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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6년 삼수군수공(諱 天會 24세)은 왜 용천부로 유배를 갔을까? / 위현동
 
1666년 삼수군수공(諱 天會 24세)은 왜 용천부로 유배를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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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군수공(諱 天會 24세, 1629~?)의 자는 여우(汝遇), 호는 취수헌(醉睡軒)으로 통덕랑공(諱 국보 國寶)와 恭人 광산金氏 사이에서 四子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公은 호남어사의 신분으로 장흥을 들른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이 公을 보고 武科에 응시하도록 추천하여 출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번쾌불사장비부생'(樊噲不死 張飛復生 / 번쾌가 죽지 않았고 장비가 다시 살아났다)라고 불리 울 정도로 호방한 용력과 멋진 한시를 창작할 정도의 지식과 뛰어난 문학성을 겸비하여 公은 오위도총부도사 등 여러 내직을 역임하다가 1664년 함경도 변경 삼수군수(三水郡守)를 제수 받았다.(족보에는 1663년으로 기록) 그런데 당시 삼수에는 해남출신 남인(南人)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71세의 늙은 나이에 조대비(趙大妃)의 상례문제로 서인들과 다투다 1660년부터 위리안치(圍離安置) 되어 있었다.(1664년 당시 고산의 나이는 78세) 고향의 어른이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잘 보살펴 주었으며 광양으로 이배 시에 남여꾼 제공 등의 편의를 봐줬는데, 이 때문에 조정의 미움을 사서 관직에서 물러나고 행원으로 귀향하여 지우들과 수창하며 보내다가 1669년 졸(卒)하였다고 알려져 있다.(지장록 p.132) 하지만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666년 윤선도의 이배 시 편의제공으로 용천부에 정배되기도 하였으나 1671년에 경상우도병마우후를 제수되어 다시 재기하였지만 1672년에 연유를 알 수 없는 살인의 죄목으로 1683년까지 도형, 정배, 이배 등 형벌집행과 귀양살이가 되풀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뛰어난 문무를 겸비했지만 한 많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배(配)는 淑夫人 죽산安氏, 淑夫人 연안李氏이며, 묘소는 행원 江亭中麓乙座이고 1822년 석천사(石川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왜 삼수군수공이 의주 남쪽에 있는 중국 단동과 접경을 이루는 압록강의 하류 용천부(龍川府)로 정배 된 것일까? 1665년 2월 고산 윤선도가 광양으로 이배될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1659년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 趙氏, 통칭 조대비라고 호칭함)의 복상기간을 기년(朞年 : 만 1년)으로 할 것인가? 3년(만 2년)으로 할 것인가? 에 대한 논란으로 시작되었다. 1차 예송논쟁 즉 기해예송이다. 일반적으로 사가(私家)는 〈주자가례〉에 따라 사례(四禮 : 관혼상제)를 행하고 있었고, 왕가(王家)는 성종대에 제정된 〈국조오례의〉를 기준으로 했다.

그런데 〈국조오례의〉에는 효종처럼 차자(次子)로서 왕위에 올랐다가 죽었을 경우 어머니가 어떤 상복(喪服)을 입어야 하는지에 관해 규정이 없었으므로 문제가 발생했다. 그리하여 복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진행되면서 윤휴(尹鑴)는 장자가 죽으면 적처(嫡妻) 소생 제2자를 장자로 세운다는 〈의례 儀禮〉의 말을 인용하여 효종은 비록 둘째아들이나 적자(嫡子)로서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차장자설(次長子說)에 입각하여 3년상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고, 송시열(宋時烈)은 〈의례〉의 사종지설(四種之說 : 왕위를 계승했어도 3년상을 치를 수 없는 이유) 중 체이부정(體而不正 : 적자이지만 장자가 아닌 경우)에 입각하여 효종은 인조의 차자이므로 1년상이 옳다고 반박했다. 아울러 윤휴가 누구든지 왕위를 계승하면 어머니도 신하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3년상을 주장한 것에 대해 송시열은 아들이 되어 어머니를 신하로 삼을 수 없다고 하자, 윤휴는 왕자(王者)의 예(禮)는 일반 사서(士庶)와는 다르다며 반론을 제기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등의 대신들은 시왕지제(時王之制 : 〈국조오례의〉에 있는 母爲子服朞)에 따라 기년복을 채택했지만, 채택기간 1년의 기년복 착용이 끝나갈 이듬해 남인인 허목(許穆)의 상소로 예송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허목은 윤휴의 차장자설에 입각한 3년상을 찬성하면서 첩의 자식으로 왕위에 오른 경우만 체이부정에 해당된다며,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상복도(喪服圖)까지 첨부시켜 송시열과 송준길을 공격했다.

