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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장녕성 함락(12월 5일)

 

4-5-1. 장녕성 함락전야

12월 3일 농민군이 장흥읍 사방을 에워싸고 기세를 올릴 때부터 부사는 수성(守城)을 위해 전전긍긍했다. 12월 4일 아침에 벽사역이 1,000여명의 농민군에 의해 단숨에 무너지는 모습을 동문의 누대에서 지켜본 부사는 이제 수 만 여명의 농민군이 장녕성을 칠 것을 예상하면 얼굴빛에 혼백이 달아날 만도 했다. 부사가 12월 4일 낮 동안 어떻게 수성에 대비했는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4일 밤의 기록은 또렷하게 전한다.

 

<박후의적>: 이때 밤에 부사는 성을 순시하면서 동문 누각에 이르렀을 때 기실(記室) 박공(朴公: 박영수)도 역시 부사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 나섰다. 적이 사방에 이르러 성을 업신여기며 대포를 쏴 그 소리가 하늘로 높이 솟았다. 통인(通引)과 시종(侍從)이 더불어 청하며 말하기를 “성이 불행하니 가까운 곳에서 잠시 몸을 낮추고 계시라고 했다.” 부사가 말하기를 “일이 급박하게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내가 마땅히 성을 넘어 삶을 도모하기 위해 내 어찌 구차하게 [난리를] 면하려 하겠느냐?”고 하며, 한숨을 쉬며 분개함이 일으켰다. 대개 그 명(命)을 밀어붙여 뜻이 단단함에 이르러 재앙과 환난에도 그 마음을 움직임이 궁색하지 않았다. 만약 지혜가 뛰어나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었겠는가?

<영회단>: 이때 밤에 박부사는 성을 순시하면서 동문 누각에 이르렀을 때 기실(記室)인 박공(朴公: 박영수)도 역시 뒤따라 나섰다. 적도들이 사방으로 이르러 운집하여 대포를 쏴 포성이 하늘로 높이 솟았다. 부사가 수성하는 이민(吏民)을 불러 말하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 묘수가 없는 즉 운명이다. 너희들은 참된 마음의 정성으로 성을 고수하고, 오늘 위험이 닥쳐오더라도 [몸을] 보전하는 것을 바라지 않음이 이와 같음에 이르렀는데 내가 마땅히 성을 넘어 삶을 도모해기 위해 내 어찌 구차하게 [난리를] 면하려 하겠느냐?”고 하면서 한탄하면서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벽사찰방 김일원(金日遠), 강진현감 이규하(李奎夏), 병영병사 서병무(徐丙懋)와는 사뭇 달리 박헌양 부사는 성을 빠져나가지 않고,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농민군의 도강(渡江)을 막기 위해 동문 앞에 있는 탐진강의 죽교(竹橋)를 부수면서까지 수성을 하는 모습자체는 목민관으로서 책임을 다한 훌륭한 모습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12월 3일 농민군이 장흥읍의 사방을 에워싸고 기세를 올린 때부터 장녕성 안으로 많은 부민(府民)이 난을 피해 들어왔다. 그 안에는 벽사역을 거저 내준 벽사역원들도 수성을 한답시고 찰방 김일원을 따라 대거 들어왔다.

4일 벽사역을 단숨에 점령한 농민군은 장녕성을 점령하기 위해 <장흥군향토지>는 “이방언 접주가 거느리고 남하했던 장흥지방 동학군은 유치 빈재와 장평으로 넘어와 관군의 아성인 장녕성을 에워싸고 포진하였다. 용반접은 부산면 “자라번지”에다 500여명으로 포진하였고 웅치접은 “미륵번데기” 곰제산 밑에 1,000여명으로 포진하였으며 어산접은 용산면 묵촌에 1,000여명으로 포진하여 장차 장녕성을 함락할 웅세를 취하였다.”고 전한다. 12월 3일 <영회단>이 전하는 “이방언은 평화 송정등(松亭磴)에 진을 치고, 이인환과 구교철은 건산 후등에 진을 치고, 김방서 등은 벽사 뒤 평원에 진을 치고, 이사경 등은 행원 앞 평원에 진을 치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12월 4일 농민군은 벽사역을 이미 점령하였기 때문에 장녕성을 향한 포위망은 더욱 좁혀 질 수밖에 없다.

벽사역을 점령한 후 장녕성을 치기 위해 사면(四面)에 어떻게 진을 쳤는가를 전한 문헌은 없지만 장녕성의 삼문(三門)인 동문, 남문, 북문으로 더욱 근접했을 것으로 보아 벽사 뒤 평원과 평화 송정등(松亭磴)에 진을 쳤던 상당수의 부대가 남문밖 석대들로 이동했을 것이다. 행원 앞 평원에 진을 쳤던 이사경의 부대는 북문쪽으로 더욱 가까이 진을 옮겼을 것이며, 건산후등에 진을 쳤던 이인환과 구교철은 장흥부사가 부셔놓은 탐진강의 죽교 근처까지 진을 옮겨 포위망을 좁혔을 것이다. 이렇게 포위망을 좁혀놓은 농민군은 수성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4일 밤 수발의 경고 대포를 쏴 하늘을 진동시키고, 부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며, 수성군을 밤에 잠을 자지 못하게 만들어 그야말로 묘수가 없는 운명을 수성군에 안겨 주었다.

 

4-5-2. 장녕성 함락 새벽전투

12월 4일 밤 수성군을 뜬눈으로 보내게 만든 농민군은 5일 새벽에 <장흥군향토지>가 전하는 “죽창 휘두른 소리를 신호로 세 방면에서 총공격을 하였다”가 아니라 전투의 개시는 동문을 지키고 있던 박헌양 부사를 피해 이사경이 지휘하는 북문에서 대포소리를 신호로 시작한다.

<박후의적>은 “새벽에 부사가 다시 문의 누각에 올라 적진을 바라보니 한방의 대포소리가 들린 다음 적들이 곧바로 북문을 넘었고, 나머지 적들은 사면으로 난입하니 온 성안이 불길에 휩싸이었다.”고 전한다. <영회단>은 “새벽에 다시 문의 누각에 올라 적진을 엿볼 때 갑자기 대포 한방의 소리가 울리자 적도들은 북문을 넘어 성내로 난입하여 용솟음치게 움직였다.”고 전한다.

그동안 몇몇 학자들은 <장흥군향토지>에서 전한 “죽창 휘두른 소리를 신호로 세 방면에서 총공격을 하였다. 동문에 진공(進攻)했던 동학군은 성문이 굳게 닫혀 있으므로 수십 명이 거목을 들고 동문을 들이 박쳐 문을 파괴하고 입성하였다. (중략) 동문이 열림과 때를 같이하여 석대군은 남문에 웅치접군은 북문에 입성하여 관아를 불 지르고 아전집 3호외에는 성내가 전부 소각되었다하며 부사 박헌양외 수성장졸이 전사하는 등 피아간에 희생자가 많았다.”의 내용에 따라 장녕성 전투가 농민군이 죽창을 휘두른 소리를 신호로 삼면에서 공격하여 먼저 동문이 열림과 때를 같이해서 남문과 북문으로 입성한 것으로 정리하였다.

그러나 장녕성 함락은 대포소리를 신호로 하여 읍성의 3문 중 이사경의 부대가 북문에서 성을 넘어 북문을 가장 먼저 열고 이어 남문과 동문이 열렸다. 동문을 연 것은 수십 명이 거목을 들고 동문을 들이 박쳐 연 것이 아니라 이 역시 회진 회령진성에서 획득한 대포였다. 여기서 동문 등에 대포를 쏜 대표적인 사람이 문공진(文公辰)이다.

