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현감공(諱 천상)의 호(號)는 왜 망서와(望西窩)일까?
위현동(35세 괴봉공파)
해남현감공(海南縣監公) 공의 諱는 천상(天相, 24世 1635 ~ 1683, 三水府使公 天會의 동생 지장록 p133)입니다.효종(孝宗) 때 무과에 급제(1665년), 해남(海南) 현감(縣監)에 제수(1675년)되어 재임하면서 청백으로 목민(牧民)하니 현민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워주는 한편 공직에서 물러나 귀향한 후에도 공의 집 담이 허술함을 보고 현민들이 쌓아주니 이를 ‘보은의 담’이라고 불렀습니다. 졸 후 석천사(石川祠)에 배향(1822년)됐습니다.라고 알려져 있으며 보첩에도 대체적으로 이와같은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2015년에 남포현감공((23세 괴봉공파 퇴우당(退憂堂) 諱 정보(廷寶))과 관련된 비석을 찾는 짧은 여행을 충남 보령으로 떠났다가 결국 비석을 찾질 못하고 현재 남아있는 남포읍성과 동헌을 둘러보고 돌아오던 길에 충남 논산시 강경읍 채운산에 있는 '고려명신십칠현숭모비'를 발견하는 기쁜 성과도 있었습니다. 2015년에는 행원문중 괴봉공파 해남현감공의 흔적을 찾는 작은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해남현감공에 대한 보첩 내용중에서 해남현감으로 재임하면서 '청백으로 목민하니 현민들이 거사비를 세워주웠다.'는 내용에서 힌트를 얻어서 관련자료를 조사하던중에 해남읍 서림공원에 선정비와 공덕비등 여러 비석들이 제법 있다는 정보를 갖고 해남읍 서쪽에 위치한 서림공원을 방문하여 조선시대 해남과 관련있는 비석군에서 해남현감공과 관련된 비석을 찾았으나 생각보다 적은 수의 비석중에는 찾을 수가 없어서 허탈한 마음뿐이었습니다.
해남현감공에 대해서 자료를 준비하던중 당시 지방 현감(종6품)의 임기는 3년이지만 해남현감공은 8개월이라는 너무나 짧은 재임기간이어서 의아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승정원 일기에 등장하는 해남현감공(휘 천상)의 주요 내용
1668년(현종 9년 12/10) 과장에서 부정행위자 처벌을 청하는 계에 초관(哨官)의 임무, 1673년(현종 14년 3/14) 무과복시 시관, 1675년(숙종 1년 2/26) 해남현감 제수, 1675년(숙종 1년 10/27) 해남현(海南縣) 군기 부실을 수식(修飾)한 혐의 추고, 1676년(숙종 2년 6/11) 직첩 환급(돌려줌), 1676년(숙종 2년 6/22) 서용(너그러이 용서함), 1676년(숙종 2년 10/23) 관직(현감) 제수, 이상의 내용이 현재까지 알려진 해남현감공(휘 천상)의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주요 내용입니다.