이어 남인 윤선도(尹善道)가 조대비의 복제를 효종의 종통(宗統)과 연결시켜 송시열 등의 기년복을 따른다면 효종의 종통은 애매하게 되고, 소현세자와 그의 자손에게 적통(嫡統)을 주는 것이 된다고 비판하면서 심각한 당파성을 띠게 되었다. 사실 효종의 왕위책봉은 종법상(宗法上) 문제가 있었고, 당시에는 소현세자의 셋째아들(석견)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송시열 등의 기년복 주장은 적통인 소현세자의 아들에게 왕위가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서인들은 일제히 윤선도가 이종비주(貳宗卑主 : 종통을 둘로 나누고, 임금을 비천하게 함)를 내세워 송시열을 공격한 것은 예론을 빙자한 흉악한 모함이라고 성토하여 윤선도를 함경도 삼수(三水)로 유배보냈다.

반면 권시(權諰), 조경(趙絅) 등 남인들은 윤선도를 구원하면서 송시열을 공격하다가 관직을 잃거나 좌천되면서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1666년(현종 7) 3월 영남남인 유세철 등 1,000여 명이 넘는 유생들이 송시열에 대한 비난상소와 이에 대한 성균관 유생 홍득우 등의 반박상소로 절정에 이르렀다. 이에 현종은 기해년 복제는 사실상 〈국조오례의〉에 따른 것이지 고례(古禮)를 채택한 것이 아니니 다시 복제를 가지고 서로 모함하는 자가 있으면 중형으로 다스리겠다고 하여 1차예송은 일단락되었다. 물론 그 뒤에도 예에 관한 논란이 약간 있었으나 1차예송은 결국 서인이 승리했다.

이런 기해예송이 진행되는 시기의 막바지에 삼수군수공은 1664년 3월 기해예송의 중심인물 고산 윤선도가 위리안치되어 있는 삼수군에 군수로 부임한다. 사형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인 유배형은 종신형으로 안치형은 일정한 장소에 유배인을 보내어 거주를 제한하는 유형 제도를 말한다. 안치형의 종류도 죄인의 죄질에 따라 다양했다. 즉, 특혜를 베푸는 처분으로써 고향을 유배지로 정하는 본향(本鄕)안치, 그와는 정반대로 과혹(過酷)한 격리조치의 하나로 섬이나 산간지방으로 보내는 절도(絶島)안치, 그리고 거주지를 더 엄격하게 봉쇄했던 위리안치가 있다.

위리안치를 당하는 유배인의 집 주위에는 높다란 나무 울타리를 쌓아 막아두고 문에 자물쇠를 채워둔 후 바깥둘레에는 가시나무 울타리를 쳤다. 말하자면 이중 막을 설치한 셈이다. 가시나무 울타리 바로 앞에는 수직소를 두어 유배인을 감시하였다.

