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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년 은둔에서 잠을 깬 양난

운영자 2015.11.07 15:51 조회 수 : 220

2백년 은둔에서 잠을 깬 양난 

                                                                                                               - 원산 위정철 -

 

1. 역성혁명 불복신(不服臣)과 선조들의 은둔(隱遁)
2. 양난(兩亂)에 참전한 선조들의 구국활동
3. 충의록(忠義錄) 저자와 참전 선조의 가계(家系)
4. 양난(兩亂)의 참전으로 인한 위문(魏門)의 위상
5. 위씨의 기질과 양난 이후의 출사(出仕)

 

 

 

1.역성혁명 불복신(不服臣)과 선조들의 은둔(隱遁)


長興 魏氏는 始祖公께서 新羅 27代 善德女王 7年(戊戌) 638年에 道藝士로 新羅 조정과 인연을 맺으면서 이 땅에 보금자리를 잡으셨다. 신라 조정은 公이 도예사의 임무를 마치자 懷州君에 封하니 長興邑 南東里에 집터를 잡고 살게됐다고 한다.

 

그러나 시조공 이후 300餘年 동안 우리 선조들의 삶의 족적은 기록없어 알길이 없다. 즉 失系로 인해 어떤 조상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았는지 모른다는 얘기다. 어런 사정은 우리 문중만 아니라 다른 성씨 일반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高麗가 성립된 후로는 사정이 달라진다. 기라성 같은 人物들이 나온다. 대표적으로는 5세 忠烈公 諱 繼廷을 꼽을 수 있다. 그는 一人之上 萬人之下의 侍中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6세 諱 紹, 7세 國師 諱 元凱, 平陽郡事 諱 文凱 형제분 등이 배출됐다.

 

그런데 사건이 터졌다. 恭讓王 2年 11월에 李成桂가 요동정벌을 포기하고 威化島에서 회군하여 易姓革命을 일으키면서 門勢는 기운다. 당시 공양왕의 비서격인 14세 判事公 諱 이 親衛革命을 꾀하려다 함께 모의한 西京千戶 尹龜澤의 고변으로 逆謀사실이 들통난 것이다.
역모가 발각되자 피의 숙청이 단행될 것은 不問可知다. 어떤 집안은 3族이 화를 입고, 어떤 집안은 다칠까봐 안절부절 못 했을 거다. 아울러 관련자 후손들의 出仕를 막는 禁錮令도 내린다. 곤장 백대에 귀향조치가 취해진 판사공의 후손인들 무사했겠는가.

 

이성계는 물론 얼마 후에 금고령을 해제한다. 비록 역적모의를 했지만 새로운 조정에 출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금고가 풀리자 다른 관련자 후손들은 적극적으로 출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長興 魏氏만은 한사코 조정에 진출하기를 꺼린다.
이유는 선조들의 精神을 저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사례는 18세 諱 宗復, 21세 魁奉公 諱 大用 등의 行狀이나 墓碣銘이 수록된 大同譜 誌狀錄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니까 李씨의 집권 이후 불과 3世라지만 시간으로는 무려 200餘年이다. 그 동안 벼슬을 멀리하고 僻村 長興에서 마냥 隱遁의 세월을 보냈다.

 

그래도 魏氏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科擧及第與否와 벼슬의 높고 낮음으로 모든 것을 評價하던 그때 조정에 출사한 인물이 없었으니 『장흥 위씨는‘덤재’를 넘지 못한다』는膾炙가 그래서 나았으리라… 벽촌의 한계 때문인가 아니면 막연히 不事二君의 조상 탓인가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평가할 대목도 있다. 수 백년간 벼슬아치도 없고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여건 에도 불구하고 士大夫의 전통을 끊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찌 보면 요즘 말로 잘 나간 집안보다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 우리의 조상들은 언젠가 찾아올 기회를 위해 서럽지만 꾸준하게 文武의 실력을 스스로 연마하고 있었다.

2 양난(兩亂)에 참전한 선조들의 구국활동


 

임진왜란의 개요
1592年(宣祖25年)부터 1598年까지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日本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 가또오기오 기요마사(加藤淸正), 구로다 나가마(黑田長政) 등을 시켜 15만 대군으로 釜山과 多大浦로 상륙, 침입해 왔으며, 9000여명의 水軍이 이들을 지원했다.

 

조선에서는 李舜臣,郭再佑, 高敬命, 趙憲, 休靜 등이 대항했으나 鳥銃의 火力을 당하지 못해 王은 義州로 播遷하였다. 왜군들은 부산에 상륙한 후 60일만에 平壤까지 함락하고 국토의 끝자락인 咸境道까지 짓밟고 있었다.
조정은 明 나라의 원병과 權慄 등이 필사적으로 반격했다. 그러나 왜군은 서울에서 철수를 서두른 한편 고니시가 講和會談을 제의해 왔고, 명 나라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회담이 진척되는 듯 했다.

