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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12월 12일 저녁 건산전투

중로지대인 흑석광정(黑石光正)의 3중대가 12일 아침 유치면 조양촌에서 전투를 하고 있을 때 같은 중로지대인 백목성태랑(白木誠太郞)의 부대는 이미 11일 탐진강 발원지의 물줄기를 따라 남하하여 12일 아침에는 이미 보림사를 지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 부대는 중간에 작전변경 연락을 받고 장흥을 단지 거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장흥읍으로 회군한 농민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기 위해 12일 오후에 장흥읍으로 들어왔다. 12일 한일연합군이 장흥읍으로 들어왔다는 기록을 다시한번 모아본다.

 

- <19대대숙박표> 12일: 支1능주, 支2병영(兵營), 支3조양(朝陽)戰, 支乾山(本營內戰).

- <순무선봉진등록> 12월 12일조: 이달 11일 나주에서 파견해 보낸 교장 황수옥의 보고 내용에 “병사 30명을 거느리고 능주에 도착하여 군대를 주둔하고 숙박하였으며, 12일 오경(五更: 새벽 4시 전후) 쯤에 장흥에 도착하여 군대를 주둔하고 숙박하였습니다. 13일 동트기 전에 적들의 형편을 탐지하니 본부의 남문 밖에 적도 수천 명이 모였다고 하므로 일본 병사와 본 진영의 병사 30명이 힘을 합해 진격하니 수합에 미치지 않아 적도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 <순무선봉진등록>: 장흥부의 공형 문장에 삼가 아룁니다. (중략) 장흥에서 변을 일으킨 비류 수 만 명이 이달 12일 내려온 대군에게 추격당하여 장흥부의 남면 고읍(古邑) 등의 협곡(峽谷)으로 숨었습니다.

- <오하기문>: 12월 12일 이규태가 병영에 도달하여 적도들은 도망가자 추격하여 장흥의 석대산에서 대파를 했다. 이규태는 나주에 있을 때 병영의 급보를 받고 먼저 한 지대의 병사들을 보냈다. 더불어 소모관 백낙중(伯樂中)과 병영으로 향할 때 길에서 벽사 찰방 김일원을 만나 병영으로 길을 안내하게 했다. 적이 퇴각하여 장흥의 모정등(茅亭嶝)에서 진을 치고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 심히 날카로워 관군은 연달아 대포 10여발을 발사하니 적들은 패하여 도망갔다.

- <박후의적>: 강진과 병영을 함락한 후 12월 12일에 돌아와 본부 남문밖과 건산 모정등(茅亭嶝)에 주둔했다. 이때 소모관 백낙중(伯樂中)이 경군을 이끌고 보성으로부터 와서 황혼 무렵에 곧바로 먼저 모정등의 적을 격파했다.

- <영회단>: 적도들이 강진과 병영을 함락한 후 12일 돌아와 본부 남문밖과 건산 후등에 진을 쳤다. 이날 소모관 백낙중(白樂仲)이 경군을 거느리고 곧바로 와서 건산 적을 격파했다.

- <임태희추기>에 “적병이 강진군과 병영을 함락하고, 12일 돌아와 본부 건산리와 남외리 등지에 진을 치고 서로 만났다. 해가 저물 때 소모관 백낙중이 왕사(王師)를 이끌고 곧바로 와서 건산리의 적을 격파했다.

 

이중 가장 오보가 황현의 <오하기문>으로 이규태는 장흥에는 발도 딛지 않은 사람인데 이규태가 적들을 석대산에서 격파하였다는 황당한 기사를 썼다. 그리고 “이규태는 나주에 있을 때 병영의 급보를 받고 먼저 한 지대의 병사들을 보냈다. 더불어 소모관 백낙중(伯樂中)과 병영으로 향할 때 길에서 벽사 찰방 김일원을 만나 병영으로 길을 안내하게 했다.”에서 소모관 백낙중은 병영루트로 들어오지 않았다. 단 김일원은 12월 4일 병영을 거쳐 나주로 구원을 요청하러 갔기 때문에 병영을 통해 다시 들어올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광무(光武) 4년(1900년) 3월에 벽사역에 세웠다가 지금은 영회당으로 옮겨진 김일원의 “청사복성불망비(請師復城不忘碑)”의 64자 명문(銘文)에도 김일원이 어느 루트를 통해 어느 부대를 안내하여 장흥으로 들어왔다는 내용은 없기 때문에 정확히 고증할 수 없다.

두 번째로 큰 오보가 장흥부의 공형(公兄)이 이규태에게 12월 24일 보낸 문장으로 “장흥에서 변을 일으킨 비류 수 만 명이 이달 12일 내려온 대군에게 추격당하여 장흥부의 남면 고읍(古邑) 등의 협곡(峽谷)으로 숨었습니다.”로 12일의 전투는 장흥읍에서 60리 떨어진 유치면 조양촌에서 이른 아침에 조양촌 전투가 있었으며, 저녁 무렵에 건산에서 전투가 있었을 뿐이다. 건산 한 지역의 전투로 농민군이 남면 고읍면 등의 협곡으로 숨을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또한 <순무선봉진등록>의 황수옥 보고의 “12일 오경(五更: 새벽 4시 전후) 쯤에 장흥에 도착하여 군대를 주둔하고 숙박하였습니다.”에서 12일 오경(五更)이 문제가 된다. 다음 문장 “13일 동트기 전에 적들의 형편을 탐지하니”와 연결이 되지 않는다. 문장대로 하면 12일 새벽에 장흥읍에 도착하여 전투는 13일 아침에 하게 된다. 그렇다면 12일 아침부터 하루 종일에 이어 13일 새벽까지는 수 만 명의 동학군이 집결해 있는 장흥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엇을 했다는 말인가?

여기서 12일 오경(五更)은 13일 오경(五更)으로 고쳐야 한다. “곧 13일 새벽 4시경에 도착하여 13일 동트기 전에 적들의 형편을 탐지하니 본부의 남문 밖에 적도 수천 명이 모였다고 하므로”로 고쳐야 한다. 황수옥이 소속된 부대는 통위영으로 그는 1중대를 수행하는 부대이다. 1중대는 12일 새벽에는 아직 능주에서 장흥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으로는 장흥현지의 기록인 <박후의적>, <영회단>, <임태희추기>에 나오는 소모관 백낙중인데, <박후의적>은 “이때 소모관 백낙중(伯樂中)이 경군을 이끌고 보성으로부터 와서 황혼 무렵에 곧바로 먼저 모정등의 적을 격파했다.”라 했고, <영회단>은 “이날 소모관 백낙중(白樂仲)이 경군을 거느리고 곧바로 와서 건산 적을 격파했다.”고 했으며, <임태희추기>는 “해가 저물 때 소모관 백낙중이 왕사(王師)를 이끌고 곧바로 와서 건산리의 적을 격파했다.”라고 건산(모정등)의 농민군을 격파한 것을 모두 소모관 백낙중과 연결시키고 있다.

백낙중이 나주에서 장흥으로 출발할 때 1중대를 따라오지 않고, 백목성태랑(白木誠太郞)의 부대를 따라 올 수도 있다고 보지만 일단은 전례를 따라 1중대를 따라 온 것으로 본다. 다만 장흥현지 기록이 모두 소모관 백낙중이 12일 경군(京軍) 또는 왕사(王師)를 이끌고 장흥으로 들어왔다는 표현은 마치 백낙중이 경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처럼 보인다. 그러나 백낙중은 임시직 9品 말단 벼슬로 그의 업무가 식량․병사․도로 등에 관해 일본 군대의 조달을 맡은 자이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일본군이 장흥에 들어오기 전에 정찰을 겸해 식량․병사․도로 등의 조달을 위해 미리 들어와 현지 상황을 살핀 것이다. 백낙중이 장흥에 들어와서는 운봉에서부터 따랐던 1중대만을 위한 식량․병사․도로 등의 조달을 맡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더더욱 그의 마당발은 분주하여 장흥부의 공형은 물론 유생들과의 접촉도 많았을 것이다.

장흥유생들은 12일 오후의 건산 전투의 공을 백낙중에게 돌리고 있지만 그는 일본군의 식량․병사․도로 등에 관해 일본 군대의 조달을 맡는 임시직 말단 9品이기 때문에 백낙중의 위상을 잘못 평가한 것이다.

<19대대 숙박표>에서는 12일에 “支乾山(本營內戰)”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말은 건산에서 전투를 벌인 부대는 백목성태랑(白木誠太郞)의 부대라는 것이다. 백목성태랑(白木誠太郞)은 본래 후비보병 18대대 소속이나 10월 13일 19대대로 배속되어 19대대에서는 대대본부로 편입되어 3중대와 함께 중로(中路)분진대를 담당했다. 때문에 남소사랑(南小四郞)이 본영(本營: 곧 대대본부)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장흥 유생들이 쓴 위 3편의 글에서 12일 황혼 무렵 건산리(모정등)에서 농민군과 한일연합군 간의 전투가 있었음을 확인시키고 있어 전투가 있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전투는 송목정보(松木正保)의 1중대가 하지 않고, 11일의 위치로 보아도 장흥과 가장 근거리에 있었던 백목성태랑(白木誠太郞)의 대대본부 소속 부대가 12일 오후에 제일 먼저 장흥읍에 입성하여 황혼 무렵 건산리 모정등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와 전투를 벌인 것이 틀림없다. 다만 전투결과 농민군이 얼마나 희생을 입었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아 아쉽다.

 

6-5. 12월 13일의 전투

 

6-5-1. 남외리 전투

 

- <19대대 숙박표> 13일: 支1능주滯, 支2영암, 장흥부근戰, 支장흥.

- <순무선봉진등록>: [통위영 황수옥의 보고내용에] 13일 동트기 전에 적들의 형편을 탐지하니 본부의 남문 밖에 적도 수천 명이 모였다고 하므로 일본 병사와 본 진영의 병사 30명이 힘을 합해 진격하니 수합에 미치지 않아 적도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이기는 틈을 타서 추격하여 총살한 자가 20여 명이며, 나머지 무리는 죽음을 무릅쓰고 달아나서 끝내 드러난 흔적이 없습니다.

- <순무선봉진등록>: 장흥부의 공형 문장에 삼가 아룁니다. (중략) 13일 저 무리 수 만 명이 장차 대적하려고 하므로 대군이 일제히 나와 총살한 것이 수백 명이었습니다. 잔여의 무리는 흔적을 감추어 그림자도 없기 때문에 위 대군은 강진 등지로 내려갔습니다.

- <박후의적>: 다음 날(13일) 새벽 벽두에 또한 남외리의 적을 격파하였다.

- <영회단> 다음 날(13일) 먼동이 뜨기 전의 이른 새벽에 남외리의 적을 격파하였다.

