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득화 관련>
선조실록 선조 27년.
선조 27년 10월 선조 27년 10월 10일
선조실록 56권, 선조 27년 10월 10일 갑인 8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요동 도지휘사사가 왜정에 관하여 보낸 자문
요동 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가 왜정(倭情)에 관하여 보낸 자문(咨文)은 다음과 같다.
"본월(本月) 4일 흠차 순무 요동 지방 찬리 군무 겸관 비왜(欽差巡撫遼東地方贊理軍務兼管備倭) 도찰원 우첨도어사(都察院右僉都御史) 이(李)의 전사(前事)에 대한 안험(案驗)을 접수하였는 바, 본년(本年) 9월 24일 접수한 병부(兵部)의 자문은, 해본부(該本部)가 직방청리사(職方淸吏司)의 안정(案呈)에 의하여 제본(題本)을 올려, 병과(兵科)에서 초출(抄出)해서 본부에 보내었는데, 조선 국왕(朝鮮國王)의 주문(奏文)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력(萬曆)336) 22년 3월 8일 배신(陪臣) 원임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原任慶尙右道兵馬節度使) 성윤문(成允文)의 치계(馳啓)에는 ‘해 김해 부사(該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이 「2월 19일 청무 부리(聽無府吏) 김변호(金變虎)가 본부(本府)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은 각처에 나누어 점거하고서 때때로 병선(兵船)을 보내는데 가는 배는 적고 오는 배가 많아 병력을 늘리는 상황을 보이며, 심 참장(沈參將)이 돌아와 하는 말을 들어보아 진퇴(進退)를 결정하겠다고 떠들었다고 공칭(供稱)하였다. 」는 내용의 비보(飛報)를 하였다.’ 하였는데, 본월 11일 배신 전라도 방어사(全羅道防禦使) 이시언(李時言)의 치계에는 ‘해 조방장(該助防將) 장의현(張義賢)이 「2월 22일 도망쳐 온 남자 오경희(吳景禧)가, 지난해 7월 중에 적에게 잡혀가서 일본국 강고수마(江古水痲) 지방으로 보내졌는데 그곳에서 만난 한 남자가 필담(筆談)으로, 나는 허의후(許義後)로 대명(大明)의 강서도(江潟) 길안부(吉安府) 만안현(萬安縣)의 사람인데 융경(隆慶)337) 4년338) 에 잡혀 이곳에 왔다 하고, 또 많은 왜적들이 천사(天使)의 소식이 오면 8월 중으로 모두 돌아오려 한다고 하였다고 공칭하였다. 」는 내용의 비보를 하였다.’ 하였으며, 4월 13일 배신 경상도 좌병마 절도사(慶尙道左兵馬節度使) 고언백(高彦伯)의 치계에는 ‘해 경주 부윤(該慶州府尹) 박의장(朴毅長)이 「3월 19일 신시(申時)에 임랑포(林郞浦)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 약 1천여 명이 언양현(彦陽縣)으로부터 약탈을 시작하여 본부(本府) 남쪽 20리 되는 지점까지 진입하여 왔으므로 신이 여러 장수들과 함께 독전하여 달려나가 적을 격퇴하였다. 패퇴한 적들이 잡아간 남녀 도합 3백 70명과 마우(馬牛) 도합 32필을 되돌려 보내왔다. 」고 비보하였다.’ 하였습니다.
