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氏族文化硏究所 發足6年의 評價                        

 장흥 위씨 씨족문화연구소가 발족한지 어언 6년째로 접어든다. 연구소는 그간 엄청난 실적을 올렸다. 실로 어느 시대에도 감히 이루지 못한 여러 업적을 거양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연구소는 2003년 6월 18일 대종회에서 발족된 문중의 기구이다. 대종회는 2002년 4월 전국 대의원회의에서 전문 7조의「씨족문화연구소 운영준칙」을 결의해 연구소를 정식 조직으로 출범시켰다. 물론 이런 문중조직을 대종회 위찬호회장과 위자형소장의 공이 누구보다 컸다. 이제 연구소가 발족된 이후 어떤 일을 하고, 무슨 사료를 발굴했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1. 인터넷 홈페이지 開設
 연구소가 발족한 후 맨 처음 착수한 사업은 인터넷 홈페이지의 개설이다. 2003년 6월에 정식으로 발족해서 바로 개설작업에 들어갔다. 홈페이지를 개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방대한 문중 자료를 체계적으로 작성하는 것이다. 시조공의 동래기록에서부터 현재까지 1360여 년 간의 역사를 망라해야 했다. 그리고 인물과 유물유적을 비롯 종원들이 알고 싶고 궁금한 사항을 문서로 작성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작성된 기록의 원고를 문중의 전문가들이 일일이 감수해서 기록의 오류와 오․탈자를 바로잡은 과정을 3번 이상 반복해야 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한글 및 영문도매인 등록 등 오픈절차를 밟아야 했다. 거기에도 300여 만 원의 자금이 따라야 했다. 인터넷은 젊은 사람들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지 인데 연세 지긋한 위원 몇몇이 이런 일을 추진하기란 여간 버거운 사업이었다. 그러나  '이가 없으면 입염이 대신 한다' 속담처럼 2004년 5월 26일부터 「장흥 위씨」를 치면 우리 위씨의 홈 페이지가 나온다. 요즘 전국의 젊은 위씨와 심지어는 타 성씨들도 우리 홈 페이지에 들어와 문답을 주고받고 있다. 앞으로도 홈 페이지는 우리 문중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2. 長興 魏氏 要覽發刊
 연구소는 홈페이지와 함께 2004년 4월 30일「장흥 위씨 요람」2100부를 출간했다. 4,6배판 양장본 케이스로 출간된 요람은 553페이지로 1) 신지제지 2) 위씨의 유래 3) 유적순례 4) 족보 공부 5) 세거지 유래 6) 모선의 주역 7) 장학회 설립내역 8) 도문중 및 대종회 역대 임원록 9) 성씨의 한문 및 영문표기통일안 등으로 엮어졌다. 요람을 발간하는 것은 8권으로 된 대동보로는 알고 싶은 사항을 찾아보기 어려운 점을 해결하기 위해 착안해서 이루어진 사업이다. 장흥 위씨 요람은 전국의 타성씨로부터 대단히 호평을 받고 있다.  

3. 圓鑑國師 關聯史料
 圓鑑國師의 유고를 담은 「圓鑑國師集」에는 정말 귀중한 사료의 寶庫였다. 유고집에는 국사의 아버지가 고려조의 政丞이었다는 사실과 동생들의 관직과 서로 주고받은 詩도 있었다. 그리고 국사께서 원나라 황제에게 보낸 表가 5건, 축수소가 4건이나 있었다. 그 원감집은 우여곡절의 과정을 거쳐 중앙대 秦星圭교수가 1988년에 발간했지만 우리 후손들은 누구도 그런 기록이 있는지 우금까지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확인된 중요한 사료를 보자.