- <임태희추기>: 다음날(13일)은 또 남외리의 적을 격파했다.

 

<순무선봉진등록>과 장흥 유생 3인 모두 남외리(남문밖)에서 전투가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임태희추기>만 제외하고 모두 동트기 전에 전투가 있었다고 전한다. <순무선봉진등록>에서 이 전투를 선봉진으로 전한 사람은 통위영의 교장 황수옥으로 그는 나주에서 후비보병 19대대 1중대를 수행하고 내려온 사람이다. 때문에 이 전투는 <순무선봉진등록>의 기록으로만 보면 12일 병영에서 회군하여 남외리에 진을 치고 있던 수천 명의 농민군과 송목정보(松木正保)가 지휘하는 나주에서 좌로(左路)를 타고 내려온 1중대와 통위영의 한일연합군이 벌인 전투로 20여 명의 농민군을 사살한 전투이다.

<19대대 숙박표>에서는 이 전투를 벌인 1중대를 능주에 체류하고 있는 것으로 표시하였다. 이 말은 곧 중대본부는 능주에 있었지만 1~2개 소대가 장흥으로 들어와 전투를 벌인 것이다. <19대대 숙박표>에는 “支장흥”이 표시되어 있어 12일 황혼 무렵 건산리(모정등)에서 전투를 벌인 곧 백목성태랑(白木誠太郞)의 부대도 장흥에 있었음 알려주고 있다. 다만 통위영의 교장 황수옥이 “일본 병사와 본 진영의 병사 30명이 힘을 합해”라고만 전해 백목성태랑(白木誠太郞)의 부대가 이 전투에 얼마만큼 공헌은 했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지만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1중대에서 장흥전투의 핵심은 육군보병 소위 식야준성(植野俊成: 1중대 소대장)이다. 남소사랑(南小四郞) 대대장이 작성한 “동학당 정토 공로자에 대한 논공 건의의 건”에서 1중대 소대장 식야준성(植野俊成)의 전공조서는 “위의 사람은 동학당 정토를 위해 동로로 분진한 제1중대의 소대장으로서 동학도를 끝까지 몰아붙였으며, 나주에 당도해서는 지대장이 되어 장흥과 유앵동(有鶯洞) 전투에서 공로가 있는 사람임.”으로 밝히고 있다.

위의 12일 저녁 건산전투와 남외리의 새벽전투에서 20여 명이 사살된 소식은 곧바로 어산 앞에서 진을 치고 있던 이방언 장군에서 급보가 전달되어 김재계 선생이 이야기한 “이번에 보성, 장흥, 강진, 병영성을 함락하고 다시 남면(용산면) 어산 앞에 와서 머무르고 있는데, 본 읍(장흥읍)으로부터 소식이 오기를 경군과 일본군이 본 읍 남산 봉명대에 머무르고 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수 십 만 군중은 일시에 더욱 흥분되어 기세를 올리며 바로 석대들에서 남산으로 직접 충돌할 때~”로 이어져 곧 장흥동학농민혁명 최후전투의 핵심인 14일의 석대혈전을 예고한다.

 

6-5-2. 유앵동(有鶯洞)전투

- <19대대 숙박표> 13일: 支1능주滯, 支2영암, 장흥부근(유앵동)戰, 支장흥.

 

후비보병 19대대 1중대 전공조서(하사관)

전 투 지 명

회수

등급

성명

유앵동

장흥

장흥

3회

일등군조

小松齊

상동

상동

상동

상동

상동

魚佳房吉

상동

상동

상동

상동

상동

兵頭輝行

상동

상동

상동

상동

이등군조

中川龜太郞

- <동학당토벌공보>: 파맥역(波麥驛)에 이르러 사영(舍營)하였다. 도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주회(李周會; 李鳳榮의 별명)로부터 다음의 정보가 전해졌다. 일본군과 경군의 일부는 이미 지난 8일(음력 12월 13일) 장흥부(長興府)로 가서 동학도와 장흥부의 북방 약 2 리(한국식으로는 20리)의 지점에서 싸워 크게 이를 격파하여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유앵동(有鶯洞) 전투도 위의 13일 동트기 전에 벌인 남외리 전투와 함께 후비보병 19대대 1중대가 벌인 전투이다. 남외리 전투가 동트기 전이었으니, 유앵동 전투는 남외리 전투를 벌인 다음에 벌인 전투이다. 또한 전투상보가 작성되었다. 이 전투(장흥전투 2회 포함)로 인해 상훈을 받은 사람이 1중대장 송목정보(松木正保), 소대장 식야준성(植野俊成)을 포함하여 하사관 4명, 상등병(上等兵) 11명, 병졸(兵卒)이 42명이나 되기 때문에 전투규모면에서 무척 엄청난 전투이며, 그만큼 농민군에게도 희생이 많은 전투이다.

<19대대 숙박표>의 13일에는 장흥과 관련하여 본래 “支1능주滯, 支2영암, 장흥부근戰, 支장흥”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장흥부근戰”을 “장흥부근(유앵동)戰”으로 필자가 괄호 속에 유앵동을 추가시켰다.

12월 13일의 부산면 유앵동(有鶯洞) 전투는 학계에서 그 동안 유앵동 자체가 어느 곳인지 파악도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유앵동 전투를 언급한 학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유앵동(有鶯洞)이 현 부산면 유량리(有良里)라는 것을 확인해준 분은 향토사학자 조천(朝天) 양기수 선생이며, 필자도 유량리의 촌로(村老)를 통해 재차 확인했다.

장흥인근에서 유앵동을 찾으면 지금도 보성군 득량면에는 유앵동(有鶯洞)이란 지명과 조양촌(朝陽村)이란 옛 지명을 가진 곳이 있지만 일단 보성은 부산수비대가 토벌을 맡은 지역이고, 12월 12~13일에 부산수비대는 광양에서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보성군 득량면의 유앵동과 조양촌은 처음부터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필자가 유앵동이 장흥의 어느 곳일 것이라는 심증을 갖게 된 것은 <주한일본공사관기록> 제 6권 75쪽~79쪽(별첨: 3)에 나오는 위의 “동학당 정벌 공훈자에 대한 논공건의 건”의 포상 상신자 전공조서를 통해서이다. 일본 후비보병 19대대 1중대장이 작성한 전공조서에 의하면 전투에 참여한 자로써 공로가 있는 자와 전투를 하지 않은 자로 공로 있는 자의 명단이 나오는데, 유앵동, 장흥, 장흥, 전투회수 3회라고 함께 묶여 출전한다. 하지만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서는 유앵동 전투가 있었음은 확인시켜 주고 있지만 전투 날짜를 전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필자가 유앵동 전투를 12월 13일로 추정하게 된 것은 유앵동 전투로 추정되는 기존의 국내기록과 일본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국내기록으로는 1993년 발행된 <전남도지> 6권 207쪽에서 1969년 신구문화사에서 발행된 <한국근대사> 1권을 인용하여 “장흥부 북편 20리 지점에서 동학군은 일본군 및 관군과 지난 12월 13일에 격전을 벌인 끝에 패하여 흩어졌다. 그후로 동학군은 군내 각처에 잠복하여 있었다. 일본군의 중대병력이 여기에서 머물러 수색전을 벌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추적과정에서 뜻밖에 <사료총서> 22권 265~266쪽 이륙신보(二六新報)에 부산수비대 4중대장 영목안민(鈴木安民)이 보성에서 부산의 병참사령관 겸 정박장 사령관인 이진야천리(伊津野千里)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장흥부의 북방 약 2 리(20리)의 지점에서 싸워 크게 이를 격파하여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라는 내용을 발견하여 <한국근대사> 1권의 “장흥부 북편 20리 지점”을 증명해 주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을 번역할 때 일본의 1리는 한국의 10리로 환산하여 번역하기 때문에 장흥부 북방 2리는 장흥부 북방 20리가 된다.

유앵동에서 빈재는 유치면에서 부산면과 장흥읍으로 넘어오는 비록 시설물은 없지만 관문에 해당되어 유치면 조양촌이 그랬듯이 농민군이 반드시 지키고 있을만한 곳이었다.

이 유앵동 전투를 담당했던 부대는 이사경(李士京)이 지휘하는 부대가 틀림없을 것이다. 이사경은 바로 유앵동과 지척에 있는 당시 용계면(龍溪面) 용반리 출신이다. 또한 용계면의 동학세력은 이방언의 남상면과 이인환의 대흥면과 함께 장흥의 3대 세력으로 꼽히는 곳이기 때문에 비록 패전은 하였지만 어느 곳보다도 치열하게 응전하여 피해가 켰을 것으로 본다.

전투규모와 농민군의 희생에 대해서 부산수비대 영목안민(鈴木安民)의 “싸워 크게 이를 격파하여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외에는 구체적으로 기술할 수 없지만 일본군에 의해 전투상보가 작성되었고, 이 전투로 인해 많은 일본군이 상훈을 받은 것으로 가늠해 볼 뿐이다. 때문에 앞으로 장흥동학농민혁명사와 이를 기념하는 일련의 헌양사업에서는 유앵동 전투를 석대혈전 다음으로 중요한 전투로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6-6. 12월 14일~15일의 석대혈전

이른바 역사에서 동학농민혁명 최후전투, 최후격전지, 석대전투, 석대혈전이라고 불리는 장흥전투의 핵심인 석대들에서 농민군과 한일연합군이 벌인 전투를 동학농민혁명 장흥전투의 대명사로 삼고 있다. 이 때문에 장흥의 많은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중에서 정부는 남문밖 석대들을 동학농민혁명 사적(史蹟) 498호로 지정하였다.

석대들에서 벌인 회심의 일전에 대한 기록도 풍부한 편이고, 많은 학자들이 장흥전투를 기술할 때 모두 석대들에서 한일연합군과 벌인 전투를 중심전투로 기록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 석대들에서 벌인 전투에 대해 정해진 고유 명칭이 없이 부르는 사람과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달리 불리고 있다.

본서가 석대들에서 벌인 전투를 “석대혈전”이라고 표기한 것은 장흥동학농민군의 후예인 천도교 장흥교구에서 일찍부터 석대혈전(石臺血戰)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천도교 장흥교구에서는 일제시대에 장흥의 동학농민혁명 전사들을 기록한 문헌의 제목을 “갑오동학혁명혈사(甲午東學革命血史: 약칭 血史)”라고 했다. 그만큼 피(血)를 많이 흘린 자신들의 혁명사이기 때문에 혈사(血史)라고 이름 붙이고, 장흥동학농민혁명의 가장 핵심 전투인 석대들 전투를 석대혈전(石臺血戰)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필자는 이를 따라준 것이다.

