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보성군수공(25세 赫萬, ~ ?)
천상(天相)의 삼자(三子)이다. 자(字)는 화경(華卿) 생졸년(生卒年) 기록은 없다. 일찍이 등무과(登武科)하고 歷府院諸職하며 出守旌義하야 歲値歉荒에 읍민(邑民)을 구활(救活)하니 치적(治績)이 임금에게 알려져 친필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 상(賞)으로 말 한필을 하사(下賜)하셨으며, 낙안군수와 보성군수에 임명되었다고 수록 되어 있다. 배(配)는 숙부인 연안李氏이다. 묘소(墓所)는 장동 馬峙艮座로 합조(合兆)이다.(기묘보 4卷 p.18 면주 내용)
「通訓大夫行寶城郡守公事實」에 의하면 公의 諱는 赫萬이요 字는 華卿이니 魁峯先生 諱 大用의 玄孫이요 縣監 諱 天相의 막내아들이다. 公이 나면서부터 체격이 壯大하였고 말수가 적으며 經書나 史記를 모두 통달하였고 筆法이 또한 정미로워 굳세며 算術이 귀신같았다. 팔도(八道) 감영(監營)의 水使·兵使를 수행하는 관원으로 있다가 武科에 급제하여 訓練院 主簿, 摠經都事, 司憲府監察을 지냈으며 外職으로 정의현감(旌義縣監)을 나갔는데 흉년을 만나 현민(縣民)을 구활(救活)하니 치적(治績)이 임금에게 알려져 親筆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 상(賞)으로 말 한필을 하사(下賜)하셨으며, 그 후 낙안과 보성군수로 임명되었고, 뒤에 해남·진도·대정·광양 등 현감을 역임하였는데 부임(赴任)한 곳마다 모두 비(碑)가 세워져 있다. 아들이 없어 伯氏(泰萬)의 둘째아들 원징(原徵)으로 후사(後嗣)를 삼아 가업을 이어받아 武科에 올라 가리포첨사를 지냈으며 一子인 原載를 두었으니 정의현감 때 소생하였으므로 자손들이 그대로 살고 있다고 수록되어 있다.(기묘보 지장록 p.1024~1025 내용)
<교지 등, 승정원일기 확인 내용>
公의 교지는 1)1696년(숙종 22) 6월 22일에 肅宗이 魏赫萬을 禦侮將軍行慶源鎭管阿山兵馬萬戶로 임명과
2)1707년(숙종33) 5월에 肅宗이 魏赫萬을 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 2매가 현존한다.
3)1711년(숙종37) 1월 초5일에 全羅道觀察使가 軍官 魏赫萬에게 발급한 傳令 1매가 현존한다. 새로 제수된 낙안군수(樂安郡守)는 조사(朝辭)하지 말고 부임(赴任)하라는 내용이다.
4)1716년(숙종42) 정의현감 재임 때 극심한 가뭄에 구휼(救恤)을 마쳤다는 보고 문서인 필진장(畢賑狀) 유서 1매가 현존한다.
승정원일기 근거 ①1696년(숙종22) 6월 22일 아산만호, ②1705년(숙종31) 2월 28일 임치첨사, ③1707년(숙종33) 5월 11일 부호군, ④1710년(숙종36) 12월 3일 겸내승, ⑤1710년(숙종36) 12월 21일 낙안군수, ⑥1716년(숙종42) 1월 23일 정의현감, ⑦1721년(경종1) 7월8일 진해현감, ⑧1722년(경종2) 1월 22일 경복궁 가위장, ⑨1723년(경종3) 3월 14일 군산첨사, ⑩1724년(경종4) 1월 28일 잉임사승전, ⑪1725년(영조1) 3월 21일 부호군, ⑫1725년(영조1) 12월 4일 보성군수, ⑬1726년(영조2) 6월 2일 단부부호군, ⑭1728년(영조4) 1월 11일 법성첨사 등 1731년까지 35년간 관직을 역임하면서 관직제수(官職除授), 의금부나인(義禁府拿因)사실, 서용(敍用), 전교(轉交), 장계(狀啓) 등 30건의 기록이 확인된다.
