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묘소 답사 후기(後記)◎
1. 판서공파발전협의회(회장 위성배)에서는 선조 묘소 7곳을 답사하기 위해서 11월 1일(수) 오후 2시 계춘(안양 기산), 성배(유치 단산), 성중(방촌) 종친과 동행하여 고향 방촌으로 출발하였다. 서해안고속도를 이용 저녁7시가 다되어 고향 집에 도착하였다.
홍씨 안내를 받아 40분가량 소요되어 천등산 250m 자락에 위치한 묘소에 도착하였다. 미리 준비한 주잔(三獻)을 올리고 참배하였다. 묘전에 세워진 묘갈명(墓碣銘) 말미에 〃崇禎 後 己巳 嘉善大夫行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使五衛都摠府副摠管 閔昌爀 撰 玄孫 道峻 書〃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숙종(肅宗)의 장인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 1630~1687)의 아들이자 숙종 계비 인현왕후의 오빠인 함경도관찰사, 형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민진장(閔鎭長, 1649~1700)과 충청도관찰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민진후(閔鎭厚, 1659~1720), 전라도관찰사, 좌의정 등을 역임한 동생 민진원(閔鎭遠, 1664~1736) 등 3형제를 수행한 公에 대해 민씨 후손인 민창혁(閔昌爀, 1740~1793)에게 집안 간 우애의 情을 군수공의 현손인 삼회당공 道峻(이명 道任, 27세 1765~1838, 장흥향교 전교 역임)이 請하여 묘갈명을 민창혁이 찬(撰)하고 1809년(己巳)에 근수(謹竪)함을 알 수 있다.(참고 지장록 722p)
12시경에 산에서 내려와 마을 중앙에 위치한 제위답을 둘러보고 인근 중앙식당에서 오찬을 하였다. 점심은 남도 해산물 정식으로 하였다. 반주 한잔씩 하면서 정담(情談)을 나누었고 묘소 관리인 홍씨를 격려하였다.
오후 1시30경 다음 목적지인 관산읍 농안리 화운재(畵雲齋)를 향했다. 오후 3시경에 도착하여 화운재 묘각을 둘러 보았다. 재실, 관리사 건물 등에 여러 농산물과 농기계를 두어 묘각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마음이 불편했다. 관리인이 부재중이어서 종친들의 마음을 전달하지 못하고 뒤쪽에 위치한
정양재공(22세 廷赫, 1588~1627), 청우당공(23세 東翼, 1622~ 1687), 수우옹공(24세 世稷, 1655~1721) 묘소를 찾아 차례로 참배했다.
200m 가량 위쪽에 위치한 운곡공(24세 世卨, 1657~1687), 잉여옹공(25세 命德, 1683~1756)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화운재 제향은 매년 陰 10. 13일이다. 묘각을 뒤로 하고 농안마을 입구로 나오면서 잠시 멈춰 인근에 위치한 운산재(雲山齋)에 들렀다. 운산재는 1954년 이건한 안항공(21세 德厚, 1556~1615)의 묘각이다. 관리사 건물이 내려앉자 있고, 묘각 창문이 훼손 등 관리되지 않아 흉물스러워 가슴 아팠다. 운산재를 뒤로 하고 신동리 안적봉에 위치한 귤우헌공(24세 세황, 1673~17
이곳 벌안에 호은공(29세 璟祚, 1809~1868), 농포공(30세 松, 1832~1875) 묘소가 있어 차례로 참배했다. 묘소 앞 아래에는 득량만 바다와 득량도, 고흥지역이 조망되어 모두들 좋은 자리라고 감탄했다.
해안도로를 타고 삼산방조제를 지나 우산마을 뒷산에 위치한 상원군수공의 配(간암처사공 世鈺 母) 숙부인 금성羅氏 묘소에 5시경에 도착해서 묘소를 둘러보고 참배했다.
