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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병조참판공 교첩 4매, 교지 24매 및 유서 3매

-원소장처 : 판서공파 종택(위성렬, 호조판서공 13대 종손)

-현소장처 : 방촌유물전시관

※ 병조참판공(諱 廷喆 22세, 1583~1657) : 字는 子吉, 호(號)는 만회재(晩悔齋)이다. 호조판서공(諱 德和)과 정부인(貞夫人) 죽산安氏의 장자(長子)로 태어났다. 1603년 무과급제, 1612년 宣傳官, 1614년 사헌부감찰. 통훈대부행함평현감, 1619년 통정대부. 절충장군행용양위부사직, 1621년 절충장군행충좌위부사과겸오위장. 통정대부행곤양군수, 1623년 인조반정 참여 정사원종일등공신(靖社原從一等功臣), 1624년 이괄의 난 참여 진무원종일등공신(振武原從一等功臣), 1628년 영유현령. 안주진관병마절제도위, 1631년 병조참판 후금 회답별사로 심양 사행, 1632년 절충장군행충무위사과겸오위장, 1633년 가리포첨절제사, 1636년 영흥대도호부사겸함경남도 방어사, 1638년 숙천도호부사, 1642년 갑산도호부사. 갑산진병마첨절제사, 1643년 절충장군행만포진병마첨절제사 등 중요 관직 역임 후 1644년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방촌)후 1657년에 종년(終年)하였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창녕曺氏, 정부인(貞夫人) 진원朴氏, 정부인(貞夫人) 온성孟氏이다. 묘소(墓所)는 천관산 감시봉(550m 고지)이다. 1806년 죽천사(竹川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병조참판공의 가리포첨절제사(제 76대) 역임 : 1633년 2월~1635년 9월 간 (완도문화원 확인)

 

병조참판공 묘소, 묘갈비.jpg

 <병조참판공 묘소, 정부인 진원朴氏 合兆 및 墓碣銘>

☞ 병조참판공은 1657년 9월 21일 타계하여 원(原) 묘소는 회진 대리(舊 德島)에 있었다. 公의 配 정부인 진원朴氏의 졸년은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장자 상원군수공(諱 東峑)이 거제현령 재임 시 1694년 1월 17일 ‘母在喪事’라고 慶尙監司의 서목에서 확인된다. 정부인 진원朴氏 원(原) 묘소도 대리에 위치하였음이 추정되며, 이후 1746년 손자 송와공(諱 世琦, 1675~1747)과 간암공(諱 世鈺, 1689~1766)이 선친 상원군수공(諱 東峑, 1649~1713)의 유언(뜻)에 따라 천관산 감시봉(해발 550m) 현 장소로 이장(移葬)하였다.(국역 존재집 간암처사공 행장에서 확인됨.)

☞ 묘갈명(墓碣銘)은 장천재 평산申氏 할머님 이하 선조 묘소에서 좌측으로 200m가량 올라가면 위치한다. 국역 존재집 "간암처사공 행장"에 의하면 1758년 봄 간암공(諱 世鈺)이 70세에 선대의 업적을 널리 드러내지 못한 사실을 걱정해 전답을 팔아 병든 몸으로 장마를 므릅쓰고 증조부 호조판서공, 조부 병조참판공의 가장(家狀)을 지니고 지기 병계 윤봉구(1683~1767, 공조판서 등 역임)을 찾아가 두분의 묘갈명을 간청하여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후 간암공과 장조카 국빈공(諱 命觀, 1710~1762)의 주도로 근수(謹竪)했다고 추정된다. 우측의 오석비(烏石碑)는 좌측의 묘갈명을 근수한 후 세월이 흘러 비문 내용이 식별되지 않아 2003년 판서공파종중에서 근수하였다. 公에 대한 제향은 1993년까지 매년 陰 9.21일 묘갈명 앞에서 국빈공(諱 命觀 25세), 사락헌공(諱 伯琛 26세)과 함께 봉행(奉行)하였으나, 제향문화 변화에 따라 1994년부터는 방촌 망치산에 설단(設壇)하고 매년 4월 둘째주 일요일에 호조판서공 등 42位에 대해 합제(合祭)한다.

 

                  ■병조참판공 교첩(敎牒)■ (1)

병조참판공 효력부위.png

            <1610 광해 2년, 효력부위자 정9품>

兵曺萬曆三十七年

五月十一日奉

敎及第魏廷喆

爲効力副尉

武科丙科例加

萬曆三十八年七月日[印]

行判書 參判 參議 參知臣柳[署押] 正郞 佐郞臣睦[署押]

●내용 및 특징

1610년(광해 2) 7월에 兵曹에서, 1609년 5월 11일에 내린 왕명을 받들어 魏廷喆에게 효력부위(効力副尉)의 품계를 내리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효력부위는 정9품 서반(西班) 무관(武官)에게 주던 품계이다. 위정철이 무과(武科) 병과(丙科)로 급제했기 때문에 관례대로 품계를 가자(加資)한다고 연호 옆에 부기(附記)되어 있다.

 

                  ■병조참판공 교첩(敎牒)■ (2)

병조참판공 분순부위.png

          <1611 광해 3년, 분순부위자 종7품>

兵曺萬曆三十八年八

月初一日奉

敎守門將效力副尉

魏廷喆爲奮順副

尉者

庚四二庚四別加領差兼司僕時己六別加幷超

萬曆三十九年正月日[印]

行判書 參判 參議 參知臣李[署押] 正郞臣琴[署押] 佐郞

●내용 및 특징

1611년(광해 3) 1월에 兵曹에서, 1610년 8월 1일에 내린 왕명을 받들어 守門將效力副尉 魏廷喆에게 분순부위(奮順副尉)의 품계를 내리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수문장은 조선시대 도성 및 궁궐의 각 문을 지키던 관직이다. 효력부위(效力副尉)는 정9품 西班 무관에게 주던 품계이며, 분순부위는 종7품 서반 무관에게 주던 품계이다. 연호 옆에 "庚四二庚四別加"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경술년(庚戌年, 1610년) 4월에 두 차례에 품계를 올려주었고, 또한 그 아래에 "領差兼司僕時己六別加"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영차겸사복에 있을 때인 기유년(己酉年, 1609년)에 6월에도 특별히 품계를 올려주었음을 알 수 있다.

☞ 분순부위(奮順副尉) : 조선시대 종칠품(從七品) 서반(西班) 무관(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해당 관직으로는 오위(五衛)의 부사정(副司正), 선전관청(宣傳官廳)의 선전관(宣傳官), 세손위종사(世孫衛從司)의 좌종사(左從史)·우종사(右從史) 등이 있었다. 처(妻)에게는 안인(安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같은 종7품으로 문관에게는 계공랑(啓功郞), 무관에게는 분순부위(奮順副尉), 잡직에게는 문관에 승무랑(承務郞), 무관에 선용부위(宣勇副尉), 토관직(土官職)에게는 문관에 주공랑(注功郞), 무관에 수의도위(守義徒尉)가 주어졌다.

 

                  ■병조참판공 교첩(敎牒)■ (3)

병조참판공 여절교위.png

          <1611 광해 3년, 여절교위자 종6품 上>

兵曺萬曆三十九年

正月二十日奉

敎守門將奮順副尉

魏廷喆爲勵節

校尉者

三庚四庚五別加仕加幷招

萬曆三十九年月日[印]

行判書 參判 參議臣尹[署押] 參知 正郞 佐郞臣睦[署押]

●내용 및 특징

1611년(광해 3)에 兵曹에서, 1월 20일에 내린 왕명을 받들어 守門將奮順副尉 魏廷喆에게 勵節校尉의 품계를 내리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수문장은 조선시대 도성 및 궁궐의 각 문을 지키던 관직이다. 분순부위(奮順副尉)는 종7품 西班 무관에게 주던 품계이고, 여절교위(勵節校尉)는 종6품 서반 무관에게 주던 상계(上階) 품계이다. 연호 옆에 "三庚四庚五別加仕加"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경술년(庚戌年 1610) 5월에 두 차례에 품계를 올려주었음을 알 수 있다.

☞ 여절교위(勵節校尉) : 조선시대 종육품(從六品) 서반(西班) 무관(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종육품의 상계(上階)로서 병절교위(秉節校尉)보다 상위 자리이다.

