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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기타 분재기(分財記)·준호구(準戶口) 등 10매

 1)분재기

  분재기(分財記)란 : 전통시대에 주로 재산의 주인이 자녀를 비롯한 가족에게 재산(財産)을 분배하여준 기록 文書를 말한다.

                 ■정부인 죽산안씨 분재기■ (1)

죽산안씨 분재기.jpg

         <1616 광해 8년, 정부인 죽산안씨 분재기>

-원소장처 : 판서공파 종택 (위성렬, 호조판서공 13대 종손)

-현소장처 : 방촌유물전시관

 

●내용 및 특징

1616년 10월 24일 호조판서공(諱 德和)의 배(配) 정부인(貞夫人) 죽산安氏(1560~1625)가 자녀들에게 재산을 상속하면서 작성해 준 분재기(分財記)이다. 죽산안씨는 남편이 임종(臨終)할 때 병세가 위독하여 전답(田畓)과 노비(奴婢)를 나누어 주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유서(遺書)를 작성해 두었다. 자식들이 모두 혼인(婚姻)하여 가정(家庭)을 이루었고 자신 또한 연로(年老)하여 전답과 노비를 유서에 따라 나주어 주는 것이라고 분재(分財)의 사유를 언급하였다. 분재 대상은 장자(長子) 정철(廷喆), 차녀(次女), 차자(次子) 정혁(廷赫)이며, 출생 순으로 노비와 전답을 분배하였다.

당시 분재할 때 가옹(家翁)의 동생형(同生兄) 통정대부(通政大夫) 위(魏)와 동성(同姓) 삼촌질(三寸姪) 유학(幼學) 위(魏)가 증인으로 참여하였고, 가옹의 동성 삼촌질 진사(進士) 위(魏)가 분재기를 직접 작성하였다. 재주(財主)인 정부인 安氏는 수결 대신 ‘위덕화처지인 (魏德和妻之印)’이 새겨져 있는 도서(圖書)를 찍었다.

☞ 가옹(家翁) : 집안의 주인(主人) 또는 남편을 칭하는 말임.

☞ 분재할 때 증인으로 참여한 가옹(家翁)의 동생형(同生兄) 통정대부(通政大夫) 위(魏)와 동성(同姓) 삼촌질(三寸姪) 유학(幼學) 위(魏)는 실명(實名)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신원(身元)을 알 수 없다. 분재기를 직접 작성한 자는 "家翁 同姓 三寸姪 進士 魏"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안항공의 장자(長子) 청금공(諱 廷勳, 1578~1662)으로 추정된다.

 

                     ■병조참판공 분재기■ (2)

위정철 분재기.png

위정철 분재기 (2).png

              <1657 효종 8년, 병조참판공 분재기> 

-원소장처 : 판서공파 종택 (위성렬, 호조판서공 13대 종손)

-현소장처 : 방촌유물전시관

 

●내용 및 특징

1657년(효종 8) 7월 21일 병조참판공 魏廷喆이 자녀들에게 재산을 상속하면서 작성해 준 분재기(分財記)이다. 분재 대상은 長子 동전(東峑), 장녀(長女), 차녀(次女), 次子 동잠(東岑), 三子 동성(東星), 四子 동두(東斗), 五子 동윤(東崙) 등으로, 자녀에게 청빈(淸貧)하고 효우(孝友)를 지향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당부하면서 자식들에게 재산을 분배하였다.

사촌형(四寸兄) 성균진사(成均進士) 위(魏)가 증인으로 참여하였고, 삼촌질(三寸姪) 유학(幼學) 위동익(魏東翼)이 분재기를 직접 작성하였다. 재주(財主)인 통정대부(通政大夫) 전 부사(前 府使) 위정철을 비롯하여 증인(證人)과 필집(筆執) 모두 수결(手決)을 기재하였다. 이 문서와 함께 같은 날 숙부인(淑夫人) 진원朴氏에게 남긴 유서(遺書)가 남아 있다.

