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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학술자료


2014~2015 [장흥위씨청장년BAND]에서 圓山 위정철 소장 께서 올린 글을 발췌하여 게재합니다. 홈페이지에 艮庵公 대한 기록이 문중자료실에 3회에 걸쳐 실렸지만 보완하는 차원에서 본 글을 올리게 되어 기쁘기 한이 없습니다. 存齋公에게 영향을 준 艮庵公 대해 심도깊은 연구가 선행되길 기대합니다.

艮庵公 生涯 思想

1.
艮庵公 누구인가
존재공을 병계 윤봉구선생과 사제의 연을 맺게 해준 간암공은 누구인가. 그는 판서공의 증손, 영흥부사 겸 방어사 재임 중 병조참판의 직함으로 후금의 수도 심양을 다녀온 회답사 휘 정철(
廷喆)의 손자, 남해군수 등을 역임한 휘 동전() 3남으로 1689년 서울 주자동에서 태어났다.
간암공은 아버지가 1676년 무과에 급제한 이후 1697년 총수어
閔鎭遠 보좌관으로 인연을 맺어 世交 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라면서 閔鎭安 承洙 문하에서 민씨들과 우정을 쌓으면서 수학했다. 강경공부는 물론 주역과 역사서와 오서와 비전 등을 읽으면서 폭 넓은 지식을 축적했다.  
그러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입신출세를 단념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고향인 관산으로 33세 때인 1721년 하향했다. 방촌에 정착한 후 장천재에서
詠而齋公, 剩餘翁 등과 담론하며 생활했다. 하향한지 6년 되던 해에 존재가 태어나자 아낌없이 후원했다. 1766 78세에 大興에서 타계했다.

1)
透徹 愛民 精神        
간암공은 누구보다 애민의식과 고발정신이 강한 성격이다. 하향한지 10년쯤 될 무렵인 1732년에 남해안에 상상을 초월한 가뭄이 들었다. 가뭄으로 아사자가 속출했지만 조정과 관청에서는 나 몰라라했다. 그 참상을 고발한 가사가 1732년 임신과 1733년 계유를 합쳐 임계탄
이란 것이다.
임계탄을 짓고서 1734년 입궐해서 영조에게
6 7의 상소문을 올렸다. 위씨로는 최초의 상소를 낸 주인공이다. 뿐만 아니라 해안방위를 위한 4島設鎭 균역청에 진정하는가하면 고금도의 관왕묘 수리를 건의하기도 했다. 늙어서 대덕면인 대흥방으로 이사 가서는 향약을 설행케 했다.  
존재 선생이 읽은 허다한 서책들도 따지고 보면 간암공에게 빌려 본 것이다. 특히 존재 선생의
年年行 등의 연시조는 임계탄과 흡사한 내용이다. 어쩌면 존재 선생의 성향은 간암공을 닮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후손들은 간암공을 너무도 몰라주고 있는 것이 아닌지 자괴감이 든다.

2)
門中 위한 獻身
공의 종가와 문중을 위한 정신도 나라와 애민사상만큼 헌신적이다. 존재공이 찬한 공의 행장을 보자. (중략)그 종손을 위한 정성은 참으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하찮은 한 조각의 종이이라도 종손을 잘 살도록 돕는데 자신의 집보다 우선했다.
특히 조부의 산소를 이장할 때는 부사(부사(
府使)가 소나무를 뱃다며 작은형을 폭행하자 심하게 다퉈 구속되기도 했다. 어느 날 친하게 지낸 보성현감이 장흥부를 찾았다고 그 광경을 보고 부사에게 위처사를 이러면 안 된다고 부탁해서 석방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공은 파조인 판서공의  조부 병조참판공 등 선조들의 묘비명을 병계 선생에게 의뢰해 챙겼다. 또한 존재공을 병계(
屛溪)를 사문으로 정하고, 기묘초보 서문을 친구인 공조판서 신경(申暻)이 써주도록 했다. 존재공으로 하여금 문중의 2세들을 위해 서당을 열도록 권유했다.  

3)
綺羅星 같은 親舊
간암공과 절친은 閔應洙(1684-1750)이다. 그의 가계는 화려하다. 증조는 관찰사 光勳, 조는 대사헌 著重, 부는 이조판서 鎭周이다. 그는 1710년 사마시에 장원급제한 후 정랑으로 재임 중 신임사화로 삭직됐다. 이들의 관직을 보면 판서나 관찰사가 대수롭지 않을 정도이다.
1715
년 주부정랑, 16년 증광시 병과 급제, 28
李麟左 난 때 호서안무사 종사관, 29년 충청 및 전라감사, 부제학, 31년 대사간, 32년 죽산부사, 강화유수, 33년 사은사 겸 진주사로 북경을 다녀옴, 예조참판, 대사성, 한성판윤, 병조 이조 형조판서, 우의정을 역임했다.
아버지의 상관
閔鎭遠 아들 閔亨洙 다정하다. 그는 副使 때인 1739년 영의정인 李光佐 논척하다 해남으로 찬배됐다. 그는 간암공이 사는 관산으로 와서 함께 천관산 탑산사를 찾았다. 이듬해에 풀려나 승지, 도승지, 1741년 형조참판, 황해감사 등을 역임했다.
이들 외의 민씨들도 기라성 같다.
閔鎭昌, 昌洙, 興洙, 百亨, 百昌, 百興, 百祥 등 민씨들과도 교분이 깊었었다. 이들과는 관산과 서울이라는 지리적인 거리에도 불구하고 피차간의 애정을 토로하는 서간이 38통이나 전해지고 있다. 아쉬운 것은 아직 국역조차되지 않고 있다.
花田 李縡(1680-1748) 1701(辛巳)에 문과에 급제, 검열, 헌납, 한성부윤, 함경도감사, 예조참판, 대제학, 이조참판을 지냈다. 공조참의를 역임한 신경과의 인연도 크다. 1759년 기묘초보에 공의 소개로 존재공으로 하여금 서문도  받아오게 해서 족보에 실었던 것이다. 그가 아니면 당시 관산에서 그런 일을 어느 누가 할 수 있었겠는가,  