<우선봉일기> 12월 18일조에 보성군수 유원규의 보고에 의하면 “장흥경계인 웅치면에서 문공진(文公辰)을 체포하였습니다. 이놈은 장흥부사가 변을 당할 때 포를 쏜 거괴(巨魁)로써 당장 효수하여 경계할 수 있도록 지시를 내려 제멋대로 할 수 없도록 하여 주십시오. 이에 동 죄인 문공진(文公辰)을 격식에 맞게 감옥에 가두어 놓고 사실의 자초지종을 먼저 보고합니다.”와 지시하기를 “당장 기록을 등사하여 순무영(巡撫營)으로 보고하라. 이 죄인의 허물을 살핀 결과 본군(보성군)에서 장졸과 더불어 민병을 많이 선발하여 나주 주재 일본군 대대본부로 압송하라.”고 했다.

죽음을 각오한 장흥부사의 수성 의지에 힘입어 장녕성의 수성군은 벽사역과는 달리 끝까지 치열하게 저항을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농민군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여 장녕성 안에서 영회당에 위패가 모셔진 96의 수성 장졸 희생자와 많은 부상자를 냈다.

 

4-5-3. 장녕성에서 농민군의 이동

12월 5일 새벽에 장녕성을 함락한 농민군은 아마도 5일 하루 종일을 장녕성에서 보내면서 수성 장졸을 응징하고, 군량미와 군수품을 획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농민군은 6일 아침을 장녕성에서 먹고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 경에 진을 벽사역 뒤 고개로 이동하여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미시(未時: 오후 1시~3시) 경에 사인점(舍人店)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선봉진일기>, <순무사정보첩>, <순무선봉진등록>에서 모두 “[비류들은] 초 6일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 경에 벽사역(碧沙驛)의 뒤 고개에 이동하여 주둔하고, 미시(未時: 오후 1시~3시) 경에 다시 장흥과 강진 병영 접계인 사인점(舍人店) 앞들에 이동하니 병영과의 거리가 10여 리에 불과합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농민군이 6일 아침 벽사역 뒤 고개로 진을 옮긴 이유는 수 만 명의 대군이 계속 장녕성에 주둔하기란 비좁고, 전투과정에서 성문과 성벽이 무너졌기 때문에 벽사 찰방 김일원이 병영으로 구병원을 요청하기 위해 장녕성을 빠져 나간 사실을 파악했을 농민군이 혹 병영군이 진격해 올 때 장녕성에서 병영군을 대적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벽사역 뒤 고개 뒤에는 바로 제암산과 사자산이 있기 때문에 이를 보루로 삼아 혹 닥쳐올지도 모른 병영군을 대비했을 것이다.

병영군의 구원 움직임이 없음을 파악한 농민군은 다시 진을 옮겨도 강진현과 병영성의 중간 지점인 사인점으로 진을 옮겨 두 곳에 상당한 심리적 압박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사인점에서 <순무선봉진등록> 12월 8일조의 병마절도사의 상고 내용처럼 “게다가 좌측 연안에서 정탐을 한 자들에게 들으니 ‘각처의 비류 수 만 명이 막 병영에서 40리 떨어진 장흥의 사창 시장에 진을 치고, 장흥을 함락한 무리와 합세하여 곧바로 본 병영을 도륙하겠다.’라고 하는 흉악한 말을 선전하고 있습니다.”와 같이 장흥전투 승전보를 듣고 사방에서 달려오는 인근의 동학농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4-6. 강진현 함락(12월 7일)

12월 6일 동학농민군은 벽사역 뒤 언덕에서 미시(未時: 오후 1시~3시) 경에 사인점(舍人店)으로 진을 옮겨 강진현과 병영성을 동시에 긴장시키면서 한편으로는 4일 벽사역 함락, 5일 장녕성 전투 등의 피로를 풀면서 장흥전투의 승전보를 듣고 사방에서 달려온 군사들을 맞이하면서 6일 밤을 보냈다. 사인점에 진을 쳐서 병영성을 긴장시켰지만 사인점에서 병영성으로 진격하지 않고 강진현으로 진격한 것은 탁월한 전략이었다.

우선 상대하기가 병영성보다는 강진현이 쉽고, 두 번째 사인점에서 병영성으로 가는 길은 금강천을 따라 양쪽에 협곡이 있어 평원이 좁고, 외길을 따라 많은 농민군이 진군 하기가 매우 비좁아 매복이라도 걸리면 많은 희생을 낼 수밖에 없는 지형적인 조건 때문이었다.

농민군이 7일 꼭두새벽에 강진현으로 출정하여 장흥부보다는 평원에 있고 좁은 강진현을 사방에서 에워싸고 성을 함락하는 시간이 병영성의 병사의 보고(巳時)와 강진현의 현감의 보고(辰時)가 다르지만 아마 늦은 진시(辰時: 오전7시~9시)가 맞을 것이다.

이규태 진영에서 작성한 강진현 함락에 관한 기록은 12월 9일조의 <선봉진일기>, 12월 12일조의 <선무사정보첩>, 12월 초 9일조, 12월 초 10일조, 12월 12일조의 <순무선봉진등록>에 모두 같은 내용이 몇 글자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게 기록되어 있다.

구례의 매천 황현(黃玹)은 <오하기문> 12월 7일조에서 장흥 부산면 출신으로 강진군 보암면으로 이사를 한 오남(吾南) 김한섭(金漢燮)의 순절에 대한 기사를 자세히 적었다. <일사>를 쓴 박기현은 그의 제자이지만 스승을 따르지 않고 숨어 지내면서 <일사>에서 김한섭을 짧게 언급하지만 매천 황현이 멀리 구례에서 남긴 김한섭과 이방언에 대한 중요한 역사자료를 살펴보자.

 

이때 장흥의 적도들은 강진을 함락했다. 의병장 김한섭(金漢燮)이 죽고 그의 제자 김형선(金亨善)도 함께 죽었다. 사인(士人) 김용현(金龍鉉), 좌수 윤종남(尹鍾南), 강진현의 서리 김봉헌(金鳳憲), 황종헌(黃鍾憲)도 함께 총탄에 맞아 죽었다. 적도들이 장흥에서 촌민을 내몰아 전위를 날카롭게 하여 강진성 아래 이르렀을 때 현감(이규하)은 병영과 나주로 구원을 요청하러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성 위에서 연달아 대포를 쏘았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함락을 당했다. 적들이 민가를 모두 불 태워 백에 하나도 남지 않았다. 김한섭은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의 문인으로 호(號)가 오남(吾南)으로 임헌회가 지어 준 것이라고 말한다.

본래 [김한섭은] 이방언과는 함께 [임헌회한테] 동문수업을 했는데, 이방언이 적도에게 물들었다는 소리를 듣고 글을 지어 효유했으나 끝내 듣지 않자 다시 글을 지어 절교를 했다. 또 동학을 경계하는 글을 지어 현인(縣人: 강진현 사람)들을 깨달게 하여 이에 제자 수 십 명을 모아 서문(西門)을 수성하면서 손수 대포에 점화하여 적 10명을 죽었다. 잠시 후 동남문이 먼저 파괴되자 성안에 사람들이 없음을 적들이 알아내고 관리들을 포살하려고 할 때 김한섭이 크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죽음을 맞아 진실로 내 몸을 구별해 보라, 너희들은 나의 의관을 보라 어찌 관리의 옷을 입었겠는가? 나는 김한섭이라고 꾸짖으며 입을 막지 않고 죽었다.

