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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

보성 모충사, 梧軒 위계룡 사당

梧軒公(啓龍)

 

휘 계룡(1870~1943)의 자는 운여(雲汝), 호는 오헌(梧軒)이다. 아버지는 춘파(春坡) 휘 관식(瓘植)과 어머니 인천(仁川) 이씨의 아들로 1870년(고종 8 庚午)에 호동에서 출생했다. 오헌 역시 복재‧계사공과 같이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등 여러 스승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그는 1948년(戊子)에 78세를 일기로 타계하기까지 많은 유작을 남겼다(제공 :  圓山 위정철)
 

우리 순천보훈지청에서는 관내 현충 시설을 일반시민들과 미래의 주역인 학생들에게 널리 알려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나라사랑정신을 함양하기 위하여 매월 우리지청 관내에 산재한“우리고장 현충시설”을 소개함으로써 지역주민과 자라나는 학생들이 우리고장에 위치한 현충시설에 관심을 갖고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습니다.“모충사”는 항일 독립운동가 면암 최익현 선생을 비롯한 백홍인 선생(1990.애족장) 위계룡 선생, 박태환 선생(1991.애국장) 백형철 선생의 충혼을 기리고자 독립운동가의 위패를 모셔둔 사당입니다. 모충사는 전남 보성군 웅치면 유산리 129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보성군을 찾는 일반 시민들 및 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곳으로서 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공간입니다.(제공 : 湖山 위신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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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泉 2016-06-09 12:00 *.193.196.58

아래의 글은  圓山 위정철 소장의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에서 옮겨 왔습니다.

 

공은 반일(反日)사상이 투철해 일제의 감시 인물이었다. 그래서 우국의 유문과 경승지를 관람한 소회를 밝히는 글을 남겼는데 유고 가운데 당시를 되돌아보자는 의미에서 중요한 일부를 골라 소개한다. 특히 공은 춘헌공(春軒公) 휘 계반(啓泮)‧죽암공(竹菴公) 휘 계문(啓文) 등 문중의 종형들과 남북종친의 숙원사업인 합보(合譜)를 위해 문중의 대의원 자격으로 관북종친에게 통지문을 발송한 글이 있기에 남북문중의 글을 한꺼번에 다루었다. (유고집)

 

長興憲兵 竹川場 派遣所 控辭

(장흥헌병대 죽천장 파견소장을 내치는 글)

 

「君臣人之大倫傳云國皆其國大凡各國其國各君其君亘萬古不易之通義也惟我東國雖僻於海隅殷師設敎之地魯聖欲居之邦入我朝五百年禮樂文物三英可逮以小中華見稱天下萬國者誠然矣夫何一朝爲日本國所據脅我君父殺我國母臣妾我奴隸我威制困迫無所不至列致乙巳誘五賊受勒約於是乎宗社邱墟矣生靈奐肉矣爲我李氏臣民者豈無刻骨痛寃之心哉淵齋勉庵心石三先生由是而殉節爲其門人者其致奠也直書其實痛其日本之勒奪朝鮮可乎反道悖義快我朝鮮之見呑日本可乎設使日本爲朝鮮國亡則爲日本臣民者其心果何如哉易地思之必皆然矣若使野史氏直筆爲可罪則几三千里江山冠儒服儒讀書知方之類者執不犯此科乎焚詩書坑儒生必如秦呂氏子然後爲可執此爲政日亦不足矣鳴乎日本之行政處事何其煩琑也何其勞苦也一則可笑一則可憫況此是庚戌合邦以前事也爲我國臣民者其於斥日之道豈有餘地哉一自合邦以後自處以亡國之民以朱夫子所謂含寃忍痛迫不得己八字爲家計民籍也稅金也諸般施爲惟命令是從不言時事杜門閣筆更不以此等說形諸紙墨知我罪我惟在所長之反求之如何耳孔子曰三軍可奪帥也匹夫不可奪志也余直一匹夫也雖不足爲有無於世然事君之道尊華之義聞之熟矣講之素矣思故國憲舊主不覺淚血膓爛當此將無罪勒作案之地雖刀鋸在前鼎濩在後曷足以動吾一髮況八萬六千年間一度生於天地之間者以百年爲期而人間七十古來稀古人有詩今余年恰當五十豈惜一死夗夗夗猶榮荑以朝鮮衣冠皎見先聖先王先賢先祖先師先父母於地下則豈不快活哉古語云從容就義難慷慨殺身易此正男兒慷慨之秋也惟所長處之緘口結舌順受而己」

 

〈해설〉임금을 받듦은 신하로서 행해야할 중요한 도리이다. 전하는 말을 종합해 살펴보면 각 나라마다 그 나라의 임금이 있고, 그 임금은 만고에 바꾸지 않은 것이 통례이다. 우리 조선은 비록 바닷가 모퉁이의 후미진 곳이라도 여러 스승이 베푸는 가르침에 따라 노나라 성인(공자의 학문)을 배우며 살고자 하는 곳이다. 공자의 학문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선 500년은 예악과 문물이 삼영(三英)의 치적을 이루어 가히 작은 중화(中華)에 이르렀음을 천하의 모든 나라가 그러하다고 칭찬함이 드러난 곳이다.

