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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성격은 천차만별하다. 급한 사람, 느긋한 사람, 매사에 적극적인 사람, 소극적인 사람, 모험심이 강한 사람, 없는 사람, 술을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 말이 많은 사람, 말수가 적은 사람, 사교성이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등등 헤아리자면 한정이 없다. 아마 지상에 사는 60억 인구는 저마다 각기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역사와 풍토와 혈통 기후 등 삶의 조건에 따라 공통점도 있다. 예를 들면 중국인은 매사에 느긋 하는 ‘만만디 정신’일본인의 책임의식인‘사무라이 정신’조선시대 선비들의 군왕과 나라를 위한‘선비정신’등이 그것이다. 성씨에도 공통점이 있다. 그 공통점을 학술적으로 거창하게 이념(理念)이라고 표현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느닷없이 성격 얘기를 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세상을 사는 데는 무수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살아야 한다. 한마디로 인생은 사람을 사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유치원에서부터 초등·중학·고교·대학에 이르는 배움의 과정은 모르는 사람을 사귄 과정이다. 또한 직장생활과 단체 활동 등도 사람을 알고 상부상조하는 과정이다.
친구와 지인(知人)이 많은 사람을 부러워한다. 사람들은 주변에 친구의 일을 제 일처럼 돕고, 아는 사람들이 크고 작은 행사에 성의를 다하는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을‘성공한 사람’이라고 평가 한다. 예를 들면 부모의 장예식과 자녀의 결혼식 등 집안의 행사에 참여하는 문상객과 축하객의 질과 양이 평가의 바로미터가 되기도 한다.
선출직(選出職)에 출마해서 당선되는 것도 사귐의 성패여부에 있다. 우리사회가 민주와 되면서 선출직 공직이 늘어가고 있다. 작은 단체의 대의원에서 한 나라의 대통령까지 선거에 의해 적격자를 가린다.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람을 사귄 결과랄 수 있다. 사람을 사귀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성격이다.  
그렇다면 우리 위씨의 성격은 어떤가.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위씨들은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며 결벽증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런 성격으로 인해 피해를 입기 일쑤이다. 물론 위씨 성을 지녔지만 개방적이고 능동적이며 사교성이 넘친 종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많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1. 장흥 위씨들의 일반적인 성격
① 내성적이다.
② 고집이 세다.
③ 아쉬운 소리를 못한다.
④ 법을 어기지 않으려 한다.
⑤ 순하지만 욱하는 일면이 있다.
⑥ 체면 때문에 손해를 많이 본다.
⑦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한다.
⑧ 문과나 이과보다 예체능쪽에 소질이 있다.
⑨ 남자보다 여자가 사회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와 같은 성격의 단면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절대적인 공통점은 아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은 1950년대 탁구에서 ‘위쌍숙’선수가 있었고, 최근에는 천재 골퍼 ‘위성미(미셸 위)’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그러므로 남존여비사상을 이유로 소질 있는데도 여자라는 이유로 능력 있는 딸의 미래를 막아서는 안 된다.  

2. 폐쇄적 성격으로 인한 결과

① 선출직 공직자가 적다.
② 부자가 없다.
③ 강력범죄자가 없다.

우리 위씨 성을 가진 사람 가운데 시조공께서 동래한 이후 국회의원은 단 한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과거 자유당 시절에는 완도와 장흥에서 두 명의 도의원이 나왔으나 1991년 지방자치가 부활된 이후 지금까지 장흥에서는 기초단체장은 물론 기초단체의원 하나도 당선된 경우가 없다. 그만큼 사람을 폭넓게 사귀는 정치력 또는 포용력이 부족한 결과가 아닌가 여겨진다.
기업가도 없다.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국가이다. 자본이 모든 가치의 척도요 목표이다. 그런데 그런 자본주의 체제에서 50명의 종업을 거느린 기업체 하나 없다면 부자(富者)가 전무하다는 얘기다. 그러니 문중 사업을 하기가 너무도 어렵다. 장학재단을 발족하는데 10년 이상 걸린 것은 바로 우리 문중의 문부(門富)가 그만큼 취약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나 부자가 없다고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위씨가 이 땅에 정착한지 1360년이 넘었지만 아직 살인(殺人)을 하거나 강도(强盜)를 하는 강력범죄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만큼 양순하다는 것을 나타낸 결과이다. 우리는 이런 미풍을 문중의 전통으로 삼아 먼 훗날까지 유지해야 할 소중한 가치인 것이다.

