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3일(陰 9월 첫丁日) 장흥군 관산읍 죽교리 418번지 양춘재 죽천사에서 제향행사가 있었다. 임진왜란 공신인 聽溪公 (諱 德毅), 工曹參議公 (諱 德元), 戶曹判書公 (諱 德和)을 비롯하여 갑자⋅정묘⋅병자호란 등에서 공을 세운 聽禽公 (諱 廷勳), 兵曹參判公 (諱 廷喆), 磻溪公 (諱 廷鳴)과 호남유학의 거목 存齋公 (諱 伯珪)등 七顯祖에 대해 제사를 드렸다.
죽천사는 長興 魏門의 3대 사우(백산재 하산사, 장천재, 양춘재 죽천사)중에 하나로 타 성씨들로 구성된 지역 유림들이 주관하여 제사를 모신 대표적인 鄕祠宇이다. 이날 초헌관에 李太均(인천인), 아헌관 金東國(광산인), 종헌관 金萬載(청풍인) 집례 李炳勳(인천인), 공축 林永默(평택인), 서점 金基洪(영광인)씨 등이 분정 되어 제례 순에 따라 제사를 모셨다. 이어서 양춘재 강당에서 甲午年 임원을 선정(원장: 이태균, 장의2명: 이병훈, 임영묵, 유사2명: 성태, 등)하고 점심식사를 마친 후 종료하였다.
- 참석 門員 : 성탁(방촌 안항), 황량(옥당 청계), 왕량(옥동 청계), 대종회장 자형(서울 운암), 경량(당동 청계), 성훈(옥동 청계), 씨족문제연구소장 정철(광주 판서), 두환(기동 운암), 지환(용전 양곡), 송량(옥동 청계), 도문회장 성태(옥산 청계), 수환(방촌 안항), 원복(월평 청계), 인환(방촌 훈도), 경량(평촌 안항), 근환(옥당 판사), 일환(당동 판서), 상복(대구 부장), 등(평촌 안항), 성록(서울 판서)등
⋇七顯祖의 이력 등
○ 청계공 (諱 德毅1540∼1613) : 당곡 진사공 곤(鯤)과 配 광주 李氏의 次子로 선조 1573년 사마시에 합격했다. 임진왜란 때 호종과 운향관의 공으로 진원현감에 제수, 호종원종훈(扈從願從勳) 이등에 훈록(勳錄)하고 타계 후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고 죽천사에 주벽으로 광산 황산사에 배향됐다.(墓所 : 장흥군 관산읍 죽교리 상잠산 언덕)
○ 공조참의공 (諱 德元 1549∼1606): 참봉 전(鱣)과 配 김해 金氏의 長子이다. 임진왜란시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공을 세워 훈련부정(訓練副正)에 임명과 원종이등(願從二等)에 녹훈되었다.(墓所 : 장흥군 장동면 율곡리 호암동)
○ 호조판서공 (諱 德和 1551∼1598) : 당곡 진사공 곤(鯤)과 配 광주 李氏의 四子이다. 선조 1583년에 무과에 급제, 임진왜란 때 선조임금 호종, 언양현감, 군자감정, 선무호종원종훈(宣武扈從願從勳)과 아들 병조참판공(廷喆)의 정사진무훈(靖社振武勳)을 감안,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추증했다.(墓所 : 장흥군 회진면 대리)
○ 청금공 (諱 廷勳 1578∼1662) : 안항공 덕후(德厚)와 配 청주 金氏의 長子이다. 1612년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폭정으로 출사를 포기하였다. 1624년 갑자란(甲子亂) 때 군량미를 모집하였고, 1627년 정묘란(丁卯亂) 때에는 반계공(廷鳴) 등과 의병을 모집 지원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때에도 의병을 모아 청주까지 올라가다 인조대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귀향하였다.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墓所 : 장흥군 관산읍 농안리 화운동)