해당 관직으로는 선혜청(宣惠廳)의 낭청(郞廳), 오위(五衛)의 부장(部將)·부사과(副司果), 훈련원(訓練院)의 주부(主簿), 선전관청(宣傳官廳)의 선전관(宣傳官),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좌위수(左衛率)·우위수(右衛率), 세손위종사(世孫衛從司)의 좌장사(左長史)·우장사(右長史), 수문장청(守門將廳)의 수문장(守門將), 훈련도감(訓鍊都監)·양향청(糧餉廳)·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종사관(從事官), 포도청(捕盜廳)의 좌종사관(左從事官)·우종사관(右從事官), 팔도(八道)의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판관(判官)·감목관(監牧官) 등이 있었다. 병마절제도위, 판관, 감목관의 일부는 예겸(例兼)하였다. 처(妻)에게는 의인(宜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병조참판공 교첩(敎牒)■ (4)

병조참판공 현신교위.png

          <1611 광해 3년, 현신교위자 종5품 上>

兵曹萬曆三十九年十二月

初八日奉

敎守門將敦勇校尉

魏廷喆爲顯信校

尉者

辛八辛十別加幷招

萬曆三十九年十二月日[印]

判書 參判 參議 參知臣吳[署押] 正郞 佐郞臣崔[署押]

●내용 및 특징

1611년(광해 3) 12월 兵曹에서, 12월 8일에 내린 왕명을 받들어 守門將敦勇校尉 魏廷喆에게 顯信校尉의 품계를 내리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수문장은 조선시대 도성 및 궁궐의 각 문을 지키던 관직이다. 돈용교위(敦勇校尉)는 정6품 西班 무관에게 주던 上階 품계이고, 현신교위(顯信校尉)는 종5품 西班 무관에게 주던 上階 품계이다. 연호 옆에 "辛八辛十別加"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신해년(辛亥年 1611) 8월과 10월에 품계를 올려주었음을 알 수 있다.

☞ 현신교위(顯信校尉) : 조선시대 종오품(從五品) 서반(西班) 무관(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종오품의 상계(上階)로서 창신교위(彰信校尉)보다 상위 자리이다.

해당 관직으로는 중추부(中樞府)·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도사(都事), 오위(五衛)의 부사직(副司直), 훈련원(訓練院)의 판관(判官), 선전관청(宣傳官廳)의 선전관(宣傳官),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좌사어(左司禦)·우사어(右司禦) 등이 있었다.

처(妻)에게는 공인(恭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병조참판공 교지(敎旨)■ (5)

병조참판공 선략장군행충좌위부사과.png

 <1612 광해 4년, 선략장군행충좌위부사과자 종4품 下>

敎旨

魏廷喆爲宣

略將軍行忠

佐衛副司果

(壬)五別加

萬曆四十年五月二十二日[印]

●내용 및 특징

1612년(광해 4) 5월 22일에 光海君이 魏廷喆에게 宣略將軍行忠佐衛副司果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선략장군(宣略將軍)은 종4품 西班 무관에게 주던 下階 품계이고, 충좌위부사과(忠佐衛副司果)는 조선시대 五衛에 속한 충좌위의 종6품 무관직이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으므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 앞에 '行'자를 붙였다. 연호 옆에 "壬五別加"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자년(壬子年 1612) 5월에 품계를 올려주었음을 알 수 있다.

☞ 선략장군(宣略將軍) : 조선시대 종사품(從四品) 서반(西班) 무관(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종사품의 하계(下階)로서 정략장군(定略將軍)보다 아래 자리이다.

해당 관직으로는 중추부(中樞府)·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경력(經歷), 오위(五衛)의 부호군(副護軍), 훈련원(訓練院)의 첨정(僉正), 선전관청(宣傳官廳)의 선전관(宣傳官),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총융청(摠戎廳)·북한산성(北漢山城)·경리청(經理廳)·총리영(摠理營)·수어청(守禦廳)·관리영(管理營)·진무영(鎭撫營)의 파총(把摠), 금위영·어영청의 외방겸파총(外方兼把摠), 팔도(八道)의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병마만호(兵馬萬戶)·수군동첨절제사(水軍同僉節制使)·수군만호(水軍萬戶) 등이 있었다. 병마·수군동첨절제사의 일부는 예겸(例兼)하였다. 처(妻)에게는 영인(令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충좌위(忠佐衛) : 조선시대 오위(五衛)의 전위(前衛)로서 두었던 군대이다. 그 휘하에 충의위(忠義衛)·충찬위(忠贊衛)·파적위(破敵衛)의 군사 2,500명을 둔 부대는 5부(部)로 나누어서 배치하여 서울의 남부와 전라도 전주진관(全州鎭管)의 군사는 중부, 순천진관(順天鎭管)의 군사는 좌부, 나주진관(羅州鎭管)의 군사는 우부(右部), 장흥(長興)·제주(濟州) 진관의 군사는 전부(前部), 남원(南原) 진관의 군사는 후부에 속하였으며, 1부는 다시 4통(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 부대는 위장(衛將:종2품)의 지휘 아래, 각 부는 부장(部長:종6품)이 통솔하였다.

☞ 부사과(副司果) : 조선시대 5위(五衛)에 두었던 종6품 무관직이다. 관계상(官階上)으로는 여절(勵節)·병절교위(秉節校尉)라고 별칭하였고, 태종 때에는 섭부 사직(攝副司直)이라 하였다. 5위체계가 갖추어지면서 1466년(세조 12) 관제개혁 때 종6품 부사과로 개칭되어 법제화하였다. 《경국대전》 당시의 정원은 176명이었으나 5위의 기능이 유명무실하게 되자 그 수가 183명으로 늘어났다. 후기에 5위가 무보직자에게 녹봉(祿俸)을 주기 위한 기관으로 바뀜에 따라, 부사과에도 친공신(親功臣)·승습군(承襲君)·공신적장(功臣嫡長)·군관·금군(禁軍) 등 보직이 없는 문관(文官)·무관(武官)·음관(蔭官)·잡직(雜職) 등이 등용되었다.

 

                    ■병조참판공 교지(敎旨)■ (6)

병조참판공 정략장군행충무위부사과.png

 <1612 광해 4년, 정략장군행충무위부사과자 종4품 上>

敎旨

魏廷喆爲定

略將軍行

忠武衛副司

果者

萬曆四十年七月初三日[印]

●내용 및 특징

1612년(광해 4) 7월 3일에 光海君이 魏廷喆에게 定略將軍行忠武衛副司果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정략장군(定略將軍)은 종4품 西班 무관에게 주던 上階 품계이고, 충무위부사과(忠武衛副司果)는 조선시대 五衛에 속한 충무위의 종6품 무관직이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으므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 앞에 '行'자를 붙였다.

☞ 정략장군(定略將軍) : 조선시대 종사품(從四品) 서반(西班) 무관(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종사품의 상계(上階)로서 선략장군(宣略將軍)보다 상위 자리이다.

해당 관직으로는 중추부(中樞府)·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경력(經歷), 오위(五衛)의 부호군(副護軍), 훈련원(訓練院)의 첨정(僉正), 선전관청(宣傳官廳)의 선전관(宣傳官),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총융청(摠戎廳)·북한산성(北漢山城)·경리청(經理廳)·총리영(摠理營)·수어청(守禦廳)·관리영(管理營)·진무영(鎭撫營)의 파총(把摠), 금위영·어영청의 외방겸파총(外方兼把摠), 팔도(八道)의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병마만호(兵馬萬戶)·수군동첨절제사(水軍同僉節制使)·수군만호(水軍萬戶) 등이 있었다. 병마·수군동첨절제사의 일부는 예겸(例兼)하였다. 처(妻)에게는 영인(令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 충무위(忠武衛) : 조선시대의 오위(五衛) 중 후위(後衛)인 정규군이다. 정병(正兵)으로 구성된 충순위(忠順衛)와 600명으로 이루어진 장용위(莊勇衛)를 예하에 두었다. 충무위는 다시 5부(部)로 나누어 서울 북부와 함경도 북청진관(北靑鎭管)의 군사는 중부, 갑산(甲山)·삼수(三水)·혜산진(惠山鎭) 진관의 군사는 좌부, 온성(穩城)·경원(慶源)·경흥(慶興)·유원(柔遠)·미전(美錢)·훈융(訓戎) 진관의 군사는 우부, 경성(鏡城)·부령(富寧)·회령(會寧)·종성(鐘城)·고령(高嶺)·동관(潼關) 진관의 군사는 전부(前部), 영흥(永興)·안변(安邊) 진관의 군사는 후부에 속해 있었는데, 각 부는 다시 4통(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위(衛)는 위장(衛將:종2품)이, 부는 부장(部將:종6품)이 통솔하였다.

