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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

장원봉 유래비

 

壯元峯 由來碑(장원봉 유래비)

 

고려 고종 임금 때 수령현 부내방 성내동(遂寧縣 府內坊 城內洞)에 위씨 3형제가 살았다. 이들 삼형제는 어려서 매우 영특하여 9세 전후에 경서와 사류를 섭렵하였다. 맏이인 원개(元凱)는 17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9세(1244) 때에는 춘위(春闈) 예부시(禮部試)에 장원급제하였다.

 

동생 문개(文凱)도 18세(1245) 때에 역시 예부시에 장원급제하고, 막내 신개(信凱)도 두 형제처럼 장원은 아니지만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때부터 동네 사람들은 이들 3형제의 급제가 뒷산의 정기로 이루어졌다며 큰 봉우리를 장원봉(壯元峯)이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개는 영가서기(永嘉書記)와 봉사(奉使)로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는데 관직생활 10년을 역임하다가 29세에 세속의 옷을 벗고 선원사로 출사하여 50세 때 송광사 삼중대사로서 청전표(請田表), 사복전표(謝復田表)의 인연으로 원나라 세조의 초청을 받아 북경에 다녀왔으며, 송광사 6세 조사로서 선교불이(禪敎不二)의 교리에 힘쓰다가 68세에 입적함으로 충렬왕이 원감(園監)국사 휘호를 내렸다. 문개도 여러 관직을 거쳐 평양군수(현 順天)가 되었고, 막내 신개도 추원당후(樞院堂后)를 역임하였다.

 

한편 위씨 3형제의 장원급제 당시 주민들은 이들 형제들을 일컬어,

'누가 일았으랴(誰知嚴下如斗舍)  바위 아래 오두막에서 천지에 몇 마리용을 길러낼 줄을 (養得天池機箇龍)이라'

읊어 칭송했다는 기록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세월이 흘러 고을의 유적과 전기들이 인멸(湮滅)됨을 안타깝게 여겨 여기에 장원봉 유래비를 세운다.

 

2007.09.21 제막

 

圓山 魏正哲 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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