 1) 圓鑑國師의 아버지의 官爵
 우리 족보에는 국사의 아버지는 紹며 어머니는 原邦大夫人 宋氏(吏部員外郞 宋子沃의 딸)로 기록하고 있다. 그 이상의 기록은 아무 것도 없다. 圓鑑集의 역자인 진교수는 고려사 권23 高宗 18년(1231) 9월 癸卯條「北界馳報 蒙兵圍龍州 城中請降 副使魏玿 被虜」의 기록을 보고 몽고의 포로가 됐던 치부를 피하기 위해 이름을 玿에서 紹로 기록하지 않았나 보고 있다. 용주 부사 玿와 위씨 족보의 紹는 同音異字이나 同一人라고 한다.
 그런데 국사가 연곡린(鷰谷璘)에게 보낸 편지에서 (중략)…'제자는 禪林의 끝이요 불교계의 외로운 뿌리입니다. 아버지는 일찍이 皇朝의 朝廷에서 대우를 받아 지위는「政丞」에 이르렀고, 아들은 聖考의 시대에 은혜를 입어 여러 번 유명한 절로 옮겼습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 진교수는이에 대해 진교수는 '冲止의 아버지가 정승에 올랐다는 것은 實職이 아니라 아들 冲止 때문에 우대되어 追贈된 것으로 생각된다'고 추정했다. 연곡린은 동료 승려로 보인다.
 일국의 국사로 추앙받은 인물이 아버지의 벼슬을 밝혔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고려 때 맨 처음 政丞의 품계를 받은 인물은 신라 마지막 왕인 敬順王이다. 그가 왕건에게 請降하자 太祖는 그에게 정승의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고려의 벼슬품계에서 政丞이란 품계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현재로 보면 부총리급인 종1품으로「僉議政丞」이 있었다. 그렇다면 국사가 말한 아버지의 벼슬 政丞은 첨의정승을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p.236~7)  
 그러나 석연찮은 대목도 있다. 국사의 아버지가 政丞이었다면 왜 국사가 1293년 入寂한 후 21년(1314)에 세운 碑에 아버지의 관직이 빠져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 족보도 국사의 아버지가 행직이건 추증이건 정승을 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전혀 언급조차 않았다는 것이 이상하다. 아마 연곡린에게 보낸 서신 속에 들어있는 기록을 발견하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원감집을 번역한 진교수나 송광사 6세조를 역임해서 누구다 국사의 이력을 잘 알고 있는 불교계에서도 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2) 文凱․信凱의 官職과 卒年

 ① 郡守公 仲弟 文凱(1228~1289)
 공의 생년은 확실치 않다. 다만 맏형 원감국사가 1226년생이니 2살 터울이면 1228년생, 3살터울이면 1229년 정도가 될 것이다. 국사의 祝舍弟文凱就官韻에는「月宮丹桂最高枝 去年今年兄弟折」월궁의 계수나무 가장 높은 가지를 거년과 금년에 형제가 꺾었구나 하며 축하한 시가 있다. 이 詩(芝峯類說 文章卷)로 보면 형이 1244년(甲辰)에 春闈(禮部試)에 합격했으니 1245년(乙巳)에 장원급제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p.192)
 그러나 원감집에는 1249년(己酉 高宗9) 說(p.192)과 1260년(庚申元宗2) 說(p.26)이 있으나 후자는 오기로 보인다. 문개공은 급제 이후 開京에서 補闕(정6품)을 거쳐 맏형이 定慧社에 있을 때인 1274년쯤에 平陽郡守(전남순천)로 부임해 재직하다 황해도 海州郡守(1277년丁丑)로 옮겼으나 신병을 앓다 1289년(乙丑)에 타계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 같은 사실은 국사의「寄大朝遼東路按察副使洪公革書」에 비친다.(원감국사집 p.281~282)
 한편 史書에 나타난 文凱公의 이름이다. 高麗史에는 文卿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름의 혼동은 3형제가 모두 같다. 맏형 원개공은 元凱․元愷, 중제는 信凱․信愷․文卿, 계제 信凱는 信愷․璇 등 기록마다 다르게 표기돼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들 한문 글자가 다른 이름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국사 3형제다. 그러나 기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국사 형제는 당대에 고려의 인물집안으로 이름을 날릴 만 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정혜사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자면서 지은 시를 보자.

