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백년 은둔에서 잠을 깬 양난 - 원산 위정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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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성혁명 불복신(不服臣)과 선조들의 은둔(隱遁) 2. 양난(兩亂)에 참전한 선조들의 구국활동 3. 충의록(忠義錄) 저자와 참전 선조의 가계(家系) 4. 양난(兩亂)의 참전으로 인한 위문(魏門)의 위상 5. 위씨의 기질과 양난 이후의 출사(出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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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충의록(忠義錄) 저자와 참전 선조의
가계(家系) 이상의 기록은 1999年에 간행된 장흥 위씨 대동보 誌狀錄에 실린 忠義錄이 그 토대이다. 忠義錄은 存齋公께서 38세 되던 英祖 1765年(乙酉)에 정리한 기록이다. 이 기록은 장흥 魏氏 최초의 족보인 1759年의 己卯譜보다 6年에 후에 작성됐기 때문에 揭載되지 못했다. 만일 공이 이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다면 후손들은 선조들의 빛나는 할동상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문제의 충의록은 1883年 癸未譜부터 대동보에 실리기 시작했지 않았나 싶다. 그후 1972년의 壬子譜를 거쳐 1999年에 간행된 대동보에는 原文과 함께 解說文까지 실려 漢文에 깊지 않는 후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충의록을 근거로 兩亂의 참전 인물을 보면 거의 父子와 兄弟들이다. 壬辰倭亂의 경우 防과 德男, 德元과 廷說, 公濬과 士進은 부자간이며, 德毅과 德和,를 비롯 大器, 大澤, 大洪, 大宙 그리고 漢良과 倫良은 모두 형제간이다. 또 丙子胡亂에서도 廷望과 鍾은 부자간이며, 廷勳, 廷烈, 廷鳴은 친형제간인데다 廷獻, 廷喆 등과는 종형제간이다. 더구나 극적인 사건은 宣祖의 행재소에서 일어난다. 임금을 호종한 덕화와 그의 둘째형 덕의가 천리타향 그 먼 곳에서 해후한 사실이다. 특히 아이러니는 관북출신 한량도 임금을 호종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점이다. 희성인 위씨가 왕의 피난길에 세 사람이나 함께 있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
4. 양난(兩亂)의 참전으로 인한 위문(魏門)의
위상 判事公에 대해서는 여러 說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李成桂가 易姓革命으로 정권을 잡은 이후 出仕者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高麗朝에서는 侍中을 배출하고, 할아버지와 손자가 사후에 왕으로부터 諡號까지 받은 집안임을 감안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逆賊의 後裔가 아니면 그렇게까지 벼슬길에서 멀어졌을까 하는 疑問이 나온다. 더구나 判事公의 후예들인 우리의 선조들이 출사를 한사코 忌避한 것도 석연찮다. 이성계는 집권하자 逆謀 가담 후손들에게 내린 禁錮令을 해제했다. 그래서 判事公보다 엄한 벌을 받은 집안 후손들도 줄줄이 관직에 진출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독 우리 長興 魏氏만 조상의 정신을 받든다는 이유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대표적 인물이 18세 諱 由亨어른이다. 그 분은 學德이 출중했으나 出仕의 길을 포기한 채 동생 諱 由貞에게 科擧에 응시하도록 권했다.
그리고 자신은 平化 茶山嶝에 山亭을 짓고 그 주변에 冬栢과 대나무를 심어 정자를 가리며 살았다. 공은 그때 귀양 온 靈川 申潛과 정자에서 술을
마시고, 詩를 지은 것을 樂으로 삼고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日本 놈들이 쳐들어 왔다.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구국의 함성이 성난 불길처럼 일어났다. 젊은이는 국토방위를 위해 의병을 자원하고,
일반백성들은 군량미를 모아 전장으로 보냈다. 장흥 冠山과 杏園 그리고 咸興의 魏氏들도 그 대열에 앞장섰다. 壬辰倭亂에는 20여명, 丙子胡亂에는
10여명이 참전해 실로 엄청난 戰功을 세운 것이다.