또 본월 15일 배신 경상우도 수군 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 원균(元均)의 치계에는 ‘3월 5일 본도의 병선(兵船)을 점검하기 위하여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등을 대동하고 고성(固城) 지역에 이르러 정탐하던 중에 중국 병사 2명이 탄 작은 배가 있어서 급히 앞으로 오게 하였는데 배 안에는 본국의 어린 사내아이가 한 명 있었다. 데려다가 물어보니 「나는 본도 상주(尙州)에 사는 정희순(丁希順)인데 잡혀간 해와 달은 기억할 수 없으나 적에게 잡혀가 웅천현(熊川縣)의 둔(屯)에 있으면서 심부름을 하였다. 그런데 오늘 적병들이 본국의 병선을 바라보고 각기 두려워 하는 마음을 품고 담 도사(譚都司)에게 금유(禁諭)하는 패문(牌文) 써주기를 간청하였는데, 나는 패문을 가진 관군(官軍)을 따라 실려왔다. 일전에 적병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니, 천사(天使)가 오면 우리는 모두 바다를 건너갈 것이지만 오지 않으면 병력을 크게 보강하여 수륙(水陸)으로 침략할 것이라고 했다. 」 하였다.’ 하였으며, 본월 16일 배신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 박진(朴晉)의 치계에는 ‘해 함안 군수(該咸安郡守) 안옥(安沃)이 「3월 26일 도망쳐온 남자 허영명(許泳溟)이, 지난 해 4월 중에 적에게 잡혀가 일본국 낭고야(郞古耶) 지방으로 보내졌는데 그곳은 바로 적추(賊酋)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있는 곳이었다. 지난해 8월 3일 수길이 본국으로 돌아가고 이름을 모르는 추왜(酋倭)가 대신 그 무리를 거느리고서 부산(釜山) 등지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들과 6개월에 한 번씩 교대를 시켰다고 공칭하였다. 」는 내용의 비보를
하였다.’고 하였으며, 5월 2일 배신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 고언백(高彦伯)의 치계에는 ‘해 동래 현령(該東萊縣令) 김중민(金中敏)이 「4월 15일 포로가 되었던 군인 송창세(宋昌洗)가 둔류(屯留)하고 있는 적이 성을 쌓고 지붕을 덮는 등 조금도 쉬지 않았으면서 모두 말하기를, 대명(大明)의 참장(參將)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오면 우리는 일시에 파하고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고 공칭하였다. 」는 내용의 비보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본월 10일 배신 제도 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 권율(權慄)의 치계에는 ‘해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 고언백(高彦伯)과 우도 병마 절도사 박진(朴晉) 등이 「매복한 자와 망보는 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우도(右道)의 적들은 김해(金海)·거제(巨濟)·웅천(熊川) 등지에 여전히 나누어 주둔하고 있으며 약탈하는 일은 전에 비하여 드물다고 하였고, 웅천에 주둔하고 있는 적은 밀양부(密陽府) 삼랑성(三郞城) 위에 집을 지으면서 천장(天將)이 나올 때에 어주(魚酒)와 미두(米豆)로 군사를 먹일 곳이라고 하였으며, 좌도(左道)의 적들은 경주(慶州)에서 패하여 돌아온 뒤로 역시 각기 맡은 요새만 지키고 있으면서 무리를 단속하여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했다. 」는 내용의 비보를
하였다.’고 하였으며, 6월 7일 총병(總兵) 유정(劉綎)의 사후(伺候) 배신(陪臣) 김찬(金瓚)의 치계에는 ‘5월 23일 본부(本府)의 군영에 있으면서 해 도사(該都司) 담종인(譚宗仁)의 게보(揭報)를 들었는데 본월 4일부터 7일까지 웅천현(熊川縣) 등지에 주둔하고 있는 적이 배를 바다에 띄워 먼저 50여 척, 뒤에 80여 척이 모두 어디론가 갔는데 행장(行長)의 무리는 별로 가감(加減)이 없었다고
하였다.’고 하였으며, 본월 8일 배신 제도 순찰사(諸道巡察使) 권율(權慄)의 치계하는 ‘해 방어사(該防禦使) 김응서(金應瑞)가 「투항해 온 왜적인 시우(時右)와 송약(松若) 등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관백(關白)의 친동생 승시(乘柴) 휘하의 군인으로 임랑포(林郞浦)의 군영에 있으면서 관백이 제추(諸酋)들에게 하는 분부를 들었는데, 봉공(封貢)이 오지 않으면 너희들은 결코 돌아올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각 군영의 장수는 모두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고 하는 내용의 비보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본월 21일 배신(陪臣) 경상도 방어사 김응서의 치계에는 ‘해 언양 현감(該彦陽縣監) 위득화(魏得和)가 「5월 28일 도망쳐온 군인 황필금(黃必金)이, 만력 21년339) 2월 중에 적에게 잡혀가 일본국 무응구(無應仇) 지방에 보내졌다가 본년 3월 중에 다시 낭고야(郞古耶) 지방으로 보내졌는데, 그곳에서 대상간(大上間)이라 부르는 대고사마(大告司馬)가 본도(本島)에 와 있으면서 모든 병무(兵務)를 전담하여 관리하였는데, 각추(各酋)가 평양(平壤)과 전라(全羅)에서 실패한 것을 깊이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겨 배를 모아 식량을 운반하고 강병(强兵)을 더 조발(調發)해서 본년 7월 중으로 2기(起)로 나누어 1기는 제주(濟州)로부터 곧바로 전라도로 침범해가고, 1기는 경상도로부터 곧바로 경기도로 들어가 동서(東西)에서 분탕질하며 이내 합세하여 서쪽으로 침략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공칭하였다. 」는 내용으로
