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도 국화리, 300여년만의 종친과 해후
1월 18일 가족과 함께 완도군 청산도에 다녀왔다. 지난해 가을부터 종친들의 세거지와 유적지를 촬영하는 가운데 언젠가는 꼭 들리고 싶었던 곳이다. 왜냐하면 이곳엔 부장공 후손들의 세거지인 국화리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마침 19일 통영 방문이 예정되어 있어 함께 둘러보기로 한 것이다.
완도는 대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도로 사정이 좋아져 4시간 정도만에 여객선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2시 30분 승용차를 싣고 완도항을 출항한 배는 1시간 정도 걸려 청산도 도청항에 도착했다. 항구에는 사전에 대종회장님과 연락이 닿은 성옥종친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옥종친의 차를 따라 위씨들의 세거지인 국화리로 향했다. 도청항에서 5분 정도 거리인 국화리는 섬 북쪽에 위치한다.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위씨들이 개척했다는 표지석이 자리잡고 있다. 한때 섬 전체에 종친이 80여가구가 살았다는데, 현재 이 마을에는 달랑 8가구만이 남아 있다. 자동차를 회관앞에 세워두고 마을의 북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수환종친댁을 찾았다. 부장공(휘 대홍)의 12대손인 수환종친께서 골목 입구까지 나와 반겨주었다.
집으로 들어가 인사를 나눈 후, 수환종친의 안내로 마을 동쪽 언덕위에 자리잡은 재각인 선산사(仙山祠)로 향했다. 2002년 건축한 이 재각은 단층 콘크리트 건물로 25세 휘 명만 이하 46주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선산(仙山)이란 이름이 특이했지만 이는 청산도의 옛이름이라고 했다. 뒤이어 마을 남쪽 입구에 자리잡은 할머니들의 묘소와 고개 넘어 산자락에 넓게 자리잡은 선대들의 묘소를 둘러보고 참배했다.
부장공 할아버지의 후손들은 김천 운곡리와 청산도 국화리에 집단적으로 세거지를 이루며 살아왔다. 본관 장흥에서 멀리 떨어진 이유를 김천 운곡리에서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청산도 국화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타깝게도 기록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른들이 들려주는 토막 지식들을 바탕으로 추정해 보는 수 밖에 없다.
공은 임진왜란 당시 종형인 괴봉공(휘 대용)의 격문을 받들어 장형인 수사공(휘 대기)과 함께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투에 참여한다. 특히 권율 장군의 휘하에서 부장으로 김천 부근의 이현(현 개령)과 적현(현 부상)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다. 전란이 끝나고 고향인 장흥으로 귀향하지만 피치못할 사정으로 인해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웠던 5형제는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길을 도모한다.
이때 부장공은 전란 당시 큰 공을 세웠던 김천으로 가족과 함께 이거한다. 이후 고향 소식이 궁금했던 공은 홀로 장흥에 다녀오기 위해 출발하지만 불행히도 거기서 임종을 맞는다. 따라서 공의 묘소는 장흥읍 평화리에 모셔져 있다. 이후 가장을 잃은 집안은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리하여 공의 아들인 휘 추남께서는 살길을 찾아 부산으로 이거하게 된 것이다.
부산에서의 삶도 여의치 않았던 것 같다. 공의 증손자인 휘 춘발까지 부산에서 일생을 마치고 그의 아들인 휘 명만은 이곳 청산도로 이거한다. 효종(1649∼1659) 때부터 시작된 입도 정책과 청산도 개척에 힘입어 무인도인 이곳에 정착한 것이다. 섬의 북쪽에 위치한 국화리는 청산도 내에서도 평지가 거의 없어 농경에 불리한 곳이다. 이곳에 세거지를 정한 이유는 다른 이주민에 비해 늦게 입도했거나 아니면 남쪽으로 자주 출몰했던 왜구에 대비한 선택일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24세 휘 춘발의 아우인 휘 춘환은 다시 김천 원동으로 이거한다. 결국 25세 휘 명만은 청산도로 이거하고 삼촌인 휘 춘환은 김천으로 이거하면서 두 지역으로 나뉘어진 것이다. 이후 휘 춘환의 손자인 휘 경숙이 전란 중 부장공께서 살만한 곳으로 점지해 두었던 운곡리로 옮겨 지금까지 이어온 것이다. 물론 휘 경숙의 아우인 휘 경희의 후손들은 이후 인근의 동영리에 정착하여 세거지를 형성했다.
김천 운곡리나 청산도 국화리는 농경에 필요한 넓은 평지가 있는 곳이 아니다. 따라서 후손들의 생활도 넉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운곡리는 좁은 토지로 인해 지역에서도 매우 어려운 삶을 영위해왔고, 산으로 둘러싸여 농경지가 거의 없는 국화리도 어업 활동에 의존하며 극히 힘들게 살아왔을 것이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후손들이 2000여명에 달할 정도로 번성한 것을 보면 기적에 가깝다는 느낌이다.
지금까지는 농경에 불리한 환경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후손들의 미래는 밝은 것 같다. 최근 청산도가 영화 서편제의 인기와 더불어 슬로시티로 지정되면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한해 수십만명에 달하는 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이 청산도를 찾고 있다. 1차 산업인 어업 중심에서 3차 산업인 서비스업으로 생업이 바뀌면서 활기를 되찾은 것이다. 물론 김천 운곡리도 마을 앞에 혁신도시가 건설되고 KTX김천역사가 들어서면서 크게 기지개를 켜고 있다. 드디어 부장공 후손들의 세거지에도 큰 변화를 맞이한 것이다.
이번 청산도 방문을 통해 장흥위씨 대종회에서 구축한 네트워크의 힘이 실로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300여년간 끊겼던 핏줄을 이어준 것이다. 수환종친께서는 80을 바라보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김천의 부장공 후손이 찾은 것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았다. 생활이 넉넉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종친회 활동에 대한 관심도 많았다. 특히 부장공의 증손자가 다시 재입향하여 세거지를 이룬 김천과의 왕래에도 관심이 많았다. 종손이 살고있는 청산도에서 관심을 가지면 모든 것이 쉽게 풀릴 것 같았다.
수환, 성옥 두분 종친과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즈음 미리 예약해 둔 숙소인 양지리 느림섬여행학교로 향했다. 폐교된 청산중학교 동분교를 활용한 이곳은 완도에 거주하는 형환종친이 추천한 곳인데, 여유롭고 깔끔한 시설이 돋보이는 펜션이었다. 숙소에 너무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펜션에서 제공하는 슬로푸드를 체험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대신 도청항 주변의 식당에서 전복과 홍합 등 청산도 별미를 맛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다음날 19일 아침 일찍 출발하여 당리 서편제길을 둘러보고 서둘러 도청항으로 향했다. 통영에서 오후 2시로 예정된 수사공 후손들과의 만남을 위해 9시 완도행 배를 타면서 청산도와의 짧은 만남을 마무리했다. 그동안 청산도 방문을 위해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 특히 대종회장님을 비롯한 여러 종친 어른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아울러 오붓한 가족 여행 대신 종친들을 찾아나선 길에 기꺼이 동참해준 가족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위상복(35세, 씨족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사진: 위현동 제공)
위금만(魏今萬)===> 위명만(魏命萬)으로 수정합니다.
명만공은 청산도 국화리 입향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