 

                  ■병조참판공 교지(敎旨)■ (7)

병조참판공 소위장군무신겸선전관.png

  <1612 광해 4년, 소위장군무신겸선전관자 정4품 下>

敎旨

魏廷喆爲昭威

將軍武臣兼宣

傳官者

副司果時壬六壬十別加幷招

萬曆四十年 月 日[印][署押]

●내용 및 특징

1612년(광해 4)에 光海君이 魏廷喆에게 昭威將軍武臣兼宣傳官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소위장군(昭威將軍)은 정4품 西班 무관에게 주던 下階 품계이고,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은 조선시대 선전관청(宣傳官廳)에서 무직승지(武職承旨) 구실을 담당한 관직으로 무관과 선전관을 겸직했다. 연호 옆에 "副司果時壬六壬十別加"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사과에 재직했던 임자년(壬子年 1612) 6월과 10월에 품계를 올려주었음을 알 수 있다.

☞ 소위장군(昭威將軍) : 조선시대 정사품(正四品) 서반(西班) 무관(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정사품의 하계(下階)로서 진위장군(振威將軍)보다 아래 자리이다.

해당 관직으로는 오위(五衛)의 호군(護軍), 선전관청(宣傳官廳)의 선전관(宣傳官), 충청도(忠淸道)·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황해도(黃海道)의 수군우후(水軍虞侯) 등이 있었다. 처(妻)에게는 영인(令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병조참판공 교지(敎旨)■ (8)

병조참판공 봉렬대부행통례원인의.png

  <1614 광해 6년, 봉렬대부행통례원인의자 정4품 下>

敎旨

魏廷喆爲奉

列大夫行通

禮院引儀者

萬曆四十二年三月二十三日[印]

●내용 및 특징

1614년(광해 6) 3월 23일에 光海君이 魏廷喆에게 奉列大夫行通禮院引儀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봉렬대부(奉列大夫)는 정4품 東班 문관에게 주던 下階 품계이고,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는 조선시대 국가의례를 관장하던 통례원의 종6품 관직이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으므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 앞에 '行'자를 붙였다.

☞ 봉렬대부(奉列大夫) : 조선시대 정사품(正四品) 동반(東班) 문관(文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정사품의 하계(下階)로서 봉정대부(奉正大夫)보다 아래 자리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이후로 문관에게만 주다가,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종친(宗親: 임금의 4대손까지의 친족)에게도 이 품계를 주었다. 해당 관직으로는 종친부(宗親府)·풍저창(豊儲倉)·광흥창(廣興倉)·전설사(典設司)의 수(守), 종친부의 전첨(典籤), 의정부(議政府)의 사인(舍人), 규장각(奎章閣)의 직각(直閣), 사헌부(司憲府)의 장령(掌令), 경연청(經筵廳)의 시강관(侍講官),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의 응교(應敎),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진선(進善)·필선(弼善)·겸필선(兼弼善),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의 좌익선(左翊善)·우익선(右翊善), 성균관(成均館)의 사예(司藝)·사업(司業), 춘추관(春秋館)의 편수관(編修官), 통례원(通禮院)의 봉례(奉禮), 사옹원(司饔院)·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예빈시(禮賓寺)·전설사의 제검(提檢), 종학(宗學)의 도선(導善) 등이 있었다. 직각, 시강관, 예문관응교, 세손강서원우익선, 편수관, 도선은 모두 예겸(例兼)하였다. 처(妻)에게는 영인(令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 통례원(通禮院) : 조선시대 정삼품아문(正三品衙門)으로 예절(禮節)과 의식(儀式)에 관한 일을 관장한다. 1392년(태조 1)에 설치되었다. 통례원(通禮院) 관원으로는 좌·우통례(左右通禮: 正三品) 각 1원, 상례(相禮: 從三品) 1원, 익례(翊禮: 從三品) 1원[속대전에서 신설]이며, 봉례(奉禮: 正四品)가 1원인데 속대전에서 삭감했으며, 찬의(贊儀: 正五品)가 1원, 인의(引儀: 從六品)가 8원인데 속대전에서 2원으로 감원했고, 대전회통에서 8원으로 증원했고, 겸인의(兼引儀: 從九品) 6원, 가인의(假引儀: 從九品) 6원으로 되어 있다. 이속(吏屬)으로 서원(書員) 6인, 서리 8인이었으나, 속대전에서 서원으로 낮추고 4인으로 감원, 대전회통에서 서원 6인으로 증원, 고직(庫直) 1명, 사령(使令) 10명, 군사(軍士) 1명이 있었다.

 

                   ■병조참판공 교지(敎旨)■ (9)

병조참판공 중훈대부행통례원인의.png

 <1614 광해 6년, 중훈대부행통례원인의자, 종3품 下>

敎旨

魏廷喆爲中

訓大夫行通

禮院引儀者

萬曆四十二年四月初五日[印]

父魏德和宣武原從功臣三等加扈聖原從功臣三

等加幷超

●내용 및 특징

1614년(광해 6) 4월 5일에 光海君이 魏廷喆에게 中訓大夫行通禮院引儀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중훈대부(中訓大夫)는 종3품 東班 문관에게 주던 下階 품계이고,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는 조선시대 국가 의례를 관장하던 통례원의 종6품 관직이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으므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 앞에 '行'자를 붙였다. 연호 옆의 부기(附記)를 보면 위정철은 아버지 魏德和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과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3등에 더해져서 관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 중훈대부(中訓大夫) : 조선시대 종삼품(從三品) 동반(東班) 문관(文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종삼품의 하계(下階)로서 중직대부(中直大夫)보다 아래 자리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이후는 문관에게만 주다가,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종친(宗親: 임금의 4대손까지의 친족)과 의빈(儀賓: 임금의 사위)에게도 이 품계를 주었다. 해당 관직으로는 종친부(宗親府)·돈령부(敦寧府)·봉상시(奉常寺)·사복시(司僕寺)·군기시(軍器寺)·사섬시(司贍寺)·군자감(軍資監)·관상감(觀象監)·전의감(典醫監)·사역원(司譯院)·선공감(繕工監)·사도시(司䆃寺)·사재감(司宰監)·제용감(濟用監)·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예빈시(禮賓寺)의 부정(副正), 의빈부(儀賓府)의 첨위(僉尉), 규장각(奎章閣)의 직각(直閣), 사헌부(司憲府)의 집의(集議), 사간원(司諫院)의 사간(司諫), 홍문관(弘文館)의 전한(典翰), 성균관(成均館)의 사성(司成), 춘추관(春秋館)의 편수관(編修官), 승문원(承文院)의 참교(參校), 통례원(通禮院)의 상례(相禮)·익례(翊禮), 사옹원(司饔院)의 제거(提擧), 팔도(八道)의 도호부사(都護府使), 숭의전(崇義殿)의 사(使) 등이 있었다. 직각, 편수관은 모두 예겸(例兼)하였다. 처(妻)에게는 숙인(淑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병조참판공 교지(敎旨)■ (10)

병조참판공 통훈대부행통례원인의.png

  <1614 광해 6년, 통훈대부행통례원인의자 정3품 下>

敎旨

魏廷喆爲通

訓大夫行通

禮院引儀者

萬曆四十二年四月十七日[印]

武臣兼宣傳官時癸七癸十一別加幷超

●내용 및 특징

1614년(광해 6) 4월 17일에 光海君이 魏廷喆에게 通訓大夫行通禮院引儀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통훈대부(通訓大夫)는 정3품 東班 문관에게 주던 下階 품계이고,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는 조선시대 국가 의례를 관장하던 통례원의 종6품 관직이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으므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 앞에 '行'자를 붙였다. 연호 옆의 부기(附記)를 보면 위정철은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에 재직하던 계축년(癸丑年 1613) 7월과 11월에 특별히 품계를 올려주었음을 알 수 있다.