음식이나 물은 문 옆에 작은 구멍을 내어 그곳을 통해 전해주고 심지어는 마당에 우물을 파서 물도 스스로 충당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며칠에 한 번씩 음식을 전해주어 외부와 연락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삼수군수공이 군수로 있는 동안 위리안치되어 있던 고산에게 어떠한 편의를 제공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삼수군수공은 군수에 임명된 지 1년도 안된 1665년 1월에 어모장군(정3품)이지만 충무위부사용(종9품직)으로 제수된다. 그리고 2월27일에 고산은 전라도 광양으로 이배된다. 하지만 삼수군수공은 충무위부사용으로 부임하지 않고 삼수군수로 계속 업무를 본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 기간에 고산의 이배과정에서 남여꾼(가마꾼)과 짐꾼 등을 제공하는 편의를 제공한 것을 알 수 있다. 1666년 6월 21일자 승정원일기에는 사간 김만기 등이 아뢰기를, "정배(定配)된 죄인이 군읍을 지나갈 때에는 단지 타고갈 말과 먹을 음식만을 주는 것이 상규(常規)입니다. 그런데 윤선도(尹善道)가 삼수(三水)로부터 유배지를 옮겨 가던 때에는 함경도 수령이 40여 명의 노비와 20여 필의 말을 제공하고, 또 가마꾼을 각 접경 지역에 대기시켜 두고 기다리도록 연로(沿路)에 통지하기를 마치 중앙 관원이 지방으로 출장갈 때에 미리 공문을 띄우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국법을 무시하고 민폐를 끼친 그 정상이 진실로 놀라우니, 맨 먼저 통지를 보냈던 수령과 연로의 수령을 감사로 하여금 조사해 내게 하여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소서."하니, 따랐다. 라는 부분이 나온다. 이배되는 고산에게 제공한 편의의 내용이 나오는 부분이지만 당시의 시대상황으로는 김만기의 이야기는 약간의 어폐가 있어 보인다.

당시 대개의 경우 유배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그와 정치적 견해를 함께하는 동료 관료들 또는 경유지역 수령들에게서 향응을 제공받았다. 이 같은 사례는 조선후기에도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관직에 있던 죄인들의 유배는 의금부에서 관할했다. 정2품 이상은 의금부 도사(都事), 종2품부터 정3품 당상관까지는 서리(書吏), 정3품 당하관 이하는 나장(羅將)이 압송한다. 압송관인 역졸은 죄인의 유배길 전체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지역의 역졸에게 죄인을 인계하여 유배지에 이르게 하였다.

이런 상황인데 고산이 전라도 광양으로 이배된 지 4개월이나 지나서 이배 시에 편의를 제공한 고을의 수령들에 대해서 문제시 하는 것은 상당히 의아하다. 또한 고산이 이배된 지 1년이 지난 1666년 3월 8일에 대사간 정만화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형조의 공사를 취해보니, 죄인 윤선도가 이배할 때에 남여(藍輿)와 짐꾼을 지급한 수령을 추고하여 법률을 적용하게 하였는데 단지 속전(贖錢 죄를 면하려고 바치는 돈)만 내게 하라고 명하였다 하니 신들은 삼가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그 당시 수령이 선도가 사적으로 전달한 문자를 근거로 민정(民丁)을 많이 내어 짐을 나르게 하고 호송과 음식 제공을 하는 등 거느린 인마가 마치 사명을 받고 가는 행렬과 같이 하였으니 놀라운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국법을 멸시하고 죄인을 비호한 죄가 어찌 속전만 받고 말 정도이겠습니까? 청컨대 파직하라고 명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기해예송의 막바지에 서인과 남인의 첨예한 대립이 7년이 넘게 계속되는 상황에서 관행으로 행하던 유배인의 호송 시에 제공되던 편의 제공이 문제가 된 것은 정치적인 이유로 밖에 볼 수가 없다. 대사간 정만화의 간언 후에 유세철 등 1,000여명이 넘는 영남유생들의 상소가 있었고 이어서 성균관 유생 홍득우 등의 반박 상소가 있는 등 또 치열해지는 예송논쟁을 3월25일 현종은 복제를 오례의에 따라 행하였으니 소요를 일으키면 형벌을 가할 것이니 기년복을 바꾸지 말 것을 명하면서 기해예송은 끝이 났다. 이런 와중에 고산에 대한 편의 제공의 빌미로 삼수군수공은 압록강 하류에 있는 용천부로 정배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함이 있는 처벌이다. 물론 삼수군수공만의 처벌은 아니다. 前甲山府使 慶一會, 前北靑判官 南夢星, 洪原縣監 李明彬, 咸興判官 鄭河, 前永興府使 李益達, 高原郡守 李商霖등이 비슷한 처벌을 받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 취수헌(醉睡軒)公 遺稿

                                                                                 魏天會 (호는 취수헌(醉睡軒) 1629~?)


