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만암공(32세 光肇, 1747~1820)
창조(昌祖)의 子다. 字는 錫汝요 號는 萬菴이니 英祖 丁卯 1747년생이며 英祖 1774년(甲午)에 司馬하고 正祖 1795년(乙卯)에 文科하여 관이 刑曹佐郞하다. 行誼文學으로 爲世所推하며 有萬菴集하고 譜疑說等을 篇하니 世稱南有桂巷이요 北有萬菴이라하다. 純祖 1820년(庚申)에 종하니 墓는 西古川面 觀音坊壬原이다. 配는 淑人 용인李氏니 父는 境城判官寅賓이다. 配는 청주韓氏니 父는 錫海며 墓는 公塋同三兆다.(면주 기록)
호조참의공(參議公) 휘 창조(昌祖)의 차자(次子)로 英祖 丁卯 1747에 태어나고 일찍이 박학굉사(博學宏詞)로서 그 문명(文名)이 1세를 풍미했다. 1774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49세 때인 正祖 乙卯 1795년에 문과(文科)에 등제하여 형조좌랑(刑曹佐郞),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유곡(幽谷), 금교(今郊) 등지의 현감(縣監)을 거쳤다. 공은 초휘를 광조(光肇)라 하였는데 왕이 조자(肇字)와 석여(錫汝)라는 자(字)를 하사(下賜)하였다. 공은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사호(沙湖)에 살면서 많은 저서를 남겼다. 만암집(萬庵集)이 있고,보의설(譜疑設)등으로 유명하니 세칭(世稱) 남유계항(南有桂巷)이요 북유만암(北有萬庵)이라 했다. 공이 남긴 유고가 다수있을 것이다 국토의 분단으로 살펴 볼 수 없어 참으로 아쉽다. 순조 21년(庚辰: 1820)에 졸했다.(요람 기록)
<사마방목, 국조방목, 교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확인 내용>
司馬榜目에 의하면 1774년(甲午 영조50) 진사 증광시 2등 4위로 합격이 확인된다.(원문 없음.)
國朝榜目에 의하면 1795년(乙卯 정조19) 정시(庭試) 병과(丙科) 16위로 문과(文科) 급제가 확인된다. 관북파 孫으로 현존 교지 확인할 수 없다. 승정원일기 내 주요 관직 제수 내용이다.
1)1795년(정조19) 5월 1일 정조실록 42권, 신해 1번째 기사 1795년 함흥(咸興)과 영흥(永興) 유생의 시권(試券)을 편전(便殿)에서 평가해 뽑았다. 함흥에서 수석을 차지한 진사(進士) 위광조(魏光肇)와 영흥에서 수석을 차지한 유학(幼學) 김이후(金履垕)에게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를 허락하였다. 내각에 명하여 합격자 명단과 수석을 차지한 답안지를 엮을 때에 맨 먼저 환조(桓祖)를 제향(躋享)한 사실을 써넣고 경축하는 연구시(聯句詩)를 기록하게 하였으며 인쇄해 반포하면서 《풍패빈흥록(豊沛賓興錄)》으로 명명하라고 하였다.
☞ 직부전시(直赴殿試) : 조선 시대 과거의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 전시는 임금의 친림(親臨)하에 행하던 과거의 마지막 시험으로 그 결과에 따라 갑과(甲科)·을과(乙科)·병과(丙科)의 등급을 정했다.
☞ 풍패빈흥록(豊沛賓興錄) : 3권 1책의 책이름이다. 조선 1797년(正祖21) 규장각(奎章閣)에서 엮음. 환조(桓祖, 이성계의 父 李子春) 탄생 480주년과 정조의 부친 장조(莊祖)와 모친 혜빈홍씨(惠嬪洪氏)의 회갑이 겹친 경사를 봉축하기 위한 갖가지 행사에 대하여 기록한 책이다.
2)1804년(순조4) 7월 10일 전적(典籍) 관직에 제수했다.
3)1805년(순조5) 10월 13일 은계찰방(銀溪察訪) 관직에 제수했다.
4)1810년(순조10) 3월 20일 형조좌랑(刑曹佐郞) 관직에 제수했다.
5)1812년(순조12) 9월 16일 금교찰방(金郊察訪) 관직에 제수했다.
☞ 은계찰방(銀溪察訪) : 역(驛)이름으로 지금의 강원도 회양군 하북면 은계리에 있었다. 조선시대에 은계도(銀溪道)의 중심 역이었다.
☞ 금교찰방(金郊察訪) : 역(驛)이름으로 지금의 황해도 금천군 서북면 강음리 남서쪽에 있었다. 조선시대에 금교도(金郊道)의 중심 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