 도문회(都門會)는 이러한 중요 사항을 연구결과를 토대로 운영위원회와 2012년 5월 6일 오현대제(五顯大祭)를 마치고 총회를 거쳐 12월 4일 시조공 사적비 개비(改碑)하고 사업을 완료하였다.
개비 문안(文案) 중, 5세 충렬공(繼廷)에 대해 고려 文宗 때 登科하여 네 임금을 섬겼다고 했다. 이는 기묘초보부터 文宗 때 登科하여 歷四事朝하다로 기록한 면주와 같은 해석이다. 네 임금을 섬겼다는 기존 사적비 내용을 그대로 유지하고 개수(改竪)하였다.
그러나 충렬공은 文宗 때 登科하여 順宗·宣宗·獻宗·肅宗·睿宗 등 여섯 임금 때 관직에 몸담아 섬겼음이 명백한 역사 사실이다. 고려 왕 계보에서도 11대 문종, 12대 순종, 13대 선종, 14대 헌종, 15대 숙종, 16대 예종으로 기록하고 있다. 12대 순종은 문종의 장자로 1083년 재위 3개월 만에 타계한다. 14대 헌종은 1094~1095년 재위하고 왕위를 숙부(숙종)에게 물려준다. 순종과 헌종의 재위 기간이 짧다는 사유로 역사사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충렬공에 대한 시조공 사적비 내용은 타당하지 않는다고 사료된다. 公의 태생은 1038년, 졸년이 1107년 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고려시대 문과 급제 자료에 의하면 급제 시기는 알 수 없다. 부(父) 4세 기로(耆老), 조(祖) 3세 원보(原補), 증조(曾祖) 2세 달(澾), 형(兄)은 계령(繼令)으로 대동보 기록과 동일하다. 처부(妻父) 즉 장인은 황주량(黃周亮, 황주人 ~ ?)으로 기록되었다. 황주량은 1004년(甲辰 목종 7) 문과에 장원급제 하여 한림원과 사관의 요직을 거쳐 세차례 지공거(知貢擧)를 맡았다. 수태보겸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등 중요 관직을 역임하고 거란과의 전쟁 후 태조부터 목종까지 「고려 7대실록」36권을 편찬하였다. 타계하자 정종(靖宗)묘정에 배향되고 시호는 경문(景文)이다. 이러한 근거로 충렬공의 配는 황주황씨(黃氏)로 고증된다.
또한 7세 원개공(1226~1293), 문개공(1228~?), 신개공(1230~?) 3형제는 장원과 급제를 하였다고 한다. 첫째 원개공은 1242년 17세 때 진사시 1위로 입격하였다. 그 후 1244년 19세 때, 둘째 문개공은 이듬해인 1245년 18세 때, 형제가 년년히 과거시험에서 장원 급제하고, 셋째 신개공은 후에 급제하였다고 시조공 사적비, 면주, 요람 등에서 후손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 과거시험 기록인 문과 급제자 자료와 1999년 편찬한 기묘대동보 지장록의 32세 만암공(光肇) 보의설에 의하면 첫째 원개공은 1244년(甲辰) 19세 때 장원급제 하고, 둘째 문개공은 1245년 18세 때가 아닌 1260년(庚申) 33세 때 장원급제가 확인된다. 셋째 신개공의 급제에 대한 기록은 확인 할 수 없다. 그밖에 문과 급제자로 위제만(魏齊萬, ~ ?)이 1051년(辛卯 문종 5) 과거시험에서 6위로 급제함이 확인된다. 진사시에는 위대여(魏大輿, ~ ?)가 1212년(壬申 강종 1) 진사시 1위로 입격하였다. 위제만 선조는 學士로 기록했으며, 두분의 선조는 방계손으로 추정된다.
