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웅천현감공(22세 廷烈, 1580~1656)
자는 자겸(子謙)으로 제용감판관에 제수된 안항(顔巷) 위덕후(1556~1615)와 공인(恭人) 청주金氏의 둘째 아들이다. 1603년 완도 고금도에서 실시된 무과에서 종제 정철과 함께 급제하였다. 이후 1620년 녹도만호(鹿島萬戶)와 비변사낭청(備邊司郎廳) 등을 거쳐 1626년 도체찰사 오리(梧里) 이원익 부름으로 체부(體府)의 참모로 재임하였다. 1636년 7월 조정은 호란 후 남해안 강화를 위해 公을 발탁하여 웅천현감(熊川縣監)에 임명하였다.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해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길에 올랐을 때 전란의 진관(鎭管)체제에 따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의 휘하 제장인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로 참전하였다. 남한산성에서 40리(16km) 떨어진 경기도 광주의 쌍령(雙嶺)에 진(陣)을 친 근왕군, 병마절도사 민영(閔栐 ?~1637) 장군이 포위되어 전사하고 휘하 부대가 군율을 잃자 公이 앞장서 지휘하여 포위망을 뚫어 웅천현으로 돌아왔다. 인조의 항복으로 병자호란이 끝난 후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여생을 마쳤다.
<교지, 창원시진해구청, 진해문화원 확인 내용>
公은 1603년(선조 34) 1월에 무과(武科) 병과(丙科) 第761人으로 급제하였다. 1987년 진해시에서 발간한 "진해시사(鎭海市史)"와 1993년 진해문화원에서 간행한 "웅천현읍지(熊川縣邑誌)"에는 역임사실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없으나,
역대 현감 인명(6줄)에서 "위정렬 거장흥(魏廷烈 居長興)"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홍문관 대제학 김노경이 撰한 묘갈명에서는 1636(인조14)년 9월에 公을 웅천현감에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웅천현(熊川縣)은 현재의 경남 창원시진해구 웅천동에 속한다.(진해문화원 사무국장 : 정남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