<면주·지장록 선대 기록과 승정원일기 비교 추정>
관직을 역임한 선조의 행장을 확인할 수 있는 대동보 면주, 지장록, 충의록 등 각종 기록에서는 관직 제수, 역임지역, 내용 등 여러 기록에서 승정원일기와 차이점이 확인된다.
1)1716년 정의현감 이전에 1710년 낙안군수를 제수(除授)함이 확인된다. 지장록 내용의 훈련원주부·총경도사·사헌부감찰·해남현감·진도군수·대정현감·광양현감 제수 사실이 승정원일기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조선시대에서는 외관직 제수시 향피(鄕避)제를 원칙으로 하였다. 해남현감은 1675년 公의 선친(先親) 해남현감공(24세 天相, 1635~ 1683)이 역임을 하여 당대 시대 상황에 의하면 부자(父子)를 동일 관직에 제수할 수 없었다고 사료된다. 진도군수 역임 관련된 기록으로는 1711년(숙종 37) 2월 19일 진도군에서 군기(軍器)를 점열(點閱)할 때 화약이 터져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전라도순무사 권상유의 장계에 대한 전교 내용 중, “巡營軍官前郡守 魏赫萬”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진도군수 역임 사실이 아니고 1710년 12월 21일 낙안군수에 제수한 사실에 의거 前 郡守로 기록함이 추정된다.
2)公은 해남현감공(諱 天相)과 宜人 창녕曺氏 사이에서 삼자(三子)로 태어났다. 생졸년은 기록되지 않아 알 수 없으나, 백형(伯兄) 내경공(泰萬)의 생년이 1662년이다. 중형(仲兄) 以萬公의 생졸년도 기록되지 않았다. 가정(假定)해서 公의 生年을 1667년으로 잡고, 25세(1692년)에 武科 급제 후 보성군수 등 여러 관직 역임 등 35년간 봉직하고 70세 미만(1731년-1667년=64년) 연령 때 타계하였을 거라고 추정해본다.
3)公과 配 숙부인 연안李氏 사이에서 1女를 생산하고 후사(後嗣)가 없어 伯兄 내경공(諱 泰萬)의 차자(次子) 원징(原徵, 1690~ ?)을 양자(養子)로 하고 가업을 잇게 하였다. 원징의 면주(기묘대동보 4권 P.81~82)에는 克承先業하고 登武科하야 內歷主簿하고 外任僉使하다. 라고 수록되어 있다. 지장록에서 가리포첨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승정원일기에서는 1750년(영조26)~1757년(영조33)간 10회 기록되어 있다. 관직은 수문장과 적양첨사(赤梁僉使) 제수(除授)가 확인되어 지장록의 가리포첨사 역임은 오기(誤記)로 추정된다.