대저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일본국에 의해 우리 임금이 협박당하고, 우리 국모와 신첩이 살해당하여, 우리가 노예가 되고, 우리의 위엄과 제도가 곤궁하여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을까? 이는 을사(乙巳)년 오적의 꾐으로 늑약(勒約)을 받아들임으로써 종묘와 사직과 구릉(王陵)이 폐허가 되고, 생령(生靈)의 살이 흩어져 버렸기 때문이도다. 나는 조선의 신민으로 어찌 뼈를 깎는 고통과 원통함이 없겠는가?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선생이 이로 말미암아 순절하셨다.

나는 그 문인(門人)된 자로 치전(致奠)을 하고, 통한(痛恨)을 직서(直書)하였다. (그로 인해 나는 죽천헌병대에 끌려가 문초를 받으면서) “일본의 조선에 대한 늑탈(勒奪)이 옳은 일인가”, 반대로 “도가 어그러지고 의리가 방종하여 우리 조선이 만약 일본을 삼키는 것을 그대들은 옳다고 생각하겠는가?” 나아가 설령 그것이 옳다하더라도 “일본이 조선국을 망하게 하였는데 바로 일본의 신민(臣民)되라고 하면 과연 따를 수 있겠는가? 이는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반드시 그러하지 아니한가?”고 반문하며 다그쳤다.

만약 민간인이 사사로이 역사를 직필하였다고 해서 죄로 삼는다면 삼천리강산에 관복 입은 유생이 글을 읽어 방책을 아는 자라면 누구나 이 과정을 범하지 않겠는가? 시서(詩書)를 불사르고, 유생을 땅에 묻은 일은 여불위(呂不韋)의 아들(秦始皇)과 같은 사람이 된 뒤에나 이를 가히 집행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정사(政事)라고 한다면 날로 또한 부족할 것이다. 오. 슬프다! 일본의 행정처사가 어찌 그렇게 너저분하고 자질구레하단 말인가? 어찌 그렇게 애써 수고한단 말인가?

가소롭고 한편으로는 가련스러우니 하물며 경술년(1910) 합방 이전의 일로 써야! 나는 조선의 신민된 자로서 일본을 물리치는 도에 어떤 여유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합방 이후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 자처하고, 주부자처럼 원통함을 머금고, 몹시 절박함을 참는 부득기한 운명으로 집안의 살림과 백성의 호적, 세금 등 여러 일들을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러하다고 이제 시사(時事)에 관해 말을 하지 않고, 집의 문을 걸어 잠그며, 필을 들어 다시 이러한 것들을 논하는 것을 종이와 먹으로 나타내지 않는다면 나의 죄를 스스로 키우고 있음을 알고 있는데 도리어 어찌 이와 같은 죄를 구할 것인가?

공자께서 논어 자한(子罕)편에서 말씀하시기를 “삼군(三軍)에서 그 장수를 빼앗을 수 있을지언정 굳게 다져진 필부의 뜻을 빼앗을 수 없다”고 함과 같이 나는 올곧은 필부의 한 사람으로서 비록 세상에 있고 없다하더라도 그러나 임금을 섬기는 도리와 중화를 존중하는 의리는 들어서 익숙하게 배워서 소박하다. 국헌(國憲)과 옛 임금 생각으로 피와 눈물로 애간장이 문드러짐을 깨닫지 못하는데 이러한 때를 맞아 장차 죄가 없는 자리를 억지로 만든다면 비록 일찍이 칼과 톱으로 정강이를 잘라 솥에 삶은 형벌이 있는 후 일지언정 어찌 족히 나의 터럭 하나라도 움직일 수 있겠는가?

하물며 8만6천년 사이 천지간에 한 번 태어나 100년을 기약하나 인간 70 고래희라는 고인의 시가 있듯이 이제 내 나이 꼭 50이니 어찌 한번 죽은 것이 아깝겠는가? 원통하도다! 원통하도다! 원통하도다! 오히려 영광스럽게 정강이가 잘리어 조선의 의관을 빛나게 할 것이다. 지하에 계신 선성, 선왕, 선현, 선조, 선사 그리고 먼저 가신 부모를 뵙게 된다면 어찌 떳떳한 것이 아니겠는가? 옛글에 “조용히 뜻을 이루기는 어려우나 분을 참지 못해 살신하기는 쉽다”고 했는데 이는 바로 사나이가 분을 참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오랫동안 살려고 도모한다면 입과 혀를 꿰매서 순종함을 받아들여야 할 뿐이다.