 

<일사>를 통해 1893년부터 장흥․강진의 동학의 현황을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전한 박기현은 벽사역, 장흥부, 강진현, 병영성 함락에 대해 의외로 기록을 많이 남기지 않았다. 병영성에 대한 기사가 그래도 약간 있지만 그것은 그의 사촌형님 도정(都正) 박창현에 대한 기사가 주를 이룬다. 그 이유는 스승 김한섭과는 달리 난을 피해 몸을 숨겼기 때문이다. 스승 김한섭에 대해서는 나중에 <강제유고>에 “제문(祭文) 제오남김선생문(祭吾南金先生文)”이라는 기록을 남긴다. 당시 몸을 숨겼더라도 <일사>에 나타난 많은 사건에 대해 평소 날카롭게 비평하면서 꼼꼼하게 기록했던 그의 정신과는 사뭇 다르다. <일사>에 나타난 강진현 함락 기사는 단 2건뿐이다.

강진현을 함락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현감 이규하(李奎夏)가 구원병 요청을 핑계로 강진현을 빠져 나가 수성군의 사기는 장흥부와는 달리 이미 땅에 떨어졌다. 때문에 장녕성 전투는 새벽에 시작하지만 강진현 전투는 훤한 진시(辰時)와 사시(巳時) 사이의 늦은 진시(辰時) 경에 아마 아침을 먹고 공격을 시작하였을 것이다.

강진현감은 이규태에게 이때 성이 함락되는 패전의 원인을 두 가지로 궁색하게 변명한다.

첫째, “무슨 읍의 운명이 불행한지 안개가 가득하여 아침 해가 뜰 즈음에도 사방이 막혀 지척을 분간하기가 어려웠습니다.”처럼 안개가 가득하여 사방이 막혀 성이 함락되는 비운을 맞은 원인 중의 하나를 안개 탓으로 돌리고 있다.

둘째, 수성을 하는 민간 군사가 “이때 적진에서 포성이 한 번 나자 삽시간에 성을 포위하고 큰 소리로 외치기를 ‘죄 없는 민간 군사는 모두 당장에 성을 나가라. 혹 이속(吏屬) 별포군 등과 섞여 피살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말하자 민간의 군대는 따라서 와해되었습니다.”와 같이 군사가 와해되어 성이 함락되는 원인 중의 하나를 김한섭과 같은 민간 병사가 와해되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그러나 구원병 요청을 핑계로 도망한 강진현감과는 달리 김한섭은 동문수학의 벗인 이방언 장군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베푼 ‘죄 없는 민간 군사는 모두 당장에 성을 나가라. 혹 이속(吏屬), 별포군 등과 섞여 피살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배려를 듣지 않고, 안개로 인해 지척이 분간하기 어려웠어도 그의 제자와 함께 서문(西門)을 수성하면서 와해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였지만 중과부적으로 강진현이 곧장 함락되고 만다.

강진현감의 말을 빌리자면 강진현을 함락시킬 때 농민군은 ‘죄 없는 민간 군사는 모두 당장에 성을 나가라. 혹 이속(吏屬), 별포군 등과 섞여 피살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여 민간의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했다는 노력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강진현을 함락한 농민군은 장녕성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과는 달리 강진현에서 점심을 먹고 곧장 병영성을 향해 이동하여 강진현에 머무른 시간은 4시간 정도로 추정된다.

 

4-7. 병영성 함락(12월 10일)

12월 7일 오전 동안에 모두 강진현 전투시작에서 함락, 수성군에 대한 응징까지를 끝낸 농민군은 강진현에서 점심을 먹고, 빠져나와 또 어느 곳에서 저녁을 먹고 차분히 휴식을 취한 다음 상현달이 기운 야음을 틈타 전라도 육군본부인 병영성을 치기 위해 각처로 이동을 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서병무 병사는 8일 이규태에게 발송하여 10일 도착한 이문(移文)에서 “어제 축시(丑時: 오전 1시~3시)경에 각처에 이동 주둔하여 지금 세 갈래의 길로 병영성을 침범하려 하는데”라고 보고 한다.

8일을 기준으로 하여 어제라고 하면 7일이 되지만 농민군이 강진현을 친 시간이 늦은 진시(辰時: 오전 7~9시)가 되기 때문에 서병무 병사가 강진읍에서 농민군의 이동과 주둔을 어제 축시(丑時)라고 했지만 정확히 말해 8일 축시(丑時)가 된다. 여기서는 그냥 동녘이 트지 않은 한밤이기에 어제라고 표현한 것 같다. 축시(丑時: 오전 1시~3시)경에 각처에 이동 주둔하였다는 것은 될 수 있는 한 농민군이 병영성으로 진격하는 진로와 농민군의 대오를 잘 드려내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이동하여 곧바로 병영성을 공격하지 않고 주둔함으로 병영군에게는 심리전에서 불안감과 초조감을 더해주었던 것이다.

강진현에서 병영성으로 향한 길을 서병무 병사는 농민군이 삼로(三路)를 통해 이동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오하기문>에서는 이인환이 9일 병영성 10리 지점인 작천면 군자촌(君子村)에 진을 쳤다는 기록과 병영성 우후(虞侯) 정규찬이 남관(南關)을 막아야 한다는 기록과 적들은 사로(四路)에서 함께 전진하여 먼저 대처하기 위해 삼봉(三峯)을 점령하였다는 기록 외에는 구체적인 지명이 나오지 않는다.

삼로(三路)든 사로(四路)든 이인환 부대 외에는 농민군의 이동 길목과 한 밤중인 8일 축시(丑時) 이후 8일 온종일의 행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행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는 때는 바로 농민군이 병영성의 사방을 포위하기 위해 부대를 직로(直路), 좌로(左路), 우로(右路)로 나누어 행군을 하고 있을 때로 특히 직로를 제외한 좌로와 우로는 병영성을 향해 에둘러 돌아가기 때문에 무척 먼 거리의 행군이었다. 때문에 8일 축시(丑時) 이후 8일과 9일은 농민군은 행군과 휴식을 번갈아 가면서 병영군에게 불안과 초조감을 안겨주는 심리전을 펴면서 선발대의 중요한 삼봉(三峯) 점령 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농민군이 명색이 전라도의 육군본부인 병영성을 치는 일은 강진현 함락하듯이 쉬운 일이 아니다. 삼문(三門)인 장흥부, 강진현과는 달리 병영성은 동서남북의 사문(四門)으로 되어 있다. 때문에 처음에는 부대를 삼로(三路)로 나누어 출발하였지만 최종적으로는 군사를 넷(四路)으로 나누어야 한다. 하지만 병사가 삼로(三路)를 통해 이동하고 있다고 보고할 때는 추정컨대 당시 강진현에서 병영성을 가는 길이 세로(三路)인데, 가장 빠른 길은 강진현에서 군동면을 거쳐 병영으로 가는 길이 가장 빠른 30리 정도의 직로(直路)로 병영성의 남문 쪽으로 이르는 길이다. 성전면으로 좌회(左回)하여 작천면을 경유하여 가는 길이 좌로(左路)로 병영성 서문 쪽으로 이르는 길이다. 군동면을 거처 우회(右回)하여 장흥 쪽에서 금강천을 끼고 가는 길이 우로(右路)로 병영성 동문 쪽으로 이르는 길이다. 병영성 북문 쪽으로 가는 부대는 좌로(左路)와 우로(右路)를 택한 부대 중에서 맡아야 하는데, 지리적인 여건으로 보아 좌로에서 또 분진하여 북문 쪽으로 향했을 것이다.