대동보에는 고려 때 선조 12人에 대해 인명과 관직만 부록에 기록되어 있다. 기묘대동보 1권 상계에 고려 때 선조 12人에 대해 인명과 관직만 부록에 기록되어 있다. 부록 내용에는 "12인(위제만, 위소, 위순, 위문경, 위문개, 위덕유, 위종, 위숭, 위강, 위통원, 위돈겸, 위공취)은 회주군(懷州君)의 후예로 고려시대에 현달하여 사적과 행장이 모두 史記에 실려있으나 世系의 차례가 舊譜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하였다. 이는 세계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중 위소(魏紹), 위순(魏珣), 위문경(魏文卿), 위문개(魏文愷)는 직계손에 해당되고 위순은 위원개(元凱)로, 위문경은 문개(文凱)로 개명(改名)하였으며 위문개(魏文愷)는 문개(文凱)와 동일인 이다. 위제만, 위덕유, 위종, 위숭, 위강, 위통원, 위돈겸, 위공취 등 8분은 방계손(傍系孫)으로 추정되며, 이는 중시조공(菖珠) 이하 15세 통선랑공(悳龍) 간 방계손에 대한 기록이 미미하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그 이외의 선조에 대한 급제와 입격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고려말 1361년(辛丑 공민왕 11), 홍건적의 침입으로 수도 개경(開京)이 함락되어 다수의 중요 사료(史料)가 소실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사료된다. 이 같은 사유로 고려 역사 보완과 정리를 위해 조선 개국 후 1449년 고려사와 1453년 고려사절요를 편찬했다. 2007년 9월 문중에서는 도문회를 중심으로 장흥문화원과
협의하여 장흥읍 읍성로 장흥경찰서에서 장흥향교 방향으로 가는 남문고개 도로변에 「壯元峯由來碑」를 문화원에서 세웠다. 현세 사람들에게는 삼형제의 뛰어남을 알리고 후손들에게는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대종회(大宗會)에서 추진하는 매년 하계수련회에서 필수 답사 장소이다. 이러한 유래비가 역사 사실과 차이점이 있다. 후손들은 기록에서 반드시 사전 역사 고증과 확인을 거쳐 사실의 역사를 반영하고 오기에 대해서는 정정해야 한다. 이는 장흥위문의 위상과 자존심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보의론연구위원회에서는 선대 역사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 및 토론문화를 이끌어 내면서 세계(世系)사항은 족보 원안을 유지키로 하였으나, 종원들간 이견차로 에너지를 소모하는 등 문중화합이라는 과제를 남겼다. 족보 원안(原案) 중, 5세 繼廷(1038~1107), 6세 紹, 7세 文凱(1228~ ?) 조손(祖孫) 간의 연령 190년 차이는 성립이 불가하다고 사료되며, 역사 학계에서도 이를 지적하고 있다. 연구안(硏究案)은 5세 계정(繼廷), 6세 통원(通元), 7세 돈겸(敦謙), 8세 대여(大輿), 9세 소(紹), 10세 문개(文凱)로 하였다. 당대의 문과 급제자, 진사시 입격자는 평균 20대 초반 연령이다. 이를 가정하고 8세 대여(大輿)의 생년이 근거되는 1212년 진사시 자료를 기준하여 증조(曾祖)가 되는 5세 충렬공(繼廷)과 생년을 비교하면 150년 안팎 가량 차이가 생겨 이 또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사료된다. 다만, 8세 대여(大輿), 9세 소(紹), 10세 문개(文凱) 간은 40년 가량 차이가 생겨 타당하다고 사료된다.
14세 합문판사공(种)은 고려말 시중 김종연 등과 고려 회복을 모의 하다가 누설되어 곤장백대를 맞고 멀리 유배(被杖百遠流)되었다.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 후 망복(罔僕)해오다가 태종 이방원의 강권(强勸)에 의해 1405년(乙酉) 판내섬시사(判內贍寺事), 1408년(戊子) 판례빈시사(判禮賓寺事), 경상도경차관(慶尙道敬差官), 별시위패두(別侍衛牌頭) 등 정3품 上 관직에 봉직(奉職)한 새로운 행장이 2005년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에서 발견되어 시조공 사적비를 개비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반영하였다. 차후 모든 기록물에서는 이를 반영하고 계속된 역사기록 수집이 필요하다.
조선후기에서는 26세 존재공(伯珪)은 1796년(丙辰) 정조대왕에게 「만언봉사」를 올려 옥과현감에 제수되고 실학사상의 저서 「정현신보」 등 90여권을 남겼다. 관북 태생 선조들은 함경도 함흥 지역을 중심으로 다수가 생원·진사시를 거쳐 문·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출사하였다. 1758년(戊寅) 영조대왕의 명을 받아 「북도능전지」를 저술한 31세 호조참의공(昌祖) 등 훌륭한 선조 다수를 배출하여 장흥위문의 위상을 높였다. 남북분단으로 인해 교지, 문집, 간행 책자 등 흔적과 행장을 확인할 수 없다.