 

그러나 5년간 계속된 明 · 日間의 강화회의가 결렬되자 왜군은 1596年(선조 30年) 15만대군을 앞세우며 再侵한 이른바 丁酉再亂을 일으켰다. 하나 高嶺에서 상주목사 鄭起龍의 군에 패하고, 稷山 싸움에서도 패해 더 이상 北進하지 못한다.

 

또한 이순신이 지휘하는 水軍은 불과 12척밖에 남지 않은 전함으로 막강한 적의 수군을 맞아 鳴梁, 露梁, 栗浦 등 여러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는 과정에서 도요도미의 죽음으로 1597年총퇴각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병자호란의 개요
1636年(仁祖 14年) 12월부터 1637年 1월에 걸친 淸 나라의 朝鮮에 대한 2차 침구로 일어난 전쟁. 後金은 1627年 조선을 침구(丁卯胡亂)해 兄弟國의 맹약을 맺고 和平을 이룬다. 후금은 1632年 滿洲를 석권하고 明의 수도 北京을 공격하면서 조선과의 관계를 형제국에서 君臣之義로 고칠 것과 공물을 바칠 것을 요구한다.

 

조선은 후금의 요구에 불응한다. 이 때 국호를 淸이라 고친 후금의 太宗은 1636年 12월 10만 대군을 앞세우며 압록강을 건너왔다. 이들과 전쟁에서 패한 仁祖는 1637年 1월 30일 세자 등 扈行 500여명을 거느리고 三田渡에 설치된 受降團에서 청의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만다.

 

1) 위씨를 잠에서 깨운 임진왜란(壬辰倭亂)

倭寇가 부산과 다대포에 상륙하여 破竹之勢로 북상하고 있으며, 왕이 파천했다는 소식은 장흥과 咸興에도 알려졌다. 나라와 군왕이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게된 선조들은 悲憤慷慨했다. 2세기의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 늙고 젊음을 떠나 나라를 구하고자 怒濤와 같이 일어섰다.
憂國衷情을 불태운 선조들은 무려 20여명에 이른다. 이미 무과에 급제한 武人과 혈기가 왕성한 청년들은 義兵으로 왜적을 무찌른 데 앞장섰다. 그리고 가솔들과 마을별로 檄文을 붙여 의병과 군량미를 모아 지원을 아기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파천한 왕의 안위를 위해 3천리 먼길을 마다 않는 충성심을 보이기도 했다.


개인별 活躍相을 보자.

  • 防(20世)
    高興 斗院에 거주하던 公은 난리 소식을 듣고 이순신의 巨文島와 閑山島 진영으로 달려가서 죽기를 맹세한다. 충무공은 이를 가상히 여겨 기존의 고흥 병력과 公이 인솔하고 온 가병 100여명으로 하여금 國島(羅老島)를 방어하라 명령한다. 더구나 그 때 고흥 원님이 규율을 어겨 파면 당하니 홀로 국도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한산도 전투에 패한 왜군이 퇴각하면서 국도로 달려들었다. 일대 전투가 벌어졌다. 公은 적은 군사로 대군을 맞아 싸웠다. 비오듯 쏟아지는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산화했다.
    아들 主簿 德男은 쌓여있는 시신 속에서 아버지를 발견, 인근의 한 언덕에 장하였다. 고을 사람들은 公의 묘를 가르치며 魏將軍의 공을 기린다.

  • 大用(副正 億文의 子, 元忠의 孫, 由貞의 曾孫, 지장록 p916)
    明宗 1555年(乙卯)에 進士 합격했으나 출사하지 않은 家門의 전통에 따른다. 진사시험에 함께 합격한 文靖公 尹斗壽와 친구간이다. 임진난이 일어날 때 63세로 와병 중에 있으면서 전장에 나가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나라를 위해 나서라’고 격문을 돌리니 고을 사람들이 감탄했다.
    刑曹佐郞 通政大夫 刑曹參議를 제수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 德毅(進士 鯤의 子, 參奉 晉秀의 孫子, 충의 7代孫)
    宣祖 1573年(癸酉) 司馬試 합격, 호는 桐湖 또는 聽溪. 倭亂 때 왕이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흥에서 90일 간 걸어서 義州(龍灣) 行在所에서 임금을 알현하니 君臣 모두가 놀라 마지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明의 將帥 呂應鍾은 公을 보고 “東國의 山은 天冠山이 있고, 사람은 魏德毅가 있어 보배롭다”고 했다. 왕이 귀경한 후 공에게 嶺南 運餉官을 제수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어 扈從의 공으로 珍原縣監에 제수해도 취임하지 않으니 扈從原從勳 一等에 錄하고 兵曹參議에 贈職 하였다.

