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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촌과 위씨유적


방촌은 상잠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마을이다. 7개의 자연마을 중 가장 오래된 내동은 주거 및 대지 형성과정이 4단계로 구분된다고 ‘마을지’는 밝히고 있다.


첫 단계는 조선 중기인 1600년대 초반 즉 위씨 일가들이 당동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정착한 시기로 그 원형의 터는 현재 위성렬 집 자리가 되고 있다. 이 집은 22세 만회재공(晩悔齋公)이 병자호란 때 인조가 항복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한 이후 구입해 옮기면서 비롯된다.


구입할 당시 해남 마산면 산막리 출신 유명한 풍수 이의신(李懿信)을 불러 집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 때 존재공의 집터와 세분 할아버지(진사공, 청계공, 판사공)의 묘지까지 잡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곳으로의 입촌시기는 1636년 호란 직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마을 이름을 왜 방촌이라 했는가. 방촌의 순수한 우리말은 곁에 있는 마을‘곁마실’을 한자음으로 부른 것이다. 그러나 방촌이라고 부른 데는 고려시대 수령치소 곁에 있는 마을로, 이곳이 조선시대 새로운 장흥치소가 되자 주민(위씨)들이 방촌으로 오면서 마을 이름마저 옮겼다는 주장이다.



만회재께서 방촌에 보금자리를 잡은 집(위성렬)은 고려시대 정안현(定安縣)의 치소인 동헌터라서 더욱 유명하다. 이 집터는 고려 17대 인종조에 왕후 공예태후의 탄생지가 당동인지라 그 예우로 인종 8년 1130년 정안현을 장흥부로 승격해 동헌으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이 집은 그 때부터 장흥부의 치소인 동헌으로 사용한 유서 깊은 자리다. 그러나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1392년에 장흥의 치소를 현재 장흥읍으로 옮길 때까지 262년간 동헌 터였다.


한편 현재 내동, 즉 방촌리 384번지에 있는 샘은 고려 때 회주고을의 감옥에서 쓰던 샘이다. 그래서 옥에서 사용했던 샘이라는 말을 주민들이 줄여서 옥샘이라 부르는 것이다.



신기마을 앞에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 밑에 고인돌들이 원형을 이루고 있는 곳을 말한다. 이 느티나무는 고려시대 회주의 명기 명월과 옥경이 심었다 하여 ‘여기정(女妓亭)’이라 불렀는데 한말 충신 연재 송병선(宋秉璿)이 삼괴정이라 불렀다.

            

이 느티나무의 수령은 약 700여년 되며 높이가 20m, 둘레는 약 4m에 이르는데 전라남도 보호수 제 10-37호로 지정됐다. 정자는 마을 주민들의 휴식터이자 선비들이 풍월과 학문을 논하는 장소로 이용되어 왔다.



방촌은 1993년 문화체육부가 시범문화마을로 지정한 마을이다. 문화마을은 향토문화의 보존 전승과 애향정신을 고취하고,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공유하는 공동체의식을 진작시키기 위해 시범문화마을 가꾸기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와 자치단체는 문화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2003년부터 방촌에 박물관을 신축하고 있다. 박물관이 준공되면 위씨 등이 소장하고 있는 문화자료를 전시하게 된다. 이와 함께 옛 회주고을의 동헌과 옥샘, 그리고 마을 앞 도로 를 정비하는 사업도 추진할 예정이다.


한편 문화부는 1975년 존재공의 생가를 국가유형문화재로 지정, 보호관리한데 이어 전라남도는 2002년과 2003년 위성택, 위성룡, 위봉환, 위성렬씨 한옥을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이들 한옥이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그만큼 전통한옥의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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