舍弟平陽新守文愷(凱)
 與君相別十三年= 그대와 이별한지 13년이나 지났네
 洛北江南兩杳然= 낙북, 강남으로 서로 묘연했네
 那料鷄峯風雨夜= 어찌 생각했으랴 계봉의 비바람 치는 밤에
 白頭今復對床眠= 흰머리로 이제 다시 잠자리를 같이 할 줄을


② 堂後公 季弟 信凱(1250~?)
 3형제 중 막내인 信凱公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는 않다. 우선 생졸년을 알 수 없다. 형들과 2살 터울이면 1230년생, 3살 터울이면 1232년생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과거의 급제시기도 두 형은 1244․5년과 1248․9년 說이 있지만 공의 경우는 빨라도 1250년 이후로 봐야 할 것 같다. 우리 족보에는 공에 대한 기록이 이름과 장원은 아니지만 급제했다는 사실과 후손이 끊겼다는 정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수록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圓鑑集에 의하면 공을 堂後라는 관작과 梁州郡守(경상도)로 재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원개공이 경상남도 김해시 神魚山 甘露社 주지로 있을 때 자주 만났으며, 定慧社로 옮겼을 때 마침 平陽郡守로 부임한 중제와 鷄足峯의 산사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잤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같이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詩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원감국사집 p.27)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당후공과 형의 詩를 보자.

堂後公의 詩
 世亂今年勝去年= 세상 어지러움 금년이 지난해보다 더하니
 四方何處不騷然= 사방 어느 곳인들 시끄럽지 않으리
 陟岡謾自勞相望= 메 뿌리에 올라 부질없이 바라보기도 괴로운데
 蓋被無因得共眠= 이불 덮고 같이 잠잘 인연도 없어라
國師公의 詩
 出處葵籬二十年= 나아가고 물러가면서 등지(규리)지 20년
 西湖會合豈徒然= 서호(黃山江)에서 만났으니 어찌 헛된 거이냐
 蝎來鷄足峯前詩= 계족봉 앞의 사찰(정혜사)을 오가며
 空憶當時對楊眠= 부질없이 잠자리 같이 했던 당시를 생각하네

 西湖一別幾經年= 서호에서 한번 이별한지 몇 년이 지났구나
 往日遺蹤尙宛然= 지난날 남은 자취 아직도 완연 하구나
 聞道邇來人事變= 듣건대 근래 인사가 많이 변했다 하는데
 風塵無地可安眠= 풍진 없는 곳에서 편안히 잠잘 수 있을까?

 移棲鷄嶺度三年= 계령으로 옮겨 온지 3년이 지났는데
 目斷天涯幾悵然= 하늘 끝을 바라보며 얼마나 슬퍼했는가?
 幸有茶煙禪楊在= 다행히 차 끓이는 연기와 선양은 있지만
 鬢絲何日一來眠= 백발이려니 언제 한번 와서 자려나
   〈이하 생략〉

 3) 出家의 動機와 過程에 대한 記錄
 國師가 무슨 동기로 출가했는지 궁금증이 많았다. 그 어려운 관문인 과가를 어린 나이에 장원급제한 인물로 미래가 보장된 상황이라 출가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국사에 대한 연구를 전문으로 하고 있는 학자들도 막연하게 蒙古의 침략과 사회적인 피폐상을 그 이유로 들고 있으나 본인의 實吐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런데 圓鑑集에는 출가의 동기와 과정이 두 편의 글에서 똑똑하게 나와 있다. 일단 본인의 글부터 보자.
 「定慧入院祝聖夏安居始疏」-생략- '제자는 어려서 禪藪(禪門)에 의지해 眞乘을 사모했습니다. 일찍이 여러 번  부모님께 편지를 올려 승려가 되고자 하였으나 오랜 세월에 쌓인 業障을 어찌할 수 없어 인연을 벗어날 수 없었음으로 10년 동안 末利를 추구했으나 항상 처음 마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라는 대목이 있다.(원감국사집 p.205)
 두 대목의 기록을 보면 국사는 이미 10대 때 출가를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1241년(高宗 壬寅) 17세 때 司院試를 보러 강화도임시수도에 갔을 무렵부터 과거급제가 아니라 출가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보님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10년간 관리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은 출가의 기회만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부모의 허락을 받기 위해 편지로 거듭거듭 사정해서 드디어 출가를 해서 원오국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승려생활을 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4) 圓鑑國師의 表文 및 疏文
 (1) 上大元皇帝表(曹溪山修禪社復田表, 代本社作)
 (2) 上大元皇帝謝賜復土田表(上同)
 (3) 上大元皇帝謝賜復土田表
 (4) 賀新登寶位表(本社)
 (5) 賀大駕還朝表