☞ 본 분재기는 병조참판공이 臨終(1657년 9월 21일) 2개월을 앞두고 작성한 문서다. 증인으로 참석한 四寸兄 성균진사는 청금공(諱 廷勳)을 稱한다. 분재기를 작성한 三寸姪 유학 위동익(1622~1687)은 정양재공(諱 廷赫, 1588~ 1627)의 子이며, 호(號)는 淸友堂이다.

 

                   ■숙부인 박씨 前 유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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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57 효종 8년, 숙부인 박씨 前 유서>

-원소장처 : 판서공파 종택 (위성렬, 호조판서공 13대 종손)

-현소장처 : 방촌유물전시관

 

● 내용 및 특징

1657년 7월 21일에 병조참판공(諱 廷喆)이 후처(後妻) 숙부인(淑夫人) 진원박씨(朴氏)에게 남긴 유서(遺書)이다. 公은 같은 날 자녀에게 재산을 분재하면서 자녀들이 걱정되어 진원박씨(珍原朴氏)에게 유서를 남겼다. 그 내용은 ‘내가 망자처럼 실신한 것은 큰 병에 걸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해서였으니, 아 어쩌면 좋겠는가. 규진(奎辰)이 아홉 살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입학(入學)하지 않았으니 내가 죽은 후에 누가 가르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진실로 염려(念慮)가 된다...해답(海畓) 1석락지(石落只)와 대흥(大興) 면전(綿田) 33두락지(斗落只)를 부인에게 허여(許與)하니, 살아생전에 잘 가지고 있다가 딸자식 가운데 매우 빈궁(貧窮)한 자식에게 사정을 헤아려 임의대로 구분해 주라.’고 하였다.

동성 오촌질(五寸姪) 유학(幼學) 위동명(魏東蓂)이 분재기를 직접 작성하였다. 재주(財主)인 가옹(家翁) 통정대부(通政大夫) 전부사(前府使) 위정철이 착명(着名)과 서압(署押)을 하였고, 필집인(筆執人) 위동명은 착명(着名)만 기재하였다.

☞ 규진(奎辰)은 상원군수공(諱 東峑)의 초명(初名)이다. 9살 때 부친(父親)이신 병조참판공이 임종 후 堂淑 청금공 밑에서 수학(修學)하였음이 상원군수공 묘표략(墓表略)에서 확인된다.

☞ 해답(海畓) 1석락지(石落只)와 대흥(大興) 면전(綿田) 33두락지(斗落只)는 현재 회진면 대리 소재 토지에 해당된다. 본 토지는 직계 후손에게 물려 내려와 판서공 10대 종손 죽암공(諱 啓文, 1865~1951)때 장천문중에 헌재(獻財)하였다. 현 당곡진사공(諱 鯤) 묘소 주변(11,929평)과 판서공(諱 德和) 묘소 주변(7,620평) 일대 林野와 祭位畓 3두락이 해당되며 장천문중으로 등기되어 관리하고 있다.

☞ 본 분재기를 작성한 오촌질(五寸姪) 위동명(魏東蓂)의 생졸년 미상, 호(號)는 觴峯으로 국천공(諱 廷獻, 1570~1643)의 子요, 청계공(諱 德毅, 1540~1613)의 孫子이다.

 

                        ■안씨 분재기■ (4)

안씨 분재기.jpg

               <1692 숙종 18년, 안씨 분재기>

-원소장처 : 위성탁(안항공 13대손)

-현소장처 : 방촌유물전시관

 