2.
임계탄 발견경위

임계탄을 처음 발굴한 사람은 전 성균대 대동문화연구원장 임형택(
林熒澤)교수이다. 그는 2002通鑑節要, 원재는「少微家塾點校附音 通鑑節要」권5-7란 책의 이면지에 여러 잡다한 기록과 함께 적혀 있었다고 한다. 문제의 통감절요는 무신자본(戊申字本)의 책으로 처음 주조된 연대가 1668(현종 9)이니, 간행연대는 17세기로 잡을 수 있다고 했다.
책의 끝 면에
전라남도 광양군 광양면 죽림리(竹林里)의 후인(後人)이 써 넣은 기록이 있었다. 이는 이 자료가 전라남도 광양지방에서 읽혀졌던 것임을 알게 한다며 가사는 모두 14면에 걸쳐 필사(筆寫)되어 있다고 전하고 있다. 임교수는 민족문학사연구지(2003년 제22)에 그 해제를 게재하면서 임계탄 가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현실비판기사로
壬子癸丑(영조 8,9, 1732,1733)에 연이어 흉년으로 대기근이 발생한 참상 및 관의 부패와 무능을 서술했다. 제목은 그 배경시대를 취해서 붙인 것인데 창작연대 또한 바로 그 무렵으로 잡혀지는 것이다. 현재 알려진 현실비판기사로서 시대가 가장 앞서는 것으로 작가의 비판의식은 매우 심각하면서 구체성을 얻고 있다. 가사를 보자.

<
임계탄 가사전문
>
『임자계축 무전흉년 개개(
介介)히 이로이라/듣고 보는 이 경색을 삼척동도 알건마는/각골한 이 시절을 명심하여 잊지 말게/무식한 진언문(眞諺文)을 재조(才助) 없이 매와 내니/구법은 보잔하고 시불견만 적어다가/장안(長安) 대도시(大道市)예 붙이로다 백성(百姓)들아/가없는 이 시절을 무흥하나 보아스라/슬프다 고노인아 이런 시절 보았느냐/ 이 시절 만난 백성 네오 내오 다를 소냐/ 무죄한 이 백성이 무유(無遺)히 다 죽거다/이 세상 나온 뜻은 삼대흥 만나거나/백세를 살작시면 도불습유 보옵고저/태평건곤 무사시를 그 뉘 아니 원할런고

천지 삼긴 후의 고금역대 생각하니/치란흥망 다 바리고 풍흉세만 이르잔들/고적의 눈이 없어 기술할 말 없거니와/양기맥수 못 봤으니 일경구수 언제일고/구년수 지리하나 흉황세 되랴하면/ 도산의 뫼혼 제후 옥백을 잡아시며/칠년한 이심하나 살년이 되랴하면/상림도 육사책의 수천리 대우할가/옛날의 천재지변 사책의 실렸으니/범연히 지나보고 등한히 혜였더니/인상식 이 말씀은 오늘날 해혹하나/아무리 혜어봐도 이 시절의 비할넌가/병 아닌 병을 앓고 두문불출 앉았으니/시서는 때를 알아 춘양조차 길게 한다/이리 혜고 저리 혜니 살아날 길 전혀 없네/실시한 이 장주여 강개는 어디 간고/진매한 삼척검을 강인하여 빼어 잡고/태산 제일봉의 촌촌이 쉬어 올라/천하를 빙목탄식하고 영략하니/12제국 동 일우의 우리 조선 편소하다/지리도 좋거니와 예의지방이로다/ 만물이 갖췄거니 대국을 부러하랴/우리나라 팔도중의 하삼남 더욱 좋다/ ㅇㅇㅇ좋거니와 ㅇㅇㅇ절 사치한다/오십삼주 호남도의 장흥은 해읍이라/지출도 크거니와 산해진미 갖출시고/관산 삼긴 후의 낙토라 유명터니/ㅇㅇ이 비색하고 시운이 망극하야/연치 대살년의 갈수록 참혹하다/만고에 이런 시절 듣기도 처음이요/생래에 이런 시절 보기도 처음이라/슬프다 사해창생 자가의 죄악인가/위로 부모동생 아래로 처자식이/일시에 죽게 되니 이 아니 망극한가/

증전의 지낸 흉년 역력히 헤어보니/을해 병자 흉년 계사 갑오 흉년/참혹하다 하려니와 이다지 자심한가/그래도 머긴 땅이 곳곳에 남아 있고/조련한 ㅇ 흉년은 진곡(
陳穀)도 있거니와/이속이 넉넉하니 진재인들 없을런가/그 남은 허다 흉년 무수히 경력하니/천만고 이래로 이 시절 처음이다/을해수(乙亥水) 병진한(丙辰旱)은 새발의 피랏닷다/계유년 무술농형 면흉을 겨우 하니/그로사풍년이라 별허비 없을런가/조정 대의하야 탑전의 정탈하고/각도의 행관하야 양전으로 작난하니/기해년 경자년을 난리로 지내여다/그 밖의 남은 흉년 을정 지낸 후의/첩첩한 공사채는 뫼같이 쌓여 있고/골골한 우환질병 물 같이 깊었도다/십생구시 이 백성이 그리저리 살아나서/탄하느니 흉년이오 원하느니 일민이라/대한양춘 못 보아서 신해환갑 만났도다/