 

 

矢辭 (자책하는 글)

 

(鳴呼維我朝鮮人爲日賊之所威脅雖莫之誰何而思漠之心則百死不變也譬之干將焉雖埋沒土壤而衝斗之氣未嘗散也江水焉雖束以矍塘厄以灩瀕鬪捍激撞憤怒噴薄而萬折必東之勢不可障也遂以數句語作矢辭曰)

採西山微蹈東海水夷連高節百世瞻彼凶彼日酋墟我宗社忝離之嘆何時可弛含寃忍痛迫不得己一心自處東里處士朝拾柳絮寫菊史我夗無地久矣切齒杜門讀書究其終始千萬意外異服突至搜覓我笥奪去數紙草野直筆堂堂義理以此作案含笑受矣余何多言只有一夗我心無貳上帝臨止緘口結舌惟爾諒此 屋社後八年丁巳六月日朝鮮遺民長興魏啓龍書

 

〈해설〉(오 슬프다. 나는 조선인이다. 일본의 적도들이 비록 위협하고, 어느 누가 막는다 해도 생각하는 마음은 백번을 죽어도 변치 않을 것이다. 비유하건대 간장(干將)의 명검이 비록 땅에 매몰됐다하더라도 북두칠성과 부딪칠 수 있는 아주 크고 거센 기운이 아직 흩어지지 않았다. 江水(양자강)가 묶여 솟구친 기운이 제방에 갇히는 재앙을 당했을지라도 강가로 물결의 출렁거림이 다투어 밀어붙이게 되면 물결이 부딪쳐 분노하고, 물을 뿜어내 땅을 얇게 하면 모든 것이 절단되어 반드시 동쪽으로 흐르는 형세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다음의 몇 구절의 글을 지어 시사(矢辭)라 한다)

「서산에 감춰진 간장(干將)의 명검을 찾아내고, 막힌 강물이 동해로 흘러넘쳐 물이 평평하게 연결되게 하면 고고한 절개가 백세 동안 우러러 볼 것이다. 저 흉측한 일본이 더욱 폐허를 이루어 우리 종묘와 사직을 욕되게 하니, 늘어놓으며 탄식함은 이미 때가 늦었도다. 원통함을 삼키고 몹시 절박함을 참으면서 한 마음으로 동리처사(東里處士‧李達)와 같이 재물을 아침으로 피어나는 버드나무의 꽃처럼 바람에 흩날리듯 연연하지 않는 국사(菊史)와 같이 자처하나니, 나의 원통함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지 오래 되었도다.

분하여 이를 갈면서 문을 닫고 독서에 궁구하려는데 그 시작과 끝이 천만 뜻밖에 이복(異服) 차림(日本憲兵)이 들이닥쳐 수색하여 내가 글을 모아둔 상자 속에서 수편을 빼앗아 갔다. 그래도 이 자리에서 초야의 직필과 당당한 의리로써 웃음을 머금고 받아드린다. 내 어찌 많은 말을 할 것인가? 다만 한 가지 원통한 것은 내 마음에 상제(上帝)가 둘이 아니란 것이다.(不事二君을 뜻함) 입과 혀를 다물어 머묾에 임하여 오직 그 살펴서 앎이 이와 같도다. 나라를 잃은 뒤 8년 丁巳(1917)년 6월 일 조선유민 장흥 위계룡씀」

※ 시사(矢辭)는 공이 淵齋 宋秉璿‧勉庵 崔益鉉‧心石 宋秉珣 등 3 선생을 기리며 집필한 것을 압수당한 후 일본의 감시와 앞으로 닥칠 조사 등에 대비, 우선은 “초야의 직필과 당당한 의리로써 글을 빼앗기는 자리에서는 웃음을 머금고 받아들이지만 앞으로 때가 되면 다시 필을 들겠다”는 결의와 최후에는 목숨까지 던지겠다는 각오 즉 자신의 가슴에 활을 쏘는 각오를 다짐하고 있다.

 

見安東義檄 (안동 의병 격문을 보고)

 

斥邪一檄日星明 위정척사의 격문으로 해와 별이 빛나니

南嶠崢嶸間氣呈 남쪽의 뾰쪽하고 가파른 곳에서도 기운이 들어나네

尊周大義執能禦 주나라의 대의를 존중하는 것을 어느 누가 막을 것인가

撻楚仁聲人莫京 회초리로 경계하신 어진 소리는 누구도 견줄 이 없어라

難容諸賊剃頭罪 저 도적들의 단발령을 용납할 수 없어서

不盡群雄唾手情 많은 영웅들이 기운 내어 일어나는 정은 끝이 없도다

爲是生民拯水火 이로써 생민을 수화의 고통에서 건져내니

壺漿簞食共相迎 거친 밥과 보잘것없는 반찬으로나마 함께 맞이하련다

 

敬次勉庵崔先生 益鉉 仙遊潭韻 (삼가 면암 최익현선생의 선유담운을 차운함)

 