●내용 및 특징

1692년(숙종 18) 11월 5일에 죽산安氏가 자녀들에게 재산을 상속하면서 작성해 준 분재기(分財記)이다. 안씨는 일찍이 남편 보헌공(諱 東晛, 1638~1677)이 세상을 떠나 자식들만 의지하고 살았는데 남편이 타계(他界)한 후 3년이 안되어 次子(世璉)가 졸(卒)하고 10여년 후에 장자(長子) 취백당공(諱 世瑚, 1657~1688) 마저 타계하였다. 장자의 자녀들도 조금씩 성장하여 남편이 죽기 전에 자녀들에게 나누어 준 초명문(草明文)과 나중에 자녀들에게 언급한 유언에 따라 약간의 전답(田畓)과 노비(奴婢)를 나누어 준다고 하였다. 분재 대상은 장자 부 박씨(長子 婦 朴氏), 장녀(長女), 차녀(次女)등 이었다. 次子의 경우에는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제위(祭位)를 위하여 별도의 몫을 정해 주었다. 가옹(家翁)의 동성 사촌형과 사촌아우 그리고 安氏의 남동생 등 3명이 증인으로 참여하였고, 가옹의 동성 육촌 동생이 문서를 직접 작성하였다. 증인과 필집 모두 착명(着名) 또는 서압(署押)을 기재하였으며 재주(財主) 안씨는 ‘위??처지인(魏??妻之印)’이라는 내용의 인문이 새겨진 도서(圖書)를 찍었다.

☞ 분재기 작성 시 증인으로 참여한 사촌형과 문서를 작성한 육촌 동생은 실명(實名)이 기록되지 않아 신원(身元)을 알 수 없다.

 

                    ■숙부인 류씨 분재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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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6 숙종 42년, 숙부인 류씨 분재기>

-원소장처 : 판서공파 종택 (위성렬, 호조판서공 13대 종손)

-현소장처 : 방촌유물전시관

 

● 내용 및 특징

1716년(숙종 42) 3월 5일 상원군수공(諱 東峑)의 배(配) 숙부인(淑夫人) 문화柳氏가 자녀들에게 재산을 상속하면서 작성해 준 분재기(分財記)이다.

숙부인 문화柳氏는 ‘남편이 불행히도 먼저 세상을 떠났고 나 또한 연로(年老)하다. 가세(家勢)는 점점 기울고 너희들은 추위와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니 한탄스럽구나. 약간의 전민(田民)을 너희들에게 나누어 주되, 적은 수의 전민을 적서(嫡庶)에 따라 구분하니, 三子 세옥(世鈺)의 생계가 더욱 어려울 것이다. 남편이 생전(生前)에 남긴 뜻이 이와 같으므로 모든 재산(財産)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라고 분재의 사유를 서문(書文)에 밝히고 있다.

분재 대상은 승중자(承重子) 귤우헌공(諱 世璜, 1673~1734), 차자(次子) 송와공(諱 世琦, 1675~1747), 삼자(三子) 간암공(諱 世玉, 1689~1766), 여서(女婿) 김후(金垕)등으로 자녀에게 재산을 분재하였다. 내덕답(來德畓, 현 회진면 대리) 5두락지(斗落只), 전(田) 5두락지 등은 長子 世璜이 차지하고, 남편의 죽은 형님의 제위조(祭位條)는 次子 世琦가 차지하여 제사를 이어 가도록 하라는 내용이 문서 말미에 추가로 기재되어 있다. 가옹(家翁)의 동성 오촌 조카 수우옹공(諱 世稷, 1655~1721)과 동성 칠촌 조카 춘담공(諱 世璘, 1673~1741)이 증인으로 참여하였고, 동성 칠촌 조카 군옥공(諱 世潤, ~1724)이 문서를 직접 작성하였다. 증인(證人)과 필집(筆執)은 착명(着名)을 기재하였고 재주(財主)인 숙부인 류씨는 ‘위동전처지인(魏東峑妻之印)’이라는 인문이 새겨진 도서(圖書)를 찍었다.

☞ 승중자(承重子) : 돌아가신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제사를 받드는 사람.

☞ 제위조(祭位條) : 직계 선조의 봉사를 위한 토지와 노비들을 말한다.

