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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탐방기

관북 종친의 집성촌 천천마을

장흥 위씨 가운데 이른바 관북파는 모두 함흥지역이 삶의 주무대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천천리(泉川里)에 관북파 집성촌이 있다. 한국 전쟁전후에는 무려 170가구의 일가들이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거의 농촌을 떠났지만 아직도 20가구 남짓한 일가들이 살고 있다.


집성촌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옛날에는 오지였다. 접근하는 길은 안반고을 안동에서 찾을 경우 34번 국도를 타고 청송군소재와 주황산을 주변을 거쳐 이르는 길이 있다. 반대로 영덕쪽에서도 같은 국도를 타고 접근하는 방법이 있다. 어느 길은 택하든 요즘은 도로사정이 좋아 별 문제가 없다.


위씨와 이곳 천천리와의 인연은 임진왜란에서 시작된다. 함흥에서 태어난 휘 대수(大壽)는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 부자가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경북 의성군 사곡면 노매촌(老梅村). 늙은 매화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지명인지 매화나무가 많은 고장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 왜군과 조선군과의 전쟁이 노매촌에서 벌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아버지를 여위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고아가된 대수공은 어머니와 살 곳을 찾아 헤맸다. 이곳저곳을 헤매다 정착한 곳이 오늘 집성촌을 이루는 천천리 바로 그 마을이라는 것이다.


천천리는 물이 그 이름처럼 많은 곳이다. 원래 마을이 있었는지 아니면 공의 모자가 개척한 곳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모자의 힘으로 마을을 개척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이 살지는 않았을지라도 이미 마을이 형성된 곳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할 수 있다.


마을에 정착한 모자는 부지런히 일했을 것이다. 공은 성인이 되어 그곳 출신 아낙네와 결혼해서 자녀를 낳았을 것이다. 살림도 무럭무럭 불고, 자손도 불어 얼마 후에는 마을 전체가 자작일촌을 이룰 만큼 발전을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는 100가구의 동네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곳 종친들의 응집력은 재각을 짓는 것으로 나타난다. 평소부터 재각 하나 마련하기를 소원하던 집안의 지도자 치운(致雲)이 앞장섰다. 1981년(辛酉) 12월 문회를 열었다. 어찌 이론이 있을 수 있겠는가. 모든 일가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갹출해서 재각신축기금을 모았다.


어느 정도 기금이 모이자 2년 후인 1983년(癸亥) 4월 6일 공사에 들어갔다. 2층 콘크리트 벽돌조의 건물을 짓는 것이다. 재각하면 전통적으로 나무로 된 한옥을 연상한다. 그렇지만 천천리 일가들은 전통을 고집하지 않고 현대식인 콘크리트 벽돌조 재각을 짓기로 한 것이다.


이유는 자세히 묻지 않았다. 하지만 공간의 활용성과 관리의 수월성에 따른 선택으로 보인다. 사실 한옥은 보기보다는 공간을 제대로 활용하기 어렵다. 여기다 관리하기도 쉽지 않다. 매년 관리를 한다 해도 비가 새고 나무가 석으면 교체하기도 생각보다 쉽지 않은 불편이 따른다.


콘크리트 벽돌조는 공간의 활용도나 관리가 용이하다. 우선 여러 공간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다. 관리도 낡아 보이면 페인트를 칠하면 새 건물처럼 된다. 물론 전통적 관념에서 보면 좀 이질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결로현상으로 벽 등에 습기가 서려 보기 흉하기도 하는 단점이 있다.


재각은 착공한지 4개월만인 그해 8월 10일 완공했다. 상층인 2층에 조상들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10월 시제를 올린다. 단층의 여러 공간에는 종중 여러 단체의 회합장소로 제공하고 있다. 심지어는 일가 초등학생들의 공부방으로 활용되니 실로 다목적 재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재각의 이름은 흥문재(興門齋)라 한다. 영남대 이원재(李元栽)밧가 찬한 재각기를 보자. “자공의 16세손 휘는 대수이니 공은 어려서 의성군 사곡면 노매촌에서 용사란에 부친을 여의고 모친을 따라 지금 이곳 청송군 현서면 천천리로 옮겨 살게 되니 청송 입향조가 되었다.


그 후 400여 년 동안 자손이 번창하여 100여호가 되었는데 세파를 따라 흩어지고 지금은 20여호다. (중략) 가을에 서리가 내리는 계절 사방에서 모인 일가가 재사(齋舍)가 한스러웠다. 이제 재각을 완성하니 당실(堂室)이 훤하고 송죽이 우거지고 동량이 산뜻하여 날아갈 듯 하다”고 했다.


우리의 전통에서 재각의 상징성은 매우 크다. 아무리 역사가 오래된 성씨라도 재각을 마련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건축기금도 그렇지만 일가 간에 뜻을 맞추기가 어렵다. 그런 점에서 청송의 위씨들이 재각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큰 자랑이다. 그래서 재각의 이름처럼 문중은 흥할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농현상으로 일가들이 고향을 떠나 집성촌이 공동화되고 있는 점이다. 산업화와 정보화 사회가 인구의 도시집중을 야기하는 주범이지만 이대로 가면 전통적인 집성촌은 하나도 남기 어렵다. 사회가 전통을 단절하고 획일화 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스런 현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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