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삼수군수공(24세 天會, 1629~1683 ?)
자(字)는 여우(汝遇) 호(號) 취수헌(醉睡軒)으로 통덕랑 諱 국보(國寶)와 恭人 광산金氏 사이에서 四子 중, 三子로 태어났다. 公은 호남어사의 신분으로 장흥을 들른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이 公을 보고 武科에 응시하도록 추천하여 출사하게 됐다. 젊은 시절 번쾌불사장비부생(樊噲不死 張飛復生 번쾌가 죽지 않았고 장비가 다시 살아났다.)라고 불리울 정도로 호방한 용력과 멋진 한시를 창작할 정도의 지식과 뛰어난 문학성을 겸비하여 어모장군오위도총부도사 등 여러 내직을 역임하다 1664년 함경도 변경 삼수군수(三水郡守)를 제수 받았다. 그런데 당시 삼수(三水)에는 해남출신 남인(南人)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5~1671)가 71세의 늙은 나이에 조대비(趙大妃)의 상례문제로 서인들과 다투다 1660년부터 위리안치(圍離安置)되어 있었다. 고향의 어른이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편의 제공 및 잘 보살펴 주어 이 때문에 조정의 미움을 사서 관직에서 물러나고 행원으로 귀향하여 지우들과 수창(酬唱)하며 보내다가 1669년 종(終)하였다고 수록하였다.(면주, 충의록, 요람 등 기록)
<국조방목, 교지, 승정원일기 확인 내용>
國朝榜目에 의하면 1651년(辛卯 효종2)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8위로 무과(武科) 급제기록이 확인된다.
公의 교지는 9매가 현존한다.
1664년(현종 6) 3월 12일 顯宗이 魏天會에게 通訓大夫行三水郡守로 임명하였다. 면주 등 선대 기록에서는 1669년 종(終)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671년(현종13) 12월 22일 현종이 魏天會에게 禦侮將軍行慶尙右道兵馬虞侯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에 의거하면 1669년 종년은 타당하지 않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666년 윤선도의 이배(移配) 시 편의제공으로 용천부에 정배(定配)되기도 하였으나 1671년에 경상우도병마우후를 제수 받아 1672년에 연유를 알 수 없는 살인의 죄목으로 1683년까지 도형(徒刑), 정배(定配), 이배(移配) 등 형벌 집행과 귀양살이가 되풀이 되어 정확한 종년(終年)은 알 수 없다. 삼수군(三水郡)은 현재의 함경남도 북서단에 위치한 삼수군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