매천 황현이 “적들은 사로(四路)에서 함께 전진하여 먼저 대처하기 위해 삼봉(三峯)을 점령하였다”의 상황으로 가게 되면 좌로(左路)로 이동했던 부대를 서문과 북문을 담당하기 위해 부대로 둘로 나눈 상황이 된다. 북문 쪽을 담당하기 위해서 남문과 동문을 담당하는 부대에서 분리할 수가 있는 상황이 아니다. 남문 앞은 들판이기 때문에 이쪽에서 병영성을 좌회(左回)하여 북문으로 가게 되면 쉽게 병영성의 공격을 받을 수 있어 선택하기가 어렵고, 동문 쪽에서 병영성을 우회(右回)하여 북문 쪽으로 가려면 많은 수인산 자락을 넘어야 하는 지리적 악조건이 있다. 그러나 서문 쪽을 담당하는 군자촌의 이인환 부대에서 좌회(左回)하여 삼봉(三峯)의 중의 하나인 옥녀봉(玉女峯)을 점령하기란 식은 죽 먹기이다. 옥녀봉을 점령한 부대는 병영성 함락 때 당연히 북문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병영성 주변 삼봉(三峯)이란 수인산(修仁山: 561m) 자락에 있는 세 봉우리로 옥녀봉(玉女峯: 256m), 성자산(聖子山: 294m), 성락산(星洛山: 274m)을 말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강진에 유배도중에 “수인산 축성에 대한 건의”란 글에서 병영성이 만약 “아침에 포위되면 저녁에 함락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라고 지적하였듯이 병영성의 최대의 약점은 요새에 있지 않고 들판에 있는 것이 큰 문제이다. 병영성의 취약점을 농민군은 사전에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인환이 군자촌에 진을 친 것이 노출된 것이 9일이다. 군자촌은 병영성에서 서쪽으로 약 10리 정도로 그 사이가 모두 논으로 이루어진 들판이기 때문에 쉽게 노출이 되었다. 이인환 부대가 9일 낮 군자촌에서 버티고 있을 때 다른 한 부대도 마찬가지로 병영성 남관(南關) 쪽이 들판이어서 쉽게 노출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두 부대가 버티고 있어 병영성을 움츠리게 하는 동안에 농민군 선발대는 좌회하여 10일에는 삼봉(三峯)을 쉽게 선점하여 대포를 쏘아 수성군을 옴츠리게 하여 병영성 공격의 사로(四路)를 확보한 후 병영성 사문(四門) 아래에 까지 이른 것이다.

농민군이 강진현에서 병영성을 치기 위해 처음 7일 오후에 강진현을 빠져나와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한 다음 상현달이 진 야음을 틈타 8일 축시(丑時: 오전 1~3시)에는 모처로 이동하여 주둔을 한다. 이후 군사를 삼로(三路)로 나눈 후 다시 북문 쪽을 담당하기 위해 9일에는 작천면 군자촌에 이인환이 진을 치고서 다시 분진을 하여 사로(四路)로 나누어 사문(四門)으로 통하는 거점을 확보한 후 병영성 주변 수인산 자락의 삼봉(三峯)인 옥녀봉(玉女峯: 256m), 성자산(聖子山: 294m), 성락산(星洛山: 274m)을 선점하여 유리한 고지를 확보했다.

병영성의 전투가 정확히 몇 시에 시작하였다는 기록은 없지만 <일사> 12월 10일조에 “아침 후에 적이 본영(本營: 병영)을 함락하고 관사와 민가에 방화를 하여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닿았다.”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우선봉일기> 1월 5일조에의 병영성의 보고에 “지난 12월 초 10일 오시(午時: 오전 11~오후1시) 경 동학도가 들어와 본영을 함락시킬 때 세력이 서로 대적이 되지 않아 우후(虞侯)가 손자와 함께 총탄에 맞아 서거하였습니다.”로 보아 아침을 먹고 병영성을 공략하기 시작하여 오시(午時) 경에는 병영성을 농민군이 함락시킨 것으로 보인다.

농민군이 병영성으로 쳐들어오자 병사는 크게 놀라 좁은 소매 옷의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에는 패랭이를 쓰고서 옥로(玉鷺)를 감추며, 인부(印符)를 가슴에 품고서 풀로 얽어맨 생가죽 신발을 신고서 피난민들 속에 뒤섞여 영암으로 도주를 하였다. 병사의 도주로 수성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진 병영성을 향해 농민군은 삼봉(三峯)에서 일제히 많은 포를 쏘며 사문(四門)으로 향해 성곽의 목책을 불사르고 함성을 지르며 성으로 올라 사문(四門)을 열고 들이닥치자 고작 1,000명밖에 되지 않는 수성군은 머리와 꼬리가 서로를 돌보지 못해 일시에 크게 무너졌다.

하지만 병영성은 장흥부, 강진현과는 달리 정규찬, 김두흡, 박창현 등은 끝까지 저항하면서 농민군에게도 상당한 희생을 입혔다. 우후(虞侯) 정규찬(鄭逵贊)은 <승정원일기>에 12월 27일조 의하면 장흥부사 박헌양과 함께 조정에서 휼전을 베풀 것이 논의되어 특별히 군무아문참의(軍務衙門參議)로 추증되었다. 특히 군기 창고를 지키고 있던 깁두흡은 화로를 껴안고 화약 속으로 자맥질하여 화약을 폭발시켜 농민군이 회진의 회령진에서처럼 군수품을 탈취하지 못하게 하여 농민군의 화력을 고갈시키게 만들었다. 농민군의 화력 고갈은 나주로 향하는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지경을 만든 한 원인이 된다.

<일사> 12월 11일조에 “어제 저녁 너의 형이 동학의 무리들에게 잡혀 단단히 죽게 되었다.”로 보아 12월 10일 저녁에도 농민군이 병영성에 있었던 것은 확인된다. 이때 당연히 많은 수성군이 농민군에게 응징을 당했을 것이다.

이때 병영성의 피해는 규장각 소장(문서번호: 17247)의 첩보존안(捷報存案) 1895년 3월 23일조에 “전라도 병영의 첩보에 의하면 본영(병영)이 불에 타 공해(公廨) 284간(間)을 부득불급 개건(改建)하려 하는데, 물력(物力)을 갖추기 어려운 바, 소용되는 비용을 마땅히 계획해 달라는 일”이 기록되어 있다. 병영성에는 284간이 농민군의 병영성 함락 때 불에 탔다고 내각에 보고되었지만 병영성의 민가(民家)도 이때 상당한 재산 피해를 입었음이 <일사> 12월 12일조에 “병영의 민가 가운데 불탄 것이 열에 여덟아홉이나 되었다.”로 보아 확인된다.

서병무 병사는 병영성의 수성군이 장흥의 동학농민군과 대적하면 패배할 줄을 일찍부터 알았던 모양이다. 11월 21일 구교철이 웅치에서 기포한 후 11월 22일 병영성 부대 200여명을 장흥으로 보냈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11월 25일 이인환이 대흥면에서 출정 기포하여 회진의 회령진을 무혈 입성하여 막강한 화력을 갖추었다. <일사>에 의하면 11월 27일 장흥부사의 구원병 요청을 문서로 받은 병사는 마지못해 도총장 윤권중(尹權仲)에게 군사 수 백 명을 내주어 장흥으로 보냈지만 29일 세 명의 동학군 목을 베는 것 외에는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왔다.

서병무 병사는 11월 28일 장흥에 구원병을 보내 군사가 29일 병영으로 돌아온 이후로는 전혀 장흥의 구원요청을 받아드리지 않는다. 병사는 이미 이인환이 대흥면에서 기포한 후 회진의 회령진성에서 병영의 육군보다 화력이 더 월등한 수군의 화력을 확보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장흥농민군과는 대적을 피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병사는 장흥부가 무너진 후 6일 사인점에 농민군이 진을 치자마자 나주 초토영과 이규태에게 “병영과의 거리가 10여 리에 불과합니다. [동학농민군의] 흉특한 큰 소리가 낭자하게 전해져 동에서 공격할듯하다가 서쪽을 공격하여 과연 예측하기가 어려움에 미약한 군사로는 방어할 계책이 없어 위급한 화가 급박하게 닥쳐오니 어찌 급하게 보고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며 구원을 요청했던 것이다.