  • 德元(參奉 전의 子, 參奉 晉秀의 孫子지장록p186, 1010)
    倭亂 발발 후 公은 權慄의 진영에 들어가 공을 세워 訓練副正(參議)에 임명됐으나 얼마 안되어 病死하니 原從二等勳에 錄되었다. ,

  • 德和(進士 鯤의 子, 參奉 晉秀의 孫子 지장록p924)
    宣祖 1583年(乙酉) 武科에 급제, 院과 府에서 근무했다. 9年 후 壬亂이 일어나 서울이 倭軍에 의해 함락되자 임금을 扈從, 밤에 松都에 이르렀다. 피난행렬이 민가에 머물었으나 먹을 것이 없자 공이 村婦들에게 서숙밥을 얻어다 임금에게 바치니 선조는 그 밥을 먹으며 八珍味보다 낫다고 하였다.
    피난행렬이 송도를 떠나 義州(龍灣)에 이를 때 장흥에서 3천리를 걸어서 올라온 중형 聽溪公과 극적으로 邂逅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선조와 左議政 松江 鄭澈과 右議政 西崖 柳成龍 등 백관들이 감격하였다. 공은 1593年(癸巳) 參上으로 승진, 궁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왜군의 괴수 고시니 유끼나가(小西行長)와 가또오기오 기요마사(加藤淸正) 등이 각 포구를 장악, 불안이 그치지 않자 왕에게 나가 싸우기를 자청했다. 왕은 공의 충성심에 감동, 彦陽縣監을 제수하니 당일로 부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공이 1596年 내직인 軍資訓練正으로 전근할 때 李舜臣 將軍의 체포 소식을 듣고 크게 탄식했다. 그 후 1598年(戊戌) 신병을 때문에 귀향해 요양하다 생을 마쳤다. 공이 타계한 후 조정에서는 宣祖扈從原從勳과 아들 廷喆의 靖社振武勳을 감안, 戶曹判書에 追贈했다.

  • 大器(參奉 文甫의 子, 通德郎 元信의 孫, 生員 由貞의 曾孫.지장록p164)
    9尺에 8백근의 활을 당기며 말을 잘 탔다. 倭敵 수백명이 배를 타고 南洋을 거쳐 장흥 中寧山을 넘어 덮치자 공이 단신으로 활을 쏘며 나가 싸워 거의 몰살하였다. 공은 또 玉浦, 赤珍, 栗浦 전투에도 참전했으며, 兵使 黃進의 義兵裨將으로 동생 大澤, 조카 舜廷, 孔時億 등과 협력, 적을 무수히 죽이고 포로로 잡았다.
    난리가 끝난 후 전사한 海南縣監 邊應鼎의 후임으로 제수하고, 副統制로 승진시켰으나 영내의 官事에 익숙치 못해 임무수행이 어렵다고 여겨 嘉善大夫 품계만 올린 후 宣武原從一等勳에 錄됐다. 그 후 조정에서는 湖南沿岸에 근심이 그치지 않자 공을 湖西水軍節度使로 임명했으나 병이 심해 취임하지 못하고 타계했다.

  • 大澤(參奉 文甫의 子,水使 大器의 同生)
    형제 5人이 모두 武科에 올라 위씨 五虎라 불렀다. 公은 栗浦 해전에서 왜선 10여척을 격침시키는 등 都總都事 伯氏 大器와 함께 왜적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워 宣武原從 二等勳에 錄되어 都事와 光陽縣監을 除授받았다.

  • 舜廷(直長 大方의 子, 生員 由貞의 曾孫)
    公은 壬亂 이전에 兼司僕將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倭亂이 일어나자 從叔父 大器와 더불어 적을 무찔러 宣武原從 二等勳에 錄되었다. 그 후 장기현감에 임명됐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別世했다.

  • 大經(主簿 億章의 子, 郡守 元忠의 孫, 生員 由貞의 曾孫)
    젊어서 從伯兄 魁峰公을 따라 무예를 배웠다. 宣祖 1575年(乙亥)에 무과에 급제, 原州判官을 지낸 후 귀향했다. 倭亂이 일어나 괴봉공의 격문에 응하여 재종 大器, 大澤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공은 李舜臣 將軍의 軍營으로 들어가 赤珍, 梨峴 전투에 나가 왜적을 베고, 병사 黃進과 尙州 전투에 나가 싸우다 어깨에 적의 화살을 맞은 부상을 입고 귀향하고 말았다.
    이 사실이 行在所에 알려지자 判書 朴忠侃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조정은 1597年 공의 軍功을 감안, 通政大夫에 이어 尙州營將으로 임명했다.