                          

                   ■귤우헌공 분재기■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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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32 영조 8년, 귤우헌공 분재기>

-원소장처 : 판서공파 종택 (위성렬, 호조판서공 13대 종손)

-현소장처 : 방촌유물전시관

 

●내용 및 특징

1732년(영조 8) 11월 3일 귤우헌공(諱 世璜)이 두 아들에게 재산을 상속하면서 작성해 준 분재기(分財記)이다. 서문(書文)에 따르면 ‘우리 집안의 재산(財産)은 승중자(承重子)를 제외하면 그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비록 여러 자녀 등이 있더라도 원래부터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나누어 줄 데가 없었다. 약간의 전답을 너희 두 아들에게만 분재하니 내 뜻을 준수하여 영구히 어기지 말아야 한다. 다만, 서장녀(庶長女) 김덕현(金德鉉)의 경우에는 내가 예전에 빌려 쓴 방마전(放馬錢) 40냥을 가정원(柯亭員) 부답(浮畓) 6두락 내 하변(下邊) 3두락으로 대신하여 빚을 갚으니 너희들은 이대로 시행하라.’라고 하여 재산이 넉넉하지 못하여 적자인 두 아들에게만 약간의 土地와 田畓을 나누어 준다고 분재하는 사유를 언급하였다. 분재 대상은 장자(長子) 국빈공(諱 命觀, 1710~1762), 차자(次子) 명갑(命甲), 서장녀(庶長女) 김덕현(金德鉉) 등이다.

동성 8촌동생 유학 춘담공(諱 世璘, 1673~1741)과 동성 7촌 조카 유학 잉여옹공(諱 命德, 1683~1756)이 증인으로 참여하였고, 동생 통덕랑(通德郞) 송와공(諱 世琦, 1675~1747)이 문서를 직접 작성하였다. 재주(財主)를 비롯하여 증인과 필집이 착명(着名) 또는 서압(署押)을 기재하였다. 문서 뒷면에는 1745년(영조 21)에 장흥부(長興府)에서 작성한 배탈입안(背脫立案)이 기재되어 있다.

☞ 귤우헌공의 차자인 命甲은 족보 면주에 명조(命肇,1713~1746), 호(號)는 의의헌(猗猗軒)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命甲은 이명(異名)으로 판단된다.

☞ 귤우헌공의 배(配)는 공인(恭人) 완산柳氏, 공인(恭人) 인천李氏이다. 서장녀(庶長女)는 인천李氏 소생 딸이며 金德鉉은 사위(婿)이다.

☞ 배탈입안(背脫立案) : 땅의 일부분(一部分)을 팔아 넘길 때 그 사유(事由)를 땅문서(文書) 뒤에 써넣어 관아에서 사실을 인증(認證)한 서면(書面)을 말한다. 요즘의 법원 등기제도라 할 수 있다.

 

2)준호구

 준호구(準戶口)란 : 관청(官廳)에서 개인의 호적 사항을 증명해 준 문서이다. 오늘날의 호적등본(戶籍騰本)에 해당하며 개인이 호적에 실릴 내용을 작성해 관에 올리는 호구단자(戶口單子)에 대비된다. 이 문서는 소송(訴訟)을 걸거나 새로운 호적(戶籍)을 만들 때, 과거(科擧)에 응시할 때, 직역(職域)을 확인할 때, 도망간 노비를 잡아올 때 등 여러 경우에 신청하여 발급(發給)받았다. 조선시대의 준호구 양식은 《經國大典》 <禮典>에 규정된 것이 1890년대까지 사용되었다. 중국 연호로 따진 발급날짜를 먼저 밝히고 '본 관서는 몇 년에 작성된 호구 장적을 살핌. 어느 어느 곳에 사는 어떤 직역(職域)의 누구, 나이 및 本貫, 부·조부·증조부·외조 등 사조(四祖)의 관직·직역과 이름, 처의 성씨와 나이 및 本貫, 처의 사조(四祖)의 이름 및 관직·직역·모(母)·동생·자녀·자부·사위 등 동거 식구의 이름과 나이, 노비(奴婢)·고공(雇工)의 이름 및 나이와 그 부모 이름을 대조해 발급하는 것, 발급 관서, 책임자, 담당자'라는 내용을 한문으로 기재한 후 여러 개의 관서인(官署印)을 찍고 해당 관인들이 수결(手決)을 놓았다. 수정한 곳이 있으면 말미에 밝혔다.