또한 7일 강진현이 함락 당하자마자 연이어 급보를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였고, 8일에도 농민군이 8일 축시(丑時)에 삼로(三路)로 나누어 병영성을 침범하려 한다면서 급보를 보내면서 장흥부와 강진현이 함락당해 장흥과 강진에서 군대를 동원함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근의 영암군에 구원병을 요청하기도 한다. 병영성이 함락되던 10일에도 농민군이 관군보다 먼저 병영성 아래에 당도하였다면서 이규태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이렇게 병사는 외부로 구원만 요청하면서 내부의 우후(虞侯) 정규찬 등이 건의한 선제공격 등을 거부하고, 성곽주변에 목책을 두른 것으로 수성의 계책을 세운 다음 정작 농민군이 병영성으로 쳐들어오자 영암으로 도망을 간 다음 12월 16일에야 영암에서 병영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병사는 결국 <승정원일기> 12월 27일조에서 확인되듯이 병사(兵使)는 비록 흩어진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성(城)과 해자(垓子)를 회복하였다고 하지만 애초에 [성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완전히 용서할 수 없음을 물어 월봉(越俸) 3등(等)의 벌전을 당한다.

또한 <일사> 12월 29일조에 “들으니 어제 일본군 대장이 나주에서 사람을 시켜 병사를 부르니 병사는 화를 입을까 두려워서 곧 자결코자 하여 이교(吏校)들이 근근이 설명을 구해 오늘 아침 나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을미년 1월 10일 나주에서 돌아오는 모습이 또한 <일사>에 기록되어 있다.

후비보병 19대대장 남소사랑(南小四郞)은 <동학당정토약기>에서 “강진 병사(兵使)의 그 거동이 좀 이상해 그를 나주성으로 소환하여 규문하였더니, 그가 그의 관내를 진무(鎭撫)하지 않은 것은 오직 그가 정신착란을 일으킨 때문이었으며, 다른 이유가 없었음이 명백해 졌으므로 4~5일 체재시켰다가 방면하였다.”고 하여 병사는 나주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신착란증의 모습을 보여 목숨을 부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5. 농민군 병영에서 장흥으로 회군

장흥농민군은 병영성을 함락시켰으니, 본래 계획의 다음 목표는 나주성을 함락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주로 진격하지 못하고 장흥으로 회군을 한다. 나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전라남도의 각지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사전에 계획을 수립했는데 이 계획을 포기한 기사가 <동학당정토약기>에 있다.

 

[동학도가] 드디어 나주를 함락시킬 생각으로 좌측은 영광과 함평 방향으로부터, 중앙은 광주로부터, 우측은 능주 방향으로부터 나주를 포위할 목표를 세우고, 각 부대가 1월 5일(음력: 1894년 12월 10일)을 기해 나주를 함락시킬 예정이었다. 그런데 3일 전 적도는 영암 방향으로 퇴각한 것 같았다.

 

농민군이 병영에서 나주로 진격하지 않고, 장흥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은 아마 12월 11일부터서 시작하여 12일에는 전략회의에 의해 모두 정해진 위치에 주둔한 것 같다. <일사> 12월 12일조에서는 “오후에 지삼(知三)이 와서 말하기를 “지금 경군과 일본군 1백 7~8십 명이 내려오고 있으니, 동학의 무리는 족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즉시 형님과 함께 영중(營中)으로 와서 본 즉 동학의 무리는 이미 모두 도주하고 없었다.”고 했다.

장흥의 현지기록인 <박후의적>, <영회단>, <임태희추기>는 모두 12월 12일 병영에서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회단>에서는 12월 1일조에 “이때 이방언이 급하게 군대를 일으킨 [연유를] 말하기를 ‘장차 나주로 향하고, 강진으로 향하기로 이인환 구교철 등과 더불어 숙계(宿計: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계획)를 이미 도모하였다.’”고 했다. 동학농민혁명이 막바지 패전에 이르렀을 때 장흥에서 기포하였던 본래 계획대로 농민군은 병영에서 나주로 향하지 않고 회군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앞의 <동학당정토약기>에서 말한 “좌측은 영광과 함평 방향으로부터, 중앙은 광주로부터, 우측은 능주 방향으로부터 나주를 포위할 목표를 세우고, 각 부대가 1월 5일(음력: 1894년 12월 10일)을 기해 나주를 함락시킬 예정이었다.”가 있다. 그런데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한 사유를 검토하여 보면 장흥동학농민군 측으로서는 세 가지의 이유 때문에 나주로 진격하지 않고, 장흥으로 회군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12월 2일 전봉준이 순창에서 체포되어 7일 최경선과 함께 일본군에 인계되었다. 삼남도교장(三南都敎長) 이방언 장군이 나주․광주 전투의 패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흥과 긴밀히 연락하여 이인환 구교철과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계획(宿計)에 따라 기포를 할 때는 전봉준 장군과도 충분히 숙계(宿計)가 있었다고 본다. 농민군이 병영에서 회군을 할 때인 12월 12일에는 충분히 그의 체포소식이 이방언 장군에 전달되었을 것이다. 전봉준과 최경선을 잃은 장흥농민군은 나주로 향하려던 계획에 큰 차질을 줄 수밖에 없었다.

둘째: 11월 25일 대흥면에서 출정기포 후 회진의 회령진성에서 많은 무기를 대량으로 확보했던 농민군은 병영성에세도 그러한 군수품을 획득할 것을 계획했을 것이다. 그러나 농민군 입장에서 보면 불행하게도 김두흡이 화약고를 불 지르며 자폭을 하는 바람에 무기획득에 실패하였다.장흥으로 회군하여서도 대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많은 대포를 쏘지 못한 것으로 보아 이때쯤에는 상당히 화력이 고갈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공주전투 이래 연일 패전했던 원인이 화력의 열세임을 잘 아는 장흥농민군이다.

셋째: 12월 10일 일본군이 경군과 함께 나주로 입성한 것을 분명히 알았을 것인데, 전봉준과 최경선도 없고, 화력도 고갈된 상태에서 조일(朝日)연합군을 상대로 요새가 없는 벌판 나주에서 싸운다는 것은 힘든 상황이었다.

때문에 회령진성, 흥양현, 벽사역, 장흥부, 강진현, 병영성을 상대로 6승을 거두었지만 회군하여 장흥부를 사수하면서 필사(必死)의 항전을 펼치는 것이 갑오대의 명분을 살리는 길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6. 한일연합군과 최후전투

6-1. 서론

장흥동학농민군은 12월 12일 오전에는 후비보명(後備步兵) 흑석광정(黑石光正)의 3중대와 유치 조양촌 전투를 벌이고, 오후에는 후비보병 18대대(경성수비대)에서 파견 나온 19대대 본부 소속인 백목성태랑(白木誠太郞) 중위의 부대와 장흥읍 건산에서 전투를 벌임을 시작으로 17일 대흥면 월정리의 최후전투까지 6일간 연일 전투를 지속한다.