<주요 관직 제수 및 확인 내용>
-임치첨절제사 : 승정원일기 근거1705년(숙종 31) 2월 28일 임치첨사에 제수가 확인된다. 무안군청(문화원) 확인에 의하면 조선 역대 임치첨절제사(종3품)의 정리 자료가 없어 정확한 재임 연월일은 알 수 없다. 임치진(臨淄鎭)은 현재의 전남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 지역이다. 이곳에 公의 선정비를 포함 5기가 세워져 있다.(무안군청 : 함경훈, 무안문화원장 : 백창석)
-낙안군수 : 1)승정원일기에 근거 1710년(숙종36) 12월 21일 낙안군수에 제수했다. 2)1711년(숙종37) 1월 초5일에 全羅道觀察使가 軍官 魏赫萬에게 발급한 현존한 전령에 의하면 새로 제수된 낙안군수(樂安郡守)는 조사(朝辭)하지 말고 부임(赴任)하라는 내용의 전령이 현존한다. 3)2006년 순천시 낙안향토지편집위원회에서 간행한 〃樂安鄕土誌〃 역대 낙안군수 인명에서 公의 인명은 없었다. 1710년 2월~1710년 12월간 沈之海, 1711년 2월~1712년 12월간 閔周憲이 각각 군수명단에 올라 있다. 4)1711년(숙종 37) 2월 19일 진도군에서 군기(軍器)를 점열(點閱)할 때 화약이 터져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전라도순무사 權尙游의 장계에 대한 전교 내용 중, “巡營軍官前郡守 魏赫萬”으로 승정원일기 등에 의거하면 낙안군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순천시청(원혜선)
-정의현감 : 승정원일기에 근거 1716년(숙종42) 1월 23일 정의현감에 제수가 확인된다. 그해 12월 극심한 가뭄에 구휼(救恤)을 마쳤다는 보고에 숙종(肅宗)이 격려하면서 특별히 길이 잘든 말(馬) 1필(匹)을 하사한다는 내용 문서인 필진장(畢賑狀) 유서(諭書) 1매가 현존한다. 이곳에 公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2002년 제주문화원에서 간행한 〃濟州史人名事典〃408p에 公은 정의현감에 1716년(숙종42) 3월부터 1718년 4월까지 역임이 기록되어 있다. 후임은 1718년 5월에 부임한 김초보(金楚寶)이다. 정의현(旌義縣)은 현재의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지역이다.(제주도청 역사문화재과 : 김나영, 서귀포 문화원장 : 강명언)
-진해현감 : 승정원일기에 근거 1721년(경종1) 7월8일 진해현감에 제수가 확인된다.
그러나 慶尙南道史(1988년), 馬山市史(1987년), 鎭海縣誌(1894년), 鎭海市史(1994년), 昌原府邑誌(1910년), 鎭田面誌(1990년), 鎭東面誌(1990년) 등 지역에서 간행한 책자에서 公의 진해현감 역임에 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진해현(鎭海縣)은 현재의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지역이다.(마산문화원장 : 임영주, 향토사학자 : 조현근)
-보성군수 : 면주, 지장록에는 보성군수에 제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1725년(영조1) 12월 4일 보성군수 관직에 제수했다. 1726년(영조2) 1월 26일 신병으로 부임하기 어려운 魏赫萬의 罷黜 등을 청하는 吏批의 啓가 확인되어 부임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2014년 보성문화원에서 간행한 〃寶城郡誌〃역대 군수 명단에 公의 인명은 없었다.(보성문화원 : 김호근)
-법성첨사 : 승정원일기에 1728년(영조4) 1월 11일 법성첨사 제수가 확인된다. 고려초 설치되어 조선 2대 조창(漕倉)의 하나인 법성창(法聖倉)과 서해 칠산바다를 관장했던 군영(軍營)이 있었던 곳이다. 현재의 영광군 법성면 법성리 지역으로 첨절제사 홍대항 등 선정비 7기가 남아있다. 〃靈光郡誌〃 〃法聖面誌〃에는 선정비가 현존한 첨사 7인에 대한 기록만 간략히 정리 되어 있다. 역대 법성첨사의 선생안 등 체계적인 정리 간행물이 없어 행장을 확인 할 수 없었다.(영광문화원 지역사연구소장 : 정택근)
※ 지장록 p1024~1025 「通訓大夫行寶城郡守公事實」내용(괴봉공파종중 升良 謹追識)중, 해남·진도·대정·광양 등 현감을 역임하였다고 했다. 승정원일기에는 관직 제수사실이 없다. 현재의 해남군청, 진도문화원, 제주도청, 광양시청에 의뢰 현감 역임에 대해 확인했다. 4곳 모두 간행 자료에서 현감직을 다른 사람이 역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오기(誤記)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