옛 신해 험한 시절 이 신해에 편할소냐/인언이 이러하니 의려인들 없을넌가/축룡이 남래하야 화룡을 채질 하니/한발이 사악하니 건곤이 홍로로다/산원의 불이 나니 전야 다 타거다/적지 천리하니 황겁이 절로 난다/시우를 못 얻으니 이양 어이 하리/불위농시 이 말씀 인력으로 못하리라/ 유월망 오는 비는 오호만의 그러나마/제판의 패개된 모 옮겨 두고 시험하세/남촌 북촌 사람 시각을 쟁선(
爭先)한다/슬프다 농민들아 필역 못 하야서/영악코 흉한 풍파 피해도 참혹하다/곳곳이 남은 전지 낱낱이 섯는 화곡/이 후나 무병하면 생도를 보라더니/놀랍다 멸오충이 사야이단 말가/엊그제 푸른 들이 백지순색 되겠구나/강동의 안석패을 다시 좇아 날아 온가/천재인무노공 하니 뉘라서 소재할꼬/이 조석 난계하니 후생애에 보랄소냐/추적을 펴여신들 저 요역 뉘 당하리/ㅇㅇ이 극엄하니 ㅇㅇ 어렵도다/자연이 이산하니 촌락이 가이없다/

신해동 남은 배성 임자 춘 만났구나/ㅇㅇ다 기민들아 진휼기별 들었는가/당초에 뫼흔 곡석 정비하야 받았더니/진휼청 모든 쥐가 각 창의 구멍 뚫고/주야로 나들면서 섬섬이 까먹었네/이번의 타낸 걸량 공곡으로 의포하네/적조 맡은 저 두승아 너조차 무슨 일로/공수자 만든 신 철목으로 삼겼거늘/무단이 환면하고 빙공영사 하나슨다/엊그제 관홍량이 간탐코 협애하다/변세는 변세로다 사람이 거북 되어/진창의 들어앉아 모든 쥐를 살피더니/본성이 서상이라 마침내 어이 되어/창중 진곡미를 다 주어 물러가다/녁코 잎을 굴을 삼고 모야의 장치하니/석서가 일어난들 교혈여부 뉘 있으리/실 갓 쓴 소영감은 진왕의 성을 얻어/단좌소 다방부리 지휘중의 넣어 두고/주묵을 천농하며 잔밈을 추박하니/저 아표 월시 하고 사화재 도모한다/진정사 맑게 하소 무실존명 가이 없다/진감색의 진진 창을 고비고비 다 채우니/기민아 네 죽거라 사사로 살세로다/기민아 네 죽거라 사사로 살세로다/사월 남풍의 대맥황을 믿었더니/황모는 제 병이라 일시에 편치하니/무상하다 시절이여 맥흉을 또 만나니/수익심 화익영을 과연이다 성훈이여/인명이 철석인들 이러고 보전하랴/묻노라 관인들아 이때가 어느 때냐/세미 환상 각항 받자 구미수는 무슨 일고/아무리 식년인들 신호적 무슨 일고/가소로다 즉금 수단 합몰 절호 방시로다/도탄의 빠진 백성 해가의 눈을 뜰꼬/실같은 이 목숨이 질김도 질길시고/굶고 먹고 그리저리 천행으로 살아난들/부모동생 어디가고 요서자식 더욱 섧다/눈에는 피가 나고 가슴은 불이 난다/망극다 통곡이여 도처의 참혹하다/이 몸이 황황하야 심불능정정하니/이 살세 살아나셔 이 낙세 볼똥말똥
/

이리하야 못 하리라 도로혀 풀쳐 혜자/인무원려(
人無遠慮)하면 필유근우(必有近憂) 라니/기면 빈사(旣免殯死)하고 우당(又當) 농절(農節)하니/아바 백성들아 작농을 고쳐 하자/오배채 얻은 것은 아직 자생이요/십배리 내어다가 농량종자 장만하고/진시에 권농하니 백종이 거의로다/경종을 마쳤느냐 농형을 살펴보니/ ㅇ이앙 얼마러니 ㅇㅇ이 가려로다/풍조(豊兆)가 되랴하면 근본이 이러할까/흉년의 놀랜 백성 황겁을 쓸어낸다/동녘 들 올벼 논에 상년 멸오 또 일거다/ㅇㅇ들 중 벼논에 ㅇ멸오 새끼 쳤다/어와 이 멸오여 원수엣 멸오로다/이 해에 다시 날 제 심상이 생겨시라/조벼가 없었거니 중벼가 남을런가/조중도 다 바리니 이 시절 가지로다/살년이 되려 할 제 풍파인들 없을런가/칠월 칠석풍파 불의에 대작하니/상년 유두풍파 오늘날 대를 하여/해택을 들러보니 해일포락 가이 없다/대재를 갖추올서 악수들 없을런가/ 전형이 없었거나 성천이 거의로다/화곡(禾穀)이 없었거니 복사가 거의로다/이 피재 면한 농형 긔 얼마나 남었는고/사방을 주람하니 초원의 여초로다/저 나락 사긴 멸오 이 나락의 들었구나/이 고지 비운 멸오 저 고지로 건내넌네/ 일시에 고손하니 도처의 동연하다/상강인가 적설인가 일양으로 희여게다/자심하다 대벌기는 공경조차 다 새겼네/저 앞에 너른 들은 벽해가 말랐는가/이 뒤에 높은 들은 추산이 비었는가/백곡(百穀)을 헤어보니 만무일실 이로다/고지마다 차탄이오 들마다 곡성이다/슬프다 져 곡성아 이제는 하릴없다/추풍이 건 듯 불어 오동의 엽락하니/동무를 다시 할까 서성을 망단하니/이것이 뉘 탓이라 수원 수구 할 꼬/일망 건곤의 갈 데도 없어지게/