離鄕己是屬春殘 고향을 떠난 이 몸은 늦은 봄을 맞아서

聞道仙潭古石壇 선유담의 옛 석단에서 도를 들었네

天際浮雲任聚散 하늘가에 뜬 구름은 하염없이 모였다가 흩어지고

谷中流水覺靑寒 계곡에 흐르는 물은 맑고도 차갑네

可怕異言眩耳目 이단의 말이 두렵고 눈과 귀가 어지러워

最宣靈境保心丹 가장 좋은 영경(靈境)에서 단심을 보존하네

也識先生登此日 알겠노라 선생께서 그날 이곳에 오른 뜻을

山人喜覩漢衣冠 산인들도 기뻐하여 의관을 살피네

 

泮宮講會韻 (문묘강회운)

 

最宜吾道不東西 우리 유도가 가장 마땅히 동서의 갈림이 없어야 하는데

杏樹壇高天欲低 서원의 단은 높아지고 하늘이 낮아졌네

千秋慷慨幾燕趙 오랜 세월 비분강개로 우국 충정한 연과 조의 선비처럼

百里絃歌復魯齊 백리에 현가를 퍼지게 하여 魯齊처럼 돌아가련다

意外官廚傳美酒 뜻밖에 관청의 소주방에서 美酒를 전해오니

瞻前聖廟俯淸溪 쳐다보니 문묘요, 엎드리니 맑은 물이로세

孜孜爲善人皆舜 부지런히 선을 행하는 사람은 모두 순의 무리처럼

聽起中宵一昌鷄 한 밤중에 창성한 닭울음소리 듣고 일어난다네

 

暮入長安感懷 (저녁 무렵 장안에 들어온 감회)

 

平生喜作四方遊 평생 사방을 유람하기를 즐겨하여

到此難堪漆室憂 장안에 도착하니 나라 잃은(漆室) 근심이 난감하구나

江山軒豁三千里 삼천리강산이 활짝 트여

日月昭明五百秋 일월의 밝음이 오백년 세월이네

夫何倭種終相迫 어찌하여 왜놈의 종자에게 끝내 핍박을 당해

永使王綱不復修 영원토록 임금의 그물을 다시는 손질하지 못하네

宮城落日遲遲路 궁성에 해떨어져 더디기도 한 발걸음에

慷慨男兒血涕琉 비분강개한 사나이는 눈물을 흘리네

平壤遊償路次過長安懷故 三首

(평양을 유람하러 가다 서울에서 옛날을 회상함)

 

鞏固三千里 공고한 삼천리강산에

休明五百年 태평성대를 누리며 오백년을 지나왔는데

一朝胡至此 하루아침에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欲訴彼蒼天 저 푸른 하늘에 하소연 하러하네

 

宮闕舊形換 궁궐은 옛 모습과 바뀌었고

江山新面多 강산은 새로운 모습이 많도다

遺臣無限恨 전종의 신하들의 무한한 한을 남긴 곳에

立馬夕陽阿 석양에 지나는 객은 말을 세우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最看勤政殿 근정전을 가장 유심이 보았더니

春草滿庭多 봄의 풀만 뜰 앞에 가득하였네

一㥘滄桑淚 일차 난리를 겪고 창상의 눈물만 흘리며

三嘆離黍歌 세 차례 탄식하며 서리가를 부르도다

 

下大同驛 (대동역 하차)

漢陽歸客入西都 한양으로 돌아가는 객이 서도역에 들르니

面面山河列畵圖 면면히 산하가 그림을 펴 놓는 것 같네

故國蒼茫興廢事 고국의 멀고 아득한 옛날의 흥망의 사실을

滿江水月子知夫 강 위에 가득한 수월이여 그대는 아는가?

 

箕子井 (기자 우물)

 

飮之味淸冽 마시고 보니 맛은 깔끔하며 차가웁고

頓覺滌煩衿 별안간 번거러운 생각을 씻어버렸도다

碑面煌煌字 비면의 글자에는 반짝반짝 빛이 나고

蒼苔不敢侵 푸른 이끼도 감히 침범하지 못하도다

 

大同橋遠眺 (대동교에서 멀리 바라봄)

 

北望羊角島 북쪽으로 양각도가 바라다 보이고

西色練光亭 서쪽에는 연광정이 솟아있네

萬景題難盡 만경을 써서 다하기는 어렵지만

怳然坐畵屛 어렴풋이 그림 병풍 속에 앉아 있는 같네

 

又咏一絶 (또 일절을 더 읊음)

 

關西美景盡斯洲 관서의 절경은 모두다 이 사주(沙洲)에 있다 하겠으니,

山免蒼蒼水碧流 산색(山色)은 푸릇푸릇하며 흐르는 물은 벽색이라.

天爲人作逈然別 천위(天爲)와 인작(人作)이 동떨어지게 다르니,

自古云勝蘇杭州 예부터 이르기를 명승으로는 소주와 항주라고 하였네.

