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시 율촌면 봉두리에는 장흥 위씨들이 400년 이상 살고 있는 고장이다. 마을로 가는 코스는 역시 산수리처럼 순천에서 여수로 가다 상봉표지판 앞에서 왼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여기서 2㎞쯤 가면 면소재지와 산수리를 거쳐 작은 재를 넘으면 오른쪽에 봉두리가 자리 잡고 있다.
봉두는 앵무산(鸚鵡山) 동쪽에 있다. 봉황새의 머리에 해당되는 지형이라서 봉두라는 마을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앞에는 광양만이 드넓게 펼쳐지고 뒤에는 앵무산이 우뚝 솟아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답다. 그래서 청우(聽雨)는 봉만(峰巒)이 기려(綺麗)하고 풍수가 유호(攸好)하다 했다.
위씨와 봉두와의 연연도 퍽이나 기이하다. 거의 모든 세거지가 남자들에 의해 개척되지만 여기는 부인에 의해 이루어진다. 즉 임진왜란 때 영장공(營將公) 휘 대경(大經, 1555~1623?)은 원래 1575년(乙亥) 20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원주판관으로 재직하다 무슨 이유로 하향했다.
그런데 왜란이 발발한 것이다. 괴봉공(魁峯公)은 친조카와 4촌 6촌 동생들에게 의병으로 참여토록 권유했다. 그는 형의 권유에 따라 참전, 이순신 휘하에서 옥포, 적진, 당항포 등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다. 다시 황진병사의 휘하로 경상도 웅치와 이치전투에서 전사 또는 부상을 입고 귀향한다.
공의 전공 사실은 박충간(朴忠侃) 병조판서에 알려졌다. 조정은 그의 전공을 감안, 상주영장(尙州營將)에 제수됐다고 대동보 면주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율촌면지(1999년 간행)에는 공이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적혀있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는 모르나 두 가지 케이스를 가정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 1592년에 발발했으니 공이 참전할 때의 나이는 38세가 된다. 참전해서 옥포, 적진, 당항포해전에 참여하고 다시 웅치(熊峙)와 이현(梨峴)전투에 참전해서 전사 또는 부상을 입었다면 40세 이전에 별세한 것이다. 족보의 졸년은 1623년이니 우리식의 나이로 69세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심쩍은 문제가 있다. 만일 공이 전투에서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전쟁 후에 가족들과 왜 다시 결합하지 않았느냐는 모순을 극복하기 어렵다. 그리고 상주영장은 추증벼슬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결국 공은 이치전투에서 전사했거나 부상 후에 별세하여 고향 평화의 선영에 묻혔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쨌든 공의 부인 전주 최씨는 외아들 효징(孝徵)을 데리고 길을 가다 봉두에 머문다. 언제 어디서 혼인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여러 사정을 감안하면 수군(水軍)시절 참전지역인 거제도에서 살다 남편이 육군으로 배속되면서 배를 이용, 고향으로 가다 기착한 곳이 아닌가 여겨진다.
최씨 부인은 봉두에 기착한 후 그대로 눌러 살았다. 아들이 성장하자 그동안 도움을 준 김명운(金命韻)이 자신의 딸과 혼인시키면서 봉두의 위씨는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한 때 100가구까지 집성촌을 이룬 위씨는 지금도 50가구에 이룰 만큼 마을을 지배하고 있는 씨족이다.
마을은 온통 위씨 천지다. 한집 건너 위씨가 아니고 위씨 문패가 집집마다 붙여있다. 이곳 봉두 위씨 종손댁은 16대가 혈손으로 이어지고 있다. 자손도 번성해서 거의 관북 위씨 같이 37, 8세가 더러 있다. 인물도 나오고 이름난 부자는 아니지만 재력도 든든한 게 봉두 위씨이다.
봉두 위씨의 힘은 재각의 규모에서 나타나고 있다. 대부분의 재각은 크다고 해야 4~5칸이 고작이다. 그러나 이곳 영장공파 재각은 무려 9칸에 이르고 있다. 보통의 갑절크기다. 재각은 1928년에 완성됐다. 평소 재각 하나 장만하기를 소원했던 일가들이 추렴해서 대역사를 이룬 것이다.
봉두 위씨와 관련된 희한한 일화가 있다. 묘소의 벌 앞에 예부터 큰 남수(柟樹)가 있었다. 그 나무가 어느 해 풍우로 넘어지자 마을 사람들이 땔감을 하기 위해 일부 살아있는 가지까지 베어갔다. 하지만 아름드리 밑 둥은 어찌할 수 없으니까 낫질도 도끼질도 못하고 방치했다.
그러자 그 밑 둥에서 새싹이 돋아났다. 자라고 자라서 이젠 아름드리나무로 성장했다. 당시 새싹이 무럭무럭 자라자 주민들은 “위씨가 크게 일어날 징조”라고 회자됐었다고 한다. 이를 반증하듯 위씨는 율촌 일대는 여수일원에서 산수와 함께 품격을 갖춘 성씨로 평가받고 있다.
주민들의 예측은 적중했다. 무너진 나무의 밑 둥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그 시점부터 봉두의 위씨들은 매사가 잘 풀렸다. 인물도 나고 재산도 불어 말하자면 안 되는 일이 없었다. 봉의 머리에서 나온 지복(地福)인지 아니면 배산인 앵무새의 산에서 일어나는 흥기가 겹친 결과처럼 보였다.
봉두 위씨 의 또 다른 장점은 종씨에게 성의를 다한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그곳에 사는 일가들은 어쩌나 그곳을 찾는 위씨를 보면 정말 다정다감하게 맞아 준다. 초면에도 불구하고 먹여서 보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면 진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