이 시절 살펴보니 배배살년(
倍倍殺年) 다시 만나/관고도 탕진하니 진정(賑政)인들 믿을런가/아마도 못살 인생 영결회(永訣會)나 하여보세/마구 떨어 술을 사고 머리 베어 안주 사고/고지 고지 취회하니 영결회가 낙사인가/아마도 죽을 인생 영감께 진퇴마라/애닮다 우리 영감 순사또의 면분없어/감영을 가시잔들 기마가 있을런가/보선이 없었거니 동의도 난득이다/행장이 부제하니 읍민완행 권치 마라/치보를 자주하샤 공도만 믿었더니/공도 공도 아녀 인정이 공도로다/사또 제음 공명하사 우리 고을 낫다하고/부비파자 기무하니 하가자도 역동이라/이 제음 이러하니 이 아니 일가소가/금릉 산양 두 사이요 영주는 앞이로다/세 고을 정족간에 우리 고을 생겼거늘/무엇이 낫다 하고 지차읍의 분등하고/아무리 연흥인들 상납을 끊칠소냐/행관이 연속하야 각항받자 정지할라/대동 걸역미와 ㅇ환상 걸량본전/각색보미 운역과 통호역 향도역/구별구별 별음하라 일시의 독봉하니/이리하여 못 하리라 별차검독 내여코야/호효하는 호령소리 여염이 진동한다/관령 메셨거니 명분을 돌아보랴/내정의 작난하니 임진왜란 이렇던가/호수차지 면임차지 이정차지 일족차지/다 잡아 수금하고 성화로 독납하니/영가적 시절인가 하담은 무슨 일고/어와 난리로다 이 난리 뉘 당하리/천병만마 쓸데없고 만재천금 네알이라/오대재에 바린 곡물 이 난리를 면할런가/매매없어 버린 전지 저 난리를 당할런가/가장기물 약간 것을 그리저리 탕진하고/가는 유걸 오는 유걸 저 아니 피난인가/타도 각관 장정외의 이고 지고 흘렀고야/동서남북 의지 없는 저 유걸아/풍설조차 무릅쓰고 어디로 향하는가/잔풍향양 언덕 밑을 제 집같이 반기는고/쉬는 듯이 앉았다가 자오듯이 죽어지네/ 물에 빠진 저 사람은 굴원의 충절인가/뫼에 죽은 저 사람은 이제의 충절인가/노방구학 쌓인 구검 무주고혼 할 일없다/일체 비부는 군아의 소탁이요/사지 해골은 제견의 상쟁이다/소견도 참측하다 저 지경을 뉘 면할꼬/

완명이 죽잖으고 천의만 바라더니/전감사 이광덕(
李匡德, 1680-1748)이 감진사(監賑史)로 온다하니/어와 백성들아 이 아니 석저불가/전왕불망 이 백성이 선문이 흔행이라/호남경중 거래간의 물전감당 가송이라/죽마래영 몇 곳이어 백수강장 도무하네/덕택을 광포하니 각읍이 균몽이라/우리 고을 애매지차 북공자파 없어지게/백역을 정감하고 진정만 힘을 쓰니/감진사의 시인선정 이 밖에 또 없거늘/산재각처 열읍 수령 수체시행 몇몇인고/우리 고을 센 개꼬리 아무련들 황모되랴/원통코 절박할사 유비백성 무슨 죄로/죽기는 이 백성이요 기긔나니 아대부라/애달프다 감진사를 고을마다 보냈던들/가련한 저 인명을 그다지 죽이는가/사목을 색책하여 설진으로 작명할제/임오년 해 저물고 계축정월 다가온다/우리 영감 신명하사 기민호를 예지하여/인구수를 마련하여 삼등의 분정하고/정식수로 성책하라 엄준히 전령하니/요마한 존위약정 위월관령 뉘 있으리/칠팔구 있는 호를 이삼구로 초출하고/우열 없는 저 기민을 정수 외에 물리치니/성책에 못 든 기민 눈물지고 사설한들/관령 메신 저 면임이 가감을 어이 하리/장택(長澤)서 타온 걸량 종시히 이러하면/드나마나 서러마라 타나마나 파차없다/슬프다 사람들아 하루도 못 살리라/진휼청(賑恤廳)이 불휼하니 해현청이 도현이라/대동청을 근피하여 서역청을 살펴보니/□한 저 환채(還債)가 어디어디 씌여진고/일성중 누락하니 임장자의 생애로다/어와 답답하다 쇠경 도감 눈을 뜨소/복중천근 이십오는 도서원 네 알리라/쌍남추색 백여수는 각면서원 뉘 모르리/묵객흑심 병발하니 엄이투령 사재로라/위민구폐 대소사는 상사렴문 네 알리라/염치 도상하니 이 시절 하릴없다/탐천이 창일하고 욕랑이 도천하니/청백리 원 없거든 도적을 책망하랴/강보중 적자심도 기한을 알고 올 제/호생오사는 인지상정이라/기한이 절신할 제 상취위도 예사로다/무렴한 이 욕심이 부귀빈천 뉘 없으리/참 대황년 보려거든 각관장물 살펴보소/이곳저곳 부민들아 이 시절 만난 후의/친척구제 인리구제 바라보도 못하여도/조로 같은 네 인명이 양구체나 잘 하여라/말세를 생각잖고 전민에 갈망하야/위법징채 횡렴하니 후손계 장원하다/

세상을 살펴보니 시비도 부질없다/농오고맹 부울세라 엄연무지 원이로다/시절이 험난하야 사람을 다 죽일 제/참혹한 염역조차 천지의 그물 되어/기한의 남은 백성 걸리는 이 다 죽는고/이리 죽고 저리 죽고 억조군민 다 죽거다/백성이 없는 후의 국가를 어이 하리/나라이 나라아녀 백성이 나라이요/백성이 백성아녀 의식이 백성이다/의식백성 다 없으니 이 시절 어이 될꼬/유구무언하고 속수무책이라/노심초사하니 낙담상기 뿐이로다/인곡을 불변할 제 상식이 강진 뿐가/골육상잔 저 흉한 일 무수히 있건마는/여차여차 환실관장 은휘령 장할시고/옹성문을 심쇄하니 고변호소 뉘 있으리/황황한 이 시절 효효한 말 다 하자면/ 후복은 방통이요 공장은 욕단이라/항산이 없었거니 항심이 있을런가/부모는 초월이요 형제는 빙탄이다/부부는 은정 없고 노주는 분의 없다/가속을 못 살릴 제 친척을 구제하랴/사지를 못 쓰거든 적자를 업을 소냐/싸랑부리 쑥 부리 염장없이 난팽이요/송엽죽 무릇죽과 모시뿌리 느릅떡을/가지가지 장만하여 별미삼아 조석사니/채색은 만면하고 복중의 뇌명한다/이무문 목불견이 삼일불식 뿐 안이요/피육건 수골입 이마의 십배로다/전어시 죽어시는 옛 사람은 편하닷쇠/조강을 못 얻거든 전죽을 바랄소냐/삼순 구우식은 옛 사람은 헐 닷쇠/부정의 듯글나니 무엇 있어 구식할까/생사유명 어인 말고 기사도 명이런가/사지상 어인 말고 이러고 사지상가/어와 이 경상을 뉘게 다 아뢸런고
/