  • 大洪(參判 文甫의 子, 通德郞 元信의 孫, 生員 由貞의 曾孫)
    壬亂이 일어나자 魁峰公의 檄文에 응하여 大器, 大澤 두 형과 李舜臣 將軍의 군영으로 들어가 部將의 직책으로 赤峴과 梨峴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 公達(儒士 方吉의 子, 參奉 祥의 孫, 府使 重根의 曾孫)
    權慄 元帥의 軍營에 들어가 공을 세워 宣武原從 二等勳에 記錄되고, 戶曹正郎을 除授받았다.

  • 公濬(參奉 昌吉의 子, 正郎 公達의 弟)
    형과 함께 權慄 元帥 휘하에서 전공을 세워 宣武原從 二等勳에 기록되고, 訓練副正을 除授받았다.

  • 漢良(參判 掌隷決事 弼文의 子, 舜廷의 孫, 自恭의 9代孫.지장록p1066)
    지략이 뛰어나고 힘이 千斤을 가볍게 들 수 있다. 일찍 武科에 급제하고 壬辰倭亂이 일어나 임금이 피난길에 오르자 의병을 모아 行在所로 달려가 왕을 호위했다.
    왕은 공의 지략과 노고에 감탄하여 龍灣 判官과 義州府尹을 겸임하게 하니 수라와 군량을 조달하는 데 탁월한 수단을 발휘하였다. 왕은 이를 보고 “關中의 蕭何(소하)나 河內의 寇恂이라도 이렇게 잘 할 수 있느냐”며 탄복했다. 조정은 공을 黃海兵使로 제수하고, 宣武原從 一等勳과 麒麟閣에 기록했다.

  • 大宙(參判 文甫의 子,通德郞 元信의 孫, 生員 由貞의 曾孫)
    明宗 1564年(甲子) 平化에서 출생, 무과에 급제한 후 왜란 때 伯兄 大器, 仲兄 大澤과 兵使 黃進의 휘하로 달려가 熊峙 전투에서 이긴 후 權慄 元帥 진영으로 들어가 癸巳年 尙州 赤巖 전투에도 참전햇다.
    丁酉再亂 때는 李舜臣 막하에서 동생 大荒과 함께 전공을 세워 訓練主簿를 제수받았다.

  • 廷說(德元의 子,參議 전의 孫, 生員 晉秀의 曾孫)
    宣祖 1580年(庚辰) 蓉山 語山에서 출생해서 倭亂이 일어나자 義兵將 崔慶會 진영에 들어가 參戰했다. 전투 중 적의 화살이 어깨를 관통하는 중상을 입고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르렀다.
    그러나 불과 12세의 나이에 참전했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 德男(訓導 防의 子, 通善郞 晉秀의 孫, 習讀公 由亨의 曾孫)
    아버지 防이 國島 전투에서 전사하자 공이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적졸들과 싸우며 많은 왜군을 베었다. 공은 아버지의 묘소에서 3년 시묘를 하니 御使 柳夢寅의 포계로 司僕寺 主簿에 제수됐다.

  • 天佑(仁傑의 子, 公弼의 孫, 碩重의 曾孫)
    公은 宣祖 때 長興 魏氏로는 드물게 文科에 及第, 弘文博士를 거쳐 司憲府 掌令, 靑陽縣監을 역임하고 潭陽府使로 재임 중 壬辰倭亂을 맞게 됐다.
    공은 의병장 金天鎰將軍과 함께 倡義하여 咸陽, 開寧과 露粱海戰에 참가하여 위훈을 세우니 李舜臣將軍은 “위씨는 紅面飛將 魏大器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제 白面飛將 魏天佑가 있구나”하며 격찬했다. 공은 난리가 끝난 후 通政의 포계를 받았다.

  • 倫良(參判 弼文의 子, 舜廷의 孫, 兵使 漢良의 弟)
    公은 壬辰倭亂으로 平讓이 왜군에 의해 함락된 후 탈환전투에 나섰다가 殉國하였다.

  • 忠起(兵使 漢良의 次子)
    公 또한 壬亂에 참전, 공을 세워 扈聖功臣으로 通政에 올랐다.

  • 士進(訓練副正 公濬의 孫)
    壬辰倭亂 때 安邦俊의 檄文에 응하여 義兵으로 참전, 文翰을 맡아보았다.