3. 선조의 DNA와 성격의 연유

위씨의 성격이 이런 유형으로 형성되는 데는 조상들의 유전인자에 기인 할 공산이 크다. 그러지 않고 각자의 성격이 우연의 일치라고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다고 돌아가신 선조들의 유전인자라고 유추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우리의 조상 가운데 몇 분의 행적을 쫓아보면 성격 내림의 유전적 결과를 어렴프시나마 조명할 수 있다.

1). 충렬공의 청백리상(淸白吏像)

우리 5세조 충렬공 휘 계정(繼廷)은 고려조정의 명신(名臣)이다. 공은 문종(文宗) 때 등제하여 선종(宣宗)·헌종(獻宗)·숙종(肅宗)·예종(睿宗)까지 4조의 임금을 섬긴 대신이었다. 관이 수태보문하시중태사(守太保門下侍中太師)이르고, 국서(國書)를 초안한 문장가였다. 졸 후 예종(睿宗) 묘정에 배향되고, 충렬(忠烈)이라 증시(贈諡)된 청백리였다.
공은 숙종의 고굉대신(股肱大臣)일만큼 신임이 두터웠다. 왕이 재위 10년 만에 병으로 위독하자 공을 불러 후사를 부탁하는 유언을 했다. 즉 “고굉대신에게 의뢰하노니 다같이 충성심을 발휘하여 왕실을 보좌하고, 국조(國祚)를 무궁토록 이어가게 한다면 짐은 비록 눈을 감으나 마음은 흡족하리라”하는 이른바 숙종 왕의 교서(敎書)를 받은 것이다.
선왕의 유지에 따라 공은 세자를 받들어 대업을 잇게 하니 그가 곧 예종(睿宗)이다. 예종은 즉위한 후 1106년에 공을 문하시중에 제수했다. 얼마 후 신병을 이유로 퇴임을 건의하자 왕은 만류하고 공은 사퇴를 고집하는 서한을 무려 7번이나 오갔다. 더구나 퇴임을 윤허한 후 왕이 차(茶)와 약(藥) 이은분(二銀盆)을 하사하자 표문을 3번이나 올려 사양했다.
여기서 왕(예종)의 조서 한 토막을 보자. “경의 학식과 문장은 사림의 으뜸이요 곧은 절개는 세상의 명신이 된지라 병으로 해관(解官)됨은 참으로 애석하게 여겼거늘 또 녹봉(祿俸)마저 사양하니 나의 우현경족(優賢敬足)한 뜻을 모르른가”하며 서운함을 표하고, 다시 이분록(二分祿)을 하사했으나 졸하자 충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예조의 뒤를 이은 인종(仁宗) 또한 그대로 있지 않았다. 조서에서 “계정(繼廷)은 일찍이 숙종의 유명을 받아 선군을 보좌했으며, 청렴 정직하여 종시일절(終始一節)하였음으로 마땅히 예종묘(睿宗廟)에 배향하라”했다. 또한 「만춘일화」도 있다. 이쯤 되면 공의 인품과 생애가 어떠했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강직한 청렴성이 후손에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2). 판사공의 불사이군(不事二君)

고려가 이성계(李成桂) 일당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우리 14세 판사공(判事公)은 도무지 승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시중을 지낸 김종연(金宗衍)·심덕부(沈德符)·판삼사사(判三司事) 지용기(池湧寄)·조유(趙裕)·장익(張翼) 등과 친위혁명을 모의했으나 서경천호 윤귀택(尹龜澤)의 밀고로 발각돼 곤장 백대를 맞고 귀가(혹은 귀양)된 바 있다.
공의 쿠테타 기도로 이성계의 조선조정은 위씨의 출사를 금지시켰다. 고려 때의 갑을족(甲乙族)이 하루아침에 역적의 집안으로 전락한 것이다. 더구나 이성계가 정권탈취에 성공한 후 친위혁명을 기도한 세력의 가문에게 출사금지령을 해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위씨의 후손들은 스스로 출사를 포기하고 두메산골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살았다.

