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흥향교 탐방기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07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건립되었다. 이후 개보수는 있었지만 600여 년 동안 위치를 변경하지 않고 장흥지방의 유학 진흥과 교화를 담당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현재도 지역사회 공헌에 주력하고 있다. 서원이 사학이라면 향교는 국가교육기관이다. 서당이 초등학교 수준이라면 향교는 중등교육기관이었다.
장흥향교는 전남 장흥군 장흥읍 교촌 남외길 33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교촌은 향교가 있는 마을이다.
홍살문을 만나면 곧 이어서 신성 시 하는 장소를 예상할 수 있다. 서원, 향교, 재실, 능, 묘, 충신, 열녀, 효자 배출한 곳, 등등에 설치하였다. 홍살문은 문의 의미보다는 상징성을 띠고 있다.
.장흥향교를 들어가는 외삼문이다. 외삼문은 세 개의 문이 달린 솟을대문의 형식이다. 외삼문 좌우에 역대 전교들의 선정비와 불망비가 즐비하게 서있다. 담장 너머 향교 내는 외삼문 기준으로 양쪽에 은행나무가 수문장처럼 서있다. 400년 안팎의 수령이라고 한다.
향교 밖에서 본 은행나무 두 그루를 향교에 들어와 찍은 것이다. 명륜당 앞에 외삼문 양편으로 식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령은 같지만 수형이 너무 달라서 대조적인 면을 느끼게 한다. 흔히 향교에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은 공자와 관련이 있다. 공자가 제자를 가르쳤던 곳이 행단(杏壇)이었다. 다만 이 행단이 무엇이냐인데, 살구나무로 보는 이와 은행나무로 보는 이가 있다. 우리 유학자들은 대체로 은행나무라고 한다. 은행나무처럼 교육이 수백 년 수천 년 이어지리라는 의미이다.
웅장하며 위용있는 이 은행나무는 조선시대 중종 때에 진사 백문순이 식재하였다고 한다. 향교수로써 손색 없는 수형이다.
明倫(명륜)이란 삼강오륜(三綱五倫) 등, 인륜을 밝히다는 뜻이다. 장흥향교에 들어서면 명륜당이 첫 번째로 만난다. 명륜당은 유생들 강학소이다. 장흥향교 구조물 배치는 전학후묘의 형태이다. 이를테면 강학소가 앞에 있고 묘전이 뒤에 있는 구도로 장흥향교가 경사지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지일 경우는 대성전이 앞으로 배치된다. 대성전은 공자의 묘전 명칭이다.
명륜당을 끼고 돌면 동재가 나온다. 동재는 대성전을 기준으로 대성전을 바라보고 동쪽의 재각을 이른다.
동재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서재이다. 대성전을 바라보고 서쪽에 있는 재각이다. 향교의 수장을 전교라고 칭하며 전교를 보좌하는 이들을 장의라고 한다. 장의는 현재 남자 30명에 여성 3명이다. 장흥향교는 전교와 33명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으며 전원 선출직이다. 보수도 없고 외려 출연금을 내는 봉사직이다. 그럼에도 명예가 있기에 경쟁적으로 입후보하고 있다. 현재 서재는 전교의 근무실이며, 서재 아래에 딸린 재각은 수석장의의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전교의 권위는 상당하다. 서재를 통째 근무실로 쓸 뿐만 아니라 아침에 입교한 장의들로부터 대성전 참배에 이어 인사를 받는다고 한다.
전교실 내부에 걸려있는 액자이다. 修己治人(수기치인)이다. "내 몸을 닦고 나서 남을 다스린다"라는 뜻이다. 유교의 핵심사상으로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난 후에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린다"이다..
전교실 내부이다. 향교 수장이신 전교는 홍의를 착용한다. 현 전교는 아산 위성태이시다. 장흥위씨는 47명의 전교를 배출하였다.
역대 전교를 지내신 원로명안이다. 생존에 계신 분을 원로라고 한다.
앞서 설명한 명륜당이다. 본 사진은 명륜당 후면이다. 앞에는 마당이 있다. 유생들이 강학하는 장소이다.
명륜당 내부이다. 규모가 족히 2M× 2M 크기 상당의 대자 忠孝(충효)편액이다. 충효란 충성과 효도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군왕을 성심(誠心)으로 받들고 부모를 지성(至誠)으로 모시는 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덕목(德目)이다.
강당 내 후면에 걸려있는 문짝 세 개 정도를 합친 크기의 대형 節義(절의)편액이다. 절의란 절개와 의리, 나아가 이를 지킨 사람이다. 절의는 부부간의 관계에서는 정절로, 벗간에는 신으로, 국가와의 관계에서는 충으로 이어지는 덕목이다.
본 알림북은 명륜당 마루와 닿아있는 기둥에 걸려있다. 북채는 기둥 뒤에 끼어 있었다. 알림북의 유생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쓰임새이다. 한 번 치면 준비하라! 두 번 치면 옷을 입으라! 세 번 치면 나와서 도열하라! 이다.
오래된 배롱나무가 고풍스런 향교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마당에는 조그만한 못이 있다. 혹여 있을 화재 시를 생각하여 만들었을 수도 있다.
대성전 담벼락에 향교와 어울리지 않은 게 있다. CCTV용 모니터라고 하는데, 석전대제 시 대성전의 제향 모습을 관람객들이 마당에서도 볼 수 있도록 하고, 제관들의 올바른 제향법을 지도하기 위한 용도라고 한다. 향교에서는 첨단장비일 수도 있다.
내삼문이다. 바깥채 안쪽에 세우는 세 개의 문이다. 내삼문을 경계로 배움의 공간과 제사공간을 구분하고 있다. 이 문을 통해야만 대성전을 오를 수 있다. 동입서출이라고 해서 들어갈 시는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는 왼쪽문으로 나온다. 가운데 문은 신이 다닌다는 신도이다. 이런 게 삼문으로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사청이다. 제사를 관장하는 곳이다.
대성전이다. 중국에 공자(孔子)를 주향으로 안자(晏子), 증자(曾子), 맹자(孟子), 자사자(子思子)의 5성인(聖人)과 송조(宋朝) 2현인 정자(程子), 주자 (朱子)와 우리나라의 신라 2현인(賢人), 고려 2현인(賢人) 조선시대 14현인(賢人)이 배향되어 있다. 배향된 우리나라 18현인은 다음과 같다.
설총(신라인, 655~?), 최치원(경주人, 857~?), 안향(순흥人, 1243~1306), 정몽주(영일人, 1337~1392), 김굉필(서흥人, 1454~1504), 정여창(하동人, 1450~1504), 이언적(여주人, 1491~1553), 이황(성주人, 1501~1570), 김인후(울산人, 1510~1560), 이이(덕수人, 1536~1584), 성혼(창녕人, 1535~1598), 김장생(광산人, 1548~1631), 김집(광산人, 1574~1656), 송시열(은진人, 1607~1689), 송준길(은진人, 1606~1672), 박세채(반남人, 1631~1695), 조광조(한양人, 1482~1519), 조헌(배천人, 1544~1592)이다.
석전대제(釋奠大祭)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 총 25위를 기리는 유교적 제사의식으로 매년 2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열린다.
<야운>
野雲 씨족문화연구위원님의 세밀하고 진취적인 글이 마음에 쏙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