☞ 통훈대부(通訓大夫) : 조선시대 정삼품(正三品) 동반(東班) 문관(文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정삼품의 하계(下階)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보다 아래 자리로 당하관(堂下官)의 최상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이후로 문관에게만 주다가,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종친(宗親: 임금의 4대손까지의 친족)과 의빈(儀賓: 임금의 사위)에게도 이 품계를 주었다. 해당 관직으로는 종친부(宗親府)·돈령부(敦寧府)·봉상시(奉常寺)·종부시(宗簿寺)·사옹원(司饔院)·내의원(內醫院)·상의원(尙衣院)·사복시(司僕寺)·군기시(軍器寺)·사섬시(司贍寺)·군자감(軍資監)·장악원(掌樂院)·관상감(觀象監)·전의감(典醫監)·사역원(司譯院)·선공감(繕工監)·사도시(司䆃寺)·사재감(司宰監)·제용감(濟用監)·내자시(內資寺)·사섬시(司贍寺)·예빈시(禮賓寺)의 정(正), 의빈부(儀賓府)의 부위(副尉)·첨위(僉尉), 규장각(奎章閣)의 직각(直閣), 교서관(校書館)의 대교(待敎),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의 직제학(直提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보덕(報德)·겸보덕(兼輔德),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의 좌유선(左諭善)·우유선(右諭善), 성균관(成均館)의 좨주(祭酒), 춘추관(春秋館)의 편수관(編修官), 승문원(承文院)의 판교(判校), 통례원(通禮院)의 좌통례(左通禮)·우통례(右通禮), 사옹원의 제거(提擧), 팔도(八道)의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목사(牧使) 등이 있었다. 직각, 대교, 직제학, 편수관은 모두 예겸(例兼)하였다. 처(妻)에게는 숙인(淑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병조참판공 교지(敎旨)■ (11)

병조참판공 통훈대부행사헌부감찰.png

  <1614 광해 6년, 통훈대부행사헌부감찰자 정3품 下>

敎旨

魏廷喆爲通訓

大夫行司憲

府監察者

萬曆四十二年四月十九日[印]

●내용 및 특징

1614년(광해 6) 4월 19일에 光海君이 魏廷喆에게 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통훈대부(通訓大夫)는 정3품 東班 문관에게 주던 下階 품계이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현 검찰청)은 조선시대 언론 활동, 풍속 교정, 백관에 대한 규찰과 탄핵 등을 관장한 사헌부의 종6품 관직이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으므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 앞에 '行'자를 붙였다.

☞ 사헌부(司憲府) : 조선시대 종이품아문(從二品衙門)으로 시정(時政)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밝히고, 관리들의 비행과 불법행위를 따져 살피는 동시에 어지러운 풍속을 바로잡고, 백성들이 원통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이를 풀어 주며, 지위를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것을 막는 등 국정 전반에 걸쳐 힘이 미치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업무를 처리했다. 즉 관리들의 비행에 대한 탄핵검찰권과 일반 범죄에 대한 검찰권, 인사와 법률 개편에 대한 동의권·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서경권(署經權)까지 가지고 있었다.

감찰을 각사(各司)나 지방에 파견하여 부정을 적발하고 그에 대한 법적 조치를 취하는 등 사법권이 있다 하여 형조(刑曹)·한성부(漢城府)와 더불어 삼법사(三法司)라고도 불렀다. 또한 사헌부와 사간원(司諫院)을 병칭하여 그 관원을 모두 대간(臺諫)이라 불렀고, 사간원·홍문관과 함께 삼사(三司)라고 불렀다. 1392년(태조 1)에 중추부(中樞府)의 남쪽에 설치하여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사간원과 함께 의정부 소속의 도찰원(都察院)으로 개편되면서 폐지하였다. 사헌부(司憲府) 관원으로는 대사헌(大司憲: 從二品), 집의(執義: 從三品) 각 1원, 장령(掌令: 正四品), 지평(持評: 正五品) 각 2원, 감찰(監察: 正六品) 13원으로 되어 있다. 특히, 감찰은 문관 3, 무관 5, 음관(蔭官) 5인으로 구성한다. 이속(吏屬)으로 서리(書吏) 25인[경국대전에서는 39인을 두었으나 대전통편에서 55인으로 증원, 대전회통에서 25인으로 감원], 서사(書寫) 2인, 소유(所由) 33명, 군사(軍士) 3명이 있었다.

 

               ■병조참판공 교지(敎旨)■ (12)

병조참판공 통훈대부행함평현감.png

  <1614 광해 6년, 통훈대부행함평현감자 정3품 下>

敎旨

魏廷喆爲通

訓大夫行咸

平縣監者

萬曆四十二年七月初四日[印]

●내용 및 특징

1614년(광해 6) 7월 4일에 光海君이 魏廷喆에게 通訓大夫行咸平縣監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통훈대부(通訓大夫)는 정3품 東班 문관에게 주던 下階 품계이고, 현감(縣監)은 조선시대 지방행정구역 단위였던 현을 다스리던 종6품 관직이다. 함평(咸平)은 지금의 전라남도 함평군이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으므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 앞에 '行'자를 붙였다.

 

                 ■병조참판공 교지(敎旨)■ (13)

병조참판공 통정대부.png

        <1619 광해 11년, 통정대부자 정3품 上>

敎旨

魏廷喆爲

通政大夫

萬曆四十七年六月十一日[印]

禿城軍官別措軍器監董効力之功極爲可嘉

加資事承

●내용 및 특징

1619년(광해 11) 6월 11일에 光海君이 魏廷喆에게 通政大夫의 품계를 내리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통정대부는 정3품 東班 문관에게 주던 上階 품계이다. 연호 옆의 부기(附記)를 보면 위정철은 군기를 나누어 두고 감독한 공(功)이 있어 가자(加資)하였음을 알 수 있다.

☞ 통정대부(通政大夫) : 조선시대 정삼품(正三品) 동반(東班) 문관(文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정삼품의 상계(上階)로서 통훈대부(通訓大夫)보다 상위 자리로 당상관(堂上官)의 말미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이후로 문관에게만 주다가,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종친(宗親: 임금의 4대손까지의 친족)과 의빈(儀賓: 임금의 사위)에게도 이 품계를 주었다. 해당 관직으로는 종친부(宗親府)·돈령부(敦寧府)의 도정(都正), 의빈부(儀賓府)의 부위(副尉)·첨위(僉尉), 종친부·상서원(尙瑞院)의 정(正), 비변사(備邊司)·교서관(校書館)·승문원(承文院)·사옹원(司饔院)·내의원(內醫院)·상의원(尙衣院)·전옥서(典獄署)의 부제조(副提調), 육조(六曹)의 참의(參議), 병조(兵曹)의 참지(參知), 규장각(奎章閣)의 직제학(直提學), 승정원(承政院)의 도승지(都承旨)·좌승지(左承旨)·우승지(右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우부승지(右副承旨)·동부승지(同副承旨), 장예원(掌隷院)의 판결사(判決事), 사간원(司諫院)의 대사간(大司諫), 경연청(經筵廳)의 참찬관(參贊官), 홍문관(弘文館)의 부제학(副提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찬선(贊善),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의 좌유선(左諭善)·우유선(右諭善), 성균관(成均館)의 대사성(大司成), 춘추관(春秋館)의 수찬관(修撰官) 등이 있었다. 부제조, 직제학, 참찬관, 수찬관, 상서원정은 모두 예겸(例兼)하였다. 처(妻)에게는 숙부인(淑夫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병조참판공 교지(敎旨)■ (14)

병조참판공 절충장군행용양위부사직.png

 <1619 광해 11년, 절충장군행용양위부사직자 정3품 上>

敎旨

魏廷喆爲折

衝將軍行龍

驤衛副司直

萬曆四十七年六月十一日[印]

●내용 및 특징

1619년(광해 11) 6월 11일에 光海君이 魏廷喆에게 折衝將軍行龍驤衛副司直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절충장군(折衝將軍)은 정3품 西班 무관에게 주던 上階 품계이고, 용양위부사직(龍驤衛副司直)은 조선시대 五衛에 속한 용양위의 종5품 무관직이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으므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 앞에 '行'자를 붙였다.