석대들에서 혈전을 벌인 이 전투의 날짜를 기존의 학자들은 모두 12월 15일 하루의 전투로 적고 있다. 그러나 장흥부 공형(公兄)은 13일로 기록하여 이규태에게 보고하였고, 장흥의 유생들이 쓴 <박후의적>, <영회단>, <임태희추기> 등에서는 14일로 적고 있다. 또한 일본군 기록에는 14일에 시작한 것은 분명하지만 당일 끝났는지 아니면 다음 날에도 석대전투가 계속되었는지를 정확하게 확정해 주지 않고 있다.

먼저 기존 사료에서 오보(誤報)를 걸러내면 경군의 기록에서 <순무선봉진등록> 12월 24일조에서 석대혈전이 12월 13일에 벌어졌다고 보고한 장흥부의 공형(公兄)의 문장에서는 전투 날짜를 잘못 전한 것 외에는 큰 문제가 없다. 다만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있다.

<오하기문>의 “12월 12일 이규태가 병영에 도달하여 적도들은 도망가자 추격하여 장흥의 석대산에서 대파를 했다.”와 “다음 날(13일) 새벽 적들은 또 더욱 많아져 수만 명이 성 아래에 이르렀다. 이규태가 군사를 풀어 충돌하여 적의 사망자가 심히 많아 나머지 무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게 하여 이규태는 빼어남을 다했다.”는 앞에서 이규태는 장흥에 발도 딛지 않은 사람으로 오보라고 했다. 또한 황현은 석대혈전이 13일에 벌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3일에는 동트기 전 1중대와 벌인 전투로써 석대혈전의 전초전인 남외리(남문밖) 전투이다. 13일 동트기 전에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일정 정도 농민군이 타격을 입었지만 농민군은 흩어지지 않고 더욱 기세를 모아 오히려 더 큰 석대혈전을 벌인 것이다.

<일사>에서는 석대들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동학의 무리 수 만 명은 두 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경군이 연속하여 총을 쏘니 동학의 무리 수십 명이 죽고 나머지는 모두 도주하였다고 한다.”로 14일에 장흥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을 기록하면서 황당하게도 동학의 무리 수십 명을 죽이고 나머지 무리를 모두 도주시킨 것은 경군 17명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장흥의 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동원된 한일연합군은 총 800여명에 이른다고 고증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논하지 않는다.

장흥현지 유생들이 기록한 <박후의적>, <영회단>, <임태희추기> 등에서 모두 석대혈전이 14일에 벌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박후의적>과 <영회단>에서는 석대혈전을 벌인 주력부대가 남면에서 올라온 부대 곧 이방언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라고 증언하고 있다. <박후의적>, <영회단>, <임태희추기>를 종합하면 남면에서 자울재로 올라와 산야로 나눠 한 부대는 월평으로 나가고 한 부대는 장흥부의 후록 곧 장원봉 쪽으로 나가 장흥부를 포위했다는 것이다. 14일 석대혈전을 벌인 주력부대가 남면에서 자울재를 넘어왔다는 것은 김재계의 <갑오년 동학이야기>에서도 증명이 된다. 그리고 <동학당정토약기>에서 “적은 어느 전투에서나 산봉우리를 점령하고 함성을 질러 그 위세를 과시하였다.”에서처럼 장흥의 농민군도 자울재에서부터 장흥부의 후록인 장원봉을 점령하여 곧 장흥읍성 주변을 포위한 것이다. 이때 한 부대는 자울재를 넘어 월평 앞으로 나간 부대는 다시 탐진강을 건너와 동문에서 남문밖의 석대들 쪽의 루트를 봉쇄한 것으로 보이고, 한 부대는 자울재에서 남문밖 석대들에서 지금의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탑 능선을 타고 장원봉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왕사(王師)인 경군의 기록에 달려 있는데, <순무선봉진등록> 12월 21일조의 교도중대장 이진호의 보고와 <순무선봉진등록>의 같은 날 통위영 중우참령관이 일본군 후비보병 19대대 1중대를 따라 장흥으로 파견된 교장 황수옥의 보고를 정리한 12월 15일 석대혈전의 전투보고 내용이다.

기존 학계에서는 이 두 기록에 의해 석대전투가 12월 15일에 벌어진 것으로 기록하면서 박맹수 교수는 13일 새벽 “토벌군 선발대와 1차 접전을 벌인 농민군은 무기의 열세로 인하여 자울재를 넘어 남면(용산면), 고읍(관산읍) 등지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토벌군의 신식 무기의 위력에 밀려 퇴각했던 농민군은 13일부터 14일 사이에 다시 재집결하여 수만의 군세를 이루어 장흥부를 재차 포위하였다.”로 14일을 재집결하는 날로 해석하였다.

우윤 교수는 <오하기문>의 기록을 인용하여 “이규태는 달아났던 벽사역 찰방 김일원을 앞세우고, 12일 강진 병영에 도착했다. 이때 북상하려던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이 남하함에 따라 방향을 바꾸어 장흥에 집결하였다. 엄청나게 그 수가 불어난 농민군은 남문밖과 건산리 뒷산 모정등(현 장흥고등학교 뒷산)에 진을 치고 있다가 관군과 일차 접전하고 퇴각하였다. 다음 날 새벽 수만 명의 농민군이 다시 성 밑으로 집결하여 일대 접전을 벌였으나 관군의 신식무기에 밀려 퇴각하였다.”로 하여 남문밖과 건산 전투의 날짜를 특정하지 않고, 일차 접전으로 처리하면서 “다음 날 새벽 수만 명의 농민군이 다시 성 밑으로 집결하여 일대 접전을 벌였으나 관군의 신식무기에 밀려 퇴각하였다.”고 하여 다음 날이 언제인지를 특정할 수 없다. 15일의 전투상황은 <순무선봉진등록> 12월 21일조의 교도중대장과 통위영 중우참령관의 보고를 인용하여 석대혈전을 묘사하고 있다.

최현식 선생은 “통위대 교장 황수옥이 이끄는 30명과 일본군 1중대 1소대는 당일 능주를 지나 다음 12일 밤늦게 장흥에 도착하여 13일 새벽에 남문 밖에 진을 치고 있던 동학농민군 수천 명과 접전하였다. 이 싸움에서 동학농민군은 2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퇴주하였다. 그런데 12월 15일 12시경 동학농민군 수만 명이 대거 진격해 와 장흥부성을 포위하려는 때에 ‘강진으로부터 백목 중위가 일본군 60명과 교도대 약 30명을 이끌고 나타났다.’일본군 백목(白木) 중위 부대와 교도대가 뜻밖에 밀어 닥쳤다.”로 하여 14일을 그냥 넘어간다. 또한 이때 강진에서 군사를 이끌고 장흥으로 들어온 부대는 백목성태랑(白木誠太郞)이 지휘하는 부대가 아니라 <동학당정토약기>에 의해 삼미아일(森尾雅一)이 지휘하는 19대대 2중대와 교도중대장 이진호가 지휘하는 교도중대 본부 병력이다.

표영삼 선생은 “장흥 지역 전투는 13일에 막이 오른 것이다. 뒤이어 15일에는 석대벌 전투, 17일에는 옥산촌(玉山村) 전투로 이어지면서 일본군의 야만적 살인행위가 시작되었다.”로 하여 14일을 그냥 넘어간다.

그러나 14일의 <19대대 숙박표>에서는 남소사랑(南小四郞)은 “支1능주滯, 支2강진滯, 支장흥滯戰.”이라 하여 14일에 장흥에서 전투가 있었음을 표시하고 오히려 15일에는 “支1능주滯, 支2장흥.”라고만 표시하여 전투 상황을 표시하지 않고, 14일에 강진에 있었던 삼미아일(森尾雅一)이 지휘하는 2중대가 15일에는 장흥에 있었음을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동학당정토약기>에서 “3개 지대 중 우측 지대(2중대)는 강진에서 비도와 싸우느라 약간 늦었고, 장흥의 적은 좌측지대(松木正保의 1중대)와 중로지대(黑石光正의 3중대, 白木誠太郞의 대대본부 소속)가 이들을 소탕하였다. 그러나 강진에서의 격전은 결국 장흥의 적 격퇴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고 하면서 “7, 8, 9일 3일간(음력: 1894년 12월 12일, 13일, 14일)은 매일 싸웠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왜 남소사랑(南小四郞)은 <순무선봉진등록>이 전한 12월 15일(양력: 1월 10일)은 매일 싸우지 않았다고 했을까? 12일(양력: 1월 7일)과 13일(양력: 1월 8일)에는 오전과 오후에 전투를 치렀음을 이미 앞에서 증명했다. 한 나절의 전투가 아닌 것이다. 14일(양력 1월 9일)은 다른 장소가 아닌 석대들에서 온 종일 싸워 농민군을 크게 패전시켜 재기가 불능할 것으로 판단하고, 15일(양력: 1월 10일) 오전에는 안심하고 강진에서 장흥으로 행군하여 온 우측지대(2중대)와 교도중대장이 지휘하는 교도중대와 함께 연일 전투의 피로를 달래기 위해 달콤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경에 다시 장흥농민군에게 기습을 당해 어리둥절하다 4시간 정도인 한나절에 거쳐 간신히 농민군을 자울재 밖으로 내몰았기 때문에 15일(양력: 1월 10일)은 매일 싸웠다고 하지 않은 것 같다.

문제가 된 석대혈전을 언제 시작하였는가의 해답은 여기에 있다. 장흥 유생들이 한결같이 석대혈전의 날짜를 14일로 기록하고 있음이 옮다. 결론지어 말하면 석대혈전은 12월 14일부터 15일까지 이틀간에 거쳐 치려 친다. 남소사랑(南小四郞)이 “7, 8, 9일 3일간(음력: 1894년 12월 12일, 13일, 14일)은 매일 싸웠다.”고 한 9일(음력 14일)에 석대혈전이 시작된 것이다.

<순무선봉진등록> 12월 21일조의 석대혈전에 관한 두 기록에서 먼저 교도중대장 이진호의 보고는 15일의 석대혈전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동학당정토약기>에서 “3개 지대 중 우측지대(2중대)는 강진에서 비도와 싸우느라 약간 늦었고, 장흥의 적은 좌측지대(松木正保의 1중대)와 중로지대(黑石光正, 白木誠太郞)가 이들을 소탕하였다.”에서 보듯이 14일 석대혈전이 시작할 때 우측지대(2중대)와 교도중대장은 강진에서 싸우느라 14일에는 장흥에 오지 않았음이 <19대대 숙박표>에서 “支2강진滯”가 증명해 주고, <우선봉일기> 1월 2일조의 강진현감의 첩보가 이를 보완해 준다.