 

2)호란(胡亂)과 代를 잇는 우국충정

壬辰倭亂이 장흥 魏氏 一世들의 活動舞臺였다면 丙子胡亂은 그 二世들의 무대였다. 병자호란은 倭亂이 발발한지 꼭 44年 후에 일어난 난리다. 그럼에도 준비 없이 맞은 왜란에 비해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나 참전한 선조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 廷鳴(軍資正 德弘의 子, 進士 鯤의 孫, 參奉 晉秀의 曾孫)
    약관에 進士가 됐으나 昏朝로 응하지 않았다가 仁祖 1627年(丁卯) 종제 廷勳과 號召使가 의병을 모집하자 가동 2000여명과 쌀 80석을 도와주었다.

  • 廷獻(參議 德毅의 子)
    仁祖1635年(乙亥) 진사에 합격했다. 종형제들과 호소사에 응 하였다. 난리가 그치자 벼슬할 것을 단념하고 號를 菊泉아라 짓고 陶淵明의 靖節傳을 읽으며 여생을 보냈다.

  • 廷喆(判書 德和의 子)
    21세에 武科에 합격해서 光海 1610年(庚戌) 宜薦의 宣傳官에 임명되고, 監察로 승진, 咸平縣監으로 부임했다. 仁祖 1627年(丁卯) 淸의 침범과 明의가도 응거 등으로 국토의 西邊이 근심스러운데 永柔島 원님까지 공석이었다.
    조정에서는 영유도와 가도의 사태 해결에 적당한 인물을 고르던 중 公을 선택, 원님으로 임명하니 單騎로 부임했다. 공은 가도로 들어가 明의 관리들을 상대로 전통적 우의를 들어 설득했다. 그러자 明軍의 책임자인 毛將軍의 환심을 사서 나라의 근심을 해소하는데 기여했다.

    그뿐 아니다. 조선은 使臣을 淸에 보내 禮物을 바치며 사이 좋게 지내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淸은 예물을 물리치는 한편 통신사 朴蘭英을 돌려보내고 수행한 軍官을 옥에 가두기까지 했다. 당황한 조정은 공에게 兵曹參判의 임시 직책을 주어 수도 심양으로 파견했다.
    공은 惡化一路의 양국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최후의 카드로 낙점된 인물이다. 청의 우두머리인 ?는 공을 보자 “조선이 明 나라에 양식을 지원, 자신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핍박했다. 그럼에도 공은 차분히 그를 설득, 조선의 요구를 관철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외교적 임무를 마친 후 공은 西北 兩道 巡察使로 임명됐다. 그는 서영을 개설하고 군무를 경리하며 兵制를 개혁했다. 그 때 조정은 공을 吉州책임자로 임명했으나 부임 전에 永興府使 겸 防禦使로 임명했다. 그 때가 丙子胡亂이 발발하기 전인 1636年(仁祖 · 丙子) 봄이었다.
    공은 부임하자 흐트러진 군기를 잡아갔다. 청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兵卒를 훈련시키고 병기를 수리했다. 그러고 있는데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졌다. 청의 오랑캐가 一萬여명의 騎兵을 앞세우며 陽德 국경선 北路를 따라 쳐들어 왔다.

    상황은 위급했다. 공과 南兵使 徐佑申은 우선 합동으로 군사를 주둔하며 대기하기로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전술은 너무 달랐다. 공은 아군의 衆寡不敵을 이유로 山을 배경삼아 진을 치자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徐는 오랑캐를 업신여기며 平原에 치자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주장은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공의 군대는 산으로 올라가 진을 치고, 徐병사의 군대는 평원에 진을 쳤다. 마침내 철갑으로 무장한 오랑캐의 기마병들은 평원에 있는 조선 步兵을 가볍게 박살냈다.
    오랑캐의 기마병은 이어 공의 진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산의 지형을 배경 삼아 진을 치고 있기 때문에 평원과는 사정이 달랐다. 산 위에서 아래로 돌을 굴리니 오랑캐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말이 달릴 수 없으니 돌에 치어 태반이 죽는 공방전이 수일간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돌발사태가 일어났다. 어느 날 오랑캐 병사가 와서 두 나라 사이에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다. 조선이 청의 요구대로 항복한 것이다. 공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 분을 못 이겨 통곡하며 군사를 해산하고 영흥으로 귀환했다.
    공은 그 때 이미 귀향을 결심하고 있었다. 조정은 胡亂이 마무리 된지 8年 후인 仁祖 1644年(甲申) 肅山 · 甲山 · 滿浦陳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사양하고 고향 관산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原從一等勳에 기록됐다.

