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문화현령공(23세 山寶, 1593~1656)
홍주(弘宙)의 아들이며, 호는 망미당(望美堂)이다. 공은 광해조 때 무과에 급제, 예빈시(禮賓寺) 주부(主簿) 등을 역임하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선전관(宣傳官)으로 왕을 호가(扈駕)했다. 또한 동궁(東宮)이 심양에 불모로 갈 때도 호종했다. 공은 난리 후 호성정사일등훈(扈聖靖社一等勳)에 록(錄)되고 이듬해인 1637년에 문화현령(文化縣令)에 임명됐으나 취임하지 않고 귀향,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졸 후 석천사(石川祠)에 배향됐다.(면주, 충의록, 요람 등 기록)
<교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확인 내용>
公은 병자호란 때 선전관(宣傳官)으로 왕을 호가(扈駕)와 비변사 낭청으로 청과의 화친 사신에 참여하였다. 이후 동궁(東宮)이 심양에 불모로 갈 때도 호종했다. 公의 현존 교지 8매 중, 1637~ 1640년간에 마지막 교지인 문화현령(文化縣令) 등 관직을 알 수 있는 교지 5매가 현존 한다.
敎旨 魏山寶爲通訓大夫行文化縣令者庚辰十二月二十七日 1640년(庚辰, 인조18) 12월 27일 인조(仁祖)가 魏山寶에게 통훈대부행문화현령에 임명함을 교지를 통해 확인되어 1637년 문화현령 임명은 맞지 않는다. 부임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1)〃1637년(인조15) 1월 1일 비국 낭청 위산보가 소고기와 술을 가지고 오랑캐의 진영에 갔다 오다.〃 公이 병자호란 때 선전관(宣傳官)으로 왕을 남한산성에 호가(扈駕)와 비변사 낭청으로 청과의 화친 사신에 참여함을 알 수 있다. 호란 직후인 1637년 2월 동궁(東宮 소현세자)이 심양에 불모로 갈 때도 호종했다. 동궁은 인질로 청나라 심양에 압송된 후 9년간 청나라에서 생활하였다. 이중 1640년, 1644년 父 인조의 병환으로 일시 귀국하였다.
2)"1640년(인조18) 10월 26일 도승지 신득연(申得淵)이 개성부에 도착하니, 위산보(魏山寶)가 심양에서 돌아오다." 이는 公이 심양과 한양을 왕래하는 연락 군관 또는 외교관 임무를 수행 한 것으로 추정된다. 병자호란 후 公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에서 확인된다.
병자호란은 치욕의 역사로 공신록권을 간행하지 않아 호성공신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사훈록(인조반정) 인명에서 公의 이름이 없는 등 호성정사일등훈(扈聖靖社一等勳) 사실은 맞지 않는 것으로 사료된다. 문화현(文化縣)은 현재의 황해북도 신계군에 속한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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