이런 일 저런 일을 어이하야 잊어볼꼬/단표를 손에 들고 피우나 하자 하니/주진촌은 막막하고 무능도원 묘묘하다/두류산 만수동의 이 시절 잊으리라/도리어 생각하니 생돌의 생도로다/진채탄 표루공이 천재의 소소하고/한 장군 계책없어 표모에게 기식한가/동탁의 불은 배는 혼자 풍년 만나던가/시호 천작얼을 피하고 탄할소냐/생사일도 인개유라 내 어이 유념하리/어와 남은 백성 천신만고 살아나서/천시태운 다시 만나 해민온 하온 후의/윤리강상 밝아지고 무한태평 될 줄 알면/장자방 벽곡공부 선암의 가 법문 읽고/요행 남은 저 벗님아 올해만 주공하소/진희이 천일모는 면래채 상존이다/내 역시 캐어 먹고 누었노라 올날부터/슬프다 이런 말씀 다 하자면 가이없다/주민의 황금가와 상전가 일편시를/유민도(
流民圖) 한 가지로 이 끝에 그려내어/이르자면 목이 메고 보자 하면 눈물 난다/십습 동봉하여 백배 계수하여/님 계신 구궁궁궐(九重宮闕) 들여 볼까 하노라』

3.
著者 확실한 典據
임교수는 저자에 대해 주()를 달아 당시 향촌의 지식인이라 할 영이재공을 그 주인공으로 가정(假定)한다. 그러나 영이재공은 당시 28세로 과거공부에 매진하고 있었으며, 성향(性向)으로 보아 저자로 보기 어렵다. 더구나 영이재공은 12항목의 가계(家戒) 8번에서 관장(官長)을 모만(侮慢)하지 말라9번에서 귀양객과 사귀지 말라고 당부했다. (지장록 1111)  
임계탄 가사의 학식을 가진 사람은 감암공 밖에 없었다. 더구나 가사에서
대궐을 비추겠다고 다짐했다. 이로 미루어 공이 1734년에 67실의 상소문을 들고 임금을 찾아간 사실과 전후가 분명하게 맞아 떨어진다. 단지 임교수가 위씨족보나 기타 기록에서 간암공의 상소문 등을 볼 수 없었기에 몰랐던 것이 작자 미상의 작품으로 귀결된 것이다.
그러나 학계는 임계탄의 저자에에 대해 손을 놓고 있다. 수년전에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간암공의 임계탄을 연구한 이모씨와 필자간에 논쟁을 벌인 바 있다. 그는 필자가 제시한 입증자료에도 불구하고
간암공의 작품 중 비슷한 가사작품이라도 나와야 저자로 확정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정도의 반증이면 무리가 없지 싶다.  

1)
著者 立證 傍證
공의 저술 가운데 임계탄 내용을 뒷받침할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핵심은 저술마다 구중궁궐
이 반복해서 서술된 점일 것이다.

(1)
임계탄 내용(저술연대 : 1732, 3
壬子 癸丑)
『주민(
周民)의 황금가(黃金歌)와 상전시(傷田歌) 일편시(一篇詩)/ 유민도(流民圖) 한 가지로 이 긋에 긔려 내어/ 니르자면 목이메고 보쟈하면 눈물나다/ 십습(十襲) 동봉(同封)하야 백배게수(百拜稽首)하야/ 님계신 구중궁궐(九宮宮闕)을 들여 볼가 하노라』

(2)
상소문 내용(저술연도 : 1734
甲寅)
『하물며 대궐은 어떻겠습니까. 구중구궐(
九重宮闕) 안이 비록 일월같이 밝을지라도 어찌 이러한 현상을 다 비추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신은 화공(畵工)의 솜씨가 없어 정협(鄭俠)의 그림처럼 그리는 정성을 본받지 못함이 한스럽습니다』

(3)
坊約成後上書本府(저술연도 : 1754甲戌)
『또 저희들은 해변 가에서 사는 창생(
蒼生)으로서 구중궁궐(九重宮闕)안에 까지는 의견을 올 릴 수 없습니다』

2)
流民圖 由來
'
유민도(流民圖)'는 북송 신종 때 감문(監門) 정협(鄭俠)이 극심한 기근에 떠도는 백성들의 처참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올린 데서 유래한다. 그림은 엄청난 효과를 나타냈다. 신종황제는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이 진행된 지 5년 째였던 그 해(1074), 신랄한 비판의 ''에도 흔들림 없었으나 유민도를 보고는 마침내 실패를 인정하고 신법을 철회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정협의 유민도는 기근의 참상을 군주에게 알리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유민도의 전통은 깊다. 심각한 기근이 들 때면 신하들은 정협의 유민도를 언급하며 군주의 자성을 촉구하곤 했다. 선조 9(1576)께 김성일(
金誠一) '어미가 자식과 이별하다'라는 시에서 "그 누가 유민도를 다시 베껴서, 임금에게 바치어 촛불이 되게 하랴"라고 노래한 것도 그 일면이다.