  • 廷勳(判官 德厚의 子)
    光海 1612年(壬子) 진사에 합격했으나 昏亂을 개탄하며 出仕를 단념했다. 그는 1624年 甲子亂 때 義士와 軍糧米를 모집해 도왔으며, 1627年 丁卯亂 때도 號召使 金文元의 격문에 응해 仲弟 廷勳, 季弟 廷鳴과 從父兄 廷望, 廷獻 등과 의병 · 의곡을 모집, 전쟁터에 나가 도적들을 물리치고 귀향한 바 있다.
    胡亂으로 仁祖가 南漢山城에서 오랑캐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침식을 안 했다. 이 때 安邦俊의 의병모집 격문을 접하고 의병을 모아 북으로 올라가다 5일만에 왕이 降伏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했다. 그는 聽禽이라 自號하고 종제 방어사 廷喆과 학문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조정은 공에게 義禁府 都事를 제수하나 취임하지 않았다

  • 廷烈(判官 德厚의 子)
    24세에 무과에 급제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1627年 丁卯亂 때 백형 廷勳 등 형제들과 의병과 군량을 모아 호소사 梧里 李政丞의 격문에 응해 體府軍官이 됐다. 난리 후 귀향했다.
    조정은 丙子胡亂으로 북변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남해안이 근심스러워 특별히 수령을 고르던 중 公을 뽑아 熊川縣監으로 임명했다. 얼마 후 호란이 일어나 왕이 피난길에 오르는데 雙橋 나루를 지키던 兵使 閔泳의 一軍이 軍律을 잃어 무너진 모습을 목격했다.
    공은 이에 격분, 혼자서 칠흑의 어둠을 뚫고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왕의 항복으로 전투가 종식되자 귀향했다.

  • 廷鳴(判官 德厚의 子)
    鄕試에 합격했으나 科擧에 관심이 없었다. 甲子·丁卯 두 난리에 형제들과 의병과 의곡을 모아 창의에 응했다. 1627年(丁卯)에는 의병을 이끌고 淸州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丙子胡亂 때는 왕이 피난 갔다는 소식을 듣고 형제들과 함께 땅에 자리를 깔고 石膏大罪하는 臣民의 도리를 하였다. 號는 磻溪이다.

  • 山寶(軍資正 弘宙의 子)
    胡亂 때 宣傳官의 특명을 받고 여러 번 淸 나라를 왕래했다.
    그 때가 전쟁 중이기에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사절의 활동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공은 난리 이듬해인 1637年에 縣令에 임명됐으나 취임하지 않고 귀향해서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 (軍資正 德弘의 子)
    胡亂 때 訓練奉事로서 임금의 수레를 호위하여 南漢山城으로 들어가 淸軍과 싸워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전투 중 적군의 포탄에 맞아 오른 팔이 절단되어 왕으로부터 慰癒의 약을 下賜받고 귀향했다.

  • 大成(仁遜의 子)
    胡亂이 조선의 항복으로 막을 내린 후 東宮이 인질로 淸의 수도 심양으로 끌려가야 했다. 이때 동궁의 수행원을 武臣 일색으로 발탁하자 무인들의 불평이 이만저만하지 않았다. 공은 비록 부당하기는 하지만 나라가 어려운데 문관과 무관이 다투면 되느냐며 파견을 자원했다.
    조정은 공이 파견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谷城縣監으로 임명됐다.
3. 충의록(忠義錄) 저자와 참전 선조의 가계(家系)
이상의 기록은 1999年에 간행된 장흥 위씨 대동보 誌狀錄에 실린 忠義錄이 그 토대이다. 忠義錄은 存齋公께서 38세 되던 英祖 1765年(乙酉)에 정리한 기록이다. 이 기록은 장흥 魏氏 최초의 족보인 1759年의 己卯譜보다 6年에 후에 작성됐기 때문에 揭載되지 못했다.

만일 공이 이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다면 후손들은 선조들의 빛나는 할동상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문제의 충의록은 1883年 癸未譜부터 대동보에 실리기 시작했지 않았나 싶다. 그후 1972년의 壬子譜를 거쳐 1999年에 간행된 대동보에는 原文과 함께 解說文까지 실려 漢文에 깊지 않는 후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충의록을 근거로 兩亂의 참전 인물을 보면 거의 父子와 兄弟들이다. 壬辰倭亂의 경우 防과 德男, 德元과 廷說, 公濬과 士進은 부자간이며, 德毅과 德和,를 비롯 大器, 大澤, 大洪, 大宙 그리고 漢良과 倫良은 모두 형제간이다. 또 丙子胡亂에서도 廷望과 鍾은 부자간이며, 廷勳, 廷烈, 廷鳴은 친형제간인데다 廷獻, 廷喆 등과는 종형제간이다.