5)  大元皇帝 祝壽齋 및 祝壽
 족보에는 국사가 원나라 황제에게 청전표를 올렸다는 기록만 있을 뿐 실제 청전표문이 없다. 연구소는 운감국사집을 보고 국사가 원나라 황제와 고려 충렬공에게 보내고 받은 서신을 확인해 2007년 5월 하산사 대제 때「원감국사전」책자를 발행해 종원들에게 나누어 준 바 있다.
 
 (1) 祝壽齋
  ① 大元皇帝祝壽齋(謝賜復土田 大本社)p. 211
  ② 大元皇帝祝壽齋(本社行) p. 212
  ③ 大元皇帝祝壽齋(本社行) p. 214
  ④ 大元皇帝祝壽齋(國朞曹侍郞行) p. 215
 (2) 祝壽 = ①~④(p.217~220)
※ 遺稿= 詩 234首, 吟 5首, 祭文 4首, 疏 46首, 表 5首, 書答 6首, 願文 3首
   총 작품수= 303篇

 6) 三兄弟間의 주고받은 詩
 (1) 舍弟平陽新守文凱(國師의 詩)
 (2) 季弟樞院堂後琁(樞院堂이 國師에게 보낸 詩)
 (3) 同生의 詩韻에 答함(國師가 막내 동생에게 보낸 詩)
 (4) 舍弟補闕에게 보낸 시(국사가 仲弟에게 보낸 詩 2首)
 (5) 國師가 兄弟와 離別하며 지은 詩

4. 遺稿集의 南北宗人間 交流記錄
 연구소가 발족한 이후 아주 중요한 업적 중의 하나는 조상들의 유고집에 들어 있는 남북 종원 간의 주고받은 한시와 서신 등 교류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들 기록 가운데 극히 일부의 제목만 족보 지장록에 기록되어있다. 결국 있는 기록도 모르고 있었던 셈이다. 이들 유고집의 기록들은 남북종원 간의 교류사를 보다 알차게 장식할 중요한 문서들이다. 앞으로 출간될「長興 魏氏 千年世稿選集」에는 아래의 한시와 서신들이 번역돼서 누구나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1) 詠而齋(文德)= 送咸興宗人(挺振)還鄕(2首)
 (2) 書溪(伯純)= 魏上舍朞服前咸興持平(迪哲)答書(戊辰1808)
                泮村逢咸興宗人萬庵共和(2首)
 (3) 竹塢(道僩)= 咸興魏氏派譜序
 (4) 茶嵒(榮馥)= 次桂巷萬庵和韻贈咸興宗中
 (5) 春坡(瓘植)= 與咸興宗人(大源)
                與咸興宗中(2首)
 (6) 春軒(啓泮)= 咸興宗人(鍾卨)寄書來
                敬次忠烈祠新建韻(在咸興)
                送宗人(鍾卨)歸關北
                贈別咸興宗人文玉(楨瑞)
                答咸興宗人(鍾卨)(5首)
 (7) 復齋(啓玟)  送咸興宗人(鍾卨)北歸
                送咸興宗人(楨珪)歸故山序
                送咸興宗人(鍾卨)北歸書(3首)
 (8) 桂史(澤基)  贈咸興宗人
 (9) 梧軒(啓龍)  答新興宗人(6인명)
                答咸興宗人(11명 연서)
                與新興宗人大源楨戊
                奉酬咸興宗仁(鍾卨)行幰
                敬次咸興月明山忠烈祠宇韻
                與咸興宗人楨瑞惜別
                與關北宗人進煥及坊內諸族友宿
                關北宗人進煥甫來冠山數日遊臨別呼一絶以替縞紵之贈(8篇)
 (10)重窩(洪良)  贈咸興宗人進煥在弼在學在鄰
                題咸北魏(進煥)學墅軸
                和咸興宗人在弼告別韻
                答宗人進煥(4首)
                  총 30首