4. 6
7 上疏文 (서문)
삼가 아뢰옵니다. 소신은 바닷가에 살고 있는 비천한 신분으로 배운 것이 없어 어리석고, 지혜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마치
시국이 어지러우면 베 짜는 아낙도 베 짜는데 정신을 쏟지 않고 나라가 망하는 것을 근심 한다는 고사처럼 진실함은 뒤지지 않습니다. 하물며 임금님께서 전일 특별히 비망의 말씀을 내리셨기에 더욱 순수하다고 생각합니다.
임금님께서는 스스로를 책망하시고, 백관을 단속하신 것은 백성들의 숨겨진 근심을 불쌍히 여기시고, 멀고 가까운 거리에 사는 그들이 마음속에 쌓여있는 어려움을 진언(
進言)하도록 허락한 것은 그들의 진언을 받아들여 하루라도 빨리 고치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임금님의 한마디 말씀은 사방에 퍼져 백성들이 기뻐하고 공경하게 됩니다.
소신처럼 멀리 떨어져 사는 천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은 임금님의 말씀에 감읍(
感泣)한 나머지 감히 다리를 싸매고 서울로 올라가 대궐 밖에서라도 엎드려 고루하고 촌스런 말씀이라도 드리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번거롭고 분수를 넘을까 두려워 상소문(上疏文)을 올릴까 생각하고 대궐을 바라보고 서성거리다 여러 날이 지나갔습니다.
상소를 올리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임금님께서 정신(
廷臣)들을 꾸짖었지만 제신(諸臣)들은 한결같이 묵묵부답하며 잠잠히 있으니 개탄(慨歎)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신은 간절하고 슬픈 마음이 일어나 감히 만 번 죽기를 무릅쓰고 어리석은 정성을 바치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성명(聖明)하신 임금님께서 재택(裁擇) 하옵기 바라나이다.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이후 여러 예락과 형정은 분명하게 정리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더욱이 백성을 자식처럼 생각하시는 덕정을 펴셨습니다. 그 이유로는 무마하는 방법과 은휼(
隱恤)하는 도리를 쓰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근년들어 뜻밖에 난적이 일어나고, 가뭄이 계속되어 한 해도 편할 때가 없습니다. 어찌 이런 사태가 성군의 세대에 일어나는지 안타깝습니다.
안타까움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선 성상께서 힘을 내시어 떨치고 일어나셔 구활(
求活)하셔야 합니다. 지금은 그 정성이 전보다 배를 더하셔야 하나 백성들은 조정의 실질적인 혜택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 수고(愁苦)의 현상과 인색(吝嗇)스럽고 꽉 막힌 사정을 보면 전하에게 소상하게 지역의 사정을 모두 아뢸 길이 없으니 이 또한 애통함이 심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
)은 호남인으로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바를 진술하겠습니다. 근래 호남 일로가 타도에 비해 재해가 더욱 심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연해(沿海)의 십수읍은 매우 심각합니다. 여러 번 큰 흉년(凶年)을 겪은 뒤 설상가상으로 고질병까지 창궐해서 문을 닫고, 죽은 자가 도도합니다. 그래서 이곳 해변마을 78백리 사이에 밥 지은 연기가 사라졌습니다.
그 뿐 아니라 도로에는 굶어서 죽은 시체가 포개져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관령으로 거두어 묻었으나 미처 묻지 못한 백골잔해가 오히려 노상에 흩어져 있습니다. 보기에도 흉할 뿐만 아니라 구슬퍼 마치 전쟁을 겪은 듯합니다. 여기다 글공부 하는 사람들도 두건이 찢어지고 책이 헤어졌습니다. 그들은 굶주림을 보면서 무엇 때문에 공부를 해야 하는지 깊은 회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
걱정스러운 것은 미래입니다. 해변일대에 장차 글 읽은 사람이 끊어진다면 누가 예의를 가르쳐 계몽하고 다스리겠습니까. 선비로써 항심이 있는 자도 이럴진대 하물며 항산도 항심도 없는 자는 어떠하겠습니까. 백성들은 참으로 불쌍하고 불쌍합니다. 이렇게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지만 도신과 수재(
守宰)들은 피상적으로 알고 있을 뿐 자상하게 알지 못하니 참으로 안타까울 노릇입니다.
하물며 대궐은 어떻겠습니까. 구중구궐(
九重宮闕) 안이 비록 일월같이 밝을지라도 어찌 이러한 현상을 다 비추겠습니까? 신은 화공의 솜씨가 없어 정협의 그림처럼 그리는 정성을 본받지 못함이 한스럽습니다. 아아! 어질고 착한 백성이 굶주려 강도로 변하고, 기름진 땅이 버려져 황야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직업에 안주하지 않고 무료한 마음만 품고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예의와 염치와 떳떳한 성품은 완전히 사라지고 끝내는 윤리가 실종되었습니다. 의리는 회색(
晦塞)되어 버리고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끼리도 서로 헐뜯어 몸을 보전치 못합니다. 혹시 그런대로 편안함을 보전한 사람도 오래 한 곳에서 안주할 마음이 없습니다. 마치 바람에 풀이 쏠리는 근심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이미 땅이 무너지고 기와가 해체되는 형세입니다.
이 같은 폐단은 자못 큽니다. 호미로 풀매는 농사꾼은 없을 것이고, 독서하는 선비가 없을 것입니다. 무인(
武人)은 기예를 연마하지 않을 것이며, 공상인은 의뢰할 곳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는 결국 멸윤과 회의(晦義)로 미풍양속을 무너뜨리는 괴란(乖亂)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그것들에 대한 걱정됨이 어찌 늠연(凜然)하고 한심(寒心)하지 아니 하리요.
아아 동해의 일부가 원통함을 호소하면 3년이나 가뭄이 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호남의 일로는 국가에 진실로 근본이 되는 땅이기에 괴란의 결과는 그만큼 큽니다. 그 땅이 병들어도 구할 약이 없다면 재앙의 피해가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하늘과 땅의 부모 같은 성상께서 이 땅을 구제하기 위해 장차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지 소신은 몹시 궁금하옵니다
.