14일 석대혈전이 시작되어 좌측지대(松木正保의 1중대)와 중로지대(黑石光正, 白木誠太郞)가 이미 상당히 농민군을 소탕한 뒤 삼미아일(森尾雅一)의 2중대와 교도중대장이 직접 지휘하는 교도중대 병력은 강진의 농민군을 14일 소탕하고, 14일을 강진에서 체류한 다음 15일 장흥으로 들어온 것이다.

14일 일대 혈전을 벌어 패전한 농민군이 그대로 물러나지 않고 농민군을 수습하여 재차 15일 석대들에서 혈전을 벌일 때 강진에서 백목(白木) 중위가 아닌 삼미아일(森尾雅一)의 2중대와 교도중대장이 장흥으로 들어와 15일 오시(午時: 오전 11시~ 오후 1시) 경에 벌어진 전투에 참여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통위영 중우참령관이 황수옥의 보고에 기초하여 작성한 <순무선봉진등록> 12월 21일조의 “15일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 경에 적도 수 만 명이 다시 모여 사방으로 에워쌀 때에 일본 병사와 교도소의 군대가 뜻밖에 들어와 힘을 합쳐 진군하여 200여 명을 총살하고, 나머지 무리는 전세가 다하고 힘이 다하여 끝내 도망갔습니다.”와 잘 연결된다.

15일의 전투가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 경에 벌어졌다는 것을 구체화시키면 교도중대장의 보고인 “15일 장흥읍(長興邑)에 도착하여 (중략) 부대를 주둔하고 다리를 잠시 쉴 때에 뜻하지 않게 비류 수 삼만 명이 남으로는 높은 봉우리 밑에서부터 북으로는 뒷산기슭의 주봉(主峰)에 이르기까지 산과 들에 가득하여”와 연결된다. 14일 강진의 농민군을 토벌하고 곧바로 장흥으로 오지 않고, 14일을 강진에서 유숙한 2중대와 교도중대는 아침에 일찍 장흥으로 출발하여 오전 중에 장흥에 도착하여 부대를 주둔하고 다리를 잠시 쉴 때에 뜻하지 않게 비류 수 삼만 명이 남으로는 높은 봉우리 밑에서부터 북으로는 뒷산기슭의 주봉(主峰)에 이르기까지 산과 들에 가득한 상황이 14일에 이어 다시 재현된 것이다.

14일의 석대혈전으로 피곤하여 송목정보(松木正保)의 1중대나 흑석광정(黑石光正)의 3중대나 백목성태랑(白木誠太郞)의 대대본부 소속의 중로(中路)부대는 15일 오전을 휴식으로 보내고 있었다. 이때 14일 강진에서 전투를 치루고, 15일 아침 장흥으로 행군해온 삼미아일(森尾雅一)의 부대와 이진호의 교도중대도 장흥에 도착하여 막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때 뜻하지 않게 비류 수 삼만 명이 남으로는 높은 봉우리 밑에서부터 북으로는 뒷산기슭의 주봉(主峰)에 이르기까지 산과 들에 가득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임태희추기>에서 날짜는 14일로 적고 있지만 “왕사(王師)가 편안히 있을 때 적병은 성을 둘러싸고 있었다.”의 상황이 15일의 상황인 것이다.

14일 석대혈전에서 농민군을 회생하지 못할 정도로 격퇴시켰다고 생각하여 안심하고, 15일 오전을 휴식으로 보내고 있을 때 농민군은 재차 장녕성을 탈환하기 위해 기습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조양촌 전투에서 보듯이 일본군 기록이나 관군기록에는 농민군에게 당한 사건은 전공(戰功)과 관련이 있어 잘 기록을 하지 않듯이 일촉즉발의 상황이 도래했지만 강진에서 합류한 2중대와 교도중대가 있어 크게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남소사랑(南小四郞)은 2중대와 교도중대가 14일 석대혈전에 참전하지 않고, 오히려 15일 장흥으로 들어온 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그러나 강진에서의 격전은 결국 장흥의 적 격퇴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라고 평가한 것이다. 만일 14일 강진에서 농민군을 격퇴하지 않았다면 15일 재차 벌인 석대혈전에 강진의 농민군도 결합하였다면 큰 화를 당할 뻔 했다는 말로 들린다.

15일에 벌인 석대혈전도 결과는 한일연합군이 크게 이겼지만 오전의 기습공격에 크게 놀랐던 모양이다. 교도중대장의 “20리 되는 자오현(自吾峴: 자울재)까지 추격하자 이 때 해는 서산에 걸려 있고 북풍 찬바람은 불어오고 병사들은 굶주린 기색이었습니다.”는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경에 기습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한일연합군은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했을 것이다. 전투를 벌려 자울재까지 추격했을 때는 해가 서산에 걸려 있었다고 했으니 약 4시간 이상을 전투를 하였고, 병사들은 굶주린 기색이었다고 했으니 지칠 대로 지쳤다는 것이다.

석대에서 자울재까지는 10리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교도중대장은 4시간의 사투 끝에 겨우 농민군을 10리도 몰아내지 못했다고 보고하면 그들의 전공(戰功)에 허물이 되기 때문에 20리 되는 자오현(자울재)까지 추격했다고 과장하여 보고를 했다.

자울재에서 더 이상 농민군을 추격하지 못하고 회군 할 때의 묘사를 보면 “남쪽을 바라보니 깊은 계곡이 구불구불 이어져있고, 대숲이 빼곡히 들어서 있어 잘못될 염려가 있을듯하여 즉시 본 진영으로 회군하였습니다.”라고 하여 자울재 아래 용산면 어산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이 좁고 구불구불하여 전후가 잘 살피지 않는데다 석대혈전에서 농민군에게 큰 타격을 입힌 대숲의 매복 공격을 혹 오히려 자기들이 당할까봐 두려움에 회군을 한 것이다.

한일연합군의 자울재에서 회군은 장흥농민군에게 다시 한번 부대를 수습할 기회를 만들어 주어 다음의 옥산촌 전투를 갖게 만든다.

연 이틀의 석대혈전의 패전으로 인해 많은 인명의 사상자가 나고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이 들어 외지에서 합류한 농민군은 이때 대거 장흥을 빠져나간다. 장흥전투에 장흥외의 타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참여한 농민군으로는 당연히 강진이 가장 많고, 보성과 해남, 영암 등의 농민군이 12월 4일 벽사역부터 12월 10일 병영성을 함락하는 사이에 대거 장흥농민군으로 합류한다.

조직적으로는 12월 1일 장평면 사창에서 합류한 금구의 김방서 부대, 화순의 김수근 부대, 능주의 조종순 부대는 장흥전투 이전부터 장흥농민군과 운명을 같이 하다 석대혈전 패전 때 눈물을 머금고 향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1월 21일 기포한 웅치의 농민군도 이때 웅치방향으로 상당수가 퇴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선봉일기>에서 문공진이 보성에서 체포된 날짜가 12월 15일이고, 영목안민(鈴木安民) 중대장이 지휘하는 부산수비대의 전황보고인 <동학당토벌공보>에서 1월 11일(음력: 12월 16일)에 웅치면 오류촌(五柳村)이 토벌 당하고, 12일(음력: 12월 17일)에는 “지난날 장흥부근의 전투에서 패한 많은 동학도가 당 군(보성군) 소관의 각처에 숨어 있어서 중대는 당분간 당지(보성)에 체재하여 잔당정벌을 결정하고 오로지 사방을 수색시켰다.”고 했다. 그리고 13일(음력: 12월 18일)은 웅치면 보춘동(普春洞)이 부산수비대에 의해 토벌 당한다.

3만 여명이 모인 석대혈전에 과연 외지에서 장흥으로 모여든 농민군의 그 외연은 얼마나 넓은가를 유추해 볼 수 있는 기록이 앞에서 자주 인용한 <동학사> 4권 입사출생(入死出生)편과 <우선봉일기>에 있다.

 

전주 도인 김동진(金東鎭)은 장흥접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중도에서 경군을 만나 쫓기어 달아나다가 보성 우산강(牛山江)에 몸을 던져 수 십리 동안을 흘러 내러가다가 다행히 여울물에 걸려 나왔다.(동학사 4권)

 

전주 도인 김동진이 장흥의 접전에 참여했다는 <동학사>의 기록은 훗날 저자 오지영이 장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전주의 김동진의 증언을 바탕으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11월 23일 삼례전투 패배 후 농민군은 전주로 퇴각한다. 바로 이때 전주로 들어간 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11월 24일부터 일본군 후비보병 19대대 대대본부와 2중대 3중대와 경군을 통합하여 운영한다. 한일연합군은 11월 24~29일까지 전주를 중심으로 인근의 무주, 금구, 태인, 장수, 정읍, 천원(川原) 등을 토벌한다. 아마 이때 전주 도인 김동진(金東鎭)이 이방언 장군을 따라 12월 1일 장흥으로 남하한 것으로 보인다. 전주에서 김동진이 이방언 장군을 따라 남하할 때 어디 한 두 명이 따라 왔겠는가?

또한 <우선봉일기> 12월 23일조에 “회령면 통수(統首)의 보고에 ‘본 면 각 마을에 타지에서 도주해온 자로 본래 무안에 거주하는 접주 박치경(朴致京), 접주 박채현(朴采玄), 접사(接司) 임학(林學) 위협에 눌려 복종한 자 김몽길(金夢吉) 등 합 네 놈을 결박하여 상부로 보냈습니다.’고 했다.”에서처럼 무안의 농민군이 장흥에서 체포되었다.

회령면 통수는 타지에서 도주해온 자라고 했지만 이들은 이규태가 무안으로 토벌을 하러간 12월 11일 이후에 장흥으로 도주해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아마도 장흥전투가 승전하고 있을 때 한편으로는 무안의 토벌을 피하고 한편으로는 장흥의 승전의 소식을 듣고 합세하기 위해 왔다가 장흥전투의 패배 후 무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회령면에서 은신하다가 체포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무안군의 농민군이 상당히 조직적으로 장흥전투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천도교 장흥교구에서 작성한 <갑오동학혁명혈사>의 마지막 부분에서 무안군 고막원 접전기(接戰記) 등을 기록해 두지 않았나 모른다.

이상은 우리나라 동학농민혁명사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동학농민혁명 최후전투 또는 최후격전지라 불리는 장흥전투의 핵심인 석대혈전의 기존문헌을 모두 모아서 이를 검토하였다.