 

                      ■위동전 준호구■ (1)

위동전 준호구.jpg

             <1705 숙종 31년, 위동전 준호구>

-원소장처 : 위광량 (판서공 11대손, 장흥군 대덕읍 초당 거주)

-현소장처 : 방촌유물전시관

 

●내용 및 특징

1705년(숙종 31) 4월 漢城府에서 西部 養生坊 西小門內契 제31통 제4호에 거주하는 長興魏氏 魏東峑과 그의 가족에 대한 인적사항을 호적대장에서 등사하여 위동전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문서이다.

호주 위동전의 본관은 長興이고, 직역(職域)은 通訓大夫前行祥原郡守이며, 己丑年(1649)生이다. 준호구를 발급받을 당시의 나이는 57세이다. 가족으로는 부인 羅召史(45세)와 아들 魏世琳(17세), 魏世瓘(5세)이 있다. 위동전의 외가는 珍原朴氏이다. 四祖의 직역을 살펴보면 아버지(위정철)는 通政大夫行永興大都護府使兼南道防禦使, 祖(위덕화)는 贈資憲大夫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總莩摠管行通訓大夫彦陽縣監慶州鎭管兵馬同僉節蹄尉, 曾祖(위 곤)는 成均進士, 外祖는 禦侮將軍行龍驤衛副司果이다. 소유노비는 奴 3구, 婢 6구가 있는데 이 중 婢 2구는 도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원군수공이 살았던 서소문 내계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동 일대이다.

☞ 세림(世琳)의 나이는 17세.. 당시(1705년) 1705-16=1689이다. 1689년은 간암공(諱 世鈺) 태생 연도로 世琳은 간암공의 이명(異名)이다. 세관(世瓘)은 족보 면주에 없어 유년기에 졸(卒)하였다고 추정된다.

 

                 ■진도군수 위동전 준호구■ (2)

진도군수 위동전 준호구.jpg

      <1708 숙종 34년, 진도군수 위동전 준호구>

-원소장처 : 판서공파 종택 (위성렬, 호조판서공 13대 종손)

-현소장처 : 방촌유물전시관

 

● 내용 및 특징

1708년(숙종 34) 長興府에서 古邑 傍村里 제6통 제4호에서 거주하는 通訓大夫行珍島郡守長興鎭管兵馬同僉節制使 魏東峑에게 호적대장을 등사하여 발급한 준호구이다.

호주 위동전의 본관은 長興이고, 직역은 通訓大夫行珍島郡守長興鎭管兵馬同僉節制使이며, 己丑年(1649년)생이다. 준호구를 발급받을 당시의 나이는 60세이다. 가족으로는 부인 문화柳氏(64세)와 아들 通德郞 魏世鼎(36세, 1673년생), 通德郞 魏世琦(34세, 1675년생)이다. 위동전의 외가(外家)는 진원朴氏이고, 부인의 외가(外家)는 함평李氏이다. 사조(四祖)의 직역(職域)을 살펴보면 父(위정철)는 通政大夫行永興大都護府使兼南道防禦使이고, 祖(위덕화)는 贈資憲大夫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總莩摠管行通訓大夫彦陽縣監慶州鎭管僉節蹄尉), 曾祖(위 곤)는 成均進士, 外祖는 禦侮將軍行龍驤衛副司果이다. 부인의 사조(四祖)는 부(父)와 외조(外祖)는 學生이고, 조(祖)는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증조(增祖)는 贈通政大夫工曹參議이다. 소유노비는 奴 28口, 婢 25口가 있는데 이중 비 21구, 노 21구는 도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동전이 살았던 고읍 방촌리는 지금의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이다.

☞ 위세정(魏世鼎)은 귤우헌공(諱 世璜)의 이명(異名)이다.