1)
上疏文 內容 要約
 
첫째, 학정(
學政)을 닦은 것이다. 호남의 인심이 좋지 못한 이유는 혹독한 흉년과 백성을 올바로 가르칠 선비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훈도의 직책을 두어 교유(敎諭)하고 진작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둘째, 방약(
坊約)을 세워 풍속을 순화하여 예의염치(禮義廉恥) 등 기강을 깨우치게 해야 한다. 곧 향약의 시행을 주장하고 있다.
 
셋째, 마을별로 이창(
里倉)을 설치해서 풍흉에 대비해야 한다. 소출할 때 많이 먹고 춘궁기에는 양식의 떨어지는 폐단을 없애자는 것이다.
 
넷째, 전재(
田災)제도를 도입, 한해나 수해 때 재해보상을 해주어야 한다. (일종의 농작물재해 보험이라 할 제도의 시행을 제안한 것이다. 당시로는 매우 선진적인 발상이다)
 
다섯째,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해안방위를 튼튼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능로군을 뽑는데 해안가 청년을 뽑으라고 요구했다
.
 
여섯째, 사치를 금지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 특히 인재등용에 영호남의 차별을 두지 말고 고루 뽑아 활용하기를 제안했다
.

2)
英祖 내린 批答
영조대왕은 간암공이 올린 상소문을 보고 다음과 같은 비답(批答)을 내렸다.그대의 육조(六條) 상소문을 살펴보니 나의 뜻에 응한 정성이 참으로 아름답다. 비변사(備邊司)에 명령하여 대책을 확정하여 올리라 하였다. 7실자(七實字)로써 힘쓰라고 경계한 것도 더욱 절실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명령하여 초서(抄書)가 끝나면 들어와 성람(省覽)토록 하라 하였다라고 했다. 비답의 핵심은 비변사에 명령해서 대책을 확정하라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은 상소문 마지막 부분에서
엄한 궁궐을 범하여 참람하고 망령된 죄를 짓고 스스로 도망갈 수 없음을 알고 있다.(중략)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오니 굽아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고 했다. 글의 내용으로 보면 공이 왕을 알현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궁궐에 들어간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입궁과 왕의 알현여부가 관심의 초점이다. 실제로 공은 상소문을 바치기 위해 상경했으니 임금을 알현하는 것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존재공이 찬한 공의 행장에는
임금이 비답을 내리고 심히 가장()함을 더하고 6조는 주사(籌司)에 내려 논의(대책)하여 올리라 하고, 7(七實)은 정원(政院)에 명령하여 뽑아서 성람하도록 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를 보면 왕을 알현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물론 존재는 간암이 상소문을 올릴 당시(1734) 8세였으니 자신이 쓴 행장의 내용처럼 직접 목격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하향한 간암의 말은 직접 들었을 것이다.
문제는 장흥 해안지방을 휩쓴 가뭄피해에 대한 정부의 조치이다. 죽기를 무릅쓰고 상소문을 올렸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구휼(
救恤)이 있었는지는 어디에도 기록이 없다. 두 가지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하나는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구휼이 소홀했을 수 있다. 영조가 등극한지 4년 만에 발생한 이린좌의 난 등으로 정부가 국토의 극변인 해안지방의 이재민들에게 충분한 구휼을 시행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5.
大興面 鄕約 設行 主導
다음은 공이 대흥면 향약을 설행한 후 장흥부사에게 올린 글이다. 글을 쓴 시기는 1754(甲戌)이다. 66세 때의 글이다. 일부 후손과 종인들은 공이 대흥면으로 이사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렇다면 아래의 글은 대흥면과 관계가 없는데 썼다는 얘기가 된다.
공은 환갑 이전에 방촌「간암정」에서 대덕 초당으로 이사해 화훼농업을 선도했으나 여의치 못했다. 이는 장천재에서 담론하며 매일 함께 지내던 잉여옹(
剩餘翁)에게 보낸 편지(答富山族姪剩餘翁 命德 辛未春 1751 : 艮庵先生文集 20)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지 않으면서 향약 설행을 주도할 수는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필자 주)

 ≪
大興面坊約成後上書本府 甲戌
 (
대흥면향약성립 후 본부에 보낸 글 1754)

