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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곡성현감공(21大成, ~ ?)

  武科經歷으로 丙子亂하여 東宮入審時武臣皆不應命 커늘 獨請曰負韈盡心 하야  血塗遼野不辭라하고 遂入審陽翊衛하되 備經辛楚 하고 特除谷城縣監하다. 는 장흥군 남면이다. 병자호란 때 좌익위로써 심양에 들어가 온갖 고초를 겪고 東宮을 모시고 돌아옴에 고향과 가까운 地方官으로 임명하여 곡성현감으로 부임한지 얼마 않되 병으로 하였다.(면주 기)

도총(武科)경력으로 병자호란(1636~1637)을 당하여 1)東宮이 심양으로 들어가는데 2)익위사(翊衛司) 관원을 모두 무신만 뽑아서 任命하니 무신이 모두 분이 나서 성을 내어 말하기를 평상시에는 3)桂坊의 좋은 벼슬은 문관이 모두 탈취(奪取)하고 이제 멀리 사지에 가는 때를 당하여서는 도리어 우리들을 가게 한다고 하면서 명령에 응하지 아니하니 이 홀로 큰소리로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비록 임금의 명령이 없더라도 마땅히 앞을 다투어 자청해야 하거늘 항차 좋은 벼슬을 주어서 명령하는데 그런 소리를 하는가? 은 말고삐를 잡고 마음을 다해 도와 護衛할 것을 청하며 비록 피를 요동 땅에 바를지라도 사양하지 않겠노라하니 듣는 자들이 모두 장하게 여기었다. 좌익위로써 심양에 들어가 온갖 고초를 겪고 東宮을 모시고 돌아옴에 고향과 가까운 地方官으로 임명하여 곡성현감으로 부임한지 얼마 않되 병으로 하였다.

1)동궁 : 왕세자 소현세자를 말한다. 2)익위사(翊衛司) : 왕세자(소현세자)侍衛를 맡은 관원3)계방(桂坊) : 동궁이 있는 곳, 왕세자 익위사의 별칭.(충의록 기록)

공의 휘는 대성(大成 24世, 仁遜의 子)이다. 인조의 항복으로 호란(胡亂)이 막을 내린 후 동궁(東宮)이 인질로 청(淸)의 수도 심양으로 끌려가야 했다. 이때 동궁의 수행원을 놓고 무신(武臣) 일색으로 발탁되자 무인들의 불평이 이만저만했다. 공은 비록 "부당하기는 하지만 나라가 어려운데 문관과 무관이 다투면 되느냐"며 파견을 자원했다. 조정은 공이 파견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곡성현감(谷城縣監)으로 임명했다.(요람 기록)

 

                            <곡성군청 확인 내용>

곡성군지 표지.jpeg

곡성현감은 1487~1944년간 266명이 역임하였다. 이중 公은 제 38대(1565년 1월~7월)현감을 역임하였다. 39대 후임 현감은 이수완으로 1565년 9월~1566년 12월간 역임이 확인된다.

곡성군지 곡성현감 내용.jpeg

 

1956년 곡성군노인회에서 편집 발행한〃谷城郡誌〃우측 상단 2번째에 “魏大成”의 인명과 품계 봉렬(奉列, 정4품 하)이 확인된다. 곡성현감 재임(1565년 乙丑) 때와 병자호란 후 동궁의 청나라 심양 호성(1637년 丁丑) 시기와는 큰 차이가 있다. 곡성현(谷城縣)은 현재의 전남 곡성군 지역이다. (곡성군청 : 이은정)

 

 

                     <곡성현감공 생년 추정에 대해>

후징(22後徵)의 면주에 생졸년 없이 中進士하다. 로 기록되었다.

위후징 진사시.jpg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1585(宣祖18)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에서 위후징(魏後徵)이 진사(進士) 3(三等) 49위로 입격이 확인된다. 는 훈경(), 생년은 1553(명종8), 본관은 장흥(長興), 거주는 보성(寶城)이며, ()전 곡성현감(前 谷城縣監) 대성(大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이를 근거로 하의 생년은 1525년 안팎으로 곡성현감 재임시는 40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면주, 충의록, 요람 기록 내용은 타당하지 않다고 사료된다.(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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