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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탐방기

대덕 草堂에 둥지 튼 靑鶴의 꿈

장흥군 대덕읍 신월리 초당마을. 관산(冠山)과 대덕(大德)은 호남의 5대명산 중의 하나인 천관산(天冠山) 앞 뒤쪽에 있다. 자신의 위치에 따라 두 지역은 앞도 되고 뒤도 된다. 여기다 보는 입장에 따라 앞산도 되고, 뒷산도 된다. 산 하나를 놓고 서로의 위치가 극명하게 바뀌는 고장이다.


초당은 대덕읍 소재지에서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천관산의 위용과 툭 터진 바다가 사람의 마음을 시원스럽게 한다. 접근하는데 두 코스가 있다. 하나는 장흥읍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자울재를 넘어 용산과 관산을 거치는 코스와 강진에서 칠량과 마량을 거쳐 닿는 코스가 있다.


이곳에 둥지를 튼 주인공은 간암공(艮庵公) 휘 세옥(世鈺)이다. 남해군수공의 3남인 그는 1689년 서울 주자동에서 출생했다. 공의 어머니는 푸른 학이 가슴으로 날아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그를 낳다. 태몽 때문인가. 공의 얼굴은 너무 희어서 푸른빛이 날 정도로 준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공은 서울에서 당대의 수재들과 공부했다. 나중에 우의정을 지낸 민응수(閔應洙)·좌우참판을 지낸 이재(李縡)·세자를 가르치는 석학 윤봉구(尹鳳九)·민대헌(閔大憲)·윤참판 등이 동문수학한 친구이거나 선후배간이다. 이들의 면면은 단순한 학생이 아니다. 거의 고관들의 자제들이다.


남달리 총명했지만 출사를 포기했다. 1713년(癸巳)에 아버지를 여위고, 얼마 지나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하향을 결심한다. 1721년(辛丑)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방촌에서 살았다. 백면서생의 농촌생활은 고달팠다. 공은 문중 일과 장천재에서 글을 읽고 시를 짓는 것으로 소일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은 농촌을 모르는 백면서생이다. 처자식(아들 3형제)과 먹고 살기가 퍽 어려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마 그런 환경이 방촌을 떠나 초당으로 이거한 주된 동기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곳에서 약초재배 등 소위 특용작물을 재배했지만 형편이 나아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공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 인생의 절반인 33년간 살았다. 평생 농사일을 해보지 않고 살았다. 농토를 일구고, 책에 기록된 대로 약초를 재배해보지만 분명 뜻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들들 또한 서울생활에 익숙해서 시골생활에 적응하기 어렵기는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삶의 환경을 더욱 나빠 갔다. 1728년에는 이린좌(李鱗左)의 반란이 일어나고, 1730년대는 남해안 일대에 가뭄으로 인한 흉년으로 아사자가 속출했다. 해변백성의 참상을 보다 못해 장문의 가사문학 형태의 임계탄(壬癸歎)과 상소문(上疏文)을 작성해서 왕에게 올린다.


그렇다면 임계탄과 상소문은 어디서 작성했을까? 임계탄의 작성연대가 1732·3년이며, 상소문을 올린 시기는 1734년임을 감안하면 장천재나 초당 중 한곳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상소문의 경우 자신의 생사가 걸린 문제이기에 차분한 마음으로 임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상소문에 나타난 농촌의 실상을 보자. “농사를 지어도 삼동(三冬)이 못돼 항아리가 비고 맙니다. 집에도 먹을 것이 없고 밖에도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배 짜는 소리도 멈췄습니다. 개간한 밭을 가리키며 스스로를 원망하며 배를 움켜쥐고 죽고자 하는 이도 있습니다”고 실상을 전하고 있다.

 

간암집.jpg


초당에 공의 서재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 저수지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방 오른쪽 천관산 기슭에 있는 당신의 유택부근인지 아니면 반대편인지 알 수 없다. 간암공의 학문적 관심은 매우 넓었다. 사서(四書)는 물론 역경(易經) 괘(卦)의 변역(變易)의 묘리 등에 이르기까지 망라했다.


그러나 간암공의 초당거주를 믿지 못한 견해도 있다. 즉 공이 돌아가실 때 작성된 부의록에는 방촌출신조문객이 많다는 점을 들고 있다. 초당은 당시의 여건으로 오가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재공이 5개월간 시마복(緦麻服)을 입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초당은 아니라고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초당을 개척한 주인공은 간암공의 손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즉 공의 둘째 아들인 휘 백화(伯華)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한다. 그의 동생 휘 백의(伯毅)도 안정된 생활을 못했던 흔적이 많다. 손자 휘 도윤(道潤)은 안양 등을 거쳐 30세 후손은 전북 김제로 이사해서 살고 있다.


초당에는 지금도 공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한 때는 10여 가구 정도가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계자(啓字) 항렬이 많다. 이는 후손이 그리 번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간암공의 작품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그의 저작인 상소문은 족보에도 누락되어 있다.


더구나 임계탄은 학자들이 발견한 이후 저자불명으로 치부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엉뚱한 인물을 저자로 추정하기까지 하고 있다. 없는 것도 만들어 조상을 빛내려 하는데 있는 작품도 빛을 못 내고 있으니 답답하지 않는가? 이는 직계후손을 넘어 문중차원에서 생각해봐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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