2차기포 토벌에 관한 정부문서인 이규태 진영에서 작성한 <선봉진일기>의 진압기록에서 12월 9일 “장성의 각 면에 전령한다” 이후 12월 12일 “군무아문에 보고함”의 병영 이문(移文)외에는 12월 18일까지의 어떠한 기록이 보이지 않고, 곧바로 12월 19일 “해남에 주둔한 통위영 영관과 대관 및 좌우수영에게 전령함”으로 넘어가 중요한 장흥․강진의 동학농민혁명의 최후격전지의 전투상황과 진압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규태 진영의 또 다른 기록인 <순무선봉진등록>에도 12월 12일 1건, 12월 21일조에 교도중대장의 12월 15일 장흥전투의 상황 보고와 통위영중우참령관(統衛營中右參領官) 장용진의 장흥전투 보고 등의 기록이 보이지만 장흥전투의 규모와 비중에 비해 아주 빈약하게 기록되어 있고 날짜가 일본기록과 다르게 출전한다.

이하에서는 장흥동학농민군과 한일연합군과의 최후전투를 날짜에 따라 전투지역별로 기술하고자 하나 이규태 진영의 기록으로는 이러한 기술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본군의 <19대대 숙박표>를 바탕으로 날짜에 따라 전투지역별로 기술하기 때문에 이규태 진영과 일본군 기록에서 차이가 나는 날짜는 일본군의 기록을 따른다.

일본군은 양력 1895년 5월 13일에 후비보병 독립 제19대대장 남소사랑(南小四郞)의 명의로 일본공사에게 보내는 “각지 전투상보 및 동학당정토책 실시보고서 송부의 건”이라는 문서에 아래의 27건과 같은 전투상보 목록을 제출한다.

지명강(至明江)부근, 연산(連山)부근, 승전곡(勝戰谷)부근, 공주(公州)부근, 홍주(洪州)부근, 증약(增若)부근, 석성촌(石城村)부근, 양산(梁山)부근, 공주(公州)부근, 금산(錦山)부근, 농산(農山)부근, 논산(論山)부근, 진안현(鎭安縣)부근, 율곡읍(栗谷邑)부근, 고산현(高山縣)부근, 원평촌(院坪村)부근, 태인(泰仁)부근, 유앵동(有鶯洞)부근, 조양촌(朝陽村)부근, 장흥(長興)부근, 장흥부(長興府), 옥산촌(玉山村)부근, 문암(文岩)부근, 지면촌(知面村)부근, 청련(淸憐)부근, 종곡(鐘谷)부근, 대둔산(大芚山)부근)이다.

전투상보 목록 중에서 유앵동(有鶯洞)부근, 조양촌(朝陽村)부근, 장흥(長興)부근, 장흥부(長興府), 옥산촌(玉山村)부근 5건이 장흥지역의 전투상보이다. 이 27건의 전투상보가 모두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남아 있었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장흥과 관련이 없는 종곡(鍾谷)부근의 전투상보와 대둔산(大芚山)부근 전투상보가 남아 있다. 그 외에는 모두 지명만 전할 뿐이니 참으로 안타깝다. 그나마 지명이 전하기 때문에 그 동안 장흥에서는 장흥전투와 옥산촌 전투 외에는 전투기록이 없었는데, 조양촌 전투, 유앵동 전투, 장흥부근 전투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 천만다행이다.

일본군 <19대대 숙박표>의 후비보병 19대대의 부대 표시에서 支1은 좌측지대로 송목정보(松木正保)가 지휘하는 1중대와 경군의 통위영 부대 일부이다. 支2는 우측지대로 삼미아일(森尾雅一)이 지휘하는 2중대와 교도중대 부대이며, 15일에는 교도중대장이 직접 참전함이 확인된다. 支3은 중로지대로 흑석광정(黑石光正)이 지휘하는 3중대와 경군의 교도중대 일부이고, 그냥 支라고 표시된 것은 또 다른 중로(中路)지대인 탐진강 발원지에서 그 물줄기를 타고 온 백목성태랑(白木誠太郞) 중위가 지휘하는 대대본부 소속의 부대와 경군의 교도중대 일부이다. 이하는 12월 12일부터 12월 17일까지 일본군의 숙박일지를 바탕으로 날짜에 따라 부대이동과 전투지역과 전투상황 등을 서술한다.

 

6-2. 장흥동학농민군과 한일연합군의 분둔(分屯)

이른바 역사에서 말하는 동학농민혁명 최후전투를 양측이 치루기 전에 양측은 어느 곳에다 부대를 나누어 진(分屯)을 쳤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주에서 한일연합군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장흥동학농민군은 병영에서 장흥으로 회군하여 진을 쳤다.

<오하기문>에서는 “적이 퇴각하여 장흥의 모정등(茅亭嶝)에서 진을 치고서”라고 했고, <박후의적>에서는 “12월 12일에 돌아와 본부 남문밖과 건산 모정등(茅亭嶝)에 주둔했다.”라고 했으며, <영회단>에서는 “병영을 함락한 후 12일 돌아와 본부 남문밖과 건산 후등에 진을 쳤다.”고 했다. 이로 보아 장흥읍 남외리(남문밖)와 장흥읍 건산리(모정등)에는 틀림없이 진을 친 것이 확인된다.

병영성에서 장흥으로 회군할 때 수 만 명의 농민군이었는데 남문밖과 모정등 두 곳은 수만 명 이상이 함께 진을 칠 수 있는 환경이 절대 아니므로 일전을 준비하는 태세로써는 너무나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곧 남문밖과 모정등 외에도 진을 친 곳이 있다는 말인데, 한 곳은 김재계 선생이 <갑오년 동학이야기>에서 말한 “이번에 보성, 장흥, 강진, 병영성을 함락하고 다시 남면(용산면) 어산 앞에 와서 머무르고 있는데, 본 읍(장흥읍)으로부터 소식이 오기를 경군과 일본군이 본 읍 남산 봉명대에 머무르고 있다고 한다.”에서 말한 용산면 어산 앞이다. 이곳은 이방언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는 말이다.

장흥농민군이 병영에서 장흥으로 회군할 때 이미 한일연합군이 장흥으로 진격해 옴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단지 남문밖, 모정등, 용산면 어산에만 진을 치고 있었다고 볼 수 없다. 이를 보완해 주는 자료가 일본군의 자료인데, 유치면 조양촌과 부산면 유앵동(유량리)이다.

또한 병영성에서 장흥으로 회군할 때 병영성에는 농민군을 남기지 않고, 대신 강진현 쪽으로 농민군을 보내 진을 쳤음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바로 <동학당정토약기>에 나오는 “3개 지대 중 우측 지대(2중대)는 강진에서 비도와 싸우느라 약간 늦었고, 장흥의 적은 좌측지대와 중로지대가 이들을 소탕하였다. 그러나 강진에서의 격전은 결국 장흥의 적 격퇴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에서 이 전투는 19대대 2중대(중대장: 森尾雅一)가 벌인 전투이다.

이 부대는 12일 병영성으로 들어왔다가 농민군이 전혀 보이지 않자 <일사> 12월 14일조에서 말하는 “병영에 왔던 경군이 어제(13일) 영암으로 돌아갔는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에서 말한 부대로 실제 <19대대 숙박표>에서 2중대는 13일에 영암에 있었고, 14일에는 강진에 있었음이 확인된다. 바로 이 부대와 전투를 한 농민군 부대는 혹 강진을 통해 들어올 한일연합군의 진격루트를 담당한 것으로 강진에도 진을 쳤음이 확인된다. 강진에 진을 친 부대는 일단 강진 출신 농민군일 것으로 본다.

이상으로 문헌을 통해 확인한 병영에서 회군하여 농민군이 진을 쳤던 곳은 장흥읍 남문밖(남외리), 모정등(건산리), 유치면 조양촌(현 유치면 소재지), 부산면 유앵동(유량리), 용산면 어산리, 병영루트가 아닌 강진읍 쪽 루트에 진을 쳤다.