해남현감공은 해남현(海南縣) 군기 부실을 수식(修飾)한 혐의로 1675년 10월에 현감직에서 물러나신것 같습니다. 당시 비변사의 보고 내용에 의하면 "전라도 순무사의 서계에 '해남현(海南縣)의 많은 군기를 모두 새로이 갖춘 것으로 장부에 기록하였으니 전임자가 전혀 수리하지 않은 정상을 이로써 알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前현감 황징(黃徵)을 추고하도록 복계하여 고신(告身)을 빼앗기에 이르렀습니다. 뒤이어 들으니 이른바 군기를 새로이 갖추었다는 것은 그 실상이 아니어서 황징이 이미 이로 인하여 죄책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부실을 수식(修飾)한 현재의 현감 위천상(魏天相)에게 그 죄가 있습니다. 위천상을 종중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前해남현감 황징은 숙종1년(1675년 2월)에 전라도 암행어사 박태상에 의해서 파직됩니다.(태백산사고) 이때 황징은 임실 현감(任實縣監) 신계징(申啓澄)·장수 현감(長水縣監) 한정상(韓鼎相)·옥구 현감(沃溝縣監) 윤연(尹葕)·무주 부사(茂朱府使) 조창기(趙昌期) ·군산 만호(群山萬戶) 한태흥(韓太興) 등과 함께 파직됩니다. 파직의 사유는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암행어사 박태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인품이 담박하고 속되지 않아 요직을 여러 번 지냈으나 항상 가난했고, 인재 등용에 공도(公道)를 철저히 실천하였다고 합니다. 출신은 서인에 해당되나 당을 갈라 정치 활동을 하는 것을 싫어해 남인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에도 다른 서인들에 비해 관로(官路)가 무난한 편이었습니다. 또한 황징은 1669년(현종10년) 무과에 급제하여 1675년(숙종1년) 해남현감에서 파직되고 1679년 유혁연(柳赫然)에 의해 장수의 임무를 맡을만한 인물로 천거되어 이듬해 전라수사가 되었다가 이 해에 일어난 허견(許堅)의 옥사에 연루되어 또 파직되고, 1682년에는 변방으로 유배되기까지 하였습니다.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석방되어 다시 이듬해 권대운(權大運)에 의하여 병사·수사의 임무를 맡을만한 인물로 천거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형조참판이 되고, 1691년에는 어영대장이 되었습니다. 어영대장이 되어서도 한 번 파직되었다가 다시 복직되는 곡절을 겪었는데, 1694년의 갑술옥사 때 다시 파직되어 유배당하였다가 이듬해 석방되었습니다. 이처럼 그의 관직생활은 남인의 진퇴와 운명을 함께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해남현감에서 물러난 사유는 해남현(海南縣) 군기 부실을 수식(修飾)한 혐의 외에 또다른 사유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시기는 2차 예송논쟁인 갑인예송으로 서인정권에서 남인정권으로 넘어가는 시기입니다.
1674년 2월23일 효종비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1차 기해예송때와 같은 논리로 또 장렬왕후 조대비가 9개월을 입어야 하느냐 1년을 입어야 하느냐를 놓고 치열한 싸움이 붙었는데 『경국대전』 예전(禮典)을 보면 큰 아들의 처(妻)일 경우 1년이고 둘째 아들 이하의 처(妻)일 경우 9개월을 입도록 되어있었습니다.당시 집권측인 서인들은 1년을 입어야 한다고 왕에게 보고했다가 둘째 아들의 부인이었으므로 9개월을 입어야 한다고 수정을 하였고 남인은 왕비이었으므로 1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조정에서는 서인의 주장대로 9개월을 입는 것으로 결론을 내기로 하였다가 1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자 중신들로 하여금 결정하도록 하자 9개월로 하는 것이 맞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현종은 선왕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로서 지난번(기해예송)과 이번에 주장하는 논리가 틀리다며 예조(禮曹) 관리를 면직시키고 효종의 신하로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식으로 할 수 있느냐면서 남인이 주장하는 1년설을 채택하였습니다. 그 이면에는 현종은 왕권보다 센 송시열 등의 세력을 꺾고 왕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고 같은 서인이지만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현종의 장인 김우명과 현종의 처사촌 김석주는 남인의 주장에 동조하는 바람에 현종이 남인의 주장을 수용하고 서인들을 대량 축출하였습니다.그 와중에 현종이 1674년8월18일 서거하자 송시열 등은 다시 예론을 거론하며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였으나 14세의 나이지만 친정(親政)을 하던 숙종은 아버지 현종이 결정한 대로 서인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 진주 유생 곽세건이 상소를 올려 송시열이 예(禮)를 잘못 인용하여 효종과 현종의 적통(嫡統)을 그르쳤다고 하자 서인들이 들고 일어나 곽세건을 처벌하라고 하였으나 숙종은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숙종은 송시열에게 현종의 묘지명을 지으면서 곽세건의 주장을 넣으라고 하였으나 송시열은 거부하였고 송시열의 제자이자 이조참판이었던 이단하(李端夏)에게 묘지명을 지으라고 하자 이단하도 거부하자 숙종은 임금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하면서 송시열을 덕원부로 귀양 보내버리고, 이조판서였던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등도 파직되어 버립니다.