 5. 鶴村公이 刊行한 北道陵殿誌
 학촌공은 관북출신으로 호조참의를 지낸 인물이다. 공은 영조(英祖)의 지시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가계와 함흥지역에 산재한 유적 등을 정리해「북도능전지(北道陵殿誌)」를 발간한 주인공이다. 능전지에는 공에게 능전지를 편찬하도록 하는 왕의 교서와 공이 편찬을 마치고 쓴 간기(刊記)가 있다. 그러나 우리 문중은 그런 귀중한 유물을 지금까지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가 천년세고집을 준비하면서 지난해 12월에야 서울대 규장각에서 입수하기에 이른 것이다.  

 6. 族譜에서 漏落된 重要한 遺稿

  (1) 艮庵(世鈺) = 上疏文, 四島設鎭略, 古今島關王廟修護事上書(均役廳).廳), 大興坊鄕約序, 壬癸歎(國文歌辭)
 大同譜 誌狀錄에는 存齋公의 上疏文과 自悔歌 등 歌辭가 실려 있으나 그의 師父라 할 艮庵公의 上疏文은 실려지 않았다. 간암공의 상소문은 존재공보다 60년 전에 英祖에게 올려 비답도 받았다. 또한 균역청에 제출한 고금도관왕묘수호상서, 4도설진략, 장흥부에 올린 대흥면 향약서 등 중요한 작품들이 빠져있다. 그리고 상소문보다 2년 앞선 壬癸歎이라는 가사가 공의 작품임이 분명하나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역시 서계공의 작품인 서계공의 農疏 등도 확인해야 한다.
  (2) 書溪(伯純) = 農疏)    

 7. 壬癸歎과 金塘別曲의 著者 確認
 또 하나의 실적은 조상들의 가사작품이다. 1732년과 1733년 임자 계축년에 저술된 임계탄이라는 가사는 학계에서 작자 미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연구소는 이 작품의 저자가 간암공(艮庵公) 휘 세옥(世鈺)이 틀림없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유는 간암공이 1734년 영조대왕에게 올린 상소문의 내용과 임계탄의 가사내용이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소 측은 임계탄을 발굴한 성균관대 임형택교수에게 간암공의 상소문을 보내주는 등 저자를 확정하는데 보탬이 되도록 했다.
 다음은 금당별곡의 저자이다. 우리 족보 대동보에는 금당별곡의 저자를 삼족당(三足堂) 휘 세보(世寶)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대 이종출교수는 1967년에 삼족당의 문집에서 작자가 수우옹(守愚翁) 휘 세직(世稷)임을 밝혀냈다. 다만 우리 문중에서는 그런 줄도 모르고 1972년 임자보(壬子譜)는 물론 1999년 기묘대동보에까지 삼족당 작품으로 기록했던 것이다. 이런 중요한 기록을 학술지 등의 기록을 보고 찾아낸 것도 연구소의 중요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씨족문화연구소의 위상에 대해 몇 마디 부언하고자 한다. 지금 연구소는 대종회 부설기관이다. 대종회가 결성된 이후 참으로 눈부신 업적을 세운 것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그 중심에 위찬호회장이 있다. 그러나 씨족문화연구소는 장흥 위씨 전체의 조직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문회와 대종회의 부설이 아닌 독립기구로 일을 해야 한다고 본다. 그 길이 양쪽을 아우르면서 보다 효율적인 연구를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모두 사심 없이 본인의 제안을 검토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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