<박후의적>에서는 “이때 소모관 백낙중(伯樂中)이 경군을 이끌고 보성으로부터 와서 황혼 무렵에 곧바로 먼저 모정등의 적을 격파했다.”고 했는데, 보성으로부터 한일연합군이 아직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장흥읍을 중심으로 사방에 진을 쳤던 농민군은 보성 방면에도 이를 대비하는 진을 쳤을 것으로 사료되지만 확인이 되지 않는다. 설령 진을 치지는 않았더라도 최소한 상당명의 척후병은 파견했을 것이다.

반면 한일연합군은 좌측지대인 1중대는 12월 11일~19일까지 능주(綾州)에다 본부의 진을 친다. 이 부대는 동학당 토벌에 투입될 때부터 주로 산악지대인 동로(東路)와 강원도 일대와 거창, 함양, 운봉, 남원 등에서 토벌을 하였기 때문에 산악전에 매우 강한 부대이다. 이러한 산악전에 강한 부대를 능주로 보내 본부의 진을 치게 하여 장흥에서 능주 방면으로 탈출하는 농민군을 토벌하고, 산악을 타고 장평면과 유치면을 드나들면서 장흥읍까지 진출하여 이른바 장흥전투에서 최대의 전공을 올리는 부대이다.

우측지대인 2중대는 12월 12일 병영에 진을 쳤다가 13일에는 영암, 14일에는 강진에서 전투를 벌인 다음 15일에는 장흥으로 들어온다. 17일까지 장흥에 있다가 18일과 19일에는 강진에서 진을 친다.

중로지대인 3중대는 <선봉진일기> 12월 12일조에서 “대위 흑석광정(石黑光正: 3중대장)은 그의 부하 1개 소대와 2개 분대, 교도중대 2개 분대를 거느리고 영암 땅으로 나아가고,”로 되어 있고, 후비보병 <19대대 숙박표> (음)12월 12일에서는 支2 병영, 支2 조양촌(戰鬪)라고 되어 있지만 필자는 “支2 조양촌(戰鬪)”은 “支3 조양촌(戰鬪)”으로 숙박표를 수정하였다.

이외에도 숙박표에서 중로지대인 3중대의 장흥 행적이 잘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아마 조양촌 전투와 관련이 깊은 것 같다. 그러나 분명 후비보병 19대대장 남소사랑(南小四郞)은 <동학당정토약기>에서 “3개 지대 중 우측 지대는 강진에서 비도와 싸우느라 약간 늦었고, 장흥의 적은 좌측지대(1중대)와 중로지대(3중대 및 백목성태랑(白木誠太郞)의 본부소속)가 이들을 소탕하였다.”고 하여 3중대가 장흥읍에 들어온 것은 사실인데 12월 16일까지 支3이 표시되지 않아 어느 곳에 진을 치고 주둔했는지 확인을 할 수 없다.

12일 숙박표에서 지건산(支乾山: 본영내전(本營內戰))으로 표시된 백목성태랑(白木誠太郞)이 지휘하는 본래 18대대 소속으로 19대대에 배속된 부대는 앞에서 대대본부 요원으로 본다고 했다. 이 부대는 13일 장흥에 주둔하고 14일에는 장흥에서 전투를 벌인다. 15일에는 <숙박표>에서 상황이 나타나지 않지만 <순무선봉진등록>의 12월 15일 장흥 상황을 전한 교도중대장 이진호의 “일본군 중위와 상의한 뒤에 통위영의 병사 30명으로 뒷산기슭 주봉에 있는 적들을 막게 하고”에서 그 일본군 중위가 혹 백목성태랑(白木誠太郞)이 아닌가 생각되고, 16일 고읍면에서 전투를 벌임이 확인되어 계속 장흥에 주둔하고 있었다.

 

6-3. 12월 12일 아침 조양촌(朝陽村)전투

장흥농민군은 병영성에서 장흥으로 회군하면서 이미 어느 곳에다 진을 치고 나주에서 장흥으로 진격하는 한일연합군을 막아 낼 것인가를 미리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치면 조양촌은 나주성에서 직선거리로 장흥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나주 세지면 동창을 넘으면 영암군 금정면이고, 이곳을 넘으면 바로 유치면 조양촌(현 조양리․신풍일대)이다. 때문에 영암군에서 유치면으로 넘어오는 경계인 조양촌에 진을 치고 이를 대비하기 위해 아마 병영성에서 다른 부대보다 일찍 길을 떠났을 것으로 보인다.

12월 12일 장흥에서 한일연합군과의 첫 전투는 장흥읍이 아닌 유치면 조양촌에서 이른 아침부터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 토벌대장이 일본 공사에게 제출한 “각지 전투상보 및 동학당정토책 실시보고서 송부의 건”에서 조양촌 전투상보를 제출함으로 보아 단지 행군하는 도중에 몇 십 명을 토벌한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19대대 숙박표>에는 분명히 진을 치고 체류한 곳은 체(滯)로 표시하고, 전투를 한 곳은 전(戰)이라 표시하며, 행군한 곳은 그냥 지명만을 표시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장흥동학농민혁명사에서 유치면 조양촌에서 일본군과 전투가 있었다는 것을 그것도 일본군에 의해 전투상보가 작성될 정도의 전투가 있었다는 것을 말한 학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필자로써는 이를 다루는 것이 매우 조심스런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조양촌(朝陽村) 전투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단서는 다행히 1992년 12월에 간행한 <유치면지> 119~120쪽, 580~581쪽, 591쪽, 611쪽 등에 유치면의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기록을 전하고 있다. <유치면지>를 통해 확인해 보면 유치면 조양촌 일대(조양1구 2구, 신풍1구)가 유치면 동학의 근거지이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었다는 구전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 천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군의 문서인 <19대대 숙박표> 12월 12일에 기재되어 있는 “支2 朝陽(戰)”과 <각지 전투상보 및 동학당정토책 실시보고서 송부의 건>에 기록되어 있는 “朝陽村부근”이라는 두 문건 모두 합해 총 11글자뿐인 장흥농민군과 일본군이 벌인 “조양촌전투”를 보다 더 구체화 할 수 있는 것이 <유치면지>의 동학관련 구전기록이므로 이를 아래에 모두 싣는다.

 

- <유치면지> 119~120쪽의 유치면의 동학농민군 활동: 유치면에서도 동학농민군에 대한 활동이 있었음이 병영에서 살았던 유생 박기현의 <일사>라는 일기에서 보이지만, 동학군들의 깃발이 곳곳에서 나부끼었다고만 기록되어 있고 구체적인 활동상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마을 조사에서 조양 1구 절터골이 동학군의 훈련장이었고, 김생규씨가 동학농민군에 참여했다고 하나 동학농민군의 결말이 실패로 돌아가서인지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유치면과 이웃한 부산 용반리 출신 이사경 접주가 활약한 것이나 동학군의 퇴로가 깊은 산골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보다 자세한 조사를 통하여 유치에서의 동학농민군 활동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동학농민군 최후항전인 석대들 전투에 참여 했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는 사람의 명단이 <장흥군향토지>에 나오는데 이 가운데 2명이 유치면 출신이다. 문찬필(文贊弼)은 유치면 수덕리 출신으로 1895년 1월 24일 45세 나이로 처형당했으나 처형 장소는 불명하며, 문치화(文致化: 혹 문치원(文致元)이라고도 함)는 늑용리 출신으로 역시 1895년 1월 24일 39세의 나이로 벽사역에서 처형당했다. 문찬필과 문치화(원)는 형제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최현식씨의 <갑오동학혁명사>에는 1976년 간행된 <장흥군향토지>의 기록을 인용하여 석대혈전 희생자 명단에 김영서(金永瑞: 46세)와 고영의(高榮義: 45세)도 유치 수덕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1990년 간행의 <장흥군지>에는 관산 출신으로 적고 있으며 각각 1894년 10월 26일, 12월 26일 벽사역에서 처형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장흥동학농민혁명사, 천도교월회보)