비보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해 경주 부윤(該慶州府尹) 박의장(朴毅長)이 「5월 30일 투항해 온 왜병 산기지(山只之) 등이 말하기를, 임랑포(林朗浦)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의 소속으로 본둔(本屯)에 있을 때 들으니 그들 무리가 떠나느냐 머무르냐는 단연코 대명(大明)의 허관(許款)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하였고, 또 각둔(各屯)에서는 날마다 심 참장(沈參將)이 돌아와 대화할 날을 바라고 있다는 말을 했다. 」는 내용으로
비보하였다.’하였습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갖추어 아룁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신(臣)은 적병이 아직도 신의 영토 안에 있으며 모두가 위세(威勢)의 긴완(緊緩)에 관계된다고 생각되어 도리상 계속하여 치주(馳奏)합니다. 지난해 11월 중에 6월 이후의 적군의 정세에 대하여 주본(奏本)을 갖추어 사은 배신(謝恩陪臣) 김수(金?) 등에게 아뢰도록 한 이외에 이제 전항(前項)의 내용은 또 본년(本年) 정월 이후에 변방을 지키는 배신(陪臣)들이 각기 보고해온 것으로서, 도망온 사람의 진술과 정탐한 사람의 보고가 비록 자세하고 간략함이 달라 사실로 믿기는 어렵지만 각관(各館)의 적정(賊情)에 관계되므로 부득불 아뢰어 조정(朝廷)340) 의 처분에 참고하도록 합니다.
신은 삼가 지난해 11월 중에 받은 칙지(勅旨)에 ‘대병(大兵)은 이제 철수하니 왕은 환국(還國)하여 스스로 다스리라. 이제 갑작스런 다른 변고가 있어도 왕을 위하여 계책을 세우기 어려울 것이다. 이를 계기로 미리 경계하노니 고인의 와신 상담(臥薪嘗膽)하던 의리로써 서로
권면하라.’하시어 은고(恩誥)하심이 정녕하여 신에게 재생(再生)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으니, 신은 감격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으며 뼈에 깊이 새겨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이어 요동 도사(遼東都司)가 병부(兵部)와 총독 군문(總督軍門)의 자문을 보내왔고, 또 배신(陪臣) 유성룡(柳成龍) 등이 군문(軍門)의 유(劉)에게서 전후에 걸쳐 간절한 분부를 받들었는데, 그 뜻은 모두가 구천(句踐)이 생취(生聚)하고 훈련하던 정신341) 으로 후일을
도모하라.’는 것으로 면려함이 매우 자상하여 신은 더욱 감격하고 더욱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신은 삼가 생각하기를, 신의 나라가 비록 쇠잔하고 파괴되었지만 만일 병화(兵火)가 잠시 중단되고 변경(邊境)이 조금 조용해지면 명지(明旨)를 받들어 노둔한 힘이나마 다 쏟아 병화의 뒷 일을 수습하여 늦게라도 보답하기를 도모하여 성 천자(聖天子)의 큰 은혜를 만분의 일이나마 우러러 갚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왜적들이 아직도 나라 안에 주둔하여 서로 버티면서 해를 보내고 으르렁대기를 그치지 않으니 소방(小邦)의 인심이 밤낮으로 흉흉하고 두려워하여 짐을 벗지 못하고 분명(奔命)342) 하기에 겨를이 없고 숨돌릴 기약이 없으며, 재력도 이미 바닥나고 민력(民力)도 다 되었으니 무상(無狀)한 신으로서 아무리 뜻을 굳게 가지고 힘써 조그만 뜻이나마 이루어보려 하여도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리고 신에게 또 하나의 근심이 있습니다. 왜적이 지난해 진주(晉州)를 약탈한 이후로 둔(屯)을 나누어 목책(木柵)을 손질하며 천조(天朝)의 허관(許款)을 기다린다고 떠들어대는데, 신은 그들이 속임수로 시간을 지연하여 필시 다시 침략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지금 반년이 지나도록 동정(動靜)을 보이지 않고 있으나 이러한 정상으로는 그들의 속셈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혹 왜노가 구관(求款)하는 것을 참장(參將) 심유경(沈惟敬)이 왕래하면서 허락하리라 약속하여 항표(降表)를 접수한 뒤 기일을 정해놓고 떠나고, 도사(都司) 담종인(譚宗仁)은 군영에 남아서 침략하지 말도록 경계하여 심참장의 보고가 오기를 기다리게 하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적의 흉봉(兇鋒)이 조금 그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또 각처의 변보(邊報)와 적의 군영에서 전해오는 말도 대체로 이와 같은데 이제 그 기일도 지나가고 적이 도모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게 되면 더욱 감정이 깊어져 결렬(決裂)된 데 대한 화가 다시 조석간에 닥치지나 않을까 신은 더욱 두렵습니다.
