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적양첨절제사공(26세 原徵, 1690~ ?)
生父는 泰萬이요 보성군수 赫萬의 양자(養子)이다. 字는 和玉이며 숙종 庚午 1690년생이니 才藝超倫하야 克承先業하고 登武科 하야 內歷主簿하고 外任僉使하다. 묘는 장동 마치다. 配는 숙부인 연안李氏로 1女 묘는 先塋下同原이다. 配는 숙부인 완산李氏니 2男하여 묘는 旌義松自只壬坐다.(면주 기록)
<후손 제주도 거주 사실 등>
公의 27세 장자 致能, 차자 載禹, 삼자 載安과 1녀(婿 尹 瑊)를 두었음이 확인된다. 장자 치능공의 묘소는 장동 馬峙이다. 완산이씨와 차자 재우공, 삼자 재안공 묘소가 정의현(현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장자 치능공은 연안이씨 소생(所生), 차자 재우공 삼자 재안공은 완산이씨 소생(所生)으로 추정된다. (기묘보 4권 p 81~83)
지장록에서는 一子 原載를 두어 정의현감 때 소생하였으므로 자손들이 그대로 살고 있다고 수록되어 있다. 적양첨사공은 三子와 1女를 두었다. 一子와 原載 기록은 오기(誤記)로 확인 된다. (지장록 p 1024~1025) 보성군수공의 정의현감 재임이 1716년이다. 이때 적양첨사공의 연령이 26세로, 이 시기에 次子 재우공, 三子 재안공이 태어 낳을 거라고 추정된다.
장자 27세 致能公 계열은 28세 榮虎公, 29세 文錫公으로 이어져 오다가 無後되었다. 묘소는 모두 장동 마치다. 이는 보성군수공의 정의현감 역임 후 보성군수공, 적양첨사공과 長子 치능공은 육지로 이거하여 본향 행원에 정착하였을 거라 추정해본다. 특히 29세 문석공 때 후사(後嗣)가 없어 보성군수공, 적양첨사공이 잊혀 있는 선조로 남아 현재 후손들로부터 제향(祭享)을 봉행(奉行) 받지 못한 중요한 요인이다.(기묘보 4권 p 81 기준)
☞ 면주기록, 지장록 내용은 公의 子•孫에 대한 기록과 비교하면 오기(誤記)가 확인된다.
<국조방목, 교지, 승정원일기, 남해군청 확인내용>
國朝榜目에 의하면 1723년(癸卯 경종3) 별시(別試) 병과(丙科) 221위로 무과(武科) 급제가 확인된다.
公의 현존 교지는 없다. 승정원일기에 1757년(영조33) 6월 16일 적양첨사 제수 등이 확인된다. 남해군청(문화원) 확인에 의하면 조선의 역대 적양첨절제사(종3품)의 정리 자료가 없어 정확한 재임 연월일은 알 수 없다. 적양진(赤梁鎭)은 현재의 경남 남해군 창선면 진동리 지역이다.(남해군청 : 여창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