☞ 절충장군(折衝將軍) : 조선시대 정삼품(正三品) 서반(西班) 무관(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정삼품의 상계(上階)로서 어모장군(禦侮將軍)보다 상위 자리로 당상관(堂上官)의 말미이다. 정삼품 위로는 문산계의 동반 품계를 받았다. 해당 관직으로는 중추부(中樞府)의 첨지사(僉知事), 준천사(濬川司)의 도청(都廳), 훈련원(訓練院)의 도정(都正), 선전관청(宣傳官廳)의 선전관(宣傳官),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호위청(扈衛廳)·수어청(守禦廳)·관리영(管理營)의 별장(別將), 훈련도감의 국별장(局別將),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총융청(摠戎廳)·관리영·진무영(鎭撫營)의 천총(千摠), 어영청의 별후부천총(別後部千摠), 금위영·어영청의 기사장(騎士將), 총융청·수어청의 진영장(鎭營將), 북한산성(北漢山城)·경리청(經理廳)의 관성장(管城將), 수어청(守禦廳)·관리영·진무영의 중군(中軍), 관리영·진무영의 종사관(從事官) 등이 있었다. 도청, 별후부천총, 종사관 등은 모두 예겸(例兼)하였다. 처(妻)에게는 숙부인(淑夫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 용양위(龍驤衛) : 조선 초·중기에 군사조직의 근간을 이루었던 오위(五衛)의 하나이다. 조선 건국 초에 중앙군 조직으로 십위(十衛)가 설치되고 그것이 1394년(태조 3) 십사(十司)로 개편될 때에 그 가운데 용양순위사(龍驤巡衛司)가 나타난다. 그 뒤 중앙군 조직은 여러 번의 변화를 거친 뒤 1451년(문종 1)에 오사(五司)로 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용양사(龍驤司)이었고, 이것이 1457년(세조 3)에 용양위로 개편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용양위의 소속 병종(兵種)은 별시위(別侍衛)와 대졸(隊卒)이었고, 또한 관할지역으로는 경동부(京東部)와 경상도 대구진관(大丘鎭管)의 군사가 중부(中部)에, 경주진관의 군사가 좌부에, 진주진관의 군사가 우부에, 김해진관의 군사가 전부에, 안동진관의 군사가 후부에 속하는 등 경성의 동부 및 경상도의 군사가 진관별로 그 예하의 오부(五部)에 분속되도록 되었다. 이와 같은 지방진관 군사의 분속은 대열(大閱) 때에 그 지방에서 징발된 군사들이 용양위에 소속되게 되는 지역별 편성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병조참판공 교지(敎旨)■ (15)

병조참판공 절충장군행경상좌도병마우후.png 

 <1621 광해 13년, 절충장군행경상좌도병마우후자 정3품 上>

敎旨

魏廷喆爲折

衝將軍行慶

尙左道兵馬

虞侯者

天啓元年五月十九日[印]

●내용 및 특징

1621년(광해 13) 5월 19일에 光海君이 魏廷喆에게 折衝將軍行慶尙左道兵馬虞侯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절충장군(折衝將軍)은 정3품 西班 무관에게 주던 上階 품계이고, 병마우후(兵馬虞侯)는 각 도에 두었던 병마절도사 밑의 부직으로 종3품 무관직이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으므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 앞에 '行'자를 붙였다.

☞경상좌도(慶尙左道) : 조선시대에 경상도 지방의 행정구역을 동·서로 나누었을 때 경상도 동부 지역의 행정구역을 통칭한다. 1407년(태종 7) 군사행정상의 편의를 위하여 경상도를 좌·우도로 나누어서 낙동강 서쪽을 경상우도, 그 동쪽을 경상좌도라 하였다. 1519년(중종 14) 좌·우도에 각기 감사를 두었다가 같은 해 11월 다시 1개 도로 환원하고, 다만 수사(水使)·병사(兵使) 등 군사상 직제만 좌·우도로 나누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길이 막혔으므로 다시 좌·우도로 나누어 좌도감영은 경주에, 우도감영은 상주에 두었다. 1593년(선조 26) 좌·우도를 다시 하나로 합쳐 감영을 성주(星州)의 팔거현(八莒縣)에 두었다. 이후 1595년(선조 28) 땅이 넓어 다스리기 곤란하다는 이유로 다시 좌·우도로 나누었으며, 1596년(선조 29)에 다시 하나로 합하여 달성(達城)에 감영을 설치하였다. 경상좌도는 왕성에서 바라볼 때 경상도 지역의 좌측을 뜻하며, 울산·양산·연일·동래·청송·예천·풍기·밀양·칠곡·경산·청도·영양 등 37개의 군현이 여기에 속하였다.

☞ 병마우후(兵馬虞候) : 조선시대 각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보좌하는 종3품 외관직(外官職) 무관(武官) 벼슬로 병우후(兵虞候)로 약칭되거나 아장(亞將)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었음.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의 제도가 정립되면서 그 막료로서 도진무(都鎭撫)가 임명되었는데, 이것이 세조 12년(1466) 1월의 관제 경정 때에 병마우후로 개칭되었으며, 우후(虞候)의 임무는 병마절도사 다음으로 막중하였다.

 

                  ■병조참판공 교지(敎旨)■ (16)

병조참판공 절충장군행용양위부사과겸사복장.png

<1621 광해 13년, 절충장군행용양위부사과겸사복장자 정3품 上>

敎旨

魏廷喆爲折

衝將軍行龍

驤衛副司果

兼司㒒將者

天啓元年七月十二日[印]

●내용 및 특징

1621년(광해 13) 7월 12일에 光海君이 魏廷喆에게 折衝將軍行龍驤衛副司果兼司㒒將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절충장군(折衝將軍)은 정3품 西班 무관에게 주던 上階 품계이고,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는 조선시대 五衛에 속한 용양위의 종6품 무관직이다. 겸사복장(兼司㒒將)은 조선시대 정예 친위대의 하나였던 겸사복의 지휘관으로 종2품 무관직이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으므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 앞에 ‘行’자를 붙였다.

☞ 겸사복장(兼司僕將) : 조선시대 겸사복(兼司僕)의 지휘관으로 종2품 무관직. 정원은 3인으로 모두 다른 부서의 관원이 겸직하였음. 종2품의 참판 등 문관이 겸하는 경우도 많았음. 겸사복이 편성된 것은 태종 9년(1409)이었으나, 겸사복장은 세조 7년(1461)에 와서 처음으로 4인이 임명됨. 세조 10년(1464)에는 겸사복의 조직이 정비되어 종2품아문(衙門)으로 직제화 되고 특수 병종(兵種)인 겸사복 50인이 배속되었는데, 이때 겸사복장의 정원도 3인으로 정해짐. 이들의 임무는 궁귈의 경비와 궐내순찰(闕內巡察), 국왕 행차시의 경호 등임. 겸사복은 효종•영조 때 관서명이 내금위, 우림위와 합쳐져 금군청, 다시 용효영으로 개칭되었으나, 겸사복장의 직명은 조선 말기까지 존속하였다.

 

                 ■병조참판공 교지(敎旨)■ (17)

병조참판공 절충장군행충좌위사직겸오위장.png

<1621 광해 13년, 절충장군행충좌위부사과겸오위장자 정3품 上>

敎旨

魏廷喆爲折

衝將軍行忠

佐衛副司果

兼五衛將者

天啓元年九月初十日[印]

●내용 및 특징

1621년(광해 13) 9월 10일에 光海君이 魏廷喆에게 折衝將軍行忠佐衛副司果兼五衛將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절충장군(折衝將軍)은 정3품 西班 무관에게 주던 上階 품계이고, 충좌위부사과(忠佐衛副司果)는 조선시대 五衛에 속한 충좌위의 종6품 무관직이다. 겸오위장(兼五衛將)은 오위의 최고 지휘관으로 종2품 무관직이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으므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 앞에 '行'자를 붙였다.

☞ 겸오위장(兼五衛將) : 오위의 으뜸 벼슬로, 초기에는 종2품관 12명을 두어 그때그때 각 위를 나누어 맡아 통솔하게 하였으며, 모두 타관(他官)이 이를 겸직하였다.

5위가 평상시에는 주로 입직(入直)과 행순(行巡:도성 내외를 순찰하는 일) 및 시위(侍衛)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5위장들은 외소(外所)·남소(南所)·서소(西所)·동소(東所)·북소(北所) 등 다섯 위장소(衛將所)에 번을 갈아 각각 1명씩 입직하여 왕의 지명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순행에 있어서는 5위장이 군사 10명을 인솔하고 시간을 나누어 순찰한 뒤 이상 유무를 직접 왕에게 보고하였다. 나라에 경사가 있어 국왕에게 축하를 드리는 조하(朝賀)가 있을 때에는 위장이 그 군사를 이끌고 궁정에 정렬, 시위하였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5위의 기능이 대폭 축소되어 궁성 숙위(宿衛)만을 맡게 되자 5위장의 기능도 이것에 한정되어 품계를 종2품에서 정3품으로 내리고 3명을 증원하되 2명을 문관으로 충당하여 위장소의 사무를 맡아보게 하였는데 이를 조사오위장(曹司五衛將)이라고 하였다. 오위장은 1882년(고종 19) 군제개혁 때 5위와 함께 폐지되었다.

 

                ■병조참판공 교지(敎旨)■ (18)

병조참판공 통정대부행곤양군수.png

  <1621 광해 13년, 통정대부행곤양군수자 정3품 上>

敎旨

魏廷喆爲通

政大夫行昆

陽郡守者

天啓元年十二月十五日[印]

●내용 및 특징

1621년(광해 13) 12월 15일에 光海君이 魏廷喆에게 通政大夫行昆陽郡守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는 정3품 東班 문관에게 주던 上階 품계이고, 군수(郡守)는 조선시대 지방행정 구역의 단위인 군(郡)의 행정을 맡아보던 종4품 외관직이다. 곤양(昆陽)은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 곤양면이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으므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 앞에 '行'자를 붙였다.