필자가 석대혈전을 결론지어 말하기를 12월 15일 하루에 벌어진 전투가 아니라 14일에서 15일에 걸쳐 이틀간 벌어진 전투이고, 가장 많은 피로 얼룩진 혈전(血戰)을 벌인 전투를 하루도 아닌 이틀에 걸쳐 수행하였다고 했다. 그 이전 12일과 13일에도 오전 오후 각기 두 차례의 총 4회의 전투에서 패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4일과 15일에도 한일연합군과 전투를 벌인 저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아무리 깊이 사려를 해봐도 뜻이 미치지 못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끝으로 일본군의 포상기록인 “동학당 정토 공로자에 대한 논공 건의의 건”에 나오는 1중대의 하사관이하 57명의 아래 전공조서 도표에서 유앵동 전투를 먼저 표시하고 다음에 장흥전투 2회를 표시한 것으로 보아 전공조서에 나온 장흥전투 2회는 12일 아침의 조양촌전투나 12일 저녁의 건산전투와 13일 동트기 전의 남문밖 전투도 아닌 14일 온종일의 석대혈전과 15일 오후의 석대혈전과 자울재 등의 전투라고 단언한다.

일본군의 장흥지역의 전투상보 목록에는 조양촌부근전투, 유앵동부근전투, 장흥부(長興府)전투, 장흥인근전투, 옥산촌부근전투라는 지명이 나오지만 1중대가 전공을 올려 상훈을 받는 전투는 유앵동전투 1회, 장흥전투 2회로 일본군 입장에서는 가장 치열한 전투였고, 전공도 많은 전투가 13일 오후의 부산면 유앵동 전투와 14일과 15일에 벌인 석대혈전인 장흥전투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한다.

 

6-7. 12월 16일 옥산촌 전투

일본군의 전투상보 목록에도 나와 있는 옥산촌 전투를 기술함에 있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옥산촌 전투가 벌어진 날짜를 일본군은 12월 16일로 적고 있고, 교도중대장 이진호는 17일로 적고 있는 점이다. 옥산촌 전투는 여러 정황으로 보아 석대혈전처럼 이틀에 거쳐 치룬 전투는 아니라고 본다. 이미 농민군은 석대혈전에서 크게 패전을 하여 옥산촌을 근거지로 하여 이틀간 전투를 벌일 여력이 없고, 일본군이 연일 패전한 4~5천명의 농민군을 상대로 이틀에 거처 전투를 벌려야 하는 수준은 절대 아니다.

필자는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 <19대대 숙박표>를 따라 옥산촌 전투는 12월 17일 아니라 12월 16일에 벌어졌다고 본다. 이미 한일연합군이 14일 온종일 석대혈전에서 농민군을 대패시켜 안심하고 잔당토벌을 미루고 있다가 15일 오전에 휴식을 취하는 도중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경에 기습을 당한 사례가 있어 농민군에게 잔당을 수습하는 틈을 주지 않기 위해 16일 하루 휴식을 취하지 않고, 고읍면에 농민군이 모여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한일연합군은 곧바로 공격을 취한 것 같다.

자울재를 넘어 남면을 거쳐 솔치재에서 정황을 파악한 뒤 대내장(竹川場: 죽청이 아니라 현재 죽교(竹橋)라고 부르는 부근)의 하천을 사이에 두고 일단은 옥산촌에 진을 치고 있는 농민군과 대치하다 죽교를 넘어 옥산촌으로 진격하여 전투를 벌인 것 같다.

이 옥산촌 전투도 농민군의 저항이 대단하여 한일연합군은 단숨에 격퇴시키지 못하고, 밤이 가까울 때까지 전투를 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최소한 4~5시간의 전투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표영삼 선생이 채록한 “관산읍에 사는 손동옥(孫東玉)의 증언에 따르면 ‘동학군과 일본군은 고읍천(古邑川)을 사이에 두고 3∼4시간 싸우다가 동학군이 패했다. 총소리에 놀란 옥산 주민들은 뒷산으로 피신하여 온 산이 백산이 되었다. 일본군은 이들에게 총격을 퍼부어 무고한 주민들이 많이 사살되었다.’”를 보면 솔치재를 넘어오는 한일연합군을 발견한 농민군이 옥산촌에서 앉아서 한일연합군을 기다리지 않고, 고읍천 앞까지 진격하여 고읍천을 넘어오지 못하게 대포 등을 쏘며 저항하다가 끝내 옥산촌으로 밀려 천관산 기슭인 금성당(金城堂) 능선을 요새로 잡아 전투를 벌이다 패전한 것 같다.

이때 패전하여 도주하는 농민군을 5리쯤 뒤쫓다가 그때 마침 눈바람이 크게 일어나고 또 황혼으로 밤이 가까워 즉시 회군하였다고 했다. 여기서 농민군이 도주한 방향은 강진군 칠량면으로 넘어가는 방향과 방촌으로 넘어가는 두 방향과 천산관 등지의 사방으로 도주를 하였을 것인데, 유독 5리쯤 쫓아간 방향은 아마 방촌 방향일 것이다. 그 이유는 옥산촌 전투를 이끈 사람은 이인환으로 그의 휘하에 있는 대흥면의 농민군은 당연히 방촌 방향으로 도주할 것인데, 많은 농민군이 방촌 방향으로 달아나자 한때 뒤쫓았을 것이다.

<순무선봉진등록>의 “황혼으로 밤이 가까워 즉시 회군하여 진영을 쉬게 하였습니다.”에서 회군하여 진영에서 쉰 곳은 장흥읍으로 추정할 필요가 없다. 다음 날 17일 바로 일본군 2중대와 3중대가 대흥면으로 진격을 하기 때문에 장흥읍으로 갔다가 다시 대흥면으로 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 <동학당토벌공보>: 제18대대의 교도중대는 죽천동(竹川洞)부근에서 3, 4백의 적을 만나 이를 격파하였고, 경성의 한국 병사 100명도 동 대의 뒤를 쫓아 광양에서 순천 낙안을 거쳐 당 군에 왔다가 이미 오늘 능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위의 부산수비대의 영목안민(鈴木安民)의 보고서에 “제18대대의 교도중대”는 백목성태랑(白木誠太郞)을 수행하는 교도중대를 말하고, “경성의 한국 병사 100명도 동 대의 뒤를 쫓아 광양에서 순천 낙안을 거쳐 당 군에 왔다가 이미 오늘 능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는 기록은 다소 혼란스럽다. 여기서 경성의 한국 병사는 당연히 일본군 1중대를 수행한 통위영 병사로 “광양에서 순천 낙안을 거쳐 당 군에 왔다”는 장차 20일 오게 될 이두황군의 행로이기 때문에 잘못되었다. “당 군에 왔다가 이미 오늘 능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는 그 동안 장흥전투에서 가장 많은 공훈을 세운 1중대를 따라 일단은 통위영 병사도 능주로 갔다는 말인데, 12월 11일 처음 나주에서 1중대를 따라 나설 때는 30명이었는데, 영목안민(鈴木安民)의 보고내용이 맞는다면 통위영의 부대는 그 동안에 증원이 되었다는 말이다.

옥산촌 전투를 벌인 부대는 장흥전투에서 가장 많은 공훈을 세운 송목정보(松木正保)의 1중대가 아니라 삼미아일(森尾雅一)이 지휘하는 2중대와 교도중대장 이진호 병력의 우측지대와 백목성태랑(白木誠太郞)이 지휘하는 대대본부 소속부대와 그를 수행한 교도중대 병력의 중로지대로 앞에서 한일연합군 계산 방식을 따르면 대략 일본군 250(2중대 150명, 대대본부 소속 100명)여명과 교도중대 180(중대장 인솔 150명, 白木을 수행한 부대 30명)여명으로 총 430여명으로 추산된다.

끝으로 이렇게 많은 한일연합군과 12월 16일 옥산촌에서 전투를 벌인 주력부대는 고읍접주 김학삼(金學三)과 대흥대접주 이인환(李仁煥)이 지휘하는 부대이다. 김학삼(金學三)은 1852년 출생하였다. 본관은 김해 김씨 공간공파(恭簡公派)로 족보명은 상휴(相休), 字는 학삼(學三), 號는 모성당(慕聖堂)이다. 또한 이방언 장군과는 내종 당숙질 사이이다. 옥산전투에서 패전한 후 처가인 방촌에 피신해 있다가 체포되어 12월 26일 장흥 벽사역에서 43세의 나이로 처형당한다.

 

6-8. 12월 17일 마지막 전투인 대흥면 월정전투

 

- <19대대 숙박표> 12월 17일: 支1능주滯, 支2대흥면(大興面), 支2대흥면(제3중대를 합함).

- <장흥군향토지>: 패전한 동학군은 건산리 모정고지에 진을 치고 관군과 대치하던 중 부산방면에서의 관군의 증원부대의 내습으로 더 고전할 수밖에 없게 되자 석대와 모정의 패잔 동학군은 용산 자울재에 집결하여 군세를 정비하고 관군과 결전했으나 역시 패전하여 대덕 월정에 집결하고 다시 관군을 요격하였으나 기진역갈(氣盡力竭)하여 패도하였다고 전해온다.

- <대덕읍지> 529쪽: 1895년 1월. 전 해에 봉기한 동학농민혁명군이 석대혈전에서 패하자 퇴각을 해 남쪽인 용산 관산에서 소규모 접전을 하였으나 패하자 마지막으로 월정마을에 진을 쳤다. 이름하여 이곳을 진터깨라 한다.

 

그 동안 학계에서는 고읍면의 옥산촌 전투를 장흥전투에서 마지막 전투라고 결론 내렸다. 때문에 <장흥군향토지>가 전한 “석대와 모정의 패잔 동학군은 용산 자울재에 집결하여 군세를 정비하고 관군과 결전했으나 역시 패전하여 대덕 월정에 집결하고 다시 관군을 요격하였으나 기진역갈(氣盡力竭)하여 패도하였다고 전해온다.”는 말은 무시당했다.

16일 고읍면 옥산촌 전투에서 패배한 농민군은 사방으로 흩어질 때 대흥면 농민군은 한일연합군의 5리 정도의 추격을 당하면서도 다행히 섬멸되지 않았다. 대흥면 농민군은 장흥동학농민군 중에서도 최강을 자랑하는 부대이다. 11월 21일 구교철이 웅치면에서 기포하자마자 장흥부사가 병영군과 합세하여 토벌을 감행할 때 곤욕을 치루기도 했지만 11월 25일 이인환이 대흥면에서 출정 기포하여 회령면에 당도한 후로는 장흥부의 수성군과 병영군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차례로 함락당하는 수모를 안겨준 부대이다. 이러한 대흥면의 이인환 부대가 주축이 되어 대흥면의 안 동네인 월정리(月亭里)에 진을 치고 마지막으로 한일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대흥면 월정리의 마지막 전투는 도피하여 숨어 있는 농민군을 토벌한 것이 아니라 천태산과 대흥면에서 강진군 대구면으로 넘어가는 지제재를 요새로 삼아 확실하게 진을 치고 대항한 곳이다. 이인환 부대가 월정리에서 진을 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15일 석대혈전을 벌일 때 강진에서 장흥으로 들어온 부대인 후비보병 19대대 삼미아일(森尾雅一)이 지휘하는 2중대의 병력과 교도중대장 이진호의 교도중대 병력이 16일 고읍면에서 장흥읍으로 철수하지 않고 주둔하다가 바로 대흥면으로 투입된 것이다.