3). 습독공의 출사포기(出仕抛棄)

18세 습독공(習讀公) 휘 유형(由亨)은 판사공의 현손이다. 습독공은 판사공 이후 15세(悳龍)·16세(自溫, 自良, 自恭, 自儉)·17세(宗亨, 宗復, 宗魯, 宗立)까지 3세대를 거쳤으나 선조들은 출사를 단념했다. 그는 당시 과거에 급제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출사를 포기한 것은 선조들의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은 당대의 문사로 알려진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나 장흥에 귀양 온 영천(靈川) 신잠(申潛) 등과의 자신의 평화촌 다산등산정재에서 수작한 결과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공은 자신을 제외하고 친동생과 또는 4촌 동생(由貞, 傭) 등에게는 과거에 응시하도록 권유해서 합격시켰지만 자신은 끝내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4). 덕원부사공의 청렴성(淸廉性)

21세 중준(重俊)은 16세 자공·17세 종립·18세 서(瑞)·19세 석정(碩貞) 20세 량(良)의 외아들이다. 그는 공직에 들어가 선정을 베풀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일찍이 무과에 급제해서 여러 직을 거쳐 덕원부사(德源府使)에 제수됐다. 부사로 부임해보니 이전까지 부사 등 벼슬아치들이 백성을 도와주기는   커녕 수탈하기에 급급한 사실을 확인했다.
부임하자 말자 백성을 괴롭힌 각종 폐단을 단시일안에 척결했다. 고을 주민들의 칭송은 자자했다. 그러나 관찰사 등은 그의 선정이 못 마땅했다. 자신들의 수탈행각과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그를 놔두고는 안 되겠다고 여겨 백방으로 모함했다. 그들의 음모로 공은 부사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귀향하는 그의 짐은 옷가지 뿐 아무 것도 없었다. 공이 얼마나 청렴했는지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5). 해남현감공의 청렴성(淸廉性)

공은 24세이며 휘는 천상(天相·1635~1683)이다. 효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외직과 내직을 두루 거쳐 해남현감(海南縣監)에 제수됐다. 고을에 부임해서 백성을 친형제처럼 보살피며 지극한 선정을 베풀었다. 주민들은 “많은 현감을 경험했지만 위 현감처럼 백성을 위한 벼슬아치는 처음만나 본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현민들은 공의 선정을 기념하기 위해 재직 중에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한편 공이 현감에서 물러나 고향인 장흥 행원으로 귀향하자 집의 담장이 허술함을 보고 새로 담장을 쌓아주기도 했다. 이 담장을 당시 주민들은 ‘보은의 담’이라고 했다. 얼마나 정직하고 청렴했으면 떠나버린 현감의 고향까지 찾아와 담장을 쌓아주겠는가.

6). 존재공의 제주(祭酒)사건과 적폐 혁파

존재공을 모르는 위씨는 없을 것이다. 그는 벽촌에서 출생한 선비로는 대단한 천재였다. 5세 때 글을 짓고 6세 때 소학을 읽은 후 14세 때는 사서(四書)와 주역(周易)총목과 선후천설(先后天說) 괘(卦)와 변역(變易) 묘리(妙理)를 탐닉했다. 7세, 8세, 9세 때 지은 영성(詠星)·영등화(詠燈火)·천관산 등정(登頂) 소감은 그 천재성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공은 과거에 무려 7번을 도전했지만 번번이 쓴잔을 마신다. 실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바로 성벽(姓僻)·지벽(地僻)·인벽(人僻) 즉 위씨라는 성씨, 장흥이라는 지역, 배경이 없는 한계를 탄식했다. 공은 결국 본시에 급제하지 못하고 벽촌에 은거하며 저술에 몰두, 9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저서들은 이제 빛을 보고 있다.
존재공의 결백증도 대단하다. 당시 남해안의 해일피해를 시찰하기 위해 위유사 서영보가 공의 사랑방에서 하루 밤을 지내게 됐다. 그런데 그날이 존재공 조상 한 분의 기일(忌日)이었다. 공은 조정에서 밀주(密酒)를 금하는 터라 제주(祭酒)도 담그지 말도록 이미 지시를 해준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이 제주를 몰래 담은 사실이 들통 난 것이다.
존재공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래서 밀주를 마당에 쏟아 버렸다. 서 위유사는 비록 조정에서 못하게 하는 밀주이지만 조상제사용으로 쓰기 위해 부인들이 소량으로 담근 것을 그렇게 하면 지나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존재공은 “아무리 좋은데 쓰려 해도 조정에서 금지하면 따른 것이 백성의 도리다”며 부인들의 행위를 마땅찮게 여겼다.
공의 결벽증(潔癖症)은 여기서 그친 게 아니다. 위유사 서영보의 천거로 옥과(玉果)현감에 취임한 그는 고작 500여 일간의 재임기간에 당시 관청의 허다한 비리를 대담하게 일소했다. 즉 지역(紙役), 승폐(僧幣), 어공(魚供) 등 주민들을 괴롭힌 관료들의 그릇된 관행을 혁파한 것이다.
공의 관폐척결은 관찰사의 원님평가에서 하등 평점으로 나타났다. 즉 전주에 있는 관찰사가 현감들의 근무를 평가하는데 최하등급으로 조정에 보고했다. 이는 공의 급진적인 개혁으로 탐관오리들의 치부를 온 천하에 폭로한데 따른 보복인 셈이다. 관찰사의 평점은 해임내신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공의 일련의 행동은 마치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다. 그렇게 엄청난 학문을 했음에도 재산을 모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변변한 제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저술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맞물려 일부러 선택한 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내림에서 오는 성격의 부정적인 면이 작용한 결과가 아닌 가 생각되기도 해도 아쉽고 억울하기까지 한다.