노봉 민정중은 전라도 암행어사로 장흥에 왔을 때에 해남현감공의 형인 취수헌(醉睡軒)공( 諱 천회)의 뛰어난 자질을 발견하고 과거에 응시하게 추천하여 결국 출사하게 하였으며 취수헌공이 살인의 죄목으로 사형을 거의 면치못하게 되었을때도 구명에 적극 앞장섰던 인연으로 인하여 적극적인 교류가 있었으며 동생인 해남현감공도 노봉 민정중과 일찍이 교류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지장록 내용) 이것은 서인편에 있었던 해남현감공이 갑인예송의 결과로 남인이 집권하자 비록 말단의 지방관이었지만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후 1679년 민정중은 장흥으로 귀양와서 장흥 위씨와 많은 인연을 이어가는데 문하에 수우옹공 휘 세직,운곡공 휘 세설등께서 수학하셨습니다.
해남현감(종6품)의 자리는 늘 고단하고 힘든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해남지역에는 전라우수영이 자리하고 있어서 정3품의 전라우수사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해야 했으며 제주도를 왕래하는 중앙관리들이나 부임하는 지방관리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었는데 계절적으로 순풍이 불지 않으면 몇개월씩 계속해서 머물러 식량과 물자를 공급해야 하는 해남현감은 항상 힘들었다고 합니다.또한 제주도에서 나오는 말의 관리도 해남현감의 일로 말이 먹어야할 건초와 물을 대야 했고 말이 죽거나 다쳤을 때의 책임도 져야했다고 합니다. 이런 힘든상황에서도 해남현감공은 청백리로서 스스로 수신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해남현감 재임시절에 관청의 문서에는 특별히 숭정(崇禎)이라는 연호로 날짜를 쓰셨다는 내용으로 봐서 숭정(崇禎)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의종 숭정제시대에 사용했던 연호로 당시에는 1644년에 이미 멸망해 버린 한족이 세운 명나라를 그리워하며 비록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게 무릎을 꿇었지만 속으로는 결코 승복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며 정신적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던 명분과 의리를 숭상하는 당시의 유학자들은 조선은 명나라의 계승자로 자처하며 명나라가 임진왜란을 도와주었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명분을 내세우며 명이 없어진 시대에도 사대부들은 숭정이라는 연호를 계속 이어갔는데 해남현감공도 이런 시대의 조류에 충실히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해남현감공의 시대는 의리와 명분을 강조하던 사대부의 시대였습니다.나라를 다시 살려준 은혜의 명나라가 멸망하였고 오랑캐라고 여기던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에 조선에서는 득세하던 서인정권이 남인정권으로 바뀌면서 힘들고 고단했던 해남현감의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되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비관적으로 보였을 것 입니다. 지장록의 내용중에 해남의 백성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웠으며 公의 집 담장을 와서 축조해 주니 보은장(報恩墻)이라 하였다.이로부터 문(門)을 닫고 금서(琴書)를 즐기며 숭정일민(崇禎逸民)이라고 스스로 일컬었으므로 인하여 號를 망서와(望西窩)라 하였다라는 내용에 비추워볼 때 숭정일민((崇禎逸民)은 '명나라를 따르며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고 초야에 파묻혀 지내는 사람'이고 망서와(望西窩)는 '서쪽을 바라보는 움집'이라는 뜻으로 이미 1644년에 이미 멸망해버렸으나 숭상하던 명나라를 그리워하면서 세상과 담을 쌓고 은둔의 생활을 하셨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비록 이듬해인 1676년에 서용되고 현감의 직첩을 돌려받았으나 더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으시고 스스로 문을 닫고 음악과 독서를 즐기며 사신것은 혼란스런 세상에서 의리와 명분을 숭상하던 사대부로서의 시대적인 고뇌와 당시 세상을 보는 시각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재치...
(사진은 해남 서림공원 비석군...2015년 여름 촬영)
많은 글이 등재되어 풍요로운 선조들의 이야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재치아우의 글이 촉진제가 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