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상원군수공(23세 東峑 , 1649~1713)
公은 임진왜란 때 임금 선조를 호종한 호조판서공 휘 덕화(德和)의 손, 병조참판공 휘 정철(廷喆)의 아들이다. 1676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1693년 거제현령(巨濟縣令) 임명 후 함경도관찰사에 봉직(奉職)하던 병조판서 민진장(閔鎭長) 총수어(摠守禦)의 추천으로 그 휘하에서 근무하다 1698년 민진원(閔鎭遠) 감진어사(監賑御使)를 수행해 섬 지방 주민들을 진휼(賑恤)하였다. 이때의 公의 공로(功勞)를 숙종(肅宗) 임금에게 알리자 조정(朝廷)에서는 상원군수(祥原郡守)로 임명했다. 수령으로 있으면서 주민을 크게 교화시켰다. 그 후 1702년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제수되었으나 문충공(민진원)이 전라도관찰사 임무를 맡게 되자 군수 부임을 포기하고 그를 수행했다. 1710년 남해현령(南海縣令)로 임명되어 민심을 순화시켜 그 공(功)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했다.(면주, 충의록, 요람 등 기록)
<교지, 승정원일기, 거제시청·문화원, 진도문화원, 남해군청 확인 내용>
公의 현존 교지는 총8매 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公에 대해 10건 기록이 확인된다.
-거제현령 : 교지는 현존하지 않는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693년(숙종19) 6월 23일 발령된다. 정확한 재임기간을 알 수 있는 년월일 기록은 없다.
2008년 10월 20일 거제부읍지(巨濟府邑誌) 72P 기록에는 〃21대 거제현령 위동전(魏東峑) 통훈대부로 숙종18년(1692) 8월 초3일에 도임하여 동왕 19년(1693년) 정월 23일 문상으로 귀향〃이라고 기록되었다. 승정원일기와 거제부읍지 기록은 1년이상 시차가 있다. 승정원일기에서 1694년(숙종 20년 2월 2일) 慶尙監司書目, 巨濟縣令魏東峑, 正月十七日母在喪事。라는 내용이 확인된다. 이는 魏東峑이 1694년 1월 17일 모친喪을 당하였다는 경상감사(慶尙監司)의 서목이 확인된다. 승정원일기 및 巨濟府邑誌를 근거로 하면 公은 거제현령에 1693년 6월23일 발령 받아 근무해오다가 1694년 1월 23일 母喪으로 귀향(방촌)하였고, 약7개월 거제현령 역임이 추정된다. 후임자는 22대 통정대부 장우극(張宇極)으로 1694년 2월 29일 부임으로 기록되었다. 거제부읍지 기록에 의하면 수령인 현령이 1년이상 공석(空席)됨으로 해석되어 오기로 판단된다. 거제현(巨濟縣)은 현재의 경남 거제시 지역이다.(거제시청 : 류선영, 거제문화원 사무국장 : 모정화, 거제향토사연구소장 : 김의부)
-상원군수 : 교지는 현존하-지 않는다. 1698년 민진후(閔鎭厚, 1659~1720) 감진어사(監賑御使)를 수행해 섬 지방 주민들을 진휼(賑恤)하여 이때의 公의 공로(功勞)를 숙종(肅宗) 임금에게 알리자 조정(朝廷)에서는 상원군수(祥原郡守)로 임명되었다고 요람 등에서 기록하였다.
1)1699년(숙종 25) 1월 吏曹에서 1월 6일에 내린 왕명을 받들어 奉直郞 魏世璜에게 通德郞의 품계를 내리면서 발급한 교지 부기(附記)에 의하면 위세황은 아버지 상원군수 위동전(祥原郡守 魏東峑)이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재직할 때인 ‘庚’자 해 12월과 10월에 특별히 품계를 올려주는 것을 대신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2)1699년(숙종 25) 1월 吏曹에서 1월 6일에 내린 왕명을 받들어 奉直郞 魏世琦에게 通德郞의 품계를 내리면서 발급한 교지 부기(附記)에 의하면 위세기는 아버지 상원군수(祥原郡守 魏東峑)에게 특별히 품계를 올려주는 것을 대신 받았다고 기록되었다. 公의 상원군수 관직을 알 수 있다. 상원군(祥原郡)은 현재의 평양특별시 소속으로 외곽 남동부에 위치한 상원군 지역이다.
-진도군수 : 승정원일기 근거 1702년(숙종 28) 4월 16일 제수가 확인된다.
2007년 진도군청에서 간행한 〃珍島郡誌〃기록에 公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1702년 9월 10일~9월 28일까지 158대 진도군수를 역임하였다고 한다. 퇴직 사유는 〃체귀(遞歸)〃라고 기록 되어 있다. 후임자는 통훈대부 민성기(閔聖基)로 1702년 12월 6일~1705년 8월 12일까지 재임이 기록되어 있다.(진도문화원장 : 박정석)
☞ 체귀(遞歸) : 벼슬을 내놓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거나 되돌아옴.
☞ 선대기록에서는 진도군수에 취임을 포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진도군지에는 취임하여 18일간 재임함을 기록하고 있다.
-남해현령 : 1710년(숙종 36) 4월 29일 발령 교지가 현존한다.
승정원일기에서도 1710년 4월 28일 관직을 제수함이 확인된다.
2005년 남해문화원에서 간행한 남해현읍지(南海懸邑誌) 기록에 의하면〃현령 위동전(魏東峑) 경인 6월 부임, 계사 정월 임기를 모두 채우고 떠나다.(1710년 6월 24일~1713년 1월 17일, 숙종36~39년)라고 기록 되어있다. 후임은 1713년 1월 17일부임한 김 준(金 濬)이다. 1713년(숙종 39) 1월 16일에 肅宗이 魏東峑에게 折衝將軍의 품계를 내리면서 발급한 교지가 현존한다.
이는 숙종이 무관인 公에게 절충장군(정삼품 上)품계를 내리는 것으로, 慶尙監司李坦狀啓拯活人命二十六名加資事覆啓 부기(附記)에 의하면 〃경상감사 이 환(李 坦)이 장계(狀啓)를 올려 사람의 목숨을 구했던 26명을 가자(加資)하도록 하였다. 위동전은 이들 중 한 사람이다.〃 라고 확인된다. 본 교지에 의거하면 선정을 베풀어 승계(陞階)함을 알 수 있다. 이후 1713년(숙종 39) 4월에 肅宗이 魏東峑에게 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가 현존한다.
이를 근거 한양에서 거주와 내직에서 근무함을 추정 할 수 있다. 이후 1713년 7월 20일 한양 집에서 타계함이 간암공처사공 행장에서 확인된다. 남해현(南海縣)은 현재의 경남 남해군 지역이다.(남해군청 : 여창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