지난해에 적이 경상도를 경유하여 충청좌도를 거쳐 곧바로 신의 도성을 침범하였는데 그들이 경과한 연해로(沿海路) 수 천리가 쑥대밭이 되어 잡초만이 우거졌을 뿐입니다. 병화를 겪은 다른 곳도 모두 그러한데 전라도 일대의 몇십 읍(邑)만은 겨우 분탕질과 약탈을 면하여 소방(小邦)의 경비(經費)와 군량을 모두 그곳에 의지하여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적들이 탐내는 곳도 바로 그 곳입니다. 이제 비록 그들이 움직이지 않고는 있지만 움직이기만 한다면 반드시 전라도와 충청우도를 침범해서 벼와 곡식을 유린하고 공사(公私)간에 비축해 놓은 것을 약탈하여 식량으로 삼고 서해(西海)의 배를 거두어 모아 수륙(水陸)으로 함께 진격해 올 것이니, 그렇다면 전라도와 충청도는 말할 것도 없고 황해도와 평안도까지도 차례로 와해될 것입니다. 이 점이 또한 오늘날의 위박(危迫)한 형세입니다. 옛말에 ‘남에게 당하는 자는 그 계책이
깊어진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계책이 깊어서가 아니라 형세가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신은 적에게 너무나 당하였습니다. 상란(喪亂) 이래로 마음을 다하여 나라 안의 신민들과 갖가지로 계책을 짜내어 스스로의 보전을 도모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마는, 공격과 수비하는 일에 하나도 쓸만한 계책이 없어 흉악한 적군은 사방에서 엿보고 있는데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으니 신의 계책이 궁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성조(聖朝)에서 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마음이 지극하고, 신이 입은 성조의 은혜 또한 지극합니다. 신의 칠로(七路)343) 를 되찾아 주시고 신의 삼도(三都)344) 를 수복시켜 신으로 하여금 살아서 고국에 돌아가게 하였으니, 끊긴 국맥을 다시 잇고 생성(生成)해 주신 은혜가 이보다 더할 수가 없습니다. 해변에 쫓겨가 있는 적쯤이야 신이 자력(自力)으로 초멸하여 제거하고 성조를 번거롭게 해서는 안 되는데도 피로에 지쳐 기세를 떨치지 못하고 한결같이 호소하여 은혜를 바라 마지않음으로써 황상(皇上)께 동쪽의 근심으로 밤낮을 잠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게 하였으니,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큽니다. 그러나 적자(赤子)345) 가 무지(無知)하여 수화(水火)중에 떨어져 고통을 못 견디게 되면 부모만을 부르는 것으로, 환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적자는 스스로 알지 못하고 부모가 걱정하여 주는 데만 매달리는 것입니다. 지금 신의 무지함이 적자와 같고 성조가 신을 아껴주심이 부모보다도 더한데, 신이 어떻게 번독(煩瀆)하다는 것 때문에 감히 통곡하며 울부짖음을 그만둘 수 있겠으며 스스로 구제해 주시는 인자함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위엄을 떨쳐 완악함을 징계하고, 허관(許款)으로 붙들어 매어 화를 종식시키는 이 두 가지는 옛날 제왕(帝王)이 오랑캐를 제어하던 대권(大權)으로서 모두 흉포함을 금지하고 생령을 보전하는 방법이니 시기와 형세에 따라서 조처하는 것은 오직 성명(聖明)께서 선택하실 바이며 신의 미칠 바가 아닙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성명께서는 적의 실정이 어떠한가를 밝게 살피시고 신의 나라의 형세가 위급함을 불쌍히 여기셔서 대신에게 명을 내려 지금 이 시기에 잘 의처(議處)하게 함으로써 흉악한 적의 환란을 해소하여 경각에 매달린 신의 국운을 잇게 하여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상은 조선 국왕의 주문 내용이었는데, 병부(兵部)에서 의논을 모으라는 성지(聖旨)를 받들었습니다.