○ 병조참판공 (諱 廷喆 1583∼1657) : 판서공 덕화(德和)와 配 貞夫人 죽산 安氏의 長子이다. 1603년 무과급제, 1610년 선전관(宣傳官), 함평(咸平)현감, 곤양(昆陽)군수, 1624년 이괄(李适)의 난으로 투옥 후 석방 1629년 영유(永柔)수령, 1631년 후금 회답별사로 심양 사행, 만포(滿浦)첨사, 1635년 절충장군 行 용양위(龍양衛)부시직, 1636년 영흥(永興)부사 겸 남도방어사 일시 파직 후 숙천(肅川)부사로 복직, 1638년 사간원 탄핵으로 일시 파직, 1642년 갑산(甲山)부사를 제수 받았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양, 1643년 만포(滿浦)첨사, 1644년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다.(墓所 : 장흥군 관산읍 용전리 천관산 대동감시봉 해발 550m)
○ 반계공 (諱 廷鳴 1589∼1640) : 안항공 덕후(德厚)와 配 청주 金氏의 三子이다. 향시에 합격했으나 광해군의 폭정에 항의 과거의 뜻을 접고 출사하지 않았다. 갑자(甲子), 정묘(丁卯)난에 형제들과 의병과 의곡을 모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때에도 의병모집에 격문을 보고 응하였으나 인조대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 후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하였다. (墓所 : 장흥군 관산읍 삼산리)
○ 존재공 (諱 伯珪 1727∼1798) : 영이재공 문덕(文德)과 配 평해 吳氏의 장자(長子)로 총명(聰明)함이 절인(絶人)하였다. 처음에는 경학(經學)에 주력하다가 문사(文辭)만 하는 학문은 마음에 들지 않자 천문(天文), 지리(地理), 율역(律曆), 복서(卜筮), 병도(兵韜), 산수(算數)를 비롯해서 백공기예(百工技藝)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습득하여 이에 통달치 않은 것이 없었다.
영조 중엽 증광(增廣) 동당시(東堂試)에 합격한 후 동양삼국(東洋三國)의 지도(地圖)와 지지(地誌) 역사(歷史) 및 제도(制度) 산업문물(産業文物) 그리고 서양제도(西洋諸道) 지지(地誌) 기술(記述)한 환영지(寰瀛誌) 와 고금서(古琴書)를 저술하고 조선 8도의 산천, 산물, 인구, 농지 등과 정폐(政弊), 민속(民俗) 및 원근(遠近)의 험이(險易)을 다룬 정현신보(政弦新譜)를 저술하였다.
영조 말 당시 생원 복시(覆試)에 합격하신 후 사성록(思成錄) 전후편(前後篇)과 자회가(自悔歌), 농가구장(農家九章), 고금예설(古今禮說), 경서조대독사차록(經書條對讀史箚錄), 시소전기서설(詩疏傳記序說) 및 잡저(雜著) 등을 차례로 저술하여 저서가 무려 90여권을 넘었다.
정조 말 공이 68세 되던 해 호남 위유사(慰諭使)로 내려온 서영보(徐榮輔)의 천거(薦擧)로 사용(司勇)에 제수(除授)된 후 다시 선공감부봉사(繕工監副奉事)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소명(召命)이 거듭됨에 입궐하시어 만원상소(萬言上疏)를 올리고 물러나기를 원했으나 허락되지 아니한 채 옥과현감(玉果縣監)을 제수 받아 500여일간 재임하였다. 그 후 노병(老病)으로 재삼(再三) 사퇴(辭退)할 것을 청했지만 그때마다 장원서별제(掌苑署別堤)와 경기전령(慶基殿令)을 내리었다. 그러나 나아가지 못하고 72세로 졸하니 관산(冠山) 죽천사(竹川祠), 다산사(茶山祠), 옥과(玉果) 영귀서원(詠歸書院), 합천(陜川) 옥계서원(玉溪書院)에 배향(配享)됐다.
(묘소 :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다산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