일본군은 이인환 부대의 막강함을 알아서인지 흑석광정(黑石光正)이 지휘하는 3중대까지를 합하여 전투에 투입한 것이다. 흑석광정(黑石光正)의 3중대는 12월 12일 유치면 조양촌 전투에서 농민군을 패전시킨 다음 안심하고 아침을 먹다가 농민군의 기습을 받아 한바탕 곤욕을 치룬 후에 장흥에 주둔하여 그 동안 중로(中路)지대라는 이름으로 장흥전투를 벌이지만 <19대대 숙박표>에서 본래의 표시인 支3(3중대)이란 본래의 표시가 이때 다시 나타난다. 3중대는 이때 강진군 대구면에서 지제재를 넘어 월정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2중대에는 교도중대장 이진호가 포함되어 있고, 3중대에는 처음부터 교도중대 병력 30명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월정전투에 투입된 한일연합군은 고읍면의 옥산촌 전투에 투입된 병력보다 많은 것으로 계산된다.

일본군 한 중대 병력을 150명으로 잡아 300명의 일본군과 교도중대장 산하 150명의 병력과 3중대를 수행하는 교도중대의 병력 30명을 합해 180명의 경군의 병력의 계산되어 월정전투에 투입된 한일연합군은 총 480명 정도가 투입된 것으로 계산된다. 이렇게 많은 부대가 장흥의 대흥면과 강진의 대구면 양쪽에서 협공을 하는 바람에 이인환의 부대도 <장흥군향토지>가 전하는 말처럼 기진역갈(氣盡力竭)하여 패도를 하고 만다.

12월 17일 대흥면 월정리에 진을 치고 마지막 항전을 벌였던 농민군의 수는 정확하게 헤아릴 수 없지만 <우선봉일기> 12월 24일조의 남소사랑(南小四郞)의 지휘서신에 “덕도(德島)에 적도 5~6백명 달아나 들어갔다고 한다. 가서 추격하여 토벌이 가능한가?”로 보아 덕도(德島) 한 곳에만 피신해 있던 농민군이 5~600명이었으니, 이로써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대흥면 월정리 전투를 마지막으로 장흥농민군은 더 이상 조직적으로 항전을 벌이지 못하고, 덕도(德島)와 천관산, 천태산 등지로 피신을 하고, 일부는 회진면의 선자도에서 배를 타고 외부로 빠져나간다.

16일 고읍면 옥산촌에서 패전한 후 농민군이 대흥면 월정리에 진을 칠 때 들어간 많은 물자를 주변 마을에서 조달하는 과정에서 강제적인 탈취가 많았다는 구전이 전해지고, 진을 쳤던 장소를 월정리 사람들은 지금도 진터깨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확실히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때문에 장흥동학농민혁명사에서 마지막 전투는 대흥면 월정전투로 정리한다.

 

7. 여동학과 어린동학의 활약

1990년 1월에 발간된 <장흥군지>는 1975년 4월 발간된 <장흥군향토지>의 동학기사를 그대로 옮기면서 “이때 이소사(李召史)란 여인이 앞장서서 싸워 동학군의 사기를 진작시켜 큰 전과를 거두었다고 당시 일본의 조일신문(朝日新聞)에 기록돼 있으나 여타 동학관계기록이 없어 안타깝다. 확인된다면 3.1운동 때의 유관순처럼 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부상될 것이다.”라는 여동학 이소사(李召史)의 활약상을 처음으로 세상에 전했다.

1990년 5월 남풍출판사에서 발행된 <역사와 현장> 1권 181~182쪽에서 송기숙 교수는 「장흥지역 동학농민전쟁 관계구전조사」에서 “당시 일본 조일신문에 장흥에서 이소사라는 여자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짤막하게 보도된 사실이 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여러 사람에게 물어봐도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소사란 과부를 높여 부르는 존칭이니, 그가 이가(李哥)라면 이방언 장군의 집안 여자가 아닐까 싶으나 그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 여성사에서 중용한 의미를 지니는 일일 것이다.”라고 마무리했다.

여동학 이소사의 존재를 세상에 가장 먼저 알린 문헌은 이두황의 <우선봉일기> 1895년 1월 1일조에서 남소사랑(南小四郞)에게 보낸 아래의 답신이다.

 

둘째, 거괴 체포자(李召史) 나주로 호송이 가능하냐고 했는데, 이 역시 그렇지 못할 것 같습니다. 백성(民)이 처형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미 교령이 오고 있을 때는 민인이 체포하여 바친 여동학 1명을 소모관 백낙중(白樂中)이 받았습니다. 소모관에게 넘어가 매를 맞는 문초를 당해 살과 가죽이 진창이 되어 있으며, 교령을 받았을 때는 기운과 호흡이 헐떡거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는 모양입니다. 조금 늦추는 것을 용인하여 이에 안정되면 여동학(女東學)을 본부로 압송하겠습니다.

 

<우선봉일기> 1월 1일조에 이소사(李召史)로 밝혀진 여동학이 처음 나오지만 일기의 내용으로 보아 남소사랑(南小四郞)이 이두황에게 여동학 압송을 지시한 서신을 보낸 날짜는 12월 27일 오전 8시이므로 이소사는 이미 12월 26일 이전에 체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 농민군이 체포되면 당일 또는 2~3일 내로 처형되었는데, 1월 1일 현재까지 5일 이상 처형을 하지 않고 그것도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거물만 압송하는 나주압송 대상으로 분류된 것으로 보아 이소사는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이소사의 체포는 이미 12월26일 이전에 있었지만 이두황이 일본군 19대대장 남소사랑(南小四郞)에게 이소사의 체포사실을 보고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소모관 백낙중의 진영에서 체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소사랑(南小四郞)은 12월 27일 아침 나주에서 이두황에게 지휘서신을 보내 이소사의 나주압송을 지시한다. 이처럼 남소사랑(南小四郞)이 장흥에 주재하지 않고 나주에 있으면서도 장흥의 상황을 훤히 알고 있다. 그 이유는 일본군은 전보(電報)라는 통신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시 장흥에 주둔하고 있던 영목안민(鈴木安民)의 부산수비대에서 나주의 남소사랑(南小四郞)에게 이소사의 체포 첩보를 전달한 것 같다.

 

<우선봉일기>에는 여동학 이소사에 관한 기록이 위의 기록 외에도 다음과 같이 출전한다.

 

- 1월 1일: 양호도순무우선봉(兩湖都巡撫右先鋒)은 장흥에서 체포한 죄인 여동학 1명을 호송하는 일에 대해 명령을 내리니 장흥부 민병에게 나주로 압송하도록 하였는바, 경유하는 각처는 각별히 호송하는데 혹 막히는 불편이 생기지 않도록 헤아려 주라고 했다.

- 1월 3일: 양영(兩營)에 보낸 첩보에 장흥 민인(民人)들이 체포한 여동학(이소사)이 껄껄 웃으며 신이부인(神異夫人)이라 칭하며, 요상한 말을 외우며 쏟아내고 있습니다. 혹 어리석은 사람의 하나이거나 대요물인 바로 금일 초하루에 나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대대로 보냈습니다.

- 1월 4일: 남소사랑(南小四郞)이 보낸 서신에 첫째, 병정 100명이 금일 나주 도착했다. 그 밀보(密報)를 역시 수령했다. 둘째, 여동학을 금일 오후에 수령했다. 셋째, 소모관 백낙중을 빨리 잡아 나주로 급송하라. 넷째, 여동학 이소사의 남편을 급히 나주로 보내 그 처자를 간병하게 하라고 했다.

- 1월 4일: 남소사랑(南小四郞)에게 보낸 답신에 여동학 이소사(李召史)의 남편을 급히 기동시켜 나주로 보내 그 처자의 간병을 하게 하라는 교령을 받들기 위해 그 사람이 살고 있는 40리나 되는 곳으로 사람을 보내 데려오라고 했으나 조금 늦어져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오는 즉시 기동시켜 보내겠으니 헤아려 주십시오.

- 1월 7일: 여동학 이소사(李召史)의 남편 김양문(金良文)을 그 동안 4번이나 찾았고, 지금 결단하여 부르고 있기 때문에 이에 기동하여 보내겠다는 연유를 보고 드립니다. 연일 크게 평안하시기를 기원한다고 했다.

 

앞에서 출전했지만 이소사(李召史)의 열전(列傳)을 통해 그 동안 수집된 자료를 이하 다시 한번 언급하면서 설명하겠다. 보통 성씨(姓氏)아래 소사(召史)를 붙였을 때 과부(寡婦)를 점잖게 일컫는 호칭으로 많이 사용되나 꼭 과부에게만 붙이는 호칭이 아니다. 필자가 2006년 <장흥동학농민혁명사료집>을 편찬할 때, 이 문구의 원문 “女東學李召史之夫金良文”을 “여동학 이소사의 시중드는 사람 김양문”으로 해석했는데, 그때는 홍계훈이 작성한 1차기포 문서인 <양호초토등록(兩湖招討謄錄)>에 전주 접주인 “허내원(許乃元)의 처 이소사(李召史)”가 있다는 정보 때문에 전주의 이소사와 장흥의 이소사를 분간하기가 어려워 일단 장흥의 이소사를 과부로 보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제 필자가 <양호초토등록>을 입수하여 확인한 결과 “허내원(許乃元)의 처 이소사(李召史), 정국찬(鄭國贊)의 처 김소사(金召史), 김영조(金永兆)·이보일(李甫一) 등은 처음 사교(邪敎)에 물들었다가 곧 귀화하였다고 합니다.”에 의거하여 전주의 이소사와 장흥의 이소사는 다른 인물임을 확인했다. 또한 <양호초토등록>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의 부인에게도 소사(召史)라는 칭호를 붙인 것을 확인할 수 있어 이제 본서에서는 이소사가 과부가 아닌 김양문(金良文)의 처로 수정한다.

남소사랑(南小四郞)은 여동학 이소사의 기록을 더욱 풍부하게 해준 사람이다. 그가 <동학당정토약기>에서 전한 이소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 또 장흥 전투의 틈을 타서 부사를 죽인 것은 여자(이소사)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 동학은 사실 미친 사람이었는데, 동학도들이 옹립해서 천사로 만들어 이용한 것이다.