본년 9월 12일 사례감 태감(司禮監太監) 장성(張誠) 등이 현극문(玄極門)에서 전봉(傳奉)한 성유(聖兪)에 ‘짐(朕)이 문서를 열람하다가 조선 국왕의 주본(奏本)을 보았는데, 왜이(倭夷)에게 관공(款貢)을 허락하여 그들의 사직을 보전하고자 하였으니, 정상이 매우 위박(危迫)하다. 짐이 생각건대 자고로 중국에서 외이(外夷)를 제어할 때 위엄으로 두렵게 하고 덕으로 굴복시켜 왔었으니, 전수(戰守)346) 와 기미(羈?)의 법을 병용(竝用)하여도 무방할 것 같다. 이제 왜(倭)가 사신을 보내와 구관(求款)하니 국가의 체통은 자연 높아졌다. 우리는 그대로 무마하여 나라를 보전케함으로써 멀리 출전(出戰)하는 번거로움을 없애고 그들의 공격을 잠시 중단시켜 수비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해부(該部)는 군국(軍國)의 중요한 임무를 교섭하는 곳이니 의당 국가의 이해(利害) 관계가 어떠한가를 잘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일신의 훼예(毁譽)만을 가지고 주저하여 남에게 미루고, 주장을 하는 일이 없으니 그러다가 천하의 대사를 그르치기라도 한다면 그 책임 또한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세의 기미를 잘 헤아려 속히 분명하게 갖추어 아뢰고 다시는 우물쭈물 하면서 둘 다 좋다고 하지 말도록 하여 천조(天朝)의 오랑캐를 제어하는 체통을 보전하고 저 나라의 호소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힘쓰라.’하였는데, 이상의 내용이 병부를 거쳐 모두 본사(本司)347) 에 왔습니다.
본사에서는 이를 근거로 조사한바, 만력 20년348) 12월 중에 해 병과 도급사중(該兵科都給事中) 허홍강(許弘綱) 등의 제본에 ‘왜보(倭報)는 믿기 어려우니 조정에서 잘 살펴야 한다.’ 함에 따라, 본부(本部)에서 복의(覆議)하여 ‘아뢴 것은 잘 알았다. 왜를 정벌하는 일은 이미 계책이 서 있으니 경략에게 공문을 보내 그로 하여금 기미를 살펴 초제(?除)하되 절대로 멀리서 관망하며 지휘하지 말고 또한 통공(通貢)하거나 성(城)을 할양(割讓)하여 저들의 간계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는 성지를 받았음을 확인하였고, 또 21년349) 4월 중에 해 경략 시랑(該經略侍郞) 송(宋)이 ‘왜적이 위엄을 두려워하여 죄를 뉘우치고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원하고 통공(通貢) 등을
애걸한다.’는 내용의 게첩(揭帖)을 올렸는데, 본부가 제의(題議)하여, ‘교활한 오랑캐는 속임수가 많으니 깊이 믿을 수 없다. 너희 부에서 즉시 사람을 차정하여 보내 경략 등에게 오랑캐의 실정을 힘써 살피도록 전하고, 만일 명을 듣고 돌아간다면 약속(約束)을 분명히 세워 영원히 사단(事端)을 만들어 이웃 나라를 침략함이 없도록만 할 뿐이다. 외신(外臣)과 같은 처지인데 다시 통공(通貢)으로 신표를 삼을 필요가
있겠는가.’하는 성지(聖旨)를 받았음을 확인하였고, 또 본년 5월 중에 해 병부 도급사중(該兵部都給事中)의 ‘군대가 원정(遠征)에 시달린 지 오래 되었는데 교활한 왜구는 돌아갈 기약이
없다.’는 제본에 따라 본부에서 복의(覆議)하여 ‘이 왜노에게 통공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에 가벼이 허락하지 않겠다는 칙지를 내렸다. 너희 나라는 준행(遵行)하도록 전하기만 하고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다.’는 성지를 받았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또 본년 9월 중에 해 경략 시랑(該經略時郞) 송(宋)이 강공(講貢)의 설에 대한 전말을 밝히고 아울러 왜적의 실정에 대한 계책 등의 일을 진달한 제본에 따라 본부에서 복의하여 ‘이 왜노가 원래 내범(內犯)350) 이 없었으니 나의 반신(叛臣)이 아니고, 이제 위엄을 두려워하고 죄를 뉘우쳤다 하니 짐은 믿고 항복을 받아들일 것이다. 