여섯 분의 선조를 보면 우리 위씨의 유전적 특징을 짐작할 수 있다. 하나같이 지나칠 만큼 유별난 결벽증이 확인되고 있다. 이런 연유인지 모르나 후손들도 허다히 그런 선조들의 유전적 특질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좋은 유전인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틈만 나면 남을 속이는 세태와는 너무 동떨어진 성격인 것이다.
위씨 같은 성격은 모든 제도와 관행이 정상인 선진국에 가서 살면 안성맞춤이다. 비근한 예로 일본정도만 되더라도 손해를 볼 필요가 없다. 일본은 남을 속여 등쳐먹은 사기꾼이 있지만 우리나라와는 딴판이다. 법을 지키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까 정직하고 부지런하면 잘 먹도 잘살 수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4. 위씨 성격의 개조론(改造論)

흔히 성격을 천성이라 한다. 타고난 성격을 고치기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씨의 일반적 성격은 현실적으로 좋은 부분보다 손해 볼 부분이 더 많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의 덕을 보지 못할망정 성격으로 인해 손해를 보는 것은 지혜롭다고 볼 수없다. 비록 천성이라 할지라도 고치려 노력하면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떤 성격으로 고쳐져야 하는가. 첫째는 남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남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도 나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남을 인정하기가 생각보다 어렵다. 인격적으로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을 똑같은 인간으로 대접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상대를 인정해야 한다.
둘째 남의 말을 끝까지 들어줘야 한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상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론을 제기하거나 자주 말을 끊으려고 한다. 몇 마디 들어보면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알 수 있다. 되지 않은 말을 들어주기란 참으로 인내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남이 자기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는데 이쪽 말을 들어줄리 없는 것이다.
셋째 남을 칭찬하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자기 잘난 멋으로 살고 있다. 나도 그렇고 남도 그렇다. 그런데 내가 상대를 무시하면 그 또한 나를 무시할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세상을 살면서 상대의 장점을 평가해주는 것 이상 좋은 장점은 없다. 그 칭찬은 어느새 한바퀴를 돌아 나에게 훨씬 좋은 결과로 오게 되어 있다.
넷째는 손해보는듯하게 살아야 한다. 그 점에서 우리 위씨는 평상시대로 살면 된다. 원래 손해를 많이 보고 살았지만 이후로라도 그렇게 살면 남에게 미움을 사지 않을 것이다. 지나치게 약삭빠르고 이기적인 사람은 언젠가는 그 성격으로 크게 손해를 보게 되어 있다. 그것이 세상사는 이치고 인과응보의 결과이기도 한다.
다섯째는 남의 이름을 기억해서 불러주면 좋다. 사실 정치하는 사람들을 보면 만난 사람 모두의 이름을 외우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 위씨 중 정치가가 없다는 것은 어쩌면 정치가적인 의지와 남의 이름을 외워 확대재생산을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이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고 불러준 것은 돈들이지 않고 환심을 사는 일이다.
여섯째는 인사를 잘해야 한다. 일본인의 가장 큰 장점은 친절이다. 그들의 인사와 길 안내 등 친절성은 세계인들의 찬탄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직장에서나 동네에서 아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돈을 들이지 않고 자신의 이미지를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다. 인사를 받은 이는 어디에서나 자기에게 친절히 인사한 그 사람의 팬이 되어줄 것이다.    
이상의 제안은 실천하기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6개항 중 네 번째는 위씨 일반의 기존성격이니 사실은 5개항만 실천하면 되는 셈이다. 이 것만 실천해도 사람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된 사람’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할 것으로 믿는다. 후손들은 우리 스스로의 성격에 무슨 결함이 있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만으로도 유익할 것이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배우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 성씨의 성격적 결함에 대해 지금까지 어디서도 지적을 받아보거나 교육을 받지 않았던 것을 음미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씨 일반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 성격을 거론해본 문중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점을 알고 대처하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5. 위씨 중흥을 위한 수련생의 방안