- 또 그 미친 여자는 좌측지대에 소속되어 순회하던 소모관 백낙중(伯樂中)이란 자가 붙잡아 민병으로 하여금 엄하게 규문하게 하였다. 그 전부터 조선에서의 처벌이 매우 엄중하다고는 들었지만, 이 여자를 고문하는 것을 보고 정말로 놀랬다. 양쪽 허벅지의 살을 모두 잘라내어, 그 한 쪽은 살을 아주 잘라내서 뼈만 남고 또 다른 한 쪽은 피부와 살이 금방 떨어져 나갈 것처럼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여자가 압송되어 나주성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거의 죽은 송장 같았다.

- 미친 여자(이소사)는 최동자와 같은 날 도착했다. 상처 부위가 썩어 문드러져서 악취가 코를 찌르고 대소변은 앉은 채 나오는 대로 내버려두었으며 입은 것이라고는 흰옷 한 벌 뿐으로, 그 참담한 꼴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의식중에 무참한 감을 느끼게 하였다. 문명한 모든 나라에서는 부녀자에 대해서는 비록 죄수라 해도 대우 면에 있어서 얼마간은 관대하므로, 나주에 도착한 뒤 그 여자를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하였다. 여러 가지 심문한 끝에 그 여자가 정신착란자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당시 봉건적인 조선사회에서 여동학 이소사가 장흥전투에 단순히 참가한 것이 아니라 말을 타고 마상 지휘를 한 여장부라는 것과 그 미모가 중출하여 한 성(城)을 기울게 하는 경성지색(傾城之色)의 꽃다운 22세의 미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일본신문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 22권 499쪽과 23권 183쪽에 영인되어 있는 이소사의 일본신문 기사는 다음과 같다.

 

- <국민신문> 1895년 3월 5일: 동학당에 여장부가 있다. 동학당의 무리 중에 한 명의 미인이 있는데, 나이는 꽃다운 22세로 용모는 빼어나기가 경성지색(傾城之色)의 미인이라 하고, 이름은 이소사(李召史)라 한다. 오랫동안 동학도로 활동하였으며, 말을 타고 장흥부가 불타고 함락될 때 그녀는 말위에서 지휘를 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꿈에 천신(天神)이 나타나 오래된 제기(祭器)를 주었다고 하여 동학도가 모두 존경하는 신녀(神女)가 되었다. 그러나 장흥전투의 패배로 관군에 체포되어 지금은 장흥의 철장 안에 있다고 한다. 어쩌면 작년의 신동(神童)의 일과 같은 것일까?(사료총서 22권 499쪽)

- <대판조일신문> 4월 7일: 여동학. 장흥부근의 동학도 무리에는 한 명의 여자가 있어 추천되어 수령(首領)이 되었다. 우리 병사가 잡아서 심문했는데, 완전히 미치광이가 되었다. 동학도가 귀신을 애기하고 신(神)을 말하는 것을 이용하여 천사(天使) 혹은 천녀(天女)라 칭하여 그로써 어리석은 백성을 선동하였다.(사료총서 23권 183쪽)

 

남소사랑(南小四郞)과 일본신문은 이소사를 미친 여자로 치부했지만 이소사는 체포되어 백낙중에게 넘어가자마다 당당하게 처형을 원하는 여장부였다. 때문에 소모관 백낙중에게 넘어가 매를 맞는 문초를 당해 살과 가죽이 진창이 되어 있어 이두황이 남소사랑(南小四郞)의 나주로 압송 교령을 받았을 때는 기운과 호흡이 헐떡거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을 정도로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이두황은 1894년 12월 30일 해시(亥時: 오후 9시~11시) 경에 남소사랑(南小四郞)의 지휘서신을 수령하여 1895년 1월 1일 오전에는 지금 상태로는 보내기 어렵다고 답신을 하였다가 오후에 다시 이소사를 나주로 압송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호흡이 헐떡거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던 이소사가 “껄껄 웃으며 신이부인(神異夫人)이라 칭하며, 요상한 말을 외우며 쏟아내고 있습니다. 혹 어리석은 사람의 하나이거나 대요물인 바로 금일 초하루에 나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대대로 보냈습니다.”라는 이두황이 1월 3일자에 순무영(巡撫營)으로 보낸 첩보에 의해 확인할 수 있듯이 갑자기 소생하였기 때문이다.

“껄껄 웃으며 신이부인(神異夫人)이라 칭하며, 요상한 말을 외우며 쏟아내고 있습니다.”라는 투의 말은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묵살하고, 일본군이나 관군이나 정부의 모든 기록이 동학도를 주문이나 외우는 어리석은 집단으로 곧장 매도하여 잘 표현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크게 개의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다. 호흡이 헐떡거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판단했던 이소사가 갑자기 소생하였기 때문에 놀라 이두황은 이소사를 대요물이라고 표현했던 것이지만 그녀의 정신력이 대단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1월 2일경 이소사를 인수한 일본군은 이소사를 곧장 처형하지 않고 조사를 하기 위해 장흥에서 소모관에게 몹시 맞아 몸이 상한 이소사를 병간호시키기 위해 두 차례나 장흥으로 “여동학 이소사의 남편을 급히 나주로 보내 간병하게 하라.”고 지시한다. 이두황의 답변에서 단지 이소사가 살고 있는 위치를 어림할 수 있는 단서가 나온다. 장흥읍에서 40리 되는 거리라는 것이다.

필자는 “박헌양 부사의 순절”편에서 여동학 이소사의 거처가 장흥부에서 40리라는 <우선봉일기>의 기록으로 보아 아마 같은 남쪽인 이인환과 이소사는 지리적으로도 가까운 거리에 있기에 혹 이소사가 김재계 선생이 전한 <갑오년 동학이야기>에 나오는 “고읍면 송현리 등지에서는 시녀(侍女)가 나고”에서의 고읍면 송현리의 시녀가 이소사가 아닌지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때문에 장녕성을 함락할 당시 이인환과 이소사는 같은 소속으로 전투 중에서는 서로가 지근거리에 있었다고 보면 <동학당정토약기>에서 “부사의 목을 내친 사람을 여동학(이소사)이라는 소문이 있다.”고 한 말이 맞아들어 이인환의 앞에서 박헌양 부사의 목을 직접 친 사람은 여동학 이소사이고, 이렇게 하여 빼앗은 장흥부의 인부와 병부는 이인환에게 건너졌을 것이라는 상황을 쉽게 재현할 수 있다.

남소사랑(南小四郞)은 이소사가 모진 고문에 의해 정신이 착란 되고 생명이 위태로워 나주에서 일본군 군의관으로 하여금 치료를 하게하고, 또한 병간호를 할 사람이 필요하여 그의 남편을 나주로 보내라는 지시를 내린 이유는 어떻게 해서라도 이소사를 소생시켜 그녀가 부사를 직접 죽었는지 그리고 장흥동학농민혁명 지도부와 관계 등을 수사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이두황은 끝내 이소사의 남편 김양문을 찾지 못한 것 같다. 남소사랑(南小四郞)은 “상처 부위가 썩어 문드러져서 악취가 코를 찌르고 대소변은 앉은 채 나오는 대로 내버려두었으며 입은 것이라고는 흰옷 한 벌 뿐”인 이소사를 회생시키기 위해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한 후 “여러 가지 심문한 끝에 그 여자가 정신착란자라는 것을 확인하였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소사는 불굴의 의지력으로 살아남아 일본군의 많은 심문을 받는다. 이소사는 심문을 받을 때 온전한 정신은 분명히 아닐 것이고, 당연히 고통을 이겨내며 흐트러지는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등의 동학 경문을 외웠을 것인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경문 외우는 소리는 일본군에게는 그저 미친 여자가 중얼거리는 소리로 들였을 것이다. 때문에 남소사랑(南小四郞)이 정신착란자로 치부해 버린 것이다.

남소사랑(南小四郞)은 병영성의 서병무 병마절도사를 나주로 불러 조사한 후 서병무도 쉽게 정신착란자로 단정하였듯이 상처 부위가 썩어 문드러져서 악취가 코를 찌르는 이소사가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 아닌데다 무어라 일본인으로써는 알 수 없는 경문을 외우고 있으니, 미친 여자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 설령 나주에서 심한 정신착락을 일으켰더라도 처음부터 이소사를 미친 여자로 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선봉일기>나 <동학당정토약기>는 물론 이인환, 최신동, 문공진, 이득춘을 처형한 후 나주목사 민종렬이 작성하여 상부로 올린 <첩보존안>에도 이소사의 생사는 전하지 않는다. 필자는 이소사가 나주에서 모진 고문의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병사했을 것으로 본다.

아무튼 이러한 불가사의 한 미모의 22세 인물이 장흥전투에 말을 타고 전투를 지휘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소사는 달리 평가해야 할 인물이다. 소모관 백낙중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후 나주 일본군 진영으로 압송되어 일본군은 병을 치료해 주면서 병간호를 시켜줄 남편을 찾으면서까지 일단은 그녀의 목숨을 유지시켜 조사를 하려고 했다. 이 때문에 일본신문은 장흥의 여동학 이소사를 여장부, 경성지색(傾城之色)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보도를 한 것이다. 앞으로 장흥동학농민혁명사에서 이소사를 유관순열사보다 항일운동의 선배로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반드시 자리매김 시켜야할 인물이다.

최동자(崔童子)는 전하는 이름이 많다. 최동(崔童), 최동린(崔東麟), 최신동(崔神童)이 모두 최동자(崔童子)이다.

천도교장흥교구의 <갑오동학혁명혈사>에서는 “최동린(崔東麟) 일명 최동(崔童): 氏는 장흥군 대덕면 연지리에서 출생하여 13세 소아로 군중을 지휘하여 장흥군 남문밖 석대혈전에서 수만 군중을 총지휘하다가 전사하다.”로 기록하고 있다.

이두황의 <우선봉일기>에는 최동자에 관한 기록이 없다. 경군의 기록으로는 유일하게 <사료총서> 17권 「각진장졸성책(各陣將卒成冊)」의 죄인록에 “崔童居長興名不知. 自日陣移送羅州日陣(최동 장흥에 거주하나 이름은 알 수 없음. 일본진영에서 나주 일본진영으로 이송)”으로 기록되어 있다.

「각진장졸성책(各陣將卒成冊)」은 이규태의 진영에서 작성한 기록이지만 이규태의 진영에서 체포하였다는 말도 없이 “自日陣移送羅州日陣(일본진영에서 나주 일본진영으로 이송)”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언제 어느 곳에서 어느 부대에 체포되었는가를 알 수 없다.