어찌 지난 일을 따지겠는가. 다만 저들은 먼 나라의 오랑캐라서 아직도 중국의 법이 엄하다는 것을 모르고 군대를 가까운 곳에 주둔하여 진정으로 항복함을 보이지 않는데 어찌 가벼이 허락할 리가 있겠는가. 너희 부(部)에서는 다시 속히 송응창(宋應昌)에게 전유(傳兪)하여 한결같은 뜻으로 병력을 엄히 조련하고 방수(防守)하도록 하여 왜적을 모두 돌아가게 한 뒤에 그들이 표(表)를 올려 신하되기를 원하고 봉(封)해 주기를 청하면 이를 허락하여 영원히 속국을 삼도록 하고, 칙지(?旨)에 따라 그들의 입공(入貢)을 허락하지 아니함으로써 내지(內地)의 간사한 백성들이 유인되어 말썽을 일으켜, 조정이 위덕(威德)으로 왜국을 포용하고 이물(異物)351) 을 귀히 여기지 않는 뜻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라.’한 성지를 받들었음을 확인하였고, 또 9월 중에 해 태자 태보(該太子太保) 본부 상서(本部尙書) 석(石)이 노병(老病)이 더욱 심하여 추무(樞務)를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제본을 올리자 ‘경의 주문(奏文)을 보니 알겠다. 중국이 오랑캐를 제어함은, 오는 자는 거절하지 않고 가는 자는 붙잡지 않으며 굴복하면 붙들어 두는 것이 바로 천고에 변함없는 이치이다. 어제 칙지에, 왜노가 모두 돌아가기를 기다려 신하되기를 원하고 죄에 굴복하면 영원히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표문(表文)을 받아들이되 봉(封)은 허락하고 공(貢)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계책을 짐이 결정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말을 많이
하겠는가.’하는 성지를 받아들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또 9월 중에 해 남경 이과 급사중(該南京吏科給事中) 진용순(陳容醇) 등이 ‘섬 오랑캐가 다시 움직여 동사(東事)가 걱정스럽다는 등의 일로 제본을 올렸는데, 본부에서 ‘봉(封)을 의논하는 일은, 반드시 소서행장(小西行長)에게 모두 돌아가도록 할 것, 반드시 봉(封)함으로 인하여 공(貢)을 요구하지 말 것. 반드시 다시는 조선을 침범하지 않을 것 등의 조건을 말하여 이 세 가지 명을 모두 들으면 대신 주청(奏請)하고, 표문(表文)이 도착하던 날에는 신들이 모두 일에 대해서 부(府)·부(部)·과(科)에서 의논하여 황제의 결단을 들을 것을 제청(題請)하며, 이 몇가지 사항 중에 한 조항이라도 따르지 않거나 따르더라도 버티어 후환을 남길 것 같으면 파기할 것을 분명히 선언하고 다시 의논하지
말라.’고 복의하여 ‘좋다’는
~하략
조선왕조실록
http://naver.me/xA4msT0Y태백산사고본】 33책 56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366면
【분류】
군사-통신(通信) / 외교-명(明) / 외교-왜(倭)
[註 336]만력(萬曆) :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註 337]융경(隆慶) :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
[註 338]4년 : 1570 선조 3년.
[註 339]만력 21년 : 1593 선조 26년.
[註 340]조정(朝廷) : 중국 조정.
[註 341]구천(句踐)이 생취(生聚)하고 훈련하던 정신 : 복수할 것을 잊지 않고 국력을 기르는 것을 말함. 월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