삼가 생각하옵건대 저희 폐읍(
弊邑)은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여러 면()과 관문(官門)과의 거리는 비록 원근(遠近)의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극히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또 많은 선비들이 대대로 세거해온 곳이 아니라 그 풍토도 검소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조심성도 없으며 명분과 도덕의 가르침으로 유지되지 않아 풍속의 교화(敎化)가 긴요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무식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이라 하여도 익히고 보고 듣는 것이 없어서 오히려 지켜야할 삼강의 엄숙한 행실과 오상의 막중함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쇠퇴한 이 말세에 살고 있지만 떳떳하지 못한 변괴(
變怪)를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부에서 내려주시는 교화를 받들거나 스스로 혜택을 입게 되는 사족들과 더불어 살지 않아 눈으로 보고 감동을 본받지 않으니 대강 모든 일이 다 비슷하고 다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본면은 내면과 좀 다른 점은 우뚝 솟은 관악 밖의 벽지이고 넓은 바다가 있는 대양의 첫머리에 있는 궁벽한 곳입니다. 산으로 빙 둘러 있고 또 바다로 둘려 있어서 밖의 세상과는 격리되어 떨어져 있으며 작은 지역이 별계로 되어 있어서 사람들을 유도할 수도 없고 겸해서 또 읍 소재지와는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관공서의 지시라도 교화가 두루 미치기 어려우며 사족도 살고 있지 않으니 덕의로써 사람을 교화시키는 연(
)을 맺을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민속(
民俗)이 너무도 무식하여 도의의 가르침인 명교(名敎)가 무엇이며 무엇을 말하는 물사(物事)인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질(資質)과 식견(識見)이 어두움으로 문() ()가 어떠한 양식으로 만들어진 기예(技藝)인지도 모릅니다. 삼한(三韓)시대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전후 수천 년 사이에 일찍이 생원이나 진사시험인 소과(小科)에 한번이나마 시험을 치러 본적이 없었던 것은 오로지 이러한 연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질실(
質實)한 기풍은 아직까지 남아있으므로 오히려 성대에 사는 기상이 있고 인정도 아직 후하며 순박하고 고풍스러운 맛은 없질 않습니다. 농기구를 가지고 밭을 갈며 김을 매면서 오직 전답(田畓)의 일에 부지런히 힘쓸 줄만 알고 있으므로 상식도 없고 아는 것은 없으나 법대로 순종하는 늙은이들과 거의 같으니 이러한 점을 보아서는 모든 사람들이 세간의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인정이 경박한 속세보다는 도리어 낫은 점도 있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중년부터 사소하게 기로소(
耆老所)에서 소금을 전매는 이해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한없이 파락호(破落戶:행세한 집의 자손으로서 결딴난 사람)라고 하는 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게 되었고 일체 도끼를 가지고 와 작은 이익 때문에 칼과 송곳으로 싸움이 벌어지며 도리어 만촉(:작은 일로 싸움이 벌어짐)의 장을 벌어지게 됩니다. 사철 가운데 낮과 밤으로 시끄러워서 옛날 장악(莊嶽:제나라의 서울)의 거리처럼 되고 맙니다.
순량하고 인정 많은 고로(
古老)들은 거의가 다 죽고 가난에 시달린 후생(後生)들만 점점 물들어 가며 그칠 줄 모르고 일정한 주거도 없이 함부로 날뛰면서 염치(廉恥)라고는 바닥을 쓸어버린 것처럼 찾아볼 수 없고 거간꾼들만 모여들어 이욕만 챙기는 사람들로 걷잡을 수 없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들끌고 있습니다. ! ()한 일을 하기란 높은 하늘에 오르기와 같고 악()한 일을 하기는 내리막길을 달리기와 같이 쉽다고 했습니다.
오직 저들의 기거동작하며 접촉할 때나 귀와 눈으로 익히는 습관을 보면 참으로 서글퍼집니다. 우리의 순박한 풍속(
風俗)이 어떻게 하여 한 해가 다 못되어서 더욱 무너져 가고만 있습니까? 어떻게 인심이 하루가 다르게 더욱 나빠집니까? 옛날처럼 선량하던 사람들도 다시 볼 수 없고 전처럼 인정 많고 심덕이 후하게 행동하는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여기에 삼강(三綱)도 없어지고 오상(五常)도 폐절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 사이에 악(
)한 자가 심한 경우 부모가 자식을 자식으로, 남편을 남편으로, 부인을 부인으로 여기지 않으며 아울러서 그 형제(兄弟)와 숙질(叔姪)간이나 종족(宗族)과 이웃 간에 은혜와 의()마저도 모두 단절된 경우도 가끔 있으며 노소(老少)와 존비(尊卑) 귀천(貴賤)과 상하간의 명분(名分)마저 없어지고 거침없이 흘러가는 풍조를 따라 가고 있으니 극히 잘못된 풍속이 사람들에게 전이(轉移)된 것입니다.
옛날 당(
)나라 때 풍속이 척박한 땅에 농사를 적극 힘써서 그 백성들이 선량해졌고 제()나라 풍속은 해수를 끊고 이익을 쫒아가더니 그 백성들이 사나워졌다고 합니다. 민정(民情)이란 자고로 다 그러한 것입니다. 본면(本面)사람들은 어업과 염전(鹽田) 이욕의 굴로 빠져 배가 불러도 염증을 느끼지 않으며 기름진 땅에 목면(木棉)을 많이 심지 않으니 마치 제()의 풍속과 같아집니다. 그러고도 어찌 당()나라 풍속처럼 선량해질까요?
그 원인은 모두가 명교(
名敎)를 쓰레기처럼 취급하고 예법(禮法)을 쓸모없는 변모(弁髦)처럼 취급해 비롯된 것이며 또 거기에 길들려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이른바 말과 소를 대면해서 옷을 입히고 물고기와 새 짐승에게 잔뜩 밥을 먹이는 격이라고 할 것입니다. 추부자(鄒夫子:맹자)가 말씀하시기를 배불리 먹고 따뜻이 입으며 편안히 지내고 교육이 없으면 금수(禽獸)에 가깝다고 하였으니 아! 그 말이 과연 맞는 말이라 할 것입니다.
(
중략) 또 저희들은 해변 가에서 사는 창생(
蒼生)으로서 구중궁궐(九重宮闕)안에 까지는 의견을 올 릴 수는 없습니다. 오직 그 마음속에 단혈(丹血)이 울결 되고 속에만 가득 차 있으니 어떻게 이천(二天)의 아래서 하찮은 말이라도 본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천 마디 말이 비록 합당하다 하지만 오리려 관문에 가서 관인을 찍는 것만 못하고 만 마디의 말이 비록 믿을 수 있다 하여도 오히려 성주(城主)의 이름을 적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이에 감히 계안(
契案)을 가지고 영헌(鈴軒)으로 찾아가 올리오니 바라옵건대 열람하시고 비답을 내려주신다면 금당(琴堂)의 남은 덕화에 도움이 되겠으니 어찌 저희들에게 기행(祈幸)이 아니겠습니까? 동향(桐鄕)의 끼친 은혜를 송축 드리오며 반드시 장차 제()나라 백성을 위해 감축(感祝)함과 같을 것입니다.  다시 청하오니 표장(表章)으로 신의를 보여주시고 원하는 바에 의해 시행해 주시기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저희 민등(民等)은 두렵고 조심스럽게 간절히 비는 마음 뜻대로 하지 못하며 무턱대고 품하여 올리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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