전국에서 모인 2005년도 하계수련회에 참가한 대학생들이 지난해 8월 13일 장천재에서‘장흥 위씨의 중흥을 위한 방안’에 대해 토론회를 가졌다. 26명의 수련생들은 5명~6명 1조로 5개 분단으로 나눠 분임토의를 가진 후 그 결과를 글이나 그림으로 전지에 표현하고 분단별 대표가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분단별 작품은 다음과 같다.
1분단= 제목 ‘魏哥의 나아갈 길’(1) 현세대 ① 기회주의적 경쟁적 사회풍토 ② 각박하고 인심이 없는 이기주의적 사회 ③ 여과 없는 문화수용으로 인한 정체성 혼란 ④ 물질만능주의 로 진단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2) 우리 가문(문중)의 본받아야 할 특징으로 ① 지조를 가진 선비 ② 풍류를 즐기면서 유유자적 ③ 자부심과 뚜렷한 정체성 ④청백리의식으로 선정을 베 품 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내림을 유지하면서 중흥을 꾀하자고 주장했다. (분단원: 대원·공탐·진섭·현식·황용)
2분단= 제목 ‘위씨의 중흥을 위한 우리의 할일’2분단은 주어진 과제를 큰 나무로 형상화해서 우리 스스로의 ① 성격적 단점 개조 ② 자신의 위치에 충실 ③ 수련회를 통해 뿌리의 정체성을 알고 ④ 장학회 활동을 강화해서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진단하고 미래의 처방도 했다.
(분단원: 현석·성표·원국·지선·상혁)
3분단= (1) 자신의 가치를 높이자 그 방안으로 ① 건강관리 ② 자기 일에 최선 ③ 적극적인 사고 ④ 인간이 갖출 덕목겸비 (2) 자신의 뿌리를 알자 ① 스스로의 뿌리를 확실히 숙지 ② 조상을 모시는 일에 적극 참여 (3) 미래를 위해 노력하자 ① 자손을 번창 시킨다(아들 딸 각 2명이상 다다익선) ② 자손들이 훌륭하게 자랄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보살핀다.(ex 위성미)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사람이 되자.
(분단원: 재문·호진·사현·혜림·설우)
4분단= 제목 ‘대한민국 만세, 대 위씨 만세’이 분단은 위씨의 발전을 위해 지구를 상징하는 원을 그리고 위쌍숙이나 위성미 같은 인물을 많이 배출해서 세계에 두각을 나타내는 위씨가 되자고 제안했다.
(분단원: 명화·남희·재희·하나·영선)
5분단= 제목 ‘위씨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5분단은 우리의 중흥을 위해 ① 신념을 가지고 살자 ② 자손을 번창시키자 ③ 적극성을 가지고 살자 ④ 남의 의견을 존중하자 ⑤후손을 위해 좋은 부모가 되자는 등으로 스스로의 다짐과 발전방안을 제시 했다.
(분단원: 종일·재호·재훈·진욱·은주·애정)

이상의 분임토의 결과는 하찮게 평가할 수 있으나 매우 소중한 것이다. 다른 성씨도 대학생을 대상으로 조상들의 유적지를 성지순례는 한다. 그러나 분단끼리 성씨의 발전과제를 놓고 분임토의를 하거나 발표하는 경우는 아마 흔치 않을 것이다. 어른들이 미래의 세대들에게 이런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 기성세대는 기왕에 수련회를 하면서 보다 효과를 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계발(啓發)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지를 모아야 한다. 중지를 모으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있는 아이디어를 빌려야 한다. 그 일은 집행부가 담당할 일이다. 역사는 특출한 지도자나 다중의 지혜를 통해 발전한 것이다.  