매번 찾아온 묘소이다. 갈수록 묘 벌안이 좁아지고 있다. 이는 장천문계 관리하에 추석 前에 벌초를 하고 있다. 벌초를 하는 인부들이 벌이 커서 조금씩 줄이고 줄이다보니 현재와 같이 묘 벌안이 줄어들었는데 묘소와 경계된 대리마을 밭의 경작인들이 묘소를 침범하여 묘소와 밭의 경계가 구분 되지 않고 있었다.
계속해서 건너편 마을 매실 밭 한쪽 밭 자락에 위치한 병조참판공(22세 廷喆)의 配 정부인 창령曺氏 할머님과 귤우헌공 配 공인 완산柳氏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이곳에는 칡넝쿨이 매실나무를 감싸고 묘소 벌안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시간을 내서 칡넝쿨 제거 작업이 필요하다.
묘소를 뒤로 하고 주변 산자락에 위치한 당곡진사공(20세 鯤, 1515~1582) 묘소를 찾았다. 매년 10월 1일 장천문중 주관으로 먼저 公의 묘전 제향을 봉행(奉行)한 다음 건너편에 위치한 호조판서공 제향을 봉행(奉行)한다. 참배를 마치고 다음 목적지인 대덕 잠두(덕촌)에 위치한 병조참판공 配 정부인 孟氏 묘소를 찾았다.
덕촌마을 뒤 야산을 15분가량 올라가다보니 묘소(일명 伏虎嶝)가 있었다. 이곳에 묘소 5기가 있다. 금년에 벌초를 하지 않았고 상석 등 부석물을 놓지 않아 누구의 묘소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면주와 단소 비문을 확인해보니 孟氏 할머님, 子 23세 통덕랑 東崙, 配 恭人 제주梁氏, 孫 24세 世逢·배 제주高氏 합조, 曾孫 25세 命章·배 광산金氏 합조로 추정된다. 묘소는 가파른 곳에 위치하여 벌안을 보존키 위해서 아래에 많은 돌로 석축(石築)을 한 흔적이 확인되었다. 孟氏 할머님 묘소 앞에서 1990년대 후반까지 이곳에서 제향을 봉행했다는 시멘트 설단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묘소 바로 뒤에 큰 바위가 현재에도 있다. 지난날 이곳에 바위 일부를 깨부수었는데 학(鶴)이 날자 바위에서 피가 흘러나와 일을 중지하였다는 설이 傳해 내려오고 있다.
참배를 마치고 인근 국도 주변에 위치한 제향(陰 10.4) 단소를 찾아 참배 했다. 이곳은 2000년 초년에 28세 榮勳(1786~?) 묘전에 설단 하여 정부인 孟氏 이하 21位를 제향 봉행하고 있다. 이후 마지막 답사 장소인 대덕읍 연지리 청다리 주변에 위치한 간암처사공(24세 世鈺, 1688~1766)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근래 묘소 부지가 타인에게 양수되어 간암처사공 10步 앞에 양수인의 선친 묘소가 최근 조성되어 있어 통곡의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계획한 선조 묘소 7곳을 모두 답사하고 대덕읍 내 대도식당에서 점식식사를 하면서 참여 종친 간 강평과 담소를 갖은 후 모든 일정을 마쳤다. 방촌 집에 들러 오후 2시에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 상경하였다. 이번 묘소 답사 행사에는 서울에서 계춘(안양 기산), 성배(유치 단산), 성중(방촌), 성록(방촌)과 광주에서 관철(방촌), 본향에서 계춘(대덕 초당), 길환(방촌), 성용(방촌) 등 8명이 참여했다. 협조와 동참에 깊이 감사드린다.
글.사진 : 씨족문화연구위원 栢江(위성록)
이번 행사는 선조 유적지 탐방의 신기원으로 기록되리라 봅니다.
뜻깊고 가치있는 어려운 일을 하셨습니다.
다른 종친들도 이를 벤치마킹해서 선조의 얼을 되새기는 계기가 많아지길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