 

大同門 一名挹灝樓 (대동문 또는 읍호루 2수)

 

大同江上大同樓 대동강(大同江)위 대동루(大同樓)에 올라

勝日憑欄万景收 승일(勝日)에 난간에 기대어 만(萬)경치 모아 기록하니

飛棟千宵星可摘 높은 용마루 하늘에 치솟으니 별도 따올 만하고

虛窓壓水月先浮 공허한 창문이 물 위에 제압하니 달빛 먼저 떠오르네

佳人曾是舞紅袖 가인은 일찍부터 춤을 추며 고운 소맷자락을 날리었건만

遊子晩來嗟白頭 나그네 늦게 찾아와 백발만 한탄하도다

故國千年離黍恨 천 년 전 고국에는 이서(離黍)의 한(恨)만 남아있고

無端斜日客心悠 하염없이 지는 석양 아래 객의 마음 아득하도다

 

江湖滿地蘸雲煙 강과 호수에 가득히 구름과 안개 잠겨 있으니

須信人間別有天 반드시 인간(人間)에 별천지가 있음을 확신하였도다

不必神仙同鶴駕 신선과 학을 타고 함께함을 요하지 않으며

要將圖畵借龍眠 장차 그림을 그리는 용면(龍眠)의 그림 솜씨를 빌리리라

繞山綿繡千層屹 산은 수놓은 비단을 두른듯하여 천 층 높이 솟아 있고

掩島綾羅十里連 능라도(綾羅島)를 감싸며 천리에 연해 있네

別後那能忘此壤 떠난 뒤에도 어떻게 능히 이 평양을 잊으랴?

知應夜夜夢相牽 아마도 밤마다 꿈속에서 서로 찾으리라

 

大同江練光亭 (대동강연광정)

大同江上練光亭 대동강 위의 연광정을

此日登臨却忘形 이날에 오르고 보니 문득 물아(物我)의 경을 초월하였네

遊擊將軍講和事 유격장군(遊擊將軍)의 강화(講和)를 약속하던 사실을

居人爲我說丁寧 거주하는 사람들은 나를 위해 재삼 설명을 하네

 

聞道關西擅勝形 관서(關西)가 명승지로 높이 알려져 있단 말을 듣고 보니

大同江抱練光亭 대동강(大同江)은 연광정(練光亭)을 안으며 흐르도다

此行始遂平生願 이번 길에 처음 나의 평생(平生)의 원을 이루었으니

疊翠層巒出杳冥 겹겹이 푸른 층만이 그윽하고 어두운 허공에 솟아있도다

 

遠臨曠野雲迷樹 멀리 광야(曠野)를 임하여 구름아래 나무숲 아득하고

俯瞰長江月上欄 긴 강(江)을 굽어다보며 달빛은 난간에 올라 있네

滿目風烟萬千像 눈앞에 가득히 풍연(風烟)은 천태만상으로 놓여 있으니

與君快豁盡情看 그대와 쾌활한 기분으로 마음껏 보리라

 

關王廟 (관왕묘)

 

塑像凜然在 소상(塑像)이 늠름하게 모셔 있는 앞에서

拜興更歛矜 배례를 드리고 일어나 다시 옷깃을 여미었다

深祈復顯聖 마음속 깊이 다시 그 성상(聖像)이 나타나기를 빌고

異類莫之侵 괴이한 무리들이 침범해 올 수 없기를 바라도다.

 

淸流亭 (청류정)

 

沸浿江流四百里 대동강(大同江)물 용솟음치며 사 백리를 흐르고

檀箕王業二千年 단군과 기자(箕子) 왕업을 닦은 지도 이천년이었네

紛絃戰鬪前朝事 어지럽게 전투(戰鬪)하던 전조(前朝)의 그 사적들은

盡在滔滔水一邊 모두가 다 도도히 흐르는 한줄기 강가에 남아 있도다.

 

朝天石 (조천석)

俯看朝天石 조천석(朝天石)을 굽어다 보며

潮退露全形 젖은 이슬을 털어보니 완연한 형상 들어나도다

至今留馬跡 지금도 말 발 자욱 남아 있고

都士說丁寧 모든 사람들도 재삼 이야기들 하도다

綾羅島 (능라도)

 

白銀灘北綾羅島 백은탄(白銀灘: 백은여울)북쪽 능라도(綾羅島)에

万像昭森十里周 만상(萬像)이 가득히 소삼(昭森)하여 십리에 둘러 있네

今古幾人來琓賞 지금이나 옛날에도 몇 사람이 와서 구경 하였던가?

不勝曠感久汀洲 허전한 감회를 못 견뎌 오래 사주(沙洲)에 머물러 있네

 

酒岩 (주암)

 

聞說酒岩裡 주암(酒岩)에 내면 이야기 들으니

水流釀碧醹 물이 흘러 푸르고 진한 술이 빚어졌도다

不飮心先醉 마시지 않고도 마음이 먼저 취하니

翻驚白首濡 펄쩍 놀라며 백수(白首)를 적시도다.