☞ 역대 곤양군수는 1419~1914년까지 495년간 236명이 역임하였다. 이중 병조참판공은 72번째 역임과 1622~1623간 2년이다. (사천문화원 역대 곤양군수 확인)

 

                 ■병조참판공 교지(敎旨)■ (19)

병조참판공 절충장군행용양위부사직자.png

 <1628 인조 6년, 절충장군행용양위부사직자 정3품 上>

敎旨

魏廷喆爲折

衝將軍行龍

驤衛副司直

崇禎元年六月初四日[印]

●내용 및 특징

1628년(인조 6) 6월 4일에 仁祖가 魏廷喆에게 折衝將軍行龍驤衛副司直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절충장군은 정3품 西班 무관에게 주던 上階 품계이고, 용양위부사직은 조선시대 五衛에 속한 용양위의 종5품 무관직이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으므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 앞에 '行'자를 붙였다.

☞ 광해군 재임 (1608~1623)이 끝나고 1623년 인조반정과 1624년 이괄의 난을 거쳐 집권한 仁祖의 교지이다. 특히 1623~1627간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 등 역사적 격변기 때 병조참판공의 정사훈록, 진무훈록 등은 고증되나 관직(교지), 행장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상세한 자료가 현존하지 않아 재조명에 어려움이 있다.

 

                   ■병조참판공 교지(敎旨)■ (20)

병조참판공 통정대부영유현령.png

  <1628 인조 6년, 통정대부행영유현령자 정3품 上>

敎旨

魏廷喆爲

通政大夫

行永柔縣

令者

崇禎元年六月二十五日[印]

●내용 및 특징

1628년(인조 6) 6월 25일에 仁祖가 魏廷喆에게 通政大夫行永柔縣令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는 정3품 東班 문관에게 주던 上階 품계이다. 현령(懸鈴)은 조선시대 종5품 외관직 26곳으로 대부분 군사 중요지역에 무관 출신을 임명하였고 관찰사의 지휘 감독을 받으며 관내를 다스렸다. 영유(永柔)는 현재의 평안남도 평원군에 속한 지역이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으므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 앞에 '行'자를 붙였다.

☞ 현령(縣令) : 조선시대 동반(東班: 文官) 종오품(從五品) 외관직(外官職)으로 정원은 26원이다. 현의 수직(首職)으로 관찰사(觀察使)의 지휘감독을 받았으며, 관내(管內)를 다스렸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제도를 따라 대현에 현령, 소현에 처음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후에 현감(縣監: 從六品)을 두었다. 1431년(세종 13)에 외관의 품계를 재정리할 때 현령을 종오품으로 하고 감무의 후진인 현감을 종육품으로 상향조정하였으며, 이는 대한제국까지 지속되었다. 현령을 두었던 현은 경기도(京畿道)의 용인(龍仁)·진위(振威)·양천(陽川)·시흥(始興), 충청도(忠淸道)의 문의(文義), 경상도(慶尙道)의 영덕(盈德)·경산(慶山)·의성(義城)·고성(固城)·남해(南海), 전라도(全羅道)의 창평(昌平)·용담(龍潭)·임피(臨陂)·만경(萬頃)·금구(金溝), 황해도(黃海道)의 신계(新溪)·문화(文化), 강원도(江原道)의 울진(蔚珍)·흡곡(歙谷)·금성(金城), 평안도(平安道)의 용강(龍岡)·영유(永柔)·증산(甑山)·순안(順安)·강서(江西)·삼등현(三登縣) 등이다. 경기도의 김포(金浦)와 영평(永平)은 군(郡)으로, 경상도의 동래(東萊)·거제(巨濟)와 황해도의 옹진(甕津) 및 평안도의 삼화(三和)·함종(咸從)은 부(府)로, 전라도의 능주(綾州)는 후에 목(牧)으로 승격(昇格)하였으며, 경기도 시흥(始興)은 후에 현감(縣監)으로 격하(格下)하였다.

 

                   ■병조참판공 교지(敎旨)■ (21)

병조참공 안주진관병마절제도위.png

  <1628 인조 6년, 안주진관병마절제도위자 종6품>

敎旨

魏廷喆爲

安州鎮管

兵馬節制

都尉者

●내용 및 특징

1628년(인조 6) 6월 25일에 仁祖가 魏廷喆에게 安州鎮管兵馬節制都尉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병마절제도위(馬節制都尉)는 조선시대 각도 諸鎭의 지휘관인 종6품의 외관 무관직이다. 위정철이 속한 진은 안주진관(安州鎮管)으로, 안주(安州)는 지금의 평안남도 안주군에 속한 지역이다. 영유현령 임명 교지와 발급 연월일이 같아 영유현령 위정철이 겸직함이 추정된다.

☞ 병조참판공은 평안도 영유 현령과 안주진관병마절제도위에 1628년 6월 25일 임명 겸직되어 재임기간은 알 수 없다. 이후 公의 22번째 교지는 1632년(인조 10) 7월 8일에 임명한 "折衝將軍行忠武衛司果兼五衛將"이다. 여기서 현존 교지에 의거 추정해보면 公은 영유현령으로 재임해오다가 1631년(인조 9) 3월 19일 종2품 병조참판(현 국방부 차관)을 제수받아 당대 최대 현안인 淸나라와의 조공 등 중요 외교문제 해결 임무를 띤 심양(審陽) 회답별사(回答別使) 사행(使行, 1631년 3월 19일~4월 30일간)을 하였다.

☞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 : 조선시대 종육품(從六品) 서반 무관 외관직(外官職)이다. 각 도 절도사(節度使) 관할 하의 제진(諸鎭)에 두었으며 현령(縣令: 從五品), 현감(縣監: 從六品) 및 거읍(巨邑)의 판관(判官: 從五品)이 겸직하였다. 1394년(태조 3) 정도전(鄭道傳)의 건의에 따라 각도에는 절제사·부절제사·검할사(鈐轄使)를 두고 주·군에는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 1409년(태종 9)에 단련사 휘하에 병마단련판관(兵馬團鍊判官)을 설치하여 거진(巨鎭)을 중심으로 지방 군사조직의 말단인 병사들을 통솔하였다. 1466년(세조 12)에 진관체제(鎭管體制)에 의해 각 지방에 진이 설치될 때 병마단련판관을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로 개칭하였다.

 

                   ■병조참판공 교지(敎旨)■ (22)

병조참판공 절충장군행충무위사과겸오위장.png

<1632 인조 10년, 절충장군행충무위사과겸오위장자 정3품 上>

敎旨

魏廷喆爲

折衝將軍

行忠武衛

司果兼五

衛將者

崇禎五年七月初八日[印]

●내용 및 특징

1632년(인조 10) 7월 8일에 仁祖가 魏廷喆에게 折衝將軍行忠武衛司果兼五衛將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절충장군(折衝將軍)은 정3품 西班 무관에게 주던 上階 품계이고, 충무위사과(忠武衛司果)는 조선시대 五衛에 속한 충무위의 정6품 무관직이다. 겸오위장(兼五衛將)은 조선시대 오위의 최고 지휘관으로 종2품 무관직이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으므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 앞에 '行'자를 붙였다.

☞ 병조참판공은 인조(仁祖)의 명(命)을 받아 1631년 3월 19일부터 4월30까지 41일간 淸나라 심양(審陽) 회답별사(回答別使) 사행(使行)은 淸과 朝鮮간의 예우•조공에 관해, 1630년 가을에 파견한 추신사(秋信使, 박난영) 군관 일행 석방 문제 등 양국 간 마찰을 빚고 있는 중요 외교 현안 임무를 완수하였다. 그럼에도 인조(仁祖)는 사행을 마치고 귀국한 公을 옥(獄)에 구금하였다. 이후 1631년 6월 하순경에 淸나라 사신이 조선(朝鮮)에 들어옴으로써 公의 회답별사(回答別使) 사행(使行)이 성공적으로 완수되었음이 입증되었다. 본 교지를 통해 公께서 복권(復權) 후 요직에 임명됨을 알 수 있다.

 

                   ■병조참판공 유서(諭書)■ (1)

병조참판공 가리포첨사 유서.png

              <1634 인조 12년, 가리포첨사>

諭加里浦僉使魏廷喆

今觀體察使從事官

李景義別單所報

爾戰舡計物盡爲新

備盡(心?)撫摩圡兵安

集特賜表裏一襲爾

其領受故諭

崇禎七年 二月二十日

<해석> 지금 체찰사 이경의 종사관의 별단 소보를 보니, 전쟁물품 조달계책에 최선을 다하고 온갖 것을 무마하며 사병들을 안전하게 모으는데 애썼기에 특별히 옷감 한 벌을 하사하노니 너는 받도록 하라. 고로 유시한다.

숭정7년(1634년) 2월 20일

●내용 및 특징

인조(仁祖)가 1634년(인조 12) 2월 20일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위정철에게 유시한 내용이다. 公의 가리포첨사 임명 교지는 현존하지 않아 본 유서를 통해 가리포첨사 역임이 고증되었다. 가리포는 지금의 전남 완도군(莞島郡) 내 지역이다. 유서는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지만 수리 흔적이 보인다. 오른쪽 첫 번째 줄의 하단 廷喆은 글씨체가 위와 다르고 색깔도 본 면과 다르다. 종이를 네모진 모양으로 덧붙인 것 같은데 이는 廷喆글자를 쓰기 위해서 부분적으로 다른 종이로 때웠기 때문이다. 뒤쪽도 후대에 와서 배접을 한 것으로 보인다. 때운 부분 종이와 색깔이 똑같아서 앞에 수리할 때 함께 배접하였으리라고 판단된다.

☞병조참판공의 가리포첨절제사(제 76대) 역임 : 1633년 2월~1635년 9월 간 (완도문화원 확인)

☞ 유서(諭書)란 : 국왕이 각 지방의 군사권을 가진 관찰사, 절도사, 방어사, 유수 등에게 자의로 군사력을 발동할 수 있게 하는 명령서이다. 특히 전란(戰亂)과 같은 위급한 상황일 경우에는 왕이 병권(兵權)을 맡은 신하에게 명령을 하달할 수 있기 때문에 문서 명을 유지(諭旨), 밀지(密旨), 밀부유지(密符諭旨)라고 부른다. 이때 신표(信表)로서 대나무쪽(符)을 함께 하달하여 상호 대조 확인한 후 왕의 명령을 전달받고 시행하도록 하였다.

☞ 체찰사(體察使) : 조선시대 외적이 침입하거나 내란이 일어난 비상시에 군대를 지휘하거나 기타 군사업무를 맡아 지방에 임시로 파견되었다. 조선 초에는 정1품이면 도체찰사(都體察使), 종1품∼정2품 정도면 체찰사에 임명되었다. 1510년(중종 5) 비변사(備邊司)가 설치된 후로는 군령(軍令) 체계의 총지휘를 도체찰사가 맡았는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4명의 도체찰사를 임명하기도 하였으며, 후에 남·북 도체찰사로 이원화시켰다. 본문 체찰사 李景義(1590∼1640)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확인되고 있다. 본문과 관련 그의 이력을 보게 되면 "호남의 체찰사"로 임명되었고, 홍주목사일 때에는 양전(量田) 업무를 잘 처리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군량을 조달하고 군진(軍鎭)을 수습하는 데에 진력하였다. 난이 끝난 뒤 유장(儒將)이라고 칭송을 받았으며, 1638년에는 호조참의겸승문원비변사부제조(戶曹參議兼承文院備邊司副提調)가 되었다.

 

                    ■병조참판공 유서(諭書)■ (2)

병조참판공 가리포첨사 유서 (2).png

                 <1634 인조 12년, 가리포첨사 >

諭加里浦僉使魏廷喆

今觀都體府從事官

書啓軍器別備之數

最優極爲可嘉玆賜

半熟馬一匹爾領受

故諭

崇禎七年八月二十七日

<해석> 방금 도체부종사관 서계를 보니 별도 군무기를 준비한 실정이다. 최고다. 기특하다. 이에 덜 조련된 말(馬) 한(一) 필(匹)을 하사하노니 너는 받도록 하라. 고로 유시한다.

숭정7년(1634년) 8월 27일

●내용 및 특징

인조(仁祖)가 1634년(인조 12) 2월 20일에 이어서 8월 27일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위정철에게 두 번째 유서한 내용이다. 가리개 3개가 붙어 있다. 가리개를 올리고 가린 부분을 찍은 사진이다. 적색으로 찍힌 정방형 인장이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뒤쪽은 배접이 된 것으로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다.

☞ 첨사(僉使) : 조선 시대 각 진영(鎭營)에 속한 종3품의 무관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의 약칭.

☞ 완도(莞島) 가리포(加里浦) : 1449년(세종 31)에 다시 주민의 거주금지령을 내렸는데, 이때는 강진현의 소속 도서였다. 1475년 완도읍 군내리의 가리포(加里浦)에 축성(築城)하고, 1522년(중종 17)에는 첨사(僉使)를 두었다. 이때쯤에는 강진과 해남에 분속되어 있었다. 1896년에 영암·강진·해남·장흥의 4군에 딸린 섬들을 떼어 완도군으로 독립시켰다. 현재 완도군의 소속 주요 도서는 완도‧금일도·금당도·노화도·고금도·보길도·생일도·소안도·신지도·약산도·청산도 등 유인도 75개, 무인도 135개로서, 3읍, 9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병조참판공 교지(敎旨)■ (23)

병조참판공 통정대부행영흥대도호부사.PNG

<1636 인조 14년, 통정대부행영흥대도호부사자 정3품 上>

敎旨

魏廷喆爲通

政大夫行永

興大都護府

使者

崇禎九年二月十二日[印]

●내용 및 특징

1636년(인조 14) 2월 12일에 仁祖가 魏廷喆에게 通政大夫行永興大都護府使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는 정3품 東班 문관에게 주던 上階 품계이고,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는 조선시대 대도호부를 다스린 정3품 외관직이다. 대도호부가 있는 영흥(永興)은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군이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으므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 앞에 '行'자를 붙였다.

☞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 조선시대 대도호부(大都護府)를 다스린 정삼품(正三品) 관직이다. 부윤(府尹)·목사(牧使)와 함께 주로 문신(文臣)이 임명되는 청환직(淸宦職)이었다. 대도호부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지방행정 관청으로, 1018년(현종 9) 최초로 안남(安南 : 全州)·안서(安西 : 海州)·안북(安北 : 安州)·안동(安東 : 慶州)에 4대도호부가 설치되었다. 그 후 안남대도호부가 폐지됨에 따라 대신 안변(安邊)이 새로운 대도호부가 되었고, 경주는 동경유수관(東京留守官)으로 승격되면서 경주 대신 지금의 안동이 새로운 대도호부로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안동(安東)·강릉(江陵)·영흥(永興)·영변(寧邊)·창원(昌原) 등 5개가 있었는데, 강릉은 1389년(공양왕 1) 대도호부로 승격된 후 한말까지 존속되었고, 안동은 고려시대 이래 계속 대도호부로 존속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대도호부에 서원(書員) 30명, 일수(日守) 49명, 외노비(外奴婢) 450명, 향교노비 25명, 관둔전(官屯田) 50결, 공수전(公須田) 15결로 정하였다. 또한 대도호부사의 부관으로 판관을 두었으나 1894년(고종 31) 지방제도 개혁 때 모두 폐지되었다.

 

                 ■병조참판공 유서(諭書)■ (3)

병조참판공 영흥부사겸함경남도방어사 유서 (3).png

   <1636 인조 14년, 영흥부사겸함경남도방어사>

永興府使兼咸鏡南道防禦使

魏廷喆

卿受委一方體任非輕凡發兵

應機安民制敵一應常事

自有舊章憲或有予與卿

獨斷處置事非密符莫可

施爲且意外奸謨不可不預

防如有非常之命合符無疑

然後當就命故賜押第二十八

符卿其受之故諭

崇禎九年三月十六日

<해석> 경(卿)이 한 지방을 위임(委任) 받으니 책임(責任)이 가볍지 아니하리라. 무릇 병사(兵士)를 동원(動員)할 때는 기회(機會)를 보아 응(應)하되 백성(百姓)을 편하게 하고 적(敵)을 제압(制壓)할 것이요 한결같이 보통(普通)일에 응(應)할 때는 자연히 구법(舊法)에 따라 할 것이요 혹시 나와 경(卿)이 독단(獨斷)으로 일을 처리(處理)할 때는 ①밀부(密符)가 아니면 가히 시행(施行)하지 말 것이요 또 뜻밖의 간사(奸邪)한 계책(計策)에는 가히 예방(豫防) 안 할 수가 없으니 만약 비상(非常)의 명령(命令)이 있을 때는 병부(兵符)를 합쳐보고 의심(疑心)이 없는 뒤에 마땅히 명령(命令)에 따를 것이다. 그러므로 21번째로 수결한 병부(兵符)를 내리니 경(卿)은 받아 깨우치라. 숭정9년3월16일

①밀부(密符) : 유수, 병사, 감사, 수사, 방어사에게 때를 가리지 않고 곧 응(應)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내리는 병부(兵符)를 말함.

●내용 및 특징

인조(仁祖)가 1636년(인조 14) 3월 16일에 영흥부사겸함경남도방어사(永興府使兼咸鏡南道防禦使) 위정철에게 내린 유서(諭書)이다. 영흥(永興)은 현재 함경남도 영흥군이며, 조선시대에는 군사적 요충지로 평안도 영변, 강원도 강릉, 경상도 안동, 경상도 창원 등과 함께 대도호부(1509년, 중종4)로 승격되어 대도호부사가 방어사(정3품 上)를 겸하였다. 본 유시는 1999년 편찬된 기묘대동보(己卯大同譜) 지장록(誌狀錄) p.934에 인조(仁祖)의 유문(諭文) 永興大都護府使兼咸鏡南道防禦使 魏廷喆에게 내림이라고 수록되어 있다.

☞ 겸방어사(兼防禦使) : 조선 시대 전국의 군사요지에 배치한 종2품 무관직이다. 정식명칭은 병마방어사(兵馬防禦使) 또는 수군방어사(水軍防禦使)였으나, 해당 지역의 수령(守令)을 겸하였으므로 겸방어사라 하였음. 고종(高宗) 초까지는 병마방어사 6인, 수군방어사 2인이었으나, 그 뒤에 각각 8인, 5인으로 증원하였다.

겸병마방어사는 경기도 수원•광주•파주•장단, 강원도 철원, 함경도 길주, 평안도 창성(昌城)•자산(慈山) 등 8개 지역에 두었고, 겸수군병마사는 경기도의 영종도(永宗島), 평안도 선천(宣川)•삼화(三和), 경상도 창원, 충청도 태안 등 5개 지역에 두었다.

 

                  ■병조참판공 교지(敎旨)■ (24)

병조참판공 절충장군행충좌위사직겸오위장.png

<1638 인조 16년, 절충장군행충좌위사직겸오위장자 정3품 上>

敎旨

魏廷喆爲

折衝將軍

行忠佐衛

司直兼五

衛將者

崇德三年二月初九日[印]

●내용 및 특징

1638년(인조 16) 2월 9일에 仁祖가 魏廷喆에게 折衝將軍行忠佐衛司直兼五衛將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절충장군(折衝將軍)은 정3품 西班 무관에게 주던 上階 품계이고, 충좌위사직(忠佐衛司直)은 조선시대 五衛에 속한 충좌위의 정5품 무관직이다. 겸오위장(兼五衛將)은 조선시대 오위의 최고 지휘관으로 종2품 무관직이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으므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 앞에 '行'자를 붙였다.

☞ 사직(司直) : 조선 시대 오위(五衛)에 속한 정5품 군직(軍職)이다.

 

                  ■병조참판공 교지(敎旨)■ (25)

병조참판공 통정대부행숙천도호부사.png

 <1638 인조 16년, 통정대부행숙천도호부사자 정3품 上>

敎旨

魏廷喆爲通

政大夫行肅

川都護府使

崇德三年二月十二日[印]

●내용 및 특징

1638년(인조 16) 2월 12일에 仁祖가 魏廷喆에게 通政大夫行肅川都護府使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는 정3품 東班 문관에게 주던 上階 품계이고, 도호부사(都護府使)는 조선시대 도호부를 다스린 종3품 외관직이다. 도호부가 있는 숙천(肅川)은 지금의 평안남도 평원군에 속한 지역이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으므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 앞에 '行'자를 붙였다.

☞ 본 교지 글자 중에 하단 通•肅字는 오랜 세월로 인해 훼손되어 수리시 한지를 뒤에 받쳐 새롭게 글자를 써 다른 원 글자와 서체(書體)가 다름을 볼 수 있다.

☞ 도호부사(都護府使) : 조선시대 도호부(都護府)를 다스리는 으뜸 벼슬로 종삼품(從三品)관직으로, 1894년(고종 31)에 폐지되었다.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는 정삼품(正三品)이었다. 대전회통에서는 전국의 도호부는 75개로 경기도에 8곳, 충청도에 1곳, 경상도에 14곳, 전라도에 7곳, 황해도에 6곳, 강원도에 7곳, 함경도에 18곳, 평안도에 14곳이 있다. 그리고 대도호부는 5개로 경상도에 안동(安東)·창원(昌原), 강원도에 강릉(江陵), 함경도에 영흥(永興), 평안도에 영변(寧邊)이 있었다.

 

                 ■병조참판공 교지(敎旨)■ (26)

병조참판공 통정대부행갑산도호부사.png

 <1642 인조 20년, 통정대부행갑산도호부사자 정3품 上>

敎旨

魏廷喆爲通

政大夫行甲

山都護府使

崇德七年九月十一日[印]

●내용 및 특징

1642년(인조 20) 9월 11일에 仁祖가 魏廷喆에게 通政大夫行甲山都護府使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는 정3품 東班 문관에게 주던 上階 품계이고, 도호부사(都護府使)는 조선시대 도호부를 다스린 종3품 외관직이다. 도호부가 있는 갑산은 지금 양강도 중부에 있는 지역이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으므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 앞에 '行'자를 붙였다.

 

                  ■병조참판공 교지(敎旨)■ (27)

병조참판공 갑산진병마첨절제사.png 

    <1642 인조 20년, 갑산진병마첨절제사자>

敎旨

魏廷喆爲甲

山鎭兵馬僉

節制使者

崇德七年九月十一日[印]

●내용 및 특징

1642년(인조 20) 9월 11일에 仁祖가 魏廷喆에게 甲山鎭兵馬僉節制使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는 조선시대 각 병영에 속한 종3품 무관직으로 거진(巨鎭)의 장(將)이다. 갑산(甲山)은 지금 양강도 중부에 있는 지역이다.

☞ 임명 발급 연월일이 갑산도호부사 교지와 같아 위정철이 겸직(兼職)함이 추정된다.

 

                 ■병조참판공 교지(敎旨)■ (28)

병조참판공 절충장군행만포진병마첨절제사.png

<1643 인조 21년, 절충장군행만포진병마첨절제사자 정3품 上>

敎旨

魏廷喆爲折

衝將軍行滿

浦兵馬僉節

制使者

崇德八年正月二十二日[印]

●내용 및 특징

1643년(인조 21) 1월 22일에 仁祖가 魏廷喆에게 折衝將軍行滿浦兵馬僉節制使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절충장군은 정3품 西班 무관에게 주던 上階 품계이다. 병마첨절제사는 조선시대 각 병영에 속한 종3품 무관직으로 거진(巨鎭)의 장(將)이다. 만포는 평안도 강계도호부에 속한 곳으로 지금의 자강도 북서부에 있는 만포시 이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으므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 앞에 '行'자를 붙였다.

☞ 본 교지는 병조참판공이 1603년 무과 급제 후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41년간 봉직(奉職)중에 마지막 교지이다.

☞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 조선시대 각 진관(鎭管)에 속했던 종삼품(從三品) 서반 무관(武官)이다. 절도사(節度使)의 아래로, 병영(兵營)에는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수영(水營)에는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있었다. 병마첨절제사는 1409년(태종 9)에 설치했으며, 수군첨절제사는 1466년(세조 12)에 도만호(都萬戶)를 개칭한 것이다. 다만 목(牧)·부(府)에서는 수령(守令)이 겸직하였으며, 품계는 종삼품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경상도 다대포(多大浦)와 평안도 만포진(滿浦鎭)에는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으로 임명하였다. 특히 수군으로서 중요한 해안지방의 독진(獨鎭)과 육군으로서 평안·함경도 지방의 독진과 그 진관에는 수령이 겸하지 않고 전임무관(專任武官)으로서 첨절제사(僉節制使)를 두었는데, 이 경우에 한하여 첨사(僉使)라고 하였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 나온 각도별 정원은 병마첨절제사의 경우 경기도에 10원, 충청도에 3원, 경상도에 7원, 전라도에 4원, 황해도에 1원, 강원도에 3원, 함경도에 25원, 평안도에 26원을 두었다. 수군첨절제사는 경기도에 3원, 충청도에 4원, 경상도에 4원, 전라도에 7원, 황해도에 2원, 강원도에 1원, 평안도에 6원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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