그나마 6.25 전쟁 때 함흥 출신 종인들이 월남하면서 가지고온 1915년 을묘보(乙卯譜)는 학계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존재공이 쓴 충의록은 합문판사공(种) 등 49人이다. 이중에는 사월 태생 21세 덕원부사공(重俊), 24세 호조정랑공(公達)·훈련부정공(公濬), 26세 사진공(士進) 등 4人과 관북(함흥) 태생 23세 추파만호공(國弼), 24세 참봉공(澂), 25세 의주부윤공(漢良), 26세 길주훈도공(大業), 32세 만암공(光肇)등 5人이 포함되어 있다. 존재공과 비교 하면 대수가 아래인 28세 도승지공(定相) 등 여러 선조가 반영되지 않았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선조들이 관직에 출사하였으나, 선대에서는 이에 대한 체계적 기록이 없다. 함경도 함흥은 지리적으로 장흥과는 원거리에 위치하여 왕래가 쉽지 않은 여건과 1950년 6.25 전쟁으로 인한 민족의 분단이 있었다. 이러한 바탕에서 장흥위문 자료를 본향(장흥)에서 정리 간행하다보니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였다고 추정된다.
최근 선조 행장 확인은 필자가 평소 의문을 갖고 시작하게 된 곡성현감공(21세 大成) 등 조선시대 38人 선조이다. 외관직을 중심으로 화순 능주 1人, 장흥 17人, 관북 20人 선조들에 대해 1)장흥 방촌 판서공파, 행원 괴봉공파 종택에서 소장하고 있었던 교지와 국가 사료인 국조방목·사마방목·승정원일기·조선왕조실록 등 2)선조들의 관직 역임지 현 28곳 시·군·구(문화원·향교·향토사학자)에서 향토지로 간행한 자료 3)1999년 기묘보 면주와 지장록, 요람 등의 후손 기록 등을 통해 선조들의 행장을 비교 확인하였다. 특히 곡성현감공에 대한 대동보 면주, 충의록, 요람 등의 기존 기록에서 公은 1637년(丁丑)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간 동궁(소현세자)을 호성하고 돌아와 고향과 가까운 곡성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한지 얼마 않되어 병환으로 타계함을 기록하고 있다. 公의 자(子) 후징(後徵)의 1585년 식년 진사시 입격 자료인 사마방목 기록에서 후징의 생년이 계축(癸丑 1553년), 父는 前 곡성현감 大成으로 기록하고 있다. 곡성군청의 선생안 자료에 의하면 제 38대 곡성현감으로 재임기간은 1565년 1월~7월간이다. 이러한 근거로 하면 公의 생년은 대략 1525~1530년 정도로 추정되며, 100년 이상 차이가 있어 청나라 심양 호성에 의문이 따른다?. 사마방목에서 자(子) 후징의 생년 등 자료와 곡성군청 선생안 자료를 대동보 면주, 충의록, 요람 등의 기록과 비교하면 큰 차이점이 확인되었다.
여러 기초자료 중, 교지는 당시 왕이 내린 인사 발령장으로 연월일까지 알 수 있어 신뢰하는 문건으로 사료된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국조방목·사마방목 내용은 교지와 같이 공신력을 가진 역사기록물이다. 관직 제수 시기는 알 수 있으나, 부임한 후 이임까지 재임기간을 알 수 없다. 선조들이 관직을 역임한 현재의 시·군·구청(문화원,향교,향토사학자)에서 편찬한 향토지 선생안에는 수령(부사·군수·현령·현감 등)의 재임기간, 전·후임자 등을 알 수 있어 교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를 보충 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대동보 면주, 지장록(충의록), 묘갈명, 행장록 등 여러 자료는 석학(碩學) 후손들이 찬(撰)하였다. 당대 시대적 풍토인 가문(家門) 중시와 선조를 높이는 사례가 일부 반영됨이 확인된다.