 

永明寺 (영명사)

 

永明古寺自勝朝 옛 사찰 永明寺는 전 왕조 고구려 때부터 있었고

爽氣依如上漢宵 상쾌한 기상은 여전히 하늘 높이 솟아 있네

滿壑風煙眞像外 골짜기에 가득한 바람과 안개는 진상(眞像)의 밖에 있고

倚欄收拾暫逍遙 난간에 기대서 시상을 정리하며 잠시 오락가락 하였도다

 

麒麟窟 (기린굴)

 

聞道明王此養麟 동명왕(東明王)이 여기에서 기린(麒麟)을 길렀다 들었건만

一朝騎馬朝天去 하루아침에 기린 마 타고 하늘로 올라갔었네

至今石窟尙谽谺 지금도 석굴에는 아직 휑덩그렁 하여 자취 남아 있으니

訪蹟行人久凝佇 자취를 찾아온 행인(行人)들은 오랫동안 머물러 있도다.

 

牧丹峯 (모란봉)

 

壯丹峯榭絶浮埃 모란봉(牧丹峯) 정자 속세에 뛰어나고

浿水滔滔一帶廻 대동강물 도도(滔滔)히 흘러 한 가닥 띠처럼 둘러 있네

久矣宿心在平壤 오랫동안 묵은 마음이 평양(平壤)에 있었기에

快哉今日涉蓬萊 상쾌하도다 오늘 봉래(蓬萊)도를 건너왔으니

麒麟窟古麒麟去 기린굴(麒麟窟) 옛날 기린은 가버리고

錦繡山今錦繡開 금수산(錦繡山)에는 지금 비단 수를 놓은 듯 열려있네

況復良辰是端午 하물며 또 좋은 때인 이 단오절(端午節)에

鞦韆脚戱眼中來 그네 타며 씨름 놀이가 안중(眼中)에 들어오도다.

 

乙密臺 (을밀대)

 

万層山頂一高坮 만층(萬層) 산정에 유일하게 높은 대(臺)가 있으니

乙密仙曾航海來 을밀선(乙密仙)이 일찍이 거룻배 타고 바다 건너 왔도다

涵碧亭浮雲共起 함벽정(涵碧亭) 뜬 구름과 함께 일어나고

朝天石出水初開 조천석(朝天石) 물 위에 솟아 처음으로 열리도다

都人戱會天中節 시중사람들 천중절(天中節) 맞아 놀이에 모여들고

騷客豪情席上盃 소객(騷客)들 호기 넘친 시정으로 석상(席上)잔을 들도다

夢想平生今始見 꿈속에 평생 생각해 오다 이제야 비로소 와 보니

流連不覺日西廻 노는데 팔려 돌아감도 잊고 해는 서쪽으로 지도다.

 

快哉亭 (쾌재정)

 

舘東聞有快哉亭 대동관 동쪽에 쾌재정이 있다고 들었건만

未到亭中名已好 쾌재정을 이르기도 전에 이름이 이미 좋았었네

明日第當一上憑 내일이 되면 다만 마땅히 한번 올라 가 보리니

快哉頓忘客中惱 상쾌하구나! 객지에서 번뇌를 모두 잊어버리겠네

 

箕林場

入箕林場鞦韆脚戱時端陽也(단오날 기림장에서 그네놀이와 씨름구경을 함)

 

柳京兒女會三万 유경(柳京)의 아녀자들이 삼만(三萬)이나 모이고

脚戱鞦韆是古風 씨름과 그네뛰기를 하며 이에 고풍(古風)을 즐기도다

非徒一日又延四 단지 하루만이 아니고 또 나흘을 연장하며

環堵都人歡樂同 온 지역 내에 도시민들은 환희의 즐거움을 함께하도다

 

兎山謁箕子陵 (토산의 기자릉 참배)

 

箕聖古陵臨此地 기성(箕聖: 기자)의 옛 능(陵)이 이곳에 임해 있고

因山封壤築高坮 인산(因山)으로 봉한 땅에 높이 축대를 쌓았도다

肅然起敬俛焉拜 숙연히 공경 심을 일으키며 머리 숙여 배례를 드리니

如在明靈(焱+刂 焱+刂)來 밝은 영령이 일어나 오고 있는 것 같도다

 

崇靈殿奉審檀君東明王神位

 

一祠同宇崇靈殿 한 사당에 같이 숭령전(崇靈殿)으로 사우를 모시었고

殿皃于今尙奐輪 전(殿)의 모양이 지금까지도 아직 장대하고 미려하도다

數尺短碑銘下馬 두자 쯤 되는 短碑에는 하마비라는 글자 새겨있으니

東方億載永尊親 동방에 일 억년 가도록 영구히 존숭하며 친근히 하리라

檀君祠 (단군사당)

 