더구나 극적인 사건은 宣祖의 행재소에서 일어난다. 임금을 호종한 덕화와 그의 둘째형 덕의가 천리타향 그 먼 곳에서 해후한 사실이다. 특히 아이러니는 관북출신 한량도 임금을 호종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점이다. 희성인 위씨가 왕의 피난길에 세 사람이나 함께 있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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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양난(兩亂)의 참전으로 인한 위문(魏門)의 위상
判事公에 대해서는 여러 說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李成桂가 易姓革命으로 정권을 잡은 이후 出仕者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高麗朝에서는 侍中을 배출하고, 할아버지와 손자가 사후에 왕으로부터 諡號까지 받은 집안임을 감안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逆賊의 後裔가 아니면 그렇게까지 벼슬길에서 멀어졌을까 하는 疑問이 나온다.
더구나 判事公의 후예들인 우리의 선조들이 출사를 한사코 忌避한 것도 석연찮다. 이성계는 집권하자 逆謀 가담 후손들에게 내린 禁錮令을 해제했다. 그래서 判事公보다 엄한 벌을 받은 집안 후손들도 줄줄이 관직에 진출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독 우리 長興 魏氏만 조상의 정신을 받든다는 이유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대표적 인물이 18세 諱 由亨어른이다. 그 분은 學德이 출중했으나 出仕의 길을 포기한 채 동생 諱 由貞에게 科擧에 응시하도록 권했다. 그리고 자신은 平化 茶山嶝에 山亭을 짓고 그 주변에 冬栢과 대나무를 심어 정자를 가리며 살았다. 공은 그때 귀양 온 靈川 申潛과 정자에서 술을 마시고, 詩를 지은 것을 樂으로 삼고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어른뿐인가. 同時代 이쪽저쪽을 살았던 선조들도 마찬가지다. 栗村 入鄕組인 諱 庸과 魁峰公 諱 大用도 進士試에 합격하고도 출사를 단념했다. 그들은 “우리 高祖(判事公) 罔僕의 충의를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 후손의 도리”라며 林泉에 묻혀 살았다. 이런 집안의 정서는 거의 200년간 계속되어 스스로 울타리를 치고 살았다.

 

그런데 日本 놈들이 쳐들어 왔다.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구국의 함성이 성난 불길처럼 일어났다. 젊은이는 국토방위를 위해 의병을 자원하고, 일반백성들은 군량미를 모아 전장으로 보냈다. 장흥 冠山과 杏園 그리고 咸興의 魏氏들도 그 대열에 앞장섰다. 壬辰倭亂에는 20여명, 丙子胡亂에는 10여명이 참전해 실로 엄청난 戰功을 세운 것이다.
戰功의 대가는 벼슬로 연결됐다. 물론 관직이 除授되어도 취임하지 않거나 전혀 官爵이 내려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당사자의 공헌정도에 따라 상응한 관직에 임명됐다. 이로 말미암아 장흥 위씨들의 出仕者는 조선조에 들어 가장 많은 기록을 세웠다. 또한 전공에 의한 追贈 벼슬도 두 난리의 공적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다.

 

아래 表와 같이 兩亂에 參戰한 선조들의 벼슬은 다양하다. 壬辰倭亂 참전자 중 추증된 벼슬은 오늘의 장관에 해당된 戶曹判書 1명을 비롯 刑曹參判 2명, 通政 1명 등이다. 그리고 실제 현직에 재직한 벼슬아치는 兵使 1명, 水使 1명(취임하지 못함), 府使 1명(전쟁 당시의 현직), 縣監 2명, 營將 1명이며, 丙子胡亂 참전자는 防禦使 1명, 縣監 2명(1명은 전쟁 당시의 현직), 縣令, 都事 각 1명었으나 취임하지는 않았다.

 

※ 참전 선조의 개인별 관직 및 追贈 벼슬 내용

임진왜란(壬辰倭亂)
△ 諱 大用= 刑曹參議(추증)
△ 諱 德毅= 刑曹參議(추증)
△ 諱 德元= 訓練副正
△ 諱 德和= 彦陽縣監, 戶曹判書(추증)
△ 諱 漢良= 兵使
△ 諱 大器= 水使(임명 후 사망으로 취임 못함)
△ 諱 大澤= 光陽縣監
△ 諱 天佑= 靑陽縣監, 潭陽府使(전쟁 이전), 通政
△ 諱 舜廷= 長기縣監(부임 전 사망)
△ 諱 大經= 尙州營將
△ 諱 大洪= 部長
△ 諱 大宙= 部長
△ 諱 公達= 戶曹正郞
△ 諱 公濬= 訓練副正
△ 諱 德男= 司僕寺 主簿
병자호란(丙子胡亂)
△ 諱 廷喆= 防禦使
△ 諱 廷勳= 義禁府 都事(취임하지 않음)
△ 諱 廷烈= 熊川縣監(전쟁 이전의 현직)
△ 諱 山寶= 縣令(취임하지 않음)
△ 諱 大成= 谷城縣監

