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웅천현감공 교첩 1매
-원소장처 : 위준환(안항공 12대 종손)
-현소장처 : 방촌유물전시관
※웅천현감공 위정렬(22세 1580~1656) : 제용감판관을 지낸 안항공 위덕후와 공인(恭人) 청주金氏의 둘째 아들이다. 1603년 완도 고금도에서 실시된 무과에서 종제 정철과 함께 급제하였다. 이후 녹도만호(鹿島萬戶)와 비변사낭청(備邊司郎廳)을 거쳐 1626년 도체찰사 오리(梧里) 이원익 부름으로 체부(體府)의 참모로 재임하였다. 조정은 호란 후 남해안 강화를 위해 公을 발탁하고 1636년 9월 웅천현감(熊川縣監)에 임명했다.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해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길에 올랐을 때 오랑캐 후금 군사들에 의해 광주 쌍교(雙橋) 나루를 지키던 경상우도병마절도사 민 영(閔 泳)이 포위되어 전사하고 휘하 부대가 군율을 잃자 公이 앞장서 지휘하여 포위망을 뚫어 웅천현으로 돌아왔다. 인조의 항복으로 병자호란이 끝난 후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여생을 마쳤다.
■웅천현감공 교첩(敎牒) 홍패(紅牌)■
<1603 선조 36년, 무과병과급제자>
敎旨
奉事魏廷烈武科丙科第七百六
十一人及第出身者
萬曆三十一年正月 日[印]
●내용 및 특징
1603년(선조 34) 1월에 奉事 魏廷烈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받은 홍패(紅牌)이다. 위정렬은 무과(武科) 병과(丙科) 第761人으로 급제하였다.
<웅천현감공 묘소, 宜人 영광丁氏 雙兆>
☞ 公에 대한 제향(매년 陰 10. 15일 장천재 뒤 墓前) 시 神位·祝文·笏記에서 ⌜창원진관병마절제도위~~⌟라고 써 봉행(奉行)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진관(鎭管) 조직에 창원(昌原)·함안(咸安)·거제(巨濟)·고성(固城)·칠원(漆原)·진해(鎭海)·웅천(熊川) 등은 김해진(金海鎭)에 속하였다. 昌原鎭管兵馬節制都尉를 ⟶ 金海鎭管兵馬節制都尉로 정정(訂正)함이 타당하다.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는 조선시대 각도 諸鎭의 지휘관인 종6품의 외관 무관직으로, 군수(郡守)·현령(縣令)·현감(縣監)이 겸직하여 웅천현감(熊川縣監) 재임 시 겸직하였다.
☞ 묘갈명(墓碣銘)은 정확한 근수(謹竪)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존재공 타계 후 근수하였음이 추정된다. 김노경(경주人, 1766~1837, 이조판서 등 역임)이 근찬(謹撰)하였다.
☞ 홍패(紅牌) : 국가에서 과거에 급제한 자에게 발급한 급제증서이다. 조선시대에는 홍패의 수여범위가 극히 제한되어 문과·무과의 전시(殿試) 급제자에게만 주었다. 그 양식은 홍색의 종이에 성명과 갑과·을과·병과의 구분 등을 기입하고, 연·월·일의 연 밑에 어보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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