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천사 액호>
장흥군 장흥읍 행원리에 위치한다. 1822(壬午)년에 유림(儒林)들의 발의로 마을 앞에 사우를 건립하고 처음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功을 세운 주벽 괴봉공(휘 대용, 1530~1610), 수사공(휘 대기, 1559~ ?), 병자호란 때 功을 세운 문화현령공(휘 산보, 1593~1656), 이 괄의 난 때 功을 세운 남포현감공(휘 정보, 1596~1644)과 삼수부사공(휘 천회, 1629~1669), 해남현감공(휘 천상, 1635~ 1683) 등 6位를 배향했다.
그 후 1843년괴봉공 문하에서 수학하고 임진왜란 때 功을 세운 휘 신용호(1568~1598), 휘 신용준(1573~1598) 형제와 1865년 영장공(휘 대경, 1555~ 1623), 장기현감공(휘 순정, 1572~1620), 절충장군공(휘 수징, 1688~1739) 등을 순차로 추배(追配)하고 11位에 대해 매년 陰 3. 9일에 제향 한다.
1868(戊辰)년에 사원 훼철령으로 철폐 후 1887(丁亥)년에 모암재공(휘 계철, 1840~1913, 괴봉공 10대손) 등 후손들이 사우를 재건하고 사방재(射榜齋)로 명명하였다고 하나 기록은 없다. 그러다가 1908년에 유허비를 세웠고, 1933(癸酉)년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의 강단(석천서원)과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사우(석천사)를 세웠다. 석천사(石川祠) 편액 글씨는 중수(重修)를 거치면서 새롭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 액호(額號)편액 글씨는 낙관(落款)이 없어 필자는 알 수 없다.
(1)석천재기(石川齋記)는 1914(갑인)년 계당공(휘 태환, 1869~1918, 괴봉공 12대종손)이 근서(謹書)하다.
(2)석천재중수기(石川齋重修記)는 1914(甲寅)년 계암공(휘 희량, 1888~1953, 괴봉공 11대손)이 근기(謹記)하다.
(3)석천재기(石川齋記)는 1924(甲子)년 계사공(휘 택기, 1858~1940, 안항공 8대손)이 찬(撰)하다.
(4)석천강당중건기(石川講堂重建記)는 1963년(癸卯)년 춘포공(휘 재환, 1902~1989, 괴봉공 12대손)이 근지(謹識)하다.
(5)석천서원 중건기(石川書院 重建記)는 2003년 광종(광종 1944~, 괴봉공 15대손)이 근찬(謹撰)하다.
(6)석천재팔경(石川齋八景)은 ①사악제월(獅岳齊月), ②예강어적(汭江漁笛), ③억불잔설(億佛殘雪), ④사산비폭(射山飛瀑), ⑤우암귀운(牛巖歸雲), ⑥인사모종(仁寺暮鐘), ⑦벽사흔연(碧沙炘烟), ⑧안곡청풍(鞍谷淸風)이다.
<석천서원 액호>
강당인 석천서원은 괴봉공(魁峰公)께서 석천재(石川齋)라는 이름을 내걸고 후학을 강학하던 곳이다. 그 석천재는 한동안 사격재(射檄齋)로 이름이 바꿨으나 1933년 중건 이후부터 본래의 이름대로 석천재 또는 석천서원으로 불리우고 있다. 석천서원의 편액 글씨는 고종 때 예조‧이조판서를 역임한 장위산인(윤용구)이 썼다. 괴봉공파종중 소유다
※ 괴봉공(휘 대용, 1530~1610) : 농암공(휘 억문, 1508~1570)과 숙인(淑人) 진주鄭氏 사이에서 장자(長子)로 태어났다. 명종(明宗) 1555년(乙卯)에 진사(進士) 합격했으나 출사하지 않은 가문(家門)의 전통에 따라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포기한다. 진사시험에 함께 합격한 문정공 윤두수(尹斗壽, 해평人, 1533~1601)와 친구간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 63세로 와병 중에 있으면서 전장에 나가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호남모곡도유사(湖南募穀都有司)로 “나라를 위해 나서라”고 격문(檄文)을 돌리고 수사공(휘 대기, 1559~ ?) 등 재종제(再從弟) 형제들의 참전(參戰)을 독려(督勵)했다. 나라에서는 난리 후에 창의사(倡義士) 김천일(金千鎰, 1537~1593), 우의장(右義將) 임계영(任啓英, 1528~1597)의 포계(褒啓)로 형조좌랑(刑曹佐郞)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어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제수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묘소(墓所)는 장흥읍 평화리 개손嶝이다. 석천사(石川祠)에 주벽(主壁)으로 배향(配享)되었다.
글·사진 : 씨족문화연구위원 栢江 위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