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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태후와 五德 태생지의 유래 2006/09/07 원산

천관산 연대봉은 동쪽으로 뻗으며 두 개의 계곡을 이룬다. 정상에서 내려보면 오른쪽엔 장천동 왼쪽엔 당동이다. 그 당동에 독특한 사연을 간직한 집이 있다. 고려 때 왕자 3명이 왕위에 오른 왕비가 태어났다. 그리고 한 문중의 파조 5형제와 두 명의 효자가 태어난 집이기도 하다.
행정구역으로는 전남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112 당동(堂洞)마을. 집주인은 1000여 년 동안 다섯 번 갈렸다. 원래의 주인은 장흥 임씨(任氏), 탐진(耽津) 최씨(崔氏), 장흥(長興) 위씨(魏氏), 인천(仁川) 이씨(李氏), 연안(延安) 차씨(車氏), 수원(水原) 백씨(白氏) 그리고 현재는 위씨가 살고 있다.
임호는 당동에서 대박을 터드렸다. 아들 의(懿)는 곧 고려조정의 평장사(平章事), 손자 원후(元厚)는 중서령(中書令)에 올랐다. 증손녀는 왕비가 됐다. 바로 공예태후(恭睿太后)가 그 주인공이다. 그러니까 태후의 태생지는 당동이며 그래서 그 집터는 지금도 예사로운 집터가 아니게 본다.
왕비에 간택된 배경을 놓고 두 설이 있다. 하나는 당시 고려조정의 어의인 강진출신 최사전이 추천했다는 설이다. 주로 향토사학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다른 설은 태조 왕건 이후 지방호족 통제수단으로 이어온 혼인을 장흥 호족 임씨에게도 적용했다는 주장이다.(고려대 박용운교수)
임씨들은 호족반열에 오를 만 했다. 호의 아들 의는 문하시중 직무대행을 지냈고, 손자 원후 또한 대단한 벼슬아치기 때문이다. 임씨들이 이민 2세부터 개경에 진출, 눈부신 활략을 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박교수는 당시 보림사 승려들과의 밀접한 관계를 들고 있으나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다.
어쨌건 왕비로 간택될 때 원후는 기라성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자신이 중서령이었다. 둘째, 장인 이위(李瑋)가 문하시중이었다. 셋째, 이자겸의 난으로 그의 딸들이 폐비가 됐다. 넷째, 기이하게도 정혼한 김인규(金仁揆)의 아들이 혼인예정일에 급사한 것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이위의 꿈 얘기도 있다. “황색의 큰 깃발이 궁궐의 용머리에 걸쳐 펄럭이는”꿈을 꾼 후 외손녀가 1126년 인종(仁宗·4년)의 비로 간택되는 연덕궁주(延德宮主)로 추천됐다. 연덕궁주는 이듬해(1127년) 의종(毅宗)을 낳고 2년 후인 1129년 왕비로 책봉된다. 언니(娥池)의 꿈을 샀다는 일화도 있다.
이후 경(暻)과 명종(明宗), 충희(沖曦), 신종(神宗) 등 5형제와 승경(承慶), 덕녕(德寧), 창락(昌樂), 영화(永和) 등 4공주를 낳는다. 왕후는 아들 의종이 즉위한 후 왕태후(王太后)에 오르고, 묘청의 난과 정중부등 무인정권에서 왕통을 고수하려 애쓰다 75세로 생을 마감, 공예태후 시호를 받았다.
공예태후는 당동이 낳은 인물이다. 장흥(長興)이라는 이름도 인종이 왕비의 출신고장이라 길이 흥할 길지를 상징해서 붙여준 지명이라 한다. 그의 아버지 원후는 1142년 인종 20년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랐다. 임씨들은 고려가 폐망하기까지 당동의 집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동 집터의 두 번째 주인은 탐진 최씨일 것이다.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고려가 망한 후 장흥 임씨의 집을 인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최씨들이 약 3대쯤 살던 1490년대 말에서 1500년대 초의 주인은 최수동(崔壽東)이었다. 그는 슬하에 아들이 없어 데릴사위인에게 집을 물러줬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동 집터의 세 번째 주인은 장흥 위씨이다. 최씨의 사위인 19세 강능(江陵) 참봉(參奉) 휘 진현(晉賢·1483~1564)을 외동딸의 배필로 삼았다. 진현은 승문습독공(承文習讀公) 유형(由亨)의 셋째 아들로 지금 용산면 어산(語山)에서 살았다. 그러다 최씨의 딸과 결혼하면서 당동으로 갔다.
