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공(海人公)

휘 계후(啓厚, 1884~1939, 독립운동가)는 담양군 창평면 장화리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를 따라 영광에서 자랐다. 그는 진외가 당숙인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와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등으로 말미암아 일찍 애국심을 불태우게 된다. 영광보교 훈도로 있으면서 1919년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위해 고하의 부름을 받고 상경했으나 와병으로 유학생 조철현(曺喆鉉)에게 선언서를 주고 영광에서 만세 운동을 벌인 배후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영광 3?1운동 배후인물로 의심돼 훈도직에서 해임된다. 그는 1921년에 영광읍 교회에 유치원을 설립하고, 1924년에는 향교에 중학교정의 영광학원을 세워 박화성(朴花成) 조운(曺雲) 등 쟁쟁한 인사를 교사로 초빙, 계몽운동에 앞장선다. 그리고 1923년에는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는 한편 이듬해는 정규중학교 설립운동에 들어갔다.

주민들과 동아일보의 도움으로 중학교 설립운동은 순조로웠다. 그래서 정규과정 60명을 모집하고 고하의 추천으로 서울에서 5명의 교사가 부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인들의 교활한 방해공작과 대지주들의 비협조로 인해 1925년 수포로 돌아갔다. 비록 중학교 설립은 좌절됐지만 그의 계몽운동은 스포츠 등에 나타나자 일인들의 미움을 사게돼 범죄자로 몰아 목포형무소에서 징역을 살았다.