 

                      ■위세정 준호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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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0 경종 1년, 위세정 준호구>

-원소장처 : 판서공파 종택 (위성렬, 호조판서공 13대 종손)

-현소장처 : 방촌유물전시관

 

● 내용 및 특징

1720년(경종 1)에 長興府에서 古邑面 傍村里 제9통 제4호에 사는 通德郞 魏世鼎에게 庚子年의 호적대장을 등사하여 발급한 준호구이다.

호주 위세정의 본관은 長興이고, 직역은 通德郞이며, 癸丑年(1673)생이다. 족보에는 魏世璜으로 기재되었다. 준호구를 발급받을 당시의 나이는 48세이다. 가족으로는 부인 완산柳氏는 사망하였고, 동생 魏世琦(46세), 동생 魏世鈺(32세)이 있다. 위동전의 외가(外家)는 진원朴氏이다. 四祖의 직역을 살펴보면 父(위동전)는 通政大夫行祥原郡守成川鎭管兵馬僉節制使이고, 祖(위정철)는 通政大夫行永興大都護府使兼南道防禦使, 曾祖(위덕화)는 贈資憲大夫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總莩摠管行通訓大夫彦陽縣監慶州鎭管僉節蹄尉, 外祖는 學生이다. 소유노비는 奴가 32口, 婢가 23口가 있는데 이중 비 19구, 노 21구는 도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세정이 살았던 고읍면 방촌리는 지금의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이다.

☞ 상원군수공(諱 東峑)의 配는 숙부인 문화柳氏, 숙부인 금성羅氏, 숙부인 남양洪氏이다. 이 중 公과 柳氏 사이에서 귤우헌공(諱 世璜), 송와공(諱 世琦)을 두었고, 금성羅氏 사이에서 간암공(諱 世鈺)을 두었으며, 남양洪氏 사이에서 諱 世仁公(1692~ ?)을 두었다. 본 준호구에서 世仁公은 언급되지 않은 것은 당시 주거지가 "개도(蓋島)"였다. 개도는 현 여수시 화정면에 소속된 비교적 큰 유인도이다. 후손 재춘(31세, 여상목재 대표, 前 여수시 상공회의소 회장)등이 여수시 내에서 주로 거주하고 있다. -끝-

 

 

 

 

번호 제목 조회 수
공지 성씨순위 및 장흥위씨 지역별 분포 내역 [1] 1707
공지 회주사 사호 개칭 경위 [1] 471
69 8.웅천현감공(諱 廷烈) 교첩 1매 / 栢江 위성록 file 265
68 9.병조참판공(諱 廷喆) 교첩 4매, 교지 24매, 유서 3매 / 栢江 위성록 file 1266
67 10.문화현령공(諱 山寶) 교첩 3매, 교지 5매 / 栢江 위성록 file 333
66 11.상원군수공(諱 東峑) 교지 8매 / 栢江 위성록 file 261
65 12.귤우헌공(諱 世璜) 교첩 1매 / 栢江 위성록 file 198
64 13.송와공(諱 世琦) 교첩 1매 / 栢江 위성록 file 207
63 14.삼수군수공(諱 天會) 교지 9매 / 栢江 위성록 file 306
62 15.보성군수공(諱 赫萬) 교지 2매, 전령 1매, 유서 1매 / 栢江 위성록 file 313
61 16.절충장군공(諱 壽徵) 교지 2매 / 栢江 위성록 file 461
60 17.존재공(諱 伯珪) 교첩 8매 / 栢江 위성록 file 239
59 18.서계공(諱 伯純) 교첩 1매 / 栢江 위성록 file 123
58 19.운수공(諱 啓忠) 교지 3매, 교첩 1매 / 栢江 위성록 [1] file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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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보성군수공(諱 赫萬) 재고증과 직계 후손 300년 제주도 거주 사실 / 栢江 위성록 [1] file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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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奇正鎭(1798~1879)의 제자 / 圓山 위정철 371
51 崔益鉉(1833~1906), 宋秉璿(1836~1905), 田愚(1841~1922)의 제자 /圓山 위정철 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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