6. 特質과 不可思議

위씨는 이해하기 어려운 몇 가지 의문이 있다. 첫째, 1367년 동안 단일본(單一本)을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함흥출신 한분이 몇 해 전에 재판을 통해 본관을‘함흥 위씨’로 호적에 등재했다는 점이 흠이라면 흠이다. 둘째, 특별한 벼슬아치를 병자호란 이후 배출하지 않고도 향토의 사족으로 명맥을 유지한 사실이다. 드믄 케이스이다.
셋째, 부자가 없는데 사우나 재각 등 갖출 것은 갖추고 산다. 다른 성씨는 문중의 큰일을 위해 부자 한 사람이 수10억씩 출연해서 일을 치른다. 그러나 위씨는 부자가 없는데 성의 있는 종원들의 힘으로 일을 해 낸다. 여기다 2004년에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우리보다 월등한 대성들도 홈피가 없는 것을 감안하면 대단하지 않는가.
넷째, 장흥 위씨 요람을 펴낸 사실이다. 국내 어느 성씨도 족보나 문적 이외에 조상·유적·세거지·모선주역 등의 유래를 단행본으로 엮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2005년 4월 30일 그 역사적인 작품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그 책은 후손들에게 조상의 유래 등을 쉽게 알 수 있는 길잡이로 손색이 없게 만들어져 호평을 받고 있다.
다섯째, 천관산(天冠山)이라는 특정한 산을 성씨의 상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천관산은 자타가 공인하는 장흥 위씨의 산이다. 장흥군민 누구에게나 천관산이 위씨의 산이냐고 물어보라. 그러면 모두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다른 성씨에서는 찾기 어렵다. 국내 280여개 성씨 가운데 특정한 산을 상징으로 가지고 있는 성씨가 어디 있는가.

7. 단결로 힘을 모아야 발전 한다

우리는 자랑거리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는 성씨이다. 그러므로 후손들은 어느 누구에게나 기(氣) 죽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살아야 한다. 조선 초에 역적의 집안으로 낙인찍히고도 살아남았는데 이제 무엇이 두려운가. 남이 가지지 않은 자랑거리를 더 만들기 위해 일로 매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중은 인물이 만든다. 인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재를 길러야 한다. 인재를 기르기 위해서는 물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물적 뒷받침을 위해서는 십시일반으로 힘을 합해야 한다. 힘을 합하는 길이 바로 장학기금을 마련하는 길이다. 개인적으로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길이 우리의 미래를 담보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단결해야 한다. 위씨는 남들처럼 도시에 문중 산이 없어 조상의 덕을 보지 못했다. 그것은 다행도 되고 불행도 된다. 일부 성씨들은 도시계획으로 엄청난 보상금을 받아 빌딩을 짓고 돈을 나누고 있다. 서로 많이 가지려고 대판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일이 없다. 돈으로 이상할 필요가 원천적으로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에도 단결 둘에도 단결밖에 없다. 우리는 부자가 없기 때문에 적은 힘을 보태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 우리의 조상들도 그렇게 해왔다. 그 길이 우리의 목표를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다. 어렵고 크게 성과가 나지 않은 일이지만 꾸준히 힘을 모으고 합치면 산도 옮길 결과가가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종친조직 간의 보이지 않은 갈등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갈등의 원인은 일부 종친간의 자존심 또는 기(氣) 다툼 같은 것이다. 제삼자적 입장에서 본 갈등의 원인을 반추해 보면 우월의식, 기금조성을 둘러싼 불신과 말씨 등 퍽 복잡다기한 사연이 깔려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의 잘못을 어루만져주며 상처를 감싸줘야 한다. 아픈 상처를 자꾸만 헤집으면 상처는 낫지 않고 커지게 마련이다. 더구나 갈등의 주인공들인 어른들은 지금 연로하시다. 솔직히 사는 날보다 세상을 하직할 날이 더 가까운데 반목하면 무슨 덕을 보겠는가? 모두 덧없는 것이다.
어른들이 지금이라도 힙을 합하면 문중에 더 큰일, 더 좋은 일을 하실 수 있다. 하산사 성역화사업, 전자족보, 장학금배가운동, 충렬공 신도비건립, 조상들의 저작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논문 수집분석 등 허다한 일이 있다. 이런 일을 하자면 서로의 힘을 모아야 함은 불문가지가 아닌가?
그래서 수련회에 참여한 후손들의 향후 역할을 적지 않다. 우선 서로 평생 동안 친하게 지내야 한다. 수련회기간만 알고 지내다 흐지부지 잊고 살려면 이 수련회의 의미는 반감한다. 그러므로 3박4일간 함께한 인연을 일생도안 끊어지지 않게 하는 모임 등의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학생 때 조상들의 유적지를 직접보고 느낀 것을 문중에 대한 관심을 갖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아마 모르기는 해도 이런 기회가 아니면 평생 하산사도 충렬공 산소도 모르고 지낼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수련회라는 기회를 통해 보고 알았으니 결코 미미한 경험이 아니다. 그런 경험을 살려서 앞으로 문중을 위한 역군이 돼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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