당동 입주의 시기에 대한 추정은 참봉공의 출생연도로 추정된다. 그는 1483년에 태어났기에 혼인적령을 20세 전후로 보면 1503년 전후로 보인다. 그 때 아버지 습독공은 돌아가고 어머니 평산 신씨와 둘째 형 진수(晉秀)와 살다 결혼 이후 어느 때 어머니를 당동으로 모셔 함께 살았다고 보인다.
참봉공의 생활은 비교적 여유로 왔다. 처가가 원래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랄까. 장인도 아들을 생산하지 못했는데 사위 또한 아들을 낳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둘째 형 진수의 네 아들 가운데 둘째 아들 곤(鯤·1515~1582)을 양자로 들여 대를 이어가게 한 것이다.
아들을 입양시키면서 당동은 이전보다 활기를 띈다. 호를 당곡(堂谷)이라 한 곤은 1549년(明宗 4년) 진사시험에 합격한다. 그리고 광주(廣州) 이씨(李氏)와 결혼해서 슬하에 덕홍(德弘)·덕의(德毅)·덕관(德寬)·덕화(德和)·덕후(德厚) 등 5형제와 두 딸을 낳으니 집안에 생기가 돌았다.
집에는 공부하는 강당인 수각(水閣)이 있었다. 여기서 5형제는 공부를 했다. 당시 그 수각에서 가사문학의 효시격인 관서별곡(關西別曲)을 지은 기봉(岐峯) 백광홍(白光弘·1522~1556)과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추앙받은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1537~1582)이 수각을 제(題)로 한 형제의 시를 보자.

古城殘堞半藤蘿: 고성의 무너진 담 반 틈은 등라가 얽혔는데
烏次餘民有幾家: 오차의 남은 백성 몇 집이나 있을 런지
山岳不崩江海闊: 산악은 무너지지 아니하고 강해는 광활하니
長生我欲問姮娥: 오래 삶을 내가 항아에게 묻고자 하네
溪南一路入松蘿: 계남의 한 길 소나무겨우살이로 들어가니
趁召高軒似到家: 부름 받고 옛집에 달려오니 벌써 이른 것 같네
盡醉不辭留夜宿: 취하도록 사양치 않고 머물러 밤을 새우니
小梅香裏候姮娥: 작은 매화 향기 속에 항아를 기다리네
※ 이 시는 기봉과 옥봉 형제가 당곡(堂谷) 아저씨를 위해 『당곡수각』을 제목으로 삼아 시를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기봉은 당곡과 불과 7살 연하인데 어떤 인연으로 아저씨가 되는지 확인되지 않아 안타깝다. 그 때는 백씨 집안과 깊은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당동 집의 네 번째 주인은 인천(仁川) 이씨(李氏)에 이어 다섯 번째는 연안(延安) 차씨(車氏)이다. 인천 이씨에 대해서는 아무런 흔적이 없다. 차씨들의 경우도 확실치 않다. 다만 차덕일·덕원 형제가 효자여서 후일 주민들에 의해 마을에 정려각(旌閭閣)을 세워 넋을 기렸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정려각은 낡아 없어졌다. 그리고 높이 180㎝, 너비 45㎝, 비후 20㎝ 크기의 비는 관산읍사무소 뜰로 옮겼다. 1980년 관산 소도읍 가꾸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땅속에 묻어버렸다. 이런저런 사실이 후손들의 귀에 전해지자 차씨들은 1982년 문제의 비를 방촌리 626의 2번지로 옮겨 세웠다.
여섯 번째는 수원(水原) 백씨(白氏)다. 백씨들이 차씨들로부터 집을 사들였는지 아니면 다른 성씨로부터 사들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장흥 위씨 가운데 당동의 집터에서 살았던 청계공(淸溪公) 후손들은 한 때 백씨들과 한 마을에서 살다 성자동으로 옮겨 살았다고 한다.
집터를 되찾은 주인공은 의재공(毅齋公)이다. 그는 평소의 소원이 선조들의 태생지를 되찾은 것이다. 비록 동네가 다른 성자동에 살고 있어도 당동 집의 동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백씨들이 팔 의사가 있는지 여부를 감지해서 남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백씨들부터 집을 판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의재공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매입에 나섰다. 상대가 위씨라는 사실을 안 백씨는 값을 터무니없게 불렀다. 그래도 의재공은 기회를 놓일 수 없었다. 그는 웃돈을 얹어주고 오덕의 탄생지를 되찾은 것이다.
당동의 집터는 단순한 터가 아니다. 임씨들은 시조의 집터이자 공예태후와 수많은 선조들의 태생지이기에 특별한 의미가 서려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 터를 다시 찾아 유장지로 가꾸고 싶어 매임을 타진했던 것이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해 마을 입구에 사당 정안사(定安祠)를 지어 선조들을 기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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