與堯幷立國 요제(堯帝)와 나란히 나라를 세웠고

平壤于封土 평양을 봉토의 수도로 정하였도다

於千万歲祀 천만년 후에 까지도 제사를 모시고

爲我朝鮮祖 우리 조선 땅의 원조(元祖)이시라네

 

與新興宗人大源楨咸 代門員 (신흥 일가 대원‧정함 대의원)

 

「謹詢淸和僉宗軆候萬旺遠外馳念不任區區之情宗下各依幸耳譜事當初收門議空名帖一切不載之意這這受語故春初宗人啓龍擧員上送與貴宗決議下來後更會示決議書則有帖家瞥眼間改前轍不載帖則不成云而鬧端不一必生爻象此將奈何年前丙辰譜不得已受捐助金記載而悔雪莫及故今如是矣有帖家云丙辰譜則載之大同譜則不載是前後相異虛實不同豈是一家信蹟耶然則丙辰譜寧罷而不行可也數十家執拗不听恠事事事當初收議時說若乃爾豈至生費定員送之之理乎大抵譜者出於敦睦之誼而事至此境則不譜爲愈故如是仰溷未知僉宗以爲如何烟霞洞派錢二十圓意謂趂時下送而尙無消息須非所望於僉宗也移轉可謂了畢而債帳上葛藤滋甚願僉宗諒此事勢卽速辨送之地千萬冀望餘三侯回敎都留不備」

 

〈해설〉삼가 문후 드리며 봄 날씨가 청명(淸明)하고 화창(和暢)한 이때 여러 종친들 체후(體候:건강) 여러모로 왕성하신지요? 먼 외지에서 몹시 생각이 간절하오나 뜻대로 구구하게 정(情)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이쪽 종친(宗下)들은 각각 전과 같이 지내고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됩니다. 족보일은 당초(當初)에 문중 논의를 모을 때 공명첩(空名帖)은 일체 기재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개개인들에게 (승낙을)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초봄에 나 계룡(啓龍) 등 임원들을 추천해 올려 보내서 귀측 종친들과 결의를 보아 가지고 온 다음에 다시 회의를 가진 다음 결의서(決議書)를 보내드리려 합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그 공명첩(空名帖)이 있는 집에 대해서는 이제와 별안간 그 전 방식을 고치고 그 공명첩(空名帖)을 기재하지 못하도록 하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시끄러움이 생길 수 있는 발단은 한 가지 사항만이 아닐 것입니다.

반드시 좋지 못한 몰골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장차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몇 년 전(年前) 병진보(丙辰譜 1916년)를 할 때도 부득이 출연금(出捐金)을 받고 기재 해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후회가 막급(莫及)이었습니다. 그러하므로 이번에도 그와 같을 것입니다. 병진보(丙辰譜)에는 기재하고 새로 발행할 대동보(大同譜)에는 기재하지 않으면 여기서 전과 후가 상이(相異)하게 되고, 허(虛)와 실(實)이 부동(不同)하게 될 것입니다.

어찌 이것이 한 집안에서 믿을 수 있는 사적이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병진보(丙辰譜)를 차라리 파(罷)해 버리고 간행하지 말았어야 했었습니다. 수십 명 집안에서 집요(執拗)하게 고집을 한다고 하지만 물리쳐 버리지 못한 것도 이상하고 이상한 일입니다. 당초 논의를 모울 때에 만약 그렇게 했더라면 어찌 비용을 들어가면서 임원을 정해 보낼 이유가 있겠습니까?

대체로 족보라는 것은 돈목(敦睦)하는 정의(情誼)로 인해서 출발된 것입니다. 그러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족보를 하지 않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와 같이 후회스런 문제를 우러러 말씀드리오니 알 수는 없지만 여러 종씨들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연하동파(烟霞同派)에서 금 이십 원(二十圓)이 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아직 보냈다는 소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필연코 여러 종씨들에게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전(移轉)등기는 필(畢)하였다고 할 수 있으나 채무 장부상으로 갈등이 더욱 심하오니 바라옵건대 여러 종친들께서는 이러한 사정을 양해하시고 곧 속히 준비해서 보내 주시기를 천만번 바랍니다. 나머지 드릴 말씀은 모든 것을 일단 멈추고 (귀측의) 회답을 기다리겠습니다. 갖추지 못합니다.

 

咸興惜別 (함흥에서 석별하며 두수의 시를 지음)

 

南湖月上北關城 남쪽 호수위에 달 떠오르고 북쪽 관성인데

今夜舒倫樂事成 오늘밤 윤기를 펴주면서 즐거운 일이 이루어졌도다

名閥已知人莫右 이름난 문벌로 이미 알려지니 누가 우세할 자 없고

勝區初見我平生 이러한 명승지를 내 평생 처음 보았네

二千里外旅燈話 이천리 밖의 여관 등불 앞에서 대화를 나눈 사람은

四百年前同室情 사백년 전 같은 방에서 정을 나누던 가족이었도다

有合有分是常事 만나고 나누어짐은 그 상사인 것이니

臨岐休作戚嗟聲 헤어진 길목에서 슬픈 말을 하지 마세

 

木落天寒接古城 낙엽지고 차가운 계절에 옛 성에 이르니

聊將花樹會圓成 또 장차 화수회가 원만히 이루어 졌도다

無端渭柳雨朝浥 하염없이 위성의 버드나무 아침 비에 젖고

底意江楓烟暮生 무슨 뜻으로 강 단풍에 저녁 안개는 이는가?