대종회에서는 문중의 대표적 책자 「장흥위씨 요람」을 2005년 4월 25일 초판 발행했다. 이어서「보정 장흥위씨 요람」을 2018년 4월 25일 재판 발행하였다. 문중에서 의결한 세계 내용, 종파 명과 각 종파 계열, 선조의 행장, 관작호, 문·무과 급제와 생원·진사시 입격 현황, 사우 연혁, 세거지 자료 등 여러 기록에서 기묘대동보, 현존 교지, 승정원일기, 시·군·구청(문화원)에서 정리 간행한 책자 기록 등과 비교하면 많은 차이가 있음이 확인된다.
충청남도(문화관광국) 등 28곳 시·군·구청(문화원,향교,향토사학자 등)관서에 연락하여 선조의 관직 역임 자료를 수집하였다.
<필자에게 우편 송부한 책자>
자료는 문화관광(예술)과, 문화원 업무 담당자로부터 해당 책자 전면 표지와 내용 부분을 사진 촬영하여 메일 또는 핸드폰으로 송부받았다. 일부 연령이 되신 문화원장, 향토사학자들과는 전화 통화하여 간행된 책자에서 내용을 발췌하였다. 4곳의 지자체에서는 관련 책자를 우편으로 송부해주었다. 협조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정리 간행된 자료에서 선조들의 인명과 관직 역임 사실이 확인되면 후손으로써 가슴 벅차고 반가웠다.
시·군·읍지, 향토지, 향교지 등의 공통된 사실은 조선 초기를 포함한 역사 격변기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조선 중기까지 자료가 현존하지 않는 사례가 많았다. 또한 400~6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자연적인 멸실로 행장 확인에 한계점이 있다. 여러 시·군·구청(문화원)에서는 주로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각 지역의 사료(史料)를 정리하여 책자를 간행하다보니 정확한 재임기간(연월일) 등 기록 자료가 드물었다.
홈페지 자료 중에 31세 운수공(啓忠 1853~1931, 행원문중 괴봉공파종중)의 홍패(紅牌) 등 교지 4매를 저본(底本)으로 하고 무과 급제자로 한국역대인물정보에 등록한 사례가 있다. 후손들의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끝으로 선조 행장 확인 내용에 대해 이견(異見)과 차이점, 새로운 사실, 정정(訂正)할 부분 등이 있으면 조언(助言) 바란다. 정독(精讀)한 종원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씨족문화연구위원 34세 성록 삼가 쓰다
2018.01.10 10:10
번호 | 제목 | 조회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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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 성씨순위 및 장흥위씨 지역별 분포 내역 [1] | 1677 |
공지 | 회주사 사호 개칭 경위 [1] | 4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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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 38.내금위장공(34세 鍾植, 1821~ ?) / 栢江 위성록 | 116 |
120 | 37.단성현감공(31세 啓采, 1849~1892) / 栢江 위성록 | 1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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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 35.홍문관수찬공(35세 道源, 1838~1886) / 栢江 위성록 | 197 |
117 | 34.사헌부지평공(34세 鍾謙, 1854~ ?) / 栢江 위성록 | 146 |
116 | 33.사헌공(34세 鍾崑, 1796~1868) / 栢江 위성록 | 119 |
115 | 32.오위장공(34세 鍾敏, 1791~1861) / 栢江 위성록 | 111 |
114 | 31.병조정랑공(34세 鍾善, 1789~1862) / 栢江 위성록 | 129 |
113 | 30.흡곡현령공(33세 煥喆, 1772~1836) / 栢江 위성록 | 96 |
112 | 29.진보현감공(33세 迪喆, 1766~1838) / 栢江 위성록 | 103 |
111 | 28.사헌부장령공(33세 文喆, 1766~ ?) / 栢江 위성록 | 103 |
110 | 27.전의현감공(33세 魯喆, 1764~1832) / 栢江 위성록 | 107 |
장기간 너무나 노고가 크셨습니다. 다소 미흡했던 관북선조들에 대한 연구가 독보적입니다. 존호를 명명하고 새로운 선조를 조명하는 등 38회라는 횟수도 그렇지만 일일이 전화하여 면주와 비교하여 고증한 점 높은 찬사를 보냅니다. 40여개의 게재글을 자세히 보고 조만간 제 나름의 의견을 제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