아래 表와 같이 兩亂에 參戰한 선조들의 벼슬은 다양하다. 壬辰倭亂 참전자 중 추증된 벼슬은 오늘의 장관에 해당된 戶曹判書 1명을 비롯 刑曹參判 2명, 通政 1명 등이다. 그리고 실제 현직에 재직한 벼슬아치는 兵使 1명, 水使 1명(취임하지 못함), 府使 1명(전쟁 당시의 현직), 縣監 2명, 營將 1명이며, 丙子胡亂 참전자는 防禦使 1명, 縣監 2명(1명은 전쟁 당시의 현직), 縣令, 都事 각 1명었으나 취임하지는 않았다.
※ 참전 선조의 개인별 관직 및 追贈 벼슬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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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위씨의 기질과 양난 이후의
출사(出仕) 兩亂에 참전한 장흥 위씨의 면면을 보면 대충 姓氏의 性向과 氣質이 나타난다. 물론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비롯된 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명의 참전자 중 諱 天佑公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武官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南宗은 關北派와는 달리 文官보다는 무관의 성향과 기질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왜 무관 성향을 지녔을까. 조상 대대로 타고난 기질일까. 아니면 문관에 비해 무관으로 진출하는 것이 쉬워서 오는 현상일까. 딱 부러진 해답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문관을 비중 있게 평가하는 사회적 정서에서 무관을 택했다면 아무래도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과거를 통해 문관으로 진출하기는 매우 어려웠던 게 당시의 현실이었다.
또 하나의 관심사는 난리가 끝난 후 위씨의 出仕는 어느 정도 이어졌는가 하는 점이다. 關北의 위씨들은 종전 이후에도 출사자가 꾸준히 배출됐다. 諱 定相은 顯宗 5年 文科에 급제, 通川 郡守를 거쳐 經筵에 시참했다. 諱 昌祖는 英祖 7年 문과에 급제, 春秋館修撰官과 북청도호부사를 역임했다. 諱 光肇도 英祖 50年 문과에 급제, 江原監司를 거쳐 冬至使拜表로 천거되어 入侍하였다. 실로 綺羅星같은 인물이 배출된 것이다.
그러나 남종의 위씨들은 북종과는 사정이 다르다. 文武官을 떠나 임진왜란 기간(1592年~1598年),과 丙 子胡亂기간(1627年~1637年) 등 전후 16年 동안 그렇게 왕성했던 출사자가 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뚝 끊어지고 말았다. 壬亂 이후 198年, 胡亂 이후 162年이 지난 후 후손이 알만한 벼슬아치는 存齋公이 유일한 인물이다.
당시의 선조들이 벼슬길에 못나갔거나 나가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다. 지금 그 때의 사정을 짐작케 하는 기록은 많지 않다. 오직 있다면 당신들의 一生을 간략하게 나마 적어놓은 행장과 墓碣銘 밖에 없다. 즉 대동보 지장록을 보면 우리의 선조들께서 출사의 방편인 科擧試驗에 합격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합격자는 찾기 어렵다. 그 많은 선조들이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시험인 進士試驗에는 붙어도 本試驗에 합격한 인물은
없었다. 어떤 선조는 실력이 없어서 떨어지고, 어떤 선조는 시험관의 편파적 사정으로 낙방되기도 했다. 특히 正祖 임금으로부터 玉果縣監을 제수받은
存齋公까지도 覆試에 합격하고도 출사를 포기했다.
결국 우리 위씨는 출사하기에 여러 가지로 너무 불리했다. 장흥이라는 땅이 정치 중심지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위씨 성을 지닌 사람을 인도할 배경이 없는 게 최대의 핸디캡이다. 예나 지금이나 최신 정보에 어두우면 불이익을 받게 마련이다. 조정에서 무엇을 하는지, 누가 실력자인지 등등을 모르면 길을 모른다. 길을 모르니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을 선택할 수 없고 그러니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단점은 성격이다. 위씨는 전통적으로 양순하다는 평을 받고있다. 사회적으로 모난 행동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하지 않는 소극성을 지녔다. 그러므로 리더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다 타협을 싫어하고 자신의 주장을 지나치게 고집하는 편협성을 갖고 있다.
그러니 요즘 사회에 적응하기가 부적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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