최동자의 체포는 두 가지로 추정되는데, 첫째 이규태 진영의 기록에서 발견된 점으로 보아 아마 이규태 휘하의 부대가 체포하여 일본군 진영으로 넘겼는데 일본군은 다시 “自日陣(현지의 일본군 진영)”에서 “移送羅州日陣(나주의 일본군 대대본부 진영으로 이송)”으로 넘긴 것으로 볼 수 있고, 또 하나는 일본군이 직접 체포하여 나주의 대대본부로 이송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가능성은 일본군이 직접 체포하여 나주의 대대본부로 이송한 쪽이 더 높다.

이규태 진영에서 작성한 <순무선봉진등록> 12월 29일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출전한다.

 

출진한 참모관 별군관의 첩보에 “해남에서 출발하여 40리를 가서 강진현에 도착하니 성 안팎의 민가가 모두 불에 타버렸으며, 놀라고 겁먹은 백성들의 실정은 매우 근심스럽고 참혹하였습니다. 이에 경내의 상황을 정탐하니 남면 칠량면 등에서 놓친 비류는 혹 산골짜기에 숨어 있거나 혹 바다를 넘어 섬으로 들어간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강진현감이 각별히 수성소(守城所)를 설치하여 날마다 저들의 뒤를 쫓아 체포하는 것을 일로 삼고 있습니다. 점심을 먹은 후에 여기서 군대를 행군하여 장흥부 근처 마을 순지동(筍芝洞)에 도착하여 무사히 머물러 지냈고, 새벽에 그곳을 떠나서 장흥부에 들어가니 우선봉진이 이달 20일에 장흥부로 들어와 군대를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 기록은 이규태가 해남에서 남도의 사정을 알기 위해 참모관과 별군관을 출동시켜 해남 → 강진 → 장흥 → 보성 → 흥양 → 낙안으로 행군하여 첩보를 올리도록 하였는데, 강진에서 장흥부 순지마을에서 숙박한 후 새벽에 장흥부로 들어갔다는 보고이다. 이때 최동자가 비롯 나이는 어리지만 거물이기에 체포하였다면 이 보고에 최동자의 체포 소식이 전할 것인데 없다.

최동자를 체포한 부대는 바로 12월 24일부터 30일까지 장흥에 주둔한 영목안민(鈴木安民)의 부산수비대이다. 부산수비대의 총격에 다리가 맞아 체포되었기 때문에 이두황의 <우선봉일기>에는 출전하지 않고, 바로 <동학당정토약기>에 출전하는 것이다. 단 이규태 진영의 기록인 <각진장졸성책>에는 후에 전해진 첩보를 기록하였기 때문에 “名不知(이름을 알 수 없음)”라고 기록했을 것으로 본다.

다행히 남소사랑(南小四郞)의 <동학당정토약기>에서 최동자가 나주로 이송되어 온 날이 이소사와 같은 날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소사가 체포된 12월 26일 이후가 아닌가로 추정되며, 1월 1일 장흥에서 이소사와 함께 나주로 이송된 것이다. <동학당정토약기>가 전하는 최동자의 기록을 아래에서 살펴보자.

 

- 또 최동자(崔童子: 최동, 최동린, 최신동이라고도 함)라고 하는 자가 있었다. 역시 동학도들이 그를 우러러 받들어 신으로 모신 것이다. 이 자의 연령은 16~17세인데 노새를 타고 비도를 지휘하다가, 때마침 장흥에서 군에 의해 다리에 총을 맞고 일어설 수 없으므로 이도 역시 병원에 집어넣었다.

- 미친 여자(이소사)는 최동자와 같은 날 도착했다. (중략) 또 최동자는 의사의 주장으로 그 다리를 자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치유될 가망이 없다고 하기에 발목을 잘랐는데, 정신이 착란 되어 감각이 둔해졌던 탓인지 뜻밖에도 그 큰 상처가 완치되었다.

 

<사료총서> 23권 183쪽 대판조일신문(大版朝日新聞) 1895년 4월 7일자에 이소사와 함께 최동자는 어린동학으로 제목을 뽑아 이소사 기사에 이어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 어린동학. 동도(東徒) 중에는 동자(童子) 한 사람이 있는데, 성은 崔라고 했다. 동학 신도들은 그를 칭하여 선생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은 최동자(崔童子)라 하여 그 순진무구함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우롱하였다. 동학도의 인민을 선동하는 것은 매번 이와 같다.

 

대판조일신문(大版朝日新聞) 기사 내용은 일본인의 시각에서 매우 부정적으로 본 것으로 마치 순진한 어린애를 전장에서 선동꾼으로 이용한 것으로 매도하고 있다.

장흥동학농민혁명에서 어린 소년은 비단 최동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최동자와 같은 대흥면 연지리 출신인 김유선(金有善)은 15세의 나이로 참전하여 생환하였다. 약산면 해동리의 박백환(朴白煥)도 당시 15세의 나이로 참전하여 생환하였으며, 500~600명의 동학농민군을 구원한 소년 사공 윤성도(尹成道)도 당시 16세였다. 무엇이 이 어린 소년들을 전장으로 내몰았을까? 당시의 시대 상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최동자는 대흥면 연지리 출신으로 이인환과는 한 마을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타고 지휘하는 이소사와 함께 이인환의 옆에서 최동자는 나귀를 타고 전투를 지휘했다.

같은 날 천하 미모의 여동학과 어린 동학이 장흥에서 나주로 압송되어 오자 1월 4일 일본인은 통역을 대동하고 장흥으로 와서 동학도 성명성책의 결과를 등사하여 갔다는 <우선봉일기>의 내용으로 보아 일본군이 아닌 일본 신문기자가 장흥의 동학군 토벌을 취재하기 위해 통역을 대동하고 자료를 수집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대판조일신문(大版每日新聞) 2월 9일자와 이륙신보(二六新報) 2월 10일자에 부산수비대의 장흥관련 기사가 실리고, 남소사랑(南小四郞)이 <동학당정토약기>에서 말한 것과 똑같은 장흥의 기사가 대판조일신문(大版朝日新聞) 4월 7일자의 “동학당토벌후기”에 실릴 수 있었던 것이다.

나주 일본군 병원에서 다리까지 절단한 최동자는 결국 살아남지 못하고, 을미년 3월 3일 나주에서 장흥의 이인환, 문공진, 이득춘과 함께 처형된다.

 

8. 마치면서

본고에서는 2차기포 후 장흥농민군이 장흥부의 외곽인 장평면 사창과 흑석장터에서 진을 쳐 장흥부사의 물리적 탄압을 피하면서 장흥의 북진세력과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숙계(宿計)를 진행시켜 11월 21일 구교철의 웅치기포, 11월 25일 이인환의 대흥기포, 11월 말 흥양현 점령, 12월 1일 북진‧현지세력의 사창 집결로 이른바 최후전투의 진영을 갖추어 12월 4일 벽사역 함락, 12월 5일 장흥부 함락, 12월 7일 강진현 함락, 12월 10일 병영성 함락까지 이른바 승리한 전투를 먼저 살펴보았다. 또한 12월 12일부터 17일까지 한일연합군과 최후혈전을 벌이면서 패배한 전루까지를 비교적 상세히 살펴보았다. 이러한 대장정의 과정에서 장흥동학농민혁명의 지도부의 탁월한 지도역량과 장흥동학농민군의 기상과 혁명대의에 충실한 반외세 투쟁을 치열하게 살펴보았다.

본고를 기초할 때는 농민군 5~600명이 은신하여 모두 살아남은 덕도동학농민혁명사도 간략히 언급하려고 했으나 이미 지면이 넘쳐 포기하였다. 덕도동학농민혁명사에 대해 필자는 금년 6월 전남대 호남학연구원과 장흥문화원이 공동 주최하는 프로그램에서 200자 원고지 300매 분량으로 <덕도동학농민혁명小史>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일이 있다. 덕도동학농민혁명사는 내년말쯤 원고지 1,000매가 넘는 대작으로 발표하려고 하려고 하기 때문에 소년사공 윤성도의 활약 등을 본고에서는 크게 언급하지 못한 점을 아쉽게 생각한다.

장흥의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인물, 사건과 장소 등은 강물처럼 넘쳐 나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을 얼마나 알고 있었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묻고 싶다. 지피지기(知彼知己)란 말이 있듯이 장흥의 동학농민혁명의 실체를 바로 알고,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는 몸에 맞는 옷처럼 향후 장흥동학농민혁명 역사콘텐츠가 개발되어야 함에 오늘 이 자리에서는 역사콘텐츠 개발보다는 정확한 1차 사료 인식에 비중을 두었다. 이는 자칫 역사콘텐츠 개발이 사료에 기초하지 않고, 이야깃거리, 흥밋거리에 치중하여 잘못된 가공이 이루진 사례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공주 우금치전투를 방불케 하는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전국에서 가장 극심한 탄압을 당했던 장흥동학농민혁명이 사료부족으로 장흥동학 이야기는 변방에서 우짖는 새소리만도 못하였지만 이제는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가장 방대한 사료를 가진 곳이라고 자부한다. 때문에 역사콘텐츠 개발자원이 너무나 풍부한 곳이다. 자원이 풍부하다고 해서 곧 역사콘텐츠 개발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역사콘텐츠 개발자원은 광물자원에 비교하여 말한다면 먼저 채광이 필요하고, 그 다음은 운반이 필요하며, 이물질을 분류해내는 제련과정을 거쳐 제철을 이루듯이 1차 사료를 숙독하는 것이 바로 채광이라고 본다. 다음은 채광된 사료를 제련 장소로 옮겨 재련을 거쳐 제철을 만들어 내는 작업인데, 이물질을 걸려 내야할 제련과정에서 혹 다른 이물질이 삽입되는 과오가 범해져서는 안 된다는 우려가 앞서는 것은 한갓 기우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나라의 역사콘텐츠 개발이 외형은 과대 포장되고, 내용은 불량가공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하는 말이고, 장흥에서도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 인식(염불)은 뒷전에 두고 이벤트(젯밥)에 치중하려는 경향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장흥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역사‧문화탐방이라는 기행상품 개발에 앞서 유적지의 장소임을 알아볼 수 있는 작은 표지석이라도 먼저 세워놓고, 그러한 것들이 논의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문학, 예술, 역사, 언론 등에서 질 좋은 1차 가공품, 2차 가공품이 생산될 수 있도록 장흥동학농민혁명사에 대한 1차 사료가 충분히 제공되어야 하지만 필자가 쓴 <장흥동학농민혁명 사료총서>만 하더라도 상하권 각각 500부밖에 발행되지 않아 사료제공이라는 측면에서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끝으로 오늘을 계기로 향후 훌륭한 장흥동학농민혁명 역사콘텐츠가 개발되기를 기원하면서 그 몫은 필자에게 주어진 과업이 아니라 여러분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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