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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탐방기

山水에 반해 정착한 山水마을

 

 

여수시 율촌면 산수리는 장흥 위씨가 자작일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순천에서 여수방향으로 12, 3㎞를 가다보면 ‘상봉입구’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 율촌면(栗村面) 소재지를 거쳐 2㎞지점에 장흥 위씨가 모여 사는 산수마을에 다다르게 된다.


산수마을은 4개 부락으로 취락을 이루고 있다. 부채살 모양의 지형에 따라 왼쪽은 행정(杏亭), 가운데는 평려(平呂)와 금산, 오른쪽은 수전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 부락 중 평려에 30가구, 금산에 2가구, 수전(水田)에 30가구 등 60여 가구의 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다.


율촌에 가면 장흥 위씨가 희성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면사무소나 마을 이장은 물론 농협, 수협 등 기관에 고루 위씨가 근무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산수와 봉두(鳳頭)에 거의 120여 가구의 일가들이 사니까 주민들이 위씨라는 성씨를 모른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위씨와 이곳 산수와의 인연은 멀리 조선초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관산파의 파조인 16세 휘 자량(自良)의 둘째 아들 종사랑공(從仕郞公) 휘 종로(宗魯)의 외아들 휘 용(庸)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사촌형제인 휘 유형(由亨),휘 유정(由貞) 등과 함께 장흥읍 평화에서 살고 있었다.


이들 중 습독공(習讀公) 유형은 집안의 전통에 따라 출사를 포기했다. 그러면서도 두 아우에게는 출사를 권유, 모두 진사시험에 합격하게 한다. 그러나 유정과 용은 시험에는 합격했지만 고조(高祖)인 판사공의 고려조정회복기도사건이 짐이 돼서 출사를 포기하고 살기로 작정했다.


조선 세조(世祖) 때의 어느 날이다.(율촌 면지(面誌)는 단종(端宗) 때로 본다) 어쨌든 용은 무슨 일로 여수(麗水)를 다니러 갔다. 당시 여수를 오가는 길이 율촌을 거치게 되었는지 아니면 일부러 그 길을 택했는지는 모르나 산수마을을 스쳐가다 산수의 아름다움에 반했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산수마을이 그렇게 아름다운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앞에는 바다가 있고, 뒤에는 산이 있어 배산임수의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고, 그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경치 하나맘으로 정착의 원인 또는 이유로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마 모르긴 해도 단순히 산수가 좋다는 이유가 주인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사실 장흥과 율촌은 지리적으로 너무 멀다. 예나 지금이나 거리가 멀면 거래를 할 수 없다. 즉 사람의 왕래가 그만큼 어렵다. 사람의 내왕이 없으면 특별히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인 인지상정이다.


그렇다면 혼인이 정착이유일 수 있다. 비록 장흥과 거리가 멀지만 아주 특별한 인연이 이루어질 수 있다. 당시 선조들 가운데 장흥을 떠난 조상들은 16세 휘 자공(自恭)을 제외하고 거의가 결혼에 의해 외지에 정착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용 할아버지의 케이스도 같을 수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는 산수마을은 평생을 보금자리로 정했다. 당시의 사회에서 진사는 벼슬 아닌 벼슬이었다. 출사의 자격시험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역에서는 대단한 벼슬아치로 인정했다. 더구나 벽촌인 율촌에서 진사인 용의 위상은 범인들을 압도하고 남았을 것이다.


장흥에선지 아니면 산수에 정착해서 결혼을 했는지 모르나 슬하에 3형제를 둔다. 이로 말미암아 여천파(麗川派)는 큰아들 희징(希徵), 숙주(淑珠), 덕수(德秀), 둘째 아들 희강(希絳), 덕광(德光), 정행(廷行), 셋째 아들 희무(希武), 철명(哲明), 흥인(興仁) 등 세 소파(小派)로 갈린다.


후손들 가운데 종파는 절손상태이며, 중파 또한 그리 많이 번성하지 못하고 있다. 계파는 크게 번성해서 사실상 산수를 기반으로 한 장흥 위씨를 대표하고 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닌 듯 하다. 이외에 충남 금산군 죽림과 장흥군 장동면 북교, 전북 김제시 금산 구월 등지에도 살고 있다.


산수 위씨는 인물이 많다고 한다. 위씨 가운데 출중한 인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저기에 많은 인재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여수나 율촌 사람들은 위씨 그러면 머리가 영리하다는 게 정평이다. 초등학교 등 각급학교에서 1등하면 으레 위씨를 꼽을 만큼 수재가 많다고 한다.


다른 특징은 항렬이 높다는 점이다. 산수 위씨 중에는 아직도 계자(啓字)가 많다. 항렬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자손이 불어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도 그럴 것이 종파와 중파는 손이 끊길 상태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계파출신 후손은 생각보다 크게 번성해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산수에 아쉬운 것 하나가 있다. 사우(祠宇)나 재각(齋閣)이 없다는 사실이다. 사실 진사공은 16세 휘 자공(自恭)께서 함흥집성촌을 개척한 이후 외지에 집성촌을 개척한 어른이다. 그런 역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당신의 위패를 모실 사우나 재각이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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