早年弓劒意猶深 (조년궁검의유심)

나이 어릴 때 활과 칼에 뜻이 깊었는데


湖海風聲動遠林 (호해풍성근원림)

호수와 바다의 바람소리에 먼 숲이 움직이네.


退倚層欄依斗立 (퇴의층란의두림)

물러나 층계의 난간 기대고 북쪽의 별을 의지하니


誰知夜夜望京心 (수지야야망경심)

누가 밤마다 서울을 바라본 마음을 알리요.

 

財痴 위현동(35세, 광주종친회 )
 
이 글과 사진(栢江 위성록 씨족문화연구소 연귀원 제공)은 장흥위씨 종보 제23호(2017.04.29)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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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泉 2017-05-30 11:54 *.76.215.182

※ 삼수군수공(諱 天會 24세, 1629~ ?) : 자(字) 여우(汝遇) 호(號) 취수헌(醉睡軒)으로 통덕랑 諱 국보(國寶)와 恭人 광산金氏 사이에서 四子 중, 三子로 태어났다.

公은 호남어사의 신분으로 장흥을 들른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이 公을 보고 武科에 응시하도록 추천하여 출사하게 됐다. 젊은 시절 번쾌불사장비부생(樊噲不死 張飛復生 번쾌가 죽지 않았고 장비가 다시 살아났다.)라고 불리울 정도로 호방한 용력과 멋진 한시를 창작할 정도의 지식과 뛰어난 문학성을 겸비하여 어모장군오위도총부도사 등 여러 내직을 역임하다 1664년 함경도 변경 삼수군수(三水郡守)를 제수 받았다. 그런데 당시 삼수(三水)에는 해남출신 남인(南人)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5~1671)가 71세의 늙은 나이에 조대비(趙大妃)의 상례문제로 서인들과 다투다 1660년부터 위리안치(圍離安置)되어 있었다. 고향의 어른이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편의 제공 및 잘 보살펴 주어 이 때문에 조정의 미움을 사서 관직에서 물러나고 행원으로 귀향하여 지우들과 수창(酬唱)하며 보내다가 1669년 종(終)하였다고 수록하였다. (대동보 지장록 p.132) 또한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666년 윤선도의 이배(移配) 시 편의제공으로 용천부에 정배(定配)되기도 하였으나 1671년에 경상우도병마우후를 제수받아 1672년에 연유를 알 수 없는 살인의 죄목으로 1683년까지 도형(徒刑), 정배(定配), 이배(移配) 등 형벌 집행과 귀양살이가 되풀이 되어 정확한 종년(終年)은 알 수 없다. 배(配)는 淑人 죽산安氏, 淑人 연안李氏이며, 묘소는 행원 江亭中麓乙座이고 1822년 석천사(石川祠)에 배향(配享)됐다.

 

이 댓글은 백강 위성록 씨족문화연구위원이 작성했습니다.

1666년 삼수군수공(諱 天會 24세)은 왜 용천부로 유배를 갔을까? / 위현동 file 1666년 삼수군수공(諱 天會 24세)은 왜 용천부로 유배를 갔을까? 삼수군수공(諱 天會 24세, 1629~?)의 자는 여우(汝遇), 호는 취수헌(醉睡軒)으로 통덕랑공(諱 국보 國寶)와 恭人 광산金氏 사이에서 四子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公은 호남어사의 신분으로 장흥을 들른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이 公을 보고 武科에 응시하도록 추천하여 출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번쾌불사... 304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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