秉牌昨宵須盡梁 패를 들고 어젯밤에 모름지기 즐거움을 다하여

分鞭此日最難情 채찍 나눠 잡아도 이날 가장 정을 다하기 어렵도다

金剛秀色開前路 금강산 빼어난 산색이 가는 길 앞에 열려있으니

爲說他時遠寄聲 위하여 다른 때 멀리 소식을 전하며 말하리라

 

酬關北宗人在弼所示韻 (관복종인 재필이 보인 시운에 답함)

 

遯跡冠山樂在玆 관산서 자취 감추고 온 건 그 즐거움 여기에 있네

平生恐或世人知 평생 혹시라도 세상 사람들이 알까 두려워하도다

遠尋感子殷勤誼 멀리 찾아준 은근한 그대의 정의에 감동하였고

信宿投吾絶妙辭 이틀 밤을 자며 나에게 절묘한 말을 일러주었도다

濁酒三盃作豪客 막걸리 석 잔에 호기를 부린 객이 되었고

孤燈一点是明師 한 점 외로운 등불아래서 현명한 스승이 되었도다

重重千里遙征路 겹겹이 싸인 천 리 밖에 원정은 멀기만 한데

那復相逢請問之 어떻게 다시 서로 만나 청하여 물으랴?

 

和進煥詩 (진환 시에 답함)

 

相逢遽爾五年玆 서로 만난 지가 어느 덧 오십년이 지났고

吾子文章已稔知 우리는 자네의 문장도 이미 익히 알고 있다네

曾日常傳魚雁字 지난날은 항상 편지로 소식을 전하였지만

今宵又詠鳳凰辭 오늘밤은 봉황(귀한 문장)의 시를 읊어 보리라

桃園嘉會樂無比 무릉도원 모임도 이 즐거움과 견줄 수 없으리니

山水淸音餘有師 산수의 맑은 음성이 스승보다 남음이 있도다

只是浹辰吟病臥 다만 여기에 협진(12일간)토록 앓아 누었으니

時時撫頂慰言之 수시로 이마를 어루만지며 위로의 말을 하였도다

 

次咸興 月明山 忠烈公 院宇韻 (함흥 월명산 충렬공 원우운을 차운함)

 

月嶽初躋太保公 청백리로 월악에 태보공께서 처음 오르시니

賢仍潁潁露丹忠 어짊이 거듭 빛나 단충은 이슬처럼 맑았네

五朝勳業曒如日 다섯 임금을 섬긴 빛난 업적이 해와 같이 밝아

百世奮興淸者風 백 년 동안 떨쳐 흥함이 청백리의 기풍이로세

朝暮絃歌增士氣 아침저녁 학문에 근면해 선비의 기풍을 진작시켰으니

春秋瀕藻報神功 춘추로 제향드림은 신령의 공덕에 보답이로세

那當趨走拜庭下 어찌 빨리 달려가 사당 아래 허리 굽혀 절하지 않는가

一點北雲瞻望中 한 점의 북쪽 구름만 우러러 바라보네

 

(제공 : 圓山 위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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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泉 2016-06-09 12:16 *.193.196.58

 

방촌 사정이 뜰에서 오헌공(휘 계룡, 1870~1948, 안항공 10대손)의
호남창의중군장장흥위공오헌선생묘도비명(湖南倡義中軍將長興魏公梧軒先生墓道碑銘) 제막식이 있었다..이날 행사에는 문재구 건립추진위원장, 前 장흥향교 전교 김두석, 前 장흥문화원장 김기홍, 장흥향교 전•현 장의(掌議) 다수 등과 장흥위문에서는 덕운(황량, 고문), 혜암(환, 도문회장), 아산(성태, 장흥향교 전교), 관흥(등, 장흥군의회 의원)과 각환(순천 위정형외과 원장), 상산(성탁), 성(방촌유물관 명예관장), 성천(前 장흥축협조합장), 안항공파 반계종중 직계 후손 등 총 30여명이 참석하였다..

묘도비의 근찬(謹撰)은 변시연
(황주人, 邊時淵, 전주대학교 변주승 교수 父), 근서는(謹書) 증손(曾孫) 위성탁, 근수(謹竪) 에는 위성탁 등 직계 후손 15명이 의연(義捐)하였다.

오헌.jpg

(글, 사진제공 : 栢江 위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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