또한 <천도교월회보>에는 문남택(文南澤)이 유치출신의 대접주로서 1891년에 동학에 입교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자세한 인적사항이나 활약상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이처럼 유치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접주로서 또는 농민군으로 참여하여 처형까지 당한 사례에서 보듯이 보다 자세한 조사를 한다면 동학과 관련한 내용이 앞으로 보다 많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지리적인 측면에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유치면과 부산면을 잇는 빈재(貧峙)는 비록 작은 고개이긴 하지만 1894년 10월 이래 장흥부의 외곽지대인 흑석장터(장평면 봉림리 흑석마을) 사창(司倉) 등지에서 군세를 강화하던 농민군이 12월초 장흥부를 공격하기 위해 진출할 때 이 고개를 넘어왔다고 전한다. 당시 이 고개는 농민군의 주둔지인 흑석장터와 농민군의 집강소가 설치되었던 자라번지(부산면 용반리~금자리 앞들)를 이어주는 교통로였기 때문에 농민군의 출입이 잦았던 고개임에 틀림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 <유치면지> 580~581쪽의 조양1구 마을의 중요사건: 동학농민혁명 때에 이곳 마을에 거주하였던 경주 김씨 김생규(생몰년 미상, 그의 후손이 반월마을에 거주한다고 함)가 동학대장(?)을 하였다고 하며, 관군이 김생규의 소재를 찾으려고 그의 부인을 붙잡아 마을 앞 정자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고문하였으나 부인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지금의 절터골에 동학군 훈련장이 설치되어 이곳에서 훈련을 하였다고 하지만 그 규모나 이 마을에서 동학군이 참가했던 인물들은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 <유치면지> 591쪽 조양2구 마을의 중요사건: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본 마을에서 총기․탄약 등을 제조하여 지원하였음.

- <유치면지> 611쪽 신풍1구 마을의 중요사건: 갑오동학농민혁명시 의병들이 일본수비대와 경군에게 화승총을 들고 대항했으나, 역부족인지라 문씨 종가집 주변의 산에 숨어 있다가 일본군대가 종가집에서 조식을 하던 중에 기습하여 일본군대의 조총을 빼앗아서 많이 물리쳤으나, 일본군이 홧김에 종가집을 태워버렸다.

 

비록 1992년에 <유치면지>를 발행할 때 목포대학교 인류학과 학생들이 마을의 구전을 채집하면서 얻은 기록이지만 이 구전은 1895년 5월에 일본군이 작성한 기록에 유치면 조양촌에서의 전투가 있었음을 분명히 증명해 주고 있다. 특히 <유치면지>에서 채집한 구전 중 조양1구의 “지금의 절터골에 동학군 훈련장이 설치되어 이곳에서 훈련을 하였다고 하지만 그 규모나 이 마을에서 동학군이 참가했던 인물들은 정확히 파악되지 않다.”와 조양2구의 “동학농민혁명 때 본 마을에서 총기․탄약 등을 제조하여 지원하였음.”으로 보아 유치면의 동학의 근거지는 조양촌 일대임이 확인된다.

특히 <유치면지> 611쪽 신풍1구의 동학기록은 바로 일본군이 말한 조양촌 전투로 이 전투에서 유치면 조양촌에 진을 치고 있던 부대가 역부족으로 비록 패하여 문씨 종가집 주변 산에 숨어 있었으나 일방적으로 패전 당하지 않고, 오히려 기습을 하여 일본군을 조양촌에서 물리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일본군대가 [문씨] 종가집에서 조식을 하던 중에 기습하여 일본군대의 조총을 빼앗아서 많이 물리쳤으나, 일본군이 홧김에 종가집을 태워버렸다.”는 구전으로 보아 조식을 하던 일본군을 기습하여 상당부분 타격을 가한 것이 드러난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그 화풀이로 조식을 먹던 문씨 종가집에 방화를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앞에서 조양촌 전투를 벌인 일본군은 <19대대 숙박표>에서 支2를 필자가 支3으로 고친 것은 앞에서 支2가 동시에 두 번 나올 수 없고, 일본군 작전에서는 항상 支1은 좌로(左路: 東路)를 담당하고, 支2는 우로(右路: 西路)를 담당하며, 支3은 중로(中路)를 담당하기 때문에 이미 좌로와 우로가 분명하기 때문에 支2를 支3으로 고쳤다고 했다. 支1, 支2를 1, 2중대로 보는 것은 남소사랑(南小四郞)이 숙박표 첫 머리에서 분명히 支1 혹은 支2의 숫자는 일본중대를 나타낸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주에서 장흥으로 진격하는 가장 가까운 루트에 있는 중로지대인 支3(3중대)이 <19대대 숙박표>에서 이른바 장흥전투 기간인 12월 13일부터 16일까지 보이지 않고, 17일 대흥면에서 3중대를 支2(2중대)로 합함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3중대에서 유일하게 장흥전투와 관련하여 전투 공훈을 인정받은 사람인 하사관에 해당하는 일등군조 소송직간(小松直幹)의 전투지역 3곳 중 2곳이 장흥(長興)으로 기록되어 있기에 이 부대도 장흥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보이지만 조양촌 전투에서 입은 타격인지는 몰라도 농민군과 상전(相戰)을 벌인 기간에는 마지막 전투인 대흥면 전투에서 2중대로 합하는 작전하였다는 것 외에는 <우선봉일기>에서 12월 25일 이두황군과 합동으로 천관산 수색에 참여한 것 외에는 별다른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곧 중로지대를 담당했던 후비보병 19대대 3중대와 그를 수행한 경군 교도중대 일부 병력은 조양촌에서 아침을 먹다가 농민군에게 기습을 당해 상당한 타격을 입어 곧바로 장흥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부대를 추스르기 위해 일단 영암으로 후퇴한 것으로 사료된다. 이 때문에 이 부대는 조양촌 전투의 전공으로 상훈을 받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또한 조양촌 전투의 후유증으로 이 부대는 부대를 수습하느라 장흥에 일찍 도착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를 못한다.

대신 12일 오후에 맨 먼저 장흥읍으로 들어온 부대는 나주에서 지금의 영암군 금정면 세류리, 쌍효리, 청룡리를 지나 속칭 “암챙이 골짜기”라 부르는 암천계곡을 타고 보림사를 거쳐 장흥읍으로 들어온 백목성태랑(白木誠太郞) 중위가 지휘하는 대대본부 소속 부대가 된다.

조양촌전투에서 일본군 중로지대인 3중대와 그를 수행하는 교도중대 일부 병력과 전투를 벌었어도 처참하게 패전하지는 않고, 기습공격을 하여 일본군에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던 장흥동학농민군은 대부분 유치면 출신을 근간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유치면의 동학농민혁명을 대표하는 인물은 <천도교월회보>에서 1891년 입교한 대접주 문남택(文南澤)일 것으로 의심하지 않는다.

나주에서 일본군이 진격해 들어올 것이 분명한 루트였던 조양촌이란 한 지역을 맡아 일본군 중로지대인 3중대와 대적했던 유치 동학농민군은 기습전을 벌여 타격을 입힐 정도로 막강한 전투력과 인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필자가 가지고 있는 장흥동학농민군 인명 데이터베이스 515명중 유치면 농민군은 단 8명뿐으로 회천면 4명 다음으로 적은 인명록을 확보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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