 

 

5. 위씨의 기질과 양난 이후의 출사(出仕)
兩亂에 참전한 장흥 위씨의 면면을 보면 대충 姓氏의 性向과 氣質이 나타난다. 물론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비롯된 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명의 참전자 중 諱 天佑公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武官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南宗은 關北派와는 달리 文官보다는 무관의 성향과 기질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왜 무관 성향을 지녔을까. 조상 대대로 타고난 기질일까. 아니면 문관에 비해 무관으로 진출하는 것이 쉬워서 오는 현상일까. 딱 부러진 해답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문관을 비중 있게 평가하는 사회적 정서에서 무관을 택했다면 아무래도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과거를 통해 문관으로 진출하기는 매우 어려웠던 게 당시의 현실이었다.

 

또 하나의 관심사는 난리가 끝난 후 위씨의 出仕는 어느 정도 이어졌는가 하는 점이다. 關北의 위씨들은 종전 이후에도 출사자가 꾸준히 배출됐다. 諱 定相은 顯宗 5年 文科에 급제, 通川 郡守를 거쳐 經筵에 시참했다. 諱 昌祖는 英祖 7年 문과에 급제, 春秋館修撰官과 북청도호부사를 역임했다. 諱 光肇도 英祖 50年 문과에 급제, 江原監司를 거쳐 冬至使拜表로 천거되어 入侍하였다. 실로 綺羅星같은 인물이 배출된 것이다.

 

그러나 남종의 위씨들은 북종과는 사정이 다르다. 文武官을 떠나 임진왜란 기간(1592年~1598年),과 丙

子胡亂기간(1627年~1637年) 등 전후 16年 동안 그렇게 왕성했던 출사자가 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뚝 끊어지고 말았다. 壬亂 이후 198年, 胡亂 이후 162年이 지난 후 후손이 알만한 벼슬아치는 存齋公이 유일한 인물이다.

 

당시의 선조들이 벼슬길에 못나갔거나 나가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다. 지금 그 때의 사정을 짐작케 하는 기록은 많지 않다. 오직 있다면 당신들의 一生을 간략하게 나마 적어놓은 행장과 墓碣銘 밖에 없다. 즉 대동보 지장록을 보면 우리의 선조들께서 출사의 방편인 科擧試驗에 합격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합격자는 찾기 어렵다. 그 많은 선조들이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시험인 進士試驗에는 붙어도 本試驗에 합격한 인물은 없었다. 어떤 선조는 실력이 없어서 떨어지고, 어떤 선조는 시험관의 편파적 사정으로 낙방되기도 했다. 특히 正祖 임금으로부터 玉果縣監을 제수받은 存齋公까지도 覆試에 합격하고도 출사를 포기했다.
存齋公은 늘 자신의 처지를 恨歎했다고 한다. 요지는 地僻·人僻·姓僻이 그것이다.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三僻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는 절규였다. 앞에서 끌어줄 수 있는 고관대작 하나 없는 이른바 촌놈의 신세를 한탄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의 사회에서도 地緣 · 學緣 · 血緣이 지배하는 세상인데 그 때는 오죽했겠는가.

 

결국 우리 위씨는 출사하기에 여러 가지로 너무 불리했다. 장흥이라는 땅이 정치 중심지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위씨 성을 지닌 사람을 인도할 배경이 없는 게 최대의 핸디캡이다. 예나 지금이나 최신 정보에 어두우면 불이익을 받게 마련이다. 조정에서 무엇을 하는지, 누가 실력자인지 등등을 모르면 길을 모른다. 길을 모르니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을 선택할 수 없고 그러니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단점은 성격이다. 위씨는 전통적으로 양순하다는 평을 받고있다. 사회적으로 모난 행동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하지 않는 소극성을 지녔다. 그러므로 리더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다 타협을 싫어하고 자신의 주장을 지나치게 고집하는 편협성을 갖고 있다. 그러니 요즘 사회에 적응하기가 부적절하다.
아마 모르긴 해도 위씨 가운 데 정치인 없는 것도 성격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포용력이 있어야 한다. 남으로부터 호감을 사려면 상대를 인정하고 그가 좋지 않은 소리를 하더라도 들어주는 아량을 가져야 한다. 하나 위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